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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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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사르"는 로마 제정 시대 황제의 가족 이름에서 유래하여, 황제 자신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후대에는 황제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 굳어졌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후 그의 양자 아우구스투스가 이 칭호를 사용하면서 황제의 칭호로 자리 잡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거치며 황제의 가족 이름이자 지위, 나아가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로마 제국 후기에는 부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동로마 제국과 유럽 각국에서도 황제를 의미하는 단어로 파생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후 이 칭호를 사용하여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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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칭호)
기본 정보
율리우스 카이사르 조각상 묘사
명칭카이사르
로마자 표기Caesar
발음
성별남성
의미(미정)
지역로마 제국
언어라틴어
변형


인기도
각주(미정)
라틴어 명칭
그리스어 명칭
독일어 명칭
슬라브어 명칭
역사적 역할
역할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
유래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
서양식 등작
황제임페라토르 /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바실레프스 / 아프토크라토르 / 카이저 / 차르
렉스 / 바실레우스 / 코눙그 / 차르
대공그랜드 듀크 / 그랜드 프린스 / 아치듀크
벨리키 크냐지
공작듀크 / 프린스 / 헤어초크 / 크냐지
터워소그 / 데스포티스 / 쿠르퓌르스트
후작마르키 / 퓌르스트 / 마르크그라프
란트그라프 / 팔츠그라프 / 보이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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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남작바로넷 / 헤레디터리 나이트
기사에퀴테스 / 나이트 / 데임 / 슈발리에 / 리터
에델프레이 / 야를 / 드루지나
유산층에스콰이어 / 레어드 / 에들러 / 용크헤어르 / 융커 / 젠틀맨

2. 역사

로마 공화정 말기의 종신 독재관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사실상의 단독 지배를 확립하고 제정 로마의 기초를 쌓았다. 이를 계승하여 실제로 제정( 프린키파투스)을 시작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 가문의 양자가 되어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계승자로 선택된 후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기도 했다.

제정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도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의 이름을 잇게 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가족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황제의 가족 이름이자 점차 황제 자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도 기능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했다고 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말은 이러한 용법의 예로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카이사르"는 당시의 티베리우스 황제를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로마 황제=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황제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서의 "카이사르"의 용법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된 후의 황제들도 카이사르를 칭한 것으로부터 확립되었다. 또한 황제들은 자신의 후계자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주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차기 원수를 의미하는 듯하게 되었다.

차기 원수로서의 카이사르의 용법은 로마 제국 후기(전제 군주제, 도미나투스)에 들어서면서 '''부황제'''를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게 되었고, '''황제'''(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하는 자로 사용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처음에는 부황제를 가리키는 말( 그리스어로는 "카이사르")이었지만, 11세기 후반의 콤네누스 왕조 시대에는 세바스토크라토르·데스포테스 등의 황제(바실레이우스)보다 하위이지만 카이사르(카이사르)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작위가 많이 신설되어 그 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처럼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황제를 의미하는 말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독일어의 '''카이저'''(Kaiserde)와 러시아어의 '''차르'''(Царьru, )가 있다.

이슬람의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타바리 이전부터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역대 로마 제국 황제와 그 후의 서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 등을 아랍어로 '''카이사르'''(قيصرar, )라고 불렀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서는 오스만 투르크어(및 튀르키예어)로 '''카이세르'''(قيصرtr, )라고 하였고, 주로 로마 황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룸 카이세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으며, 술레이만 1세 등 일부 술탄은 동로마의 계승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칭호를 사용했다.

2. 1. 기원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모든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공통 조상으로 여겨진다.[1][2] 섹스투스의 증손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내전원로원을 제압하고 로마 공화정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을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la으로 임명했지만, 기원전 44년 암살되기 전까지 약 한 달 동안만 그 직책을 유지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율리우스의 양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포함한 세 명의 장군으로 구성된 제2차 삼두정치가 등장했다.

로마식 이름 규칙에 따라 옥타비우스는 양부의 이름을 계승하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종종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렸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단순히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불렀다.[3] 기원전 27년, 옥타비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명예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받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이전에 "카이사르"를 제외한 모든 이름을 버리고, 이를 ''족명''으로 간주했으며, 승리 칭호인 ''임페라토르''("대장군")을 새로운 ''칭호''로 채택했다.[4]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기원후 4년 6월 26일 양자로 입적되면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불렀다. 즉위 후에는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불렀다. 따라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그의 후계자를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주는 전례가 확립되었다.

