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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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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그라트 3세는 978년부터 1014년까지 조지아를 통치한 바그라티오니 왕조 출신의 왕이다. 그는 카르틀리의 왕으로 즉위한 후 압하지야 왕국을 상속받아 두 왕국을 통합했으며, 카헤티와 헤레티를 정복하여 조지아 통일을 완성했다. 바그라트 3세는 조지아 정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베디아 대성당과 바그라티 대성당을 건설했으며, 1014년에 사망하여 베디아 대성당에 묻혔다. 그는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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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트 3세
기본 정보
바그라트 3세, 베디아 프레스코
바그라트 3세, 베디아 대성당 프레스코
칭호조지아의 왕
통치 기간1008년–1014년
이전조지아 왕국 통일
계승자기오르기 1세
칭호 1압하지야의 왕
통치 기간 1978년–1008년
이전 1테오도시우스 3세
계승자 1조지아 왕국 통일
칭호 2카르틀리 공작
통치 기간 2975년–978년
이전 2구르겐
계승자 2구란두흐트
배우자마르타
자녀기오르기 1세
바실
왕가바그라티오니
왕가 유형왕조
아버지구르겐
어머니구란두흐트
출생일기원전 960년경
출생지쿠타이시
사망일1014년 5월 7일
사망지타오, 파나스케르티
매장지베디아 대성당
종교조지아 정교회

2. 초기 생애와 카르틀리 통치

바그라트 3세는 960년대 카르틀리에서 카르틀리의 왕 구르겐과 게오르기 2세의 딸 구란두크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상속자였으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촌인 타오의 다비드 3세의 상속자로 지명되어 그의 궁정에서 교육받았다.[1][2]

당시 카르틀리는 압하지아 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압하지아 왕국은 780년 아랍 침공을 피해 비잔틴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성장한 강력한 왕국이었다. 916년 압하지아는 이베리아를 침공하고 아르메니아를 위협하며 절정에 달했다.[3] 그러나 975년 압하지아의 테오도시우스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고, 압하지아에서 내전이 발발하여 혼란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카케티의 크비리케 2세는 이베리아를 약탈하며 압하지아 군주의 권위에 도전했고, 동부 조지아를 완전히 침공했다.[4] 그러나 카르틀리의 에리스타비(총독) 이오아네 마루쉬스제는 크비리케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바그라트의 양아버지인 타오의 다비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975년 또는 976년에 다비드 3세는 카케티인들을 카르틀리에서 몰아내고,[5][6] 바그라트에게 카르틀리 왕국을 주었으며, 바그라트는 아버지의 섭정 아래 놓였다.[5]

바그라트 3세의 카르틀리 통치 초기, 왕위에 오른 직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978년, 귀족들은 카헤티의 새로운 공작 다비드와 동맹을 맺고 우플리스치케 요새를 점령하여 바그라트 3세와 그의 부모를 인질로 잡았다. 다비드 3세는 카헤티에 군사 원정을 시작했고, 협상 끝에 카르틀리를 왕가에 돌려받았지만, 그루비와 치르크발리 요새는 유지했다. 이후 바그라트 3세의 어머니인 구란두흐트 여왕이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2. 1. 유년 시절

바그라트는 960년대 카르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르틀리의 명목상 왕 구르겐과 게오르기 2세 왕의 딸 구란두크트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따라서 바그라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상속자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사촌인 타오의 다비드 3세에 의해 상속자로 지명되었는데, 다비드 3세는 상부 타오 공작령을 다스렸고 966년부터 이베리아의 쿠로팔라테스였다.[1] 그는 어린 왕자를 자신의 궁정에서 교육했다.[2]

당시 카르틀리는 압하지아 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780년 아랍 침공을 피해 달아난 압하지아는 비잔틴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이 지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했다. 916년 압하지아는 이베리아를 침공하고 아르메니아를 위협하면서 절정에 달했다.[3] 그러나 975년, 장님 왕으로 알려진 압하지아의 테오도시우스 3세(바그라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가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다. 압하지아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혼란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동부 조지아를 통치하던 카케티의 크비리케 2세는 이베리아를 상대로 약탈을 조직하여 압하지아 군주의 권위에 도전했고, 결국 동부 조지아를 완전히 침공했다.[4] 그러나 카르틀리의 에리스타비(총독) 이오아네 마루쉬스제는 크비리케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어린 바그라트의 양아버지인 타오의 다비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975년 또는 976년에 다비드 3세는 카케티인들을 카르틀리에서 몰아냈다.[5][6] 다비드 3세는 이전 모든 지배자로부터 해방된 카르틀리 왕국을 어린 바그라트에게 주었고, 바그라트는 아버지의 섭정 아래 놓였다.[5]