네 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는 이전 황제에게 양자로 입적되지 않고도 그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으로, 어머니 쪽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외조카였으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칼리굴라의 삼촌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계자이자 조카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양자로 삼아 그의 족명 "클라우디우스"에 "카이사르"를 추가했고, 그의 계자는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2. 2.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갈바는 실질적인 권위 없이도 황제의 지위와 칭호를 모두 사용한 최초의 황제였다.[5] 그는 서기 68년 네로의 죽음 이후 "세르비우스 갈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위에 올랐다. 갈바는 자신의 양자 피소 리키니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여 지정 상속인의 칭호로서 "카이사르"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5]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오토에게 살해당했으며, 오토는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오토는 그 후 비텔리우스에게 패했고, 비텔리우스는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승리 칭호인 "게르마니쿠스"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제국 권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내전을 종식시키고 서기 69년 플라비우스 왕조를 세운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즉시 복원되었고, 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통치했다.

초기 황제들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치는 다양했다. 보통은 '''외명'''(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바로 앞에 왔다. 몇몇 황제들은 '''외명''' 바로 뒤에 놓았다( 갈바, 오토, 네르바). 황제 공식 칭호는 마침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동안 표준화되었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태어난 안토니누스는 입양 후 "티투스 엘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누스"가 되었지만,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로 통치했다. 따라서 황제의 공식 칭호는 황제의 이름 앞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이름]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황태자들은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추가하여 '''외명''' 뒤에 놓았다. 카이사르들은 때때로 명예 칭호인 '''청년의 수장'''("청년들 중 첫째")와 3세기부터는 '''노빌리시무스'''("가장 고귀한")를 받았다.

2. 3. 플라비우스 왕조와 그 이후

갈바는 서기 68년 네로의 죽음 이후 "세르비우스 갈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위에 올라 실질적인 권위 없이도 황제의 지위와 칭호를 모두 사용한 최초의 황제였다.[5] 갈바는 자신의 양자 피소 리키니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여 지정 상속인의 칭호로서 "카이사르"를 확고히 했다.[5]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오토에게 살해당했으며, 오토는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오토는 그 후 비텔리우스에게 패했고, 비텔리우스는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승리 칭호인 "게르마니쿠스"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제국 권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내전을 종식시키고 서기 69년 플라비우스 왕조를 세운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즉시 복원되었고, 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통치했다.

초기 황제들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치는 다양했다. 보통은 '''외명'''(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바로 앞에 왔다. 몇몇 황제들은 '''외명''' 바로 뒤에 놓았다( 갈바, 오토, 네르바). 황제 공식 칭호는 마침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동안 표준화되었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태어난 안토니누스는 입양 후 "티투스 엘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누스"가 되었지만,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로 통치했다. 따라서 황제의 공식 칭호는 황제의 이름 앞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이름]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황태자들은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추가하여 '''외명''' 뒤에 놓았다. 카이사르들은 때때로 명예 칭호인 '''청년의 수장'''("청년들 중 첫째")와 3세기부터는 '''노빌리시무스'''("가장 고귀한")를 받았다.

2. 4. 3세기의 위기와 테트라르키아

3세기 동안 황위 계승자를 지칭하는 ''카이사르'' 칭호의 인기가 높아졌다. 많은 군인 황제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아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했는데, 막시미누스 트랙스, 필립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갈리에누스, 카루스 등이 대표적이다.[6] 이들은 베루스 막시무스와 발레리아누스 2세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 재위 시절에 ''아우구스투스''로 승진하거나 (필립 2세처럼) 아버지 사후 아우구스투스로 계승했다 (호스틸리아누스, 누메리아누스).[6] 260년부터 274년까지 로마 제국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던 갈리아 제국에서도 이 칭호가 사용되었는데, 마지막 갈리아 황제 테트리쿠스 1세는 자신의 상속자 테트리쿠스 2세를 ''카이사르''로 임명했다.[6]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계승을 안정적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거의 모든 ''카이사르''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또는 아버지와 함께 죽었거나, 호스틸리아누스처럼 짧은 기간만 생존했다.[6] ''카이사르''로서 ''아우구스투스'' 지위에 올라 상당 기간 통치한 유일한 인물은 고르디아누스 3세였지만, 그조차도 궁정의 강한 통제를 받았다.[6]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명의 수석 황제(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후임 황제(''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로 구성된 테트라르키아를 수립했다.[6] 후임 황제들은 정식 황제가 된 후에도 ''카이사르'' 칭호를 유지했다.[6] 이 시기의 ''카이사르''들은 때때로 ''황제''로 불렸지만, ''아우구스티''에게 명백히 종속되었다.[6]