2. 2. 왕위와 망명 사이

바그라트는 960년대에 카르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르겐과 게오르기 2세 왕의 딸 구란두크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다. 따라서 바그라트는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상속자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의 왕세자는 그의 아버지의 사촌인 타오의 다비드 3세에 의해 상속자로 지명되었는데, 그는 상부 타오 공작령을 다스렸고 966년부터 이베리아의 쿠로팔라테스였다.[1] 그는 어린 왕자를 자신의 궁정에서 교육했다.[2]

당시 카르틀리는 압하지아 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780년에 아랍 침공을 피한 압하지아는 비잔틴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국으로 자리매김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916년에는 압하지아 국가는 이베리아를 침공하고 아르메니아를 위협하면서 절정에 달했다.[3] 그러나 975년, 장님으로 알려진 압하지아의 테오도시우스 3세 (바그라트의 외삼촌)가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들과 갈등을 겪었다. 압하지아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혼란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카케티의 크비리케 2세는 이베리아를 상대로 약탈을 조직하여 압하지아 군주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는 결국 동부 조지아를 완전히 침공했다.[4] 그러나 카르틀리의 에리스타비(총독) 이오아네 마루쉬스제는 크비리케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어린 바그라트의 양아버지인 타오의 다비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975/6년에 다비드 3세는 카케티인들을 카르틀리에서 몰아냈다.[5] 다비드 3세는 카르틀리를 해방하고, 이전 모든 지배자로부터 해방된 왕국을 어린 바그라트에게 제공했으며, 바그라트는 아버지의 섭정 아래 놓였다.[6]

바그라트 3세의 카르틀리 통치 초기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조지아의 좋지 않은 상황을 틈타 과거의 권력을 되찾으려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978년, 귀족들은 카헤티의 새로운 공작 다비드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곧 우플리스치케 요새를 점령하고 젊은 바그라트 3세와 그의 부모를 인질로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다비드 3세는 카헤티에 군사 원정을 시작했고, 그들은 협상 끝에 카르틀리를 왕가에 돌려주었지만, 그루비와 치르크발리 요새는 유지했다. 이후 바그라트 3세의 어머니인 구란두흐트 여왕이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3. 압하지야의 왕

압하지아 왕국의 테오도시우스 3세가 귀족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왕국이 약해졌다. 이 상황을 틈타 이오안 마루시스제는 바그라트를 압하지아 왕국의 수장으로 만들려 했다. 이베리아와 압하지아의 귀족들은 바그라트 3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두 나라를 통일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978년, 바그라트 3세는 왕위에 올랐다.

바그라트 3세는 카르틀리의 섭정이었던 어머니 구란두흐트가 독립하려 하자 급히 카르틀리로 돌아가야 했다. 카르틀리의 귀족들은 바그라트 3세를 이베리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카브타르 트벨리를 수장으로 세웠다. 귀족들은 중앙 조지아 전역에 방어선을 쳤지만, 바그라트는 모그리시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우플리스치헤를 되찾았다.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압하지아로 돌아가 질서를 정돈하고 귀족들을 진정시키며 충성스러운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3. 1. 내전

994년 이전, 이베리아 귀족 리파리트의 아들 클데카리 공작 라티[1]가 바그라트 3세 왕국의 동부 지역에서 강력한 귀족으로 등장했다. 그는 곧 아테니 요새와 므트크바리 강, 트리알레티, 망글리스-케비, 스퀴레티 남쪽의 카르틀리를 모두 차지했고,[2] 이후 바그라트 3세에게 복종을 거부했다.[1] 이에 바그라트 3세는 아버지 구르겐의 민병대로 보강된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바그라트가 자신보다 더 강력해질 것을 두려워한 왕의 양아버지 바그라트 레구에니[1] (구르겐의 친아버지)는 아르메니아의 스삼바트 2세, 카르스의 아바스 등 아르메니아 군주들과 동맹을 맺어 바그라트의 개입을 막으려 했다.[3]

첫 번째 전투는 샤브셰티 입구의 가르다트킨리 평원에서 벌어졌다. 구르겐의 군대는 패배했고 왕자는 쩨프타 요새로 피신해야 했다.[1] 라티에 대한 작전을 중단했던 바그라트 3세는 자신이 타오의 다비드 3세와 바그라트 레구에니의 군대와 맞설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하며 반대 진영과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평화가 허락되었고, 이른바 "가족 전쟁"은 종결되었다.