테트라르키아는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와 함께 붕괴되었고, 장기간의 내전이 이어졌다.[7]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재통합했다. 권력의 테트라르키아식 분할은 폐지되었지만, ''카이사르'' 칭호는 계속 사용되었다.[7] 콘스탄티누스는 사망 당시 네 명의 ''카이사르''를 두었다.[7] 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그리고 그의 조카 달마티우스였다.[7]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차례로 ''카이사르''로 임명했지만, 갈루스를 처형하고 율리아누스와 전쟁을 벌였다.[7] 360년 율리아누스의 반란 이후, ''카이사르'' 칭호는 한동안 유행하지 않았으며, 황제들은 아들들을 직접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는 것을 선호했다.[7]

이 칭호는 408년 콘스탄티누스 3세가 아들 콘스탄스 2세에게 수여하면서 부활했고,[8] 424년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수여했다.[7] 그 후 동로마 제국에서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는데, 472년 레오 2세가 그 예이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아들 팔라디우스가 455년 ''카이사르'' 칭호를 가진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7]

2. 5.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그 이후

2. 6. 비잔티움 제국

카이사르(Καῖσαρgrc)는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고위 궁정 칭호였다. 본래 로마 제국에서와 같이 황태자를 위한 칭호였고, "수여된" 품계 중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 대부분의 황제들은 예정된 후계자를 공동 황제, 즉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켜 계승을 확고히 했다.[9] 따라서 이 칭호는 둘째나 셋째 아들, 또는 황제의 친척이자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더 자주 수여되었다. 테오필로스의 사위 알렉시오스 모셀레, 미카엘 3세의 삼촌이자 최고 대신인 바르다스, 니케포로스 2세의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 등이 그 예이다. 예외적인 경우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705년 자신의 왕위 탈환을 도운 불가리아 칸 테르벨에게 이 칭호를 수여했다. 1081년에는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의 형제인 조지아의 조지 2세에게도 수여되었다.[9]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하기아 소피아 성당, 콘스탄티노폴리스 모자이크


이 직책은 광범위한 특권, 큰 명성과 권력을 누렸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가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를 만들면서 ''카이사르''는 중요도에서 세 번째가 되었고,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데스포테스'' 칭호를 만들면서 네 번째가 되었으며, 제국 멸망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10] 여성형은 ''카이사리사''였다.[10] 899년의 ''클레토롤로기온''에 따르면, 비잔티움의 ''카이사르'' 휘장은 십자가가 없는 왕관이었다. ''카이사르'' 즉위식(이 경우 콘스탄티누스 5세 시대의 것)은 ''데 체레모니이스'' I.43에 포함되어 있다.

카이사르 미카엘 앤젤로스의 인장


이 칭호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에 의해 ''세바스토크라토르''( ''세바스토스''와 ''아우토크라토르''에서 유래, 그리스어로 ''아우구스투스''와 ''임페라토르''에 해당)가, 그리고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 의해 ''데스포테스''가 도입될 때까지 황실 계급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제국의 마지막 세기 동안에도 존재했으며,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에는 알렉시오스 스트라테고풀로스와 같은 저명한 귀족들이 이 칭호를 가졌지만, 14세기부터는 발칸 반도의 통치자들, 예를 들어 블라키아, 세르비아 및 테살리아의 군주들에게 주로 수여되었다. 14세기 중반 가짜 코디노스의 ''직책의 책''에 기록된 늦은 비잔티움 계급에서 이 계급은 ''세바스토크라토르'' 다음에 계속되었다. 가짜 코디노스는 또한 ''카이사르''가 알렉시오스 1세가 만든 또 다른 직책인 ''판히페르세바스토스''와 동등한 서열이라고 기록했지만,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그의 조카 미카엘 타르카네이오테스를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계급으로 승격시키고 ''카이사르'' 다음에 오도록 명령했으며, 안드로니쿠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 치하에서는 미래의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누스에게 수여되었을 때 ''메가스 도메스티코스''가 같은 지위로 승격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의 ''카이사르'' 휘장은 빨간색과 금색의 ''스키아디온'' 모자였고, 금실 자수로 장식되었으며, 착용자의 이름이 쓰인 베일과 ''데스포테스''와 ''세바스토크라토르''와 동일한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그는 황제와 비슷한 붉은색 튜닉(''루콘'')을 입었지만(특정 장식은 없었음), 신발과 스타킹은 파란색이었고, 말의 장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것은 모두 ''세바스토크라토르''와 동일했지만 후자의 수놓은 독수리는 없었다. 가짜 코디노스는 돔형 ''스카라니콘'' 모자와 ''카이사르''의 망토인 ''탐파리온''의 특정 형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썼다.

2. 7. 오스만 제국

메흐메드 2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게나디오스.


"카이사르"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지칭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한 칭호이다.[11][12] 중동에서는 페르시아인과 아랍인들이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카이사르"( ''Qaysar-i Rum'', "로마의 카이사르", 고대 페르시아어 ''kēsar''에서 유래)라고 계속 불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 통치자 중 이 칭호( ''Kayser-i Rûm'')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메흐메드 2세는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며 ''카이사르-이 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13] 그의 주장은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새로운 왕조가 정복을 통해 황제가 된 것이며, 이는 이전에 헤라클리우스와 레오 3세와 같은 인물들이 했던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14] 당대 학자 트레비존드의 게오르기오스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이며… 로마 황제인 자는 온 세상의 황제이기도 하다"라고 기록했다.[15]

게나디오스 2세는 1454년 술탄 자신에 의해 모든 의례적 요소와 민족 지도자 (혹은 ''milletbashi'')의 지위를 갖춘 콘스탄티노폴리스-신로마 총대주교로 즉위했다. 이에 따라 게나디오스 2세는 공식적으로 메흐메드 2세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16]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티움 황실과의 혈연 관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전임자인 술탄 오르한 1세는 비잔티움 공주와 결혼했고, 메흐메드 2세는 요한 첼레페스 콤네누스의 후손임을 주장했을 수도 있다.[17]

오스만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외교 문서에서 오스만 관료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카이사르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분노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을 때,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 (1533년)에 따라 카이사르 칭호의 사용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18]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규정한 러시아는 마찬가지로 오스만의 제재를 받았고, 오스만은 크림 칸국에 여러 차례 러시아를 침략하도록 명령했다.[18] 오스만은 1606년 지트바토르크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정치적 우월성 주장을 중단했고, 1774년 퀴추크 카이날지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대한 우월성 주장을 중단했으며, 이 두 나라의 군주를 오스만 술탄과 동등한 존재로 외교적으로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3. 다른 언어에서의 사용

로마 공화정 말기의 종신 독재관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사실상의 단독 지배를 확립하고 제정 로마의 기초를 쌓았다. 이를 계승하여 실제로 제정( 프린키파투스)을 시작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 가문의 양자가 되어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계승자로 선택된 후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기도 했다.

제정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도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의 이름을 잇게 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가족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황제의 가족 이름이자 점차 황제 자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도 기능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했다고 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말은 이러한 용법의 예로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카이사르"는 당시의 티베리우스 황제를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로마 황제=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황제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서의 "카이사르"의 용법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된 후의 황제들도 카이사르를 칭한 것으로부터 확립되었다. 또한 황제들은 자신의 후계자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주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차기 원수를 의미하는 듯하게 되었다.