바그라트 3세는 압하지야로 돌아와 평화롭게 통치했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 라티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왕의 전략은 라티가 카르틀리로 돌아가 분쟁이 끝났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겨울 동안 바그라트는 군대를 모아 클데카리를 포위했고, 오만한 공작을 물리쳤다. 라티는 용서받았고 서부 조지아의 아르그베티 공작이 되었다.[4]

4. 조지아 통일

1000년 3월 31일, 바그라트 3세의 양아버지인 다비드 3세 쿠로팔라테스가 사망했다.[1] 조지 왕조 연대기에 따르면, 타오의 통치자가 죽자 그 지역이 황폐해졌다고 한다.[3] 비잔틴 황제 바실 2세는 다비드가 바르다스 포카스 반란에 가담한 대가로 타오를 유증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강제로 되찾으려 했다.[3]

바실 2세는 시리아에서 파티마 칼리파국을 상대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그라트 3세의 권위를 부정하는 귀족들과 마주쳤다.[4] 그는 몇 달 만에 타오-클라르제티 정복을 완료하고, 바그라트의 아버지 구르겐에게는 "마기스트로스" 칭호를, 바그라트 3세에게는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부여했다. 비잔틴 제국은 아들이 아버지와 대립하도록 시도했지만, 구르겐이 정직한 인물로 여겨졌기에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바그라트 3세는 압하지야 왕 칭호 외에도 이베리아의 쿠로팔라테스가 되어 서부 조지아를 통일했지만, 가족 유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1008년, 아버지 구르겐 1세가 사망하면서 바그라트 3세는 "조지아인" 왕의 세습 칭호와 통일된 하부 타오-자바헤티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구성원이 통치하는 모든 땅의 주인이 된 바그라트 3세는 동부 트란스캅카스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978년 카르틀리 전쟁에서의 승리 후 합병한 땅에 대해 다비드, 카헤티의 공작이자 초르비숍에게 영토를 요구했으나 다비드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벌일 의사를 밝혔다.

바그라트 3세는 카헤티로 진격하여 카르틀리를 건너 헤레티, 즉 카헤티 공국의 동부 지방을 황폐화시켰다. 그는 그 지역의 므타바리 ("백작")로 아불랄을 임명했지만, 아불랄은 현지 귀족들에 의해 전복되었고, 귀족들은 나라를 장악하여 카헤티와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헤레티에서의 반란 소식을 접한 바그라트 3세는 군대를 통합하여 정복을 재개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헤레티 합병을 완료하고 이메레티의 현지 귀족들을 진압했으며, 이 나라 최초의 정교회 여왕의 유물을 배치했다. 1008년, 바그라트 3세는 카헤티 정복을 시작하여 1010년에 완료했다. 그는 보드초르마 요새를 다비드 주교의 아들인 카헤티의 크비리케 3세에게 남겨두었지만, 얼마 후 빼앗아 나라를 완전히 합병했다. 이 전쟁이 끝날 무렵, 바그라트 3세는 조지아 전체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었다. 그는 나라의 통일을 완료했고, "압하지아, 카르트벨, 란 및 카크의 왕"이 되었다.

4. 1. 카헤티-헤레티 합병

바그라트 3세는 클라르제티 공작령을 합병하여 모든 조지아 영토의 왕이 되었다. 그는 캅카스 원정을 통해 아란, 시르반, 아르메니아를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카디르와 동맹을 맺고 바실 2세에 대항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지아는 통일되었고 귀족들의 반란은 없었으며, 백성들은 그를 절대 군주처럼 여기며 따랐다.

4. 2. 간자 토후국 원정

조지아 국왕 바그라트 3세는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웃한 간자 토후국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토후 파들 이븐 무하마드가 한동안 동 조지아를 약탈해 왔기 때문이다.[1] 바그라트는 아르메니아 국왕 가기크 1세와 동맹을 맺고, 1012년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연합군은 조라게트에 있는 간자로 진격했다.[1]

모든 기독교인의 죽음을 맹세하고 그때까지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통치자를 만난 적이 없었던 파들은 십자가를 숭배하는 두 나라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요새로 피신하여 어려운 포위를 준비했다.[2] 바그라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아란 영토를 점령하여 조지아 주로 만들고, 샤다디 토후가 피신해 있던 요새 도시 샴코르 포위전을 시작했다.[2] 며칠 만에 그는 도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정복자들에게 평화를 부여했다. 파들은 이제 조지아의 봉신이 되었고, 필요한 경우 바그라트를 돕게 되었으며, 간자는 그 이후부터 조공(Kharaj)을 바쳐야 했다.[1] 토후는 바그라트에게 많은 호화로운 선물을 제공했으며, 간자를 합병하지 않고 평화를 맺도록 바그라트를 설득한 귀족들에게도 선물을 제공했다.[3]