차기 원수로서의 카이사르의 용법은 로마 제국 후기(전제 군주제, 도미나투스)에 들어서면서 '''부황제'''를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게 되었고, '''황제'''(아우구스투스)를 보좌하는 자로 사용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처음에는 부황제를 가리키는 말( 그리스어로는 "카이사르")이었지만, 11세기 후반의 콤네누스 왕조 시대에는 세바스토크라토르·데스포테스 등의 황제(바실레이우스)보다 하위이지만 카이사르(카이사르)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작위가 많이 신설되어 그 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처럼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황제를 의미하는 말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독일어의 '''카이저'''(Kaiserde)와 러시아어의 '''차르'''(Царьru, Tsarru-Latn)가 있다.

이슬람의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타바리 이전부터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역대 로마 제국 황제와 그 후의 서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 등을 아랍어로 '''카이사르'''(قيصرar, Qayṣarar-Latn)라고 불렀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서는 오스만 투르크어(및 튀르키예어)로 '''카이세르'''(قيصرtr, Qayṣar/Kaysertr-Latn)라고 하였고, 주로 로마 황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룸 카이세르'''(Kayser-i-Rûmtr-Latn)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으며, 술레이만 1세 등 일부 술탄은 동로마의 계승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칭호를 사용했다.

4. 카이사르 칭호 보유자 목록

카이사르 칭호를 보유했던 인물 목록은 다음과 같다. 상세한 목록은 영어 위키백과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화폐이름즉위사임사유재위 황제관계참고자료
피소 리키니아누스69년 1월 10일69년 1월 15일암살갈바양자[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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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69년 12월 21일79년 6월 24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베스파시아누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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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69년 12월 21일81년 9월 14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아들/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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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서기 74년 이후서기 83년 이전 (?)어린 시절 사망도미티아누스아들
트라야누스97년 10월 말98년 1월 28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네르바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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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엘리우스136년 6월/8월138년 1월 1일질병으로 사망하드리아누스양자
안토니누스 피우스138년 2월 25일138년 7월 10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하드리아누스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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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39년 말161년 3월 7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안토니누스 피우스사위[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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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니우스 베루스166년 10월 12일169년 9월 10일종양으로 사망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아들/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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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모두스166년 10월 12일177년 여름아우구스투스로 선포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아들/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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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티낙스 주니어193년 1월경193년 3월경칭호 박탈페르티낙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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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우스 알비누스194년경196년경칭호 박탈셉티미우스 세베루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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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라196년 4월 4일198년 1월 28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셉티미우스 세베루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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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타198년 1월 28일209년 10월경아우구스투스로 선포셉티미우스 세베루스아들/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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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두메니아누스217년 4월218년 5월아우구스투스로 선포마크리누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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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알렉산데르221년 6월222년 3월 14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엘라가발루스양자이자 사촌[22]
살루스티우스 (?)227년경227년경처형세베루스 알렉산데르장인[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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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루스 막시무스236년 1월/5월238년 5월/6월암살막시미누스 트락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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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아누스 3세238년 4월/5월238년 8월아우구스투스로 승계발비누스/푸피에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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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푸스 2세244년 8월247년 7월/8월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필리푸스 아랍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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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250년 9월251년 5월아우구스투스로 선포데키우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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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틸리아누스250년 9월251년 6월아우구스투스로 승계데키우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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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루시아누스251년 7월경251년 8월경아우구스투스로 선포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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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누스 2세256년 9월경258년 여름암살됨?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손자/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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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니누스258년 6월경260년 7월경아우구스투스로 선포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손자/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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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누스282년 11월 (?)283년 봄아우구스투스로 선포카루스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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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메리아누스282년 11월 (?)283년 7월아우구스투스로 승계카루스/카리누스아들/형제
막시미아누스 (?)285년 7월 21일 (?)286년 4월 1일 (?)아우구스투스로 승계디오클레티아누스 (동방)[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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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1세293년 3월 1일305년 5월 1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막시미아누스 (서방)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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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리우스293년 3월 21일305년 5월 1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디오클레티아누스 (동방)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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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2세305년 5월 1일306년 8월아우구스투스로 승계막시미아누스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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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누스 2세305년 5월 1일310년 5월 (?)아우구스투스로 승계갈레리우스 (동방)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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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306년 8월310년 5월아우구스투스로 인정갈레리우스/리키니우스 (동방)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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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주니어317년 3월 1일324년 9월 19일폐위리키니우스 (동방)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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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푸스317년 3월 1일326년 3월경처형콘스탄티누스 1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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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2세317년 3월 1일337년 9월 9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콘스탄티누스 1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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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2세324년 11월 8일337년 9월 9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콘스탄티누스 1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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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스 1세333년 12월 25일337년 9월 9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콘스탄티누스 1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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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티우스335년 9월 18일337년 6월/8월암살콘스탄티누스 1세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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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센티우스350년 7월/8월353년 8월 18일자살마그넨티우스 (서방)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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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갈루스351년 3월 15일354년 말처형콘스탄티우스 2세사촌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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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누스 2세355년 11월 6일361년 11월 3일아우구스투스로 승계콘스탄티우스 2세사촌
콘스탄스 2세408년409년/410년아우구스투스로 선포콘스탄티누스 3세/호노리우스 (서방)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424년 10월 23일425년 10월 23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테오도시우스 2세 (동방)사촌 동생
팔라디우스455년 3월 17일455년 5월 31일아비투스에 의해 처형막시무스 (서방)아들
파트리키우스470년경471년경폐위 또는 처형레오 1세 (동방)사위
레오 2세472년 10월경473년 11월 17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레오 1세 (동방)아들[25]
마르쿠스475년475년아우구스투스로 선포바실리스쿠스 (동방)아들
바실리스쿠스476년477년처형제논 (동방)
유스티니아누스 1세525년527년 4월 1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유스티누스 1세양자[26]
티베리우스 2세574년 12월 7일578년 9월 26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유스티누스 2세양자
게르마누스582년 8월 5일582년 8월 11일 이전칭호 거부티베리우스 2세사위
모리스582년 8월 5일582년 8월 13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티베리우스 2세사위
테오도시우스587년경590년 3월 26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모리스아들
헤라클로나스632년 1월 1일638년 7월 4일아우구스투스로 선포헤라클리우스아들[27]
다비드 티베리우스638년 7월 4일641년 11월아우구스투스로 선포헤라클리우스아들[28]
마르티누스638년 7월 4일 (?)641년 11월폐위헤라클리우스아들[28]
콘스탄스 2세641년 2월경641년 7월경칭호 박탈 (?),
나중에 아우구스투스로 선포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아들[29]



;비잔티움 귀족


  • 테르벨, 칸 of the 불가르인,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의해 705년에 임명됨
  • 니케포로스 & 크리스토퍼,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769년 4월 2일에 임명됨[30]
  • 알렉시오스 모셀레, 장인 테오필로스에 의해 831년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 바르다스, 조카 미카엘 3세에 의해 862년 4월 22일에 임명됨
  • 로마누스 1세 레카페노스, 비잔티움 상원에 의해 920년 9월 24일에 임명됨
  • 바르다스 포카스, 아들 니케포로스 2세에 의해 963년 말에 임명됨
  • 로마누스 3세 아르기로스, 장인 콘스탄티누스 8세에 의해 1028년 11월 9일에 임명됨
  •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더 영어, 장인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임명됨
  • 존 두카스, 형제 콘스탄티누스 10세에 의해 1074년에 임명됨
  • 조지아의 조지 2세, 처남 니케포로스 3세에 의해 1081년에 임명됨
  • 니케포로스 멜리세노스,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1080년에 임명됨
  • 이삭 콤네노스,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1104년에 임명됨
  • 존 로게리오스 달라세노스, 장인 요한 2세에 의해 1130년경에 임명됨
  • 몽페라의 레니에르, 장인 마누엘 1세에 의해 1180년에 임명됨
  • 존 칸타쿠제노스, 이삭 2세에 의해 1186년에 임명됨
  • 몽페라의 콘라드, 장인 이삭 2세에 의해 1187년에 임명됨
  • 마누엘 마우로조메스, 알렉시오스 3세에 의해 1200년경에 임명됨
  • 레오 가발라스, 테오도르 1세 라스카리스 (재위 1205-1221)에 의해 임명됨
  •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 형제 미카엘 8세에 의해 1259년에 임명됨
  • 알렉시오스 스트라테고풀로스, 미카엘 8세에 의해 1259년에 임명됨
  • 로제 드 플로르, 카탈루냐 군단의 지도자, 안드로니쿠스 2세에 의해 1304년에 임명됨
  • 존 팔라이올로고스, 삼촌 안드로니쿠스 2세에 의해 1326년에 임명됨
  • 흐렐랴,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 (재위 1347-1354)에 의해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세르비아 통치자