4. 3.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1000년, 타오의 다비드 3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영토가 비잔틴 제국에 양도된 후, 타오-클라르제티는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바그라트 3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하 타오와 자바헤티를 통치했지만, 비잔틴 행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역에 대해서는 권한이 없었다.[1]

1011년에서 1012년 사이, 바그라트 3세는 자신의 세습지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잔틴에 복종하여 '클라르제티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고 조지아의 권력을 위협한 클라르제티의 숨바트 3세와 구르겐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어떠한 반대도 없이 곧 그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1012년, 그는 두 형제 숨바트와 구르겐을 트모그비 요새에 투옥된 채 살해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도록 허용했다.[1]

클라르제티 공작령을 합병한 바그라트 3세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카디르와 동맹을 맺고 바실 2세의 적으로 나섰다.[1]

5. 바그라트 3세와 기독교

조지아 왕국 통일과 함께 바그라트 3세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전 조지아 가톨리코스-총대주교를 창설했다. 1000년대 이전에는 총대주교 요한 4세가 "이베리아의 가톨리코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독실한 기독교 왕이었던 바그라트 3세는 999년에 베디아 대성당을 포함한 여러 교회를 세웠으며,[5] 베디아 대성당을 주교구의 으뜸가는 도시이자 압하지야 왕국의 종교 수도로 격상시켜 이 칭호를 구다크바에서 가져왔다. 조지아의 첫 번째 군주인 그는 그의 수도 쿠타이시에 있는 바그라티 대성당 건설을 책임졌으며,[5] 이 종교 건물은 1003년에 완공되었다. 이 기념물은 1994년 제18차 회의부터 2017년까지 유네스코 세계 유산의 일부였으나, "그 완전성과 진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 재건 사업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철회되었다.[5]

바그라티 대성당 (쿠타이시), 세계 유산.


바그라트가 베디아 수도원에 기증한 베디아 성배는 조지아 금속 공예의 중요한 작품이다. 서기 999년 경


카르틀리의 바후슈티와 마리-펠리시테 브로세에 따르면, 조지아와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던 바실 2세 황제는 코카서스 총대주교에게 케스토리아 수도원(아마도 그리스)을 제공했다. 동시에 전 조지아 가톨리코스-총대주교는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105개 이상의 마을, 은과 금, 성상, 십자가를 획득했다.[5] 18세기에 글을 쓴 바후슈티에 따르면, 현재 조지아 가톨리코스-총대주교의 자리인 므츠헤타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바그라트 3세의 보호 아래 건설, 혹은 복원되었으며, 케스토리아에서 가져온 장식품을 사용했다.[5] 그러나 현재는 이 일이 다음 통치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6. 죽음

바그라트 3세는 클라르제티 공작들을 물리친 후 고향으로 마지막 여정을 떠났다. 그는 압하지야에서 헤레티에 이르기까지 왕국 전체를 가로질렀고, 카르틀리와 카케티를 거쳐 마침내 타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1013~1014년 겨울을 타오 군주의 옛 거처였던 파나스케르티 요새에서 보냈다. 그는 1014년 5월 7일 왕실 거처에서 사망했다. 압하지야의 한 지방을 다스리던 즈비아드 오르벨리아니 백작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북쪽으로 운구했다. 그는 베디아 대성당에 묻혔다.[6]

그는 2016년 12월 22일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축일은 5월 7일(양력 5월 21일)로 정해졌다.[6]

7. 가족

키릴 투마노프에 따르면, 바그라트 3세는 마르타와 결혼하여 아들 게오르기 1세를 낳았다.[1] 다른 자료에는 바그라트 3세에게 바실이라는 두 번째 아이가 있었으며, 그는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하훌리의 바실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문서 Date de la mort de Bagrat II d'Ibérie
[2] 서적 Mathieu d'Édesse, Ire partie, chap. XXIV, p.33, et Aristakès Lastivertsi, chap. I, p.9 1995
[3] 서적 Histoire du peuple arménien Privat, Toulouse 2007
[4] 문서 Marie-Félicité Brosset
[5] 뉴스 Gelati Monastery, Georgia, removed from UNESCO's List of World Heritage in Danger https://whc.unesco.o[...] 2017-07-10
[6] 뉴스 წმინდა სინოდმა წმინდანებად ორი მეფე - ბაგრატ მესამე და სოლომონ პირველი, ასევე, კათოლიკოს-პატრიარქი კალისტრატე ცინცაძე შერაცხა http://geotimes.ge/i[...]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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