  •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필란트로페노스, 1373년에 데스포트 토마스 프렐류보비치에 의해 임명됨
  • 마누엘 앙겔로스 필란트로페노스, 1390년에 데스포트 에사우 데 부온델몬티에 의해 임명됨
  • 그르구르 골루비치, 1347년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에 의해 임명됨
  • 보이히나, 1347년 우로시 4세에 의해 임명됨
  • 프렐류브, 1348-49년 우로시 4세에 의해 임명됨
  • 우글리샤 블라트코비치, 우로시 5세에 의해 임명됨
  • 니콜라 라돈야, 우로시 5세에 의해 임명됨
  • 노박, 우로시 5세에 의해 임명됨

5. 각주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Little, Brown and Company
[2]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https://archive.org/[...] Little, Brown and Company 1870
[3] 논문 Livy and Augustus 1959
[4] 논문 Imperator Caesar: A Study in Nomenclature https://www.jstor.or[...] 1958
[5] 서적 The Art of Forgetting: Disgrace & Oblivion in Roman Political Culture https://books.google[...] Univ of North Carolina Press
[6] 서적 A Companion to the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08
[7] 서적 Child Emperor Rule in the Late Roman West, AD 367-455 https://books.google[...] OUP 2013
[8] 서적 Roman Imperial Coinage. Volume X https://books.google[...] Spink Books 2018
[9] 서적 Unrivalled Influence: Women and Empire in Byzantium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10] 서적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ēs https://books.google[...]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4
[11] 문서 𐭪𐭩𐭮𐭫𐭩
[12] 서적 The Avar Siege of Constantinople in 626: History and Legend Springer 2019
[13] 서적 Archivum Ottomanicum https://books.google[...] Mouton
[14] 서적 Living in the Ottoman Realm: Empire and Identity, 13th to 20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016-04-11
[15] 서적 Constantinople: The Last Great Siege, 1453 https://books.google[...] Faber & Faber
[16] 백과사전 Gennadios II Scholarios https://global.brita[...] 2020-07-13
[17] 서적 Byzantium:The Decline and Fall Alfred A. Knopf
[18] 서적 Kırım Hanlığı Tarihi Üzerine Araştırmalar 1441–1700: Seçme Eserleri – XI
[19] 서적 The Art of Forgetting: Disgrace & Oblivion in Roman Political Culture https://books.google[...] Univ of North Carolina Press
[20] 서적 The Theology of Acts in Its Historical Setting https://books.google[...] S.P.C.K.
[21] 서적 Adoption in the Roman World https://books.google[...]
[22] 웹사이트 Severus Alexander https://www.livius.o[...]
[23] 웹사이트 Alexander Severus (A.D. 222–235) http://www.roman-emp[...]
[24] 서적 Emperors and Usurpers in the Later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5] 논문 The Imperial Reigns of Leo II https://www.degruyte[...] 2004
[26] 문서 Chronica https://www.dmgh.de/[...] 0570
[27] 서적 Catalogue of the Byzantine Coins, Vol. 2 https://archive.org/[...] Dumbarton Oaks
[28] 논문 SB VI 8986 and Heraclius' Sons 2008
[29] 논문 On the title and the office of the Byzantine basileus http://www.academia.[...] 2010
[30] 웹사이트 Nikephoros 5 http://www.pbe.kcl.a[...] 2001
[31] 서적 Ottoman-Safavid Cultural Exchange, 1500–1639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3
[32] 서적 Medieval Worlds Comparative & Interdisciplinary Studies https://www.medieval[...] Austrian Academy of Sciences Press
[33] 웹사이트 Kayser قيصر Araplar’ın Roma ve Bizans imparatorları için kullandıkları unvan. https://islamansiklo[...]
[34] 서적 Visions of Empire: How Five Imperial Regimes Shaped the World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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