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하지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압하지야는 흑해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압하스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부르는 이름인 "영혼들의 땅"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9세기부터 콜키스 왕국의 일부였으며, 이후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후, 소련 시대를 거쳐 1990년대 초 조지아와의 분쟁을 겪으며 독립을 선포했지만, 국제적으로는 러시아, 니카라과 등 일부 국가만 승인했다. 압하지야는 대통령 중심의 이원집정부제 국가이며, 러시아 루블을 사용하고 관광업이 주요 산업이다. 인구는 압하스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러시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압하스어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지아 - 남오세티야
남오세티야는 조지아 영토로 주장되지만 사실상 독립국가이며, 조지아는 츠힌발리 지역으로 부르며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나, 러시아의 지원하에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며 국제적 지위가 불안정하다. - 조지아의 행정 구역 - 트빌리시
트빌리시는 쿠라 강 양안에 위치한 조지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5세기에 건설되어 12세기 번영을 누렸으나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현재는 조지아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이다. - 조지아의 자치 공화국 - 아자리야
아자리야는 흑해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조지아의 자치 공화국으로, 고대부터 조지아의 일부였으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거쳐 현재는 조지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아자라 장관회의 의장이 통치하고 관광,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압하지야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 | |
기본 정보 | |
공식 국명 | 아프스느 아후은트카라 (압하스어) 레스푸블리카 압하지야 (러시아어) |
약칭 | 압하지야 |
공용어 | 압하스어 러시아어 |
수도 | 수후미 |
최대 도시 | 수후미 |
국가 표어 | 없음 |
![]() | |
![]() | |
![]() | |
국가 | 승리 |
정치와 정부 | |
정치 체제 | 공화제, 단일 국가, 이원집정부제 |
대통령 | 바드라 군바 (권한대행) |
총리 | 알렉산드르 안크바브 |
총리 (대행) | 발레리 브간바 (권한대행) |
독립 | |
독립 형태 | 사실상 독립 |
독립 선언 | 조지아로부터 |
독립 선언일 | 1992년 7월 23일 |
최초 승인국 | 러시아 |
러시아 승인일 | 2008년 8월 26일 |
승인 국가 | 러시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나우루 시리아 |
지리 | |
면적 | 8,600 |
면적 순위 | ??? |
실효 지배 면적 (2008년까지) | 2,540km² |
인구 | |
인구 통계 년도 | 2017 |
인구 순위 | ??? |
인구 | 243,564 |
인구 밀도 | 28.3 |
인구 조사 년도 | 2021 |
조사 인구수 | 244,926 |
경제 | |
GDP 통계 년도 | 2009 |
GDP 순위 | ??? |
GDP | 약 500백만 |
GDP (루블) | 15.5억 루블 |
통화 | 압하지야 아프사르 러시아 루블 |
통화 코드 | RUB |
시간대 | |
시간대 | +3 (모스크바 시간) |
여름 시간 | 없음 |
기타 정보 | |
국제 전화번호 | +995 44x / +7 840 / +7 940 |
아브하지야 자치 공화국 (조지아) | |
공식 명칭 | 아프하제티스 아브토노미우리 레스푸블리카 (조지아어) |
![]() | |
![]() | |
공용어 | 조지아어 압하스어 |
수도 (정부 소재지) | 수후미 (법령상) |
수도 (역사) | 스후미 (1992-1993) 트빌리시 (1993-2006) 크베모 아자라 (2006-2008) 트빌리시 (2008-) |
최고 평의회 의장 | 제말 가마카리아 |
총리 (대행) | 루슬란 아바시제 |
면적 (2008년까지) | 2,540km² |
인구 (2002년) | 1,956명 |
설치 (아브하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에서) | 1991년 4월 9일 |
자치 정부 망명 | 1993년 9월 27일 (스후미에서) 2008년 8월 13일 (코도리 계곡에서) |
ISO 3166-2:GE | GE-AB |
웹사이트 | http://abkhazia.gov.ge/ |
참고 | 인구, 면적 값은 조지아 군이 실효 지배하던 코도리 계곡의 값. 통화, 시간대는 조지아를 참조 |
2. 어원
압하지야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Аҧсны|압스니ab로 부르며, 이는 "영혼들의 땅/국가"라는 의미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필멸 (필멸의 생명들)의 국가"라는 의미도 있다. 압스니는 7세기 아르메니아어 문서에서 '팬'('운')으로 처음 등장하여, 압실린인들을 일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압하지야는 조지아 최서단에 위치하며 흑해 북쪽 해안과 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카프카스 산맥을 경계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산악 지대이기 때문에 주거지는 흑해 연안과 일부 협곡에 한정되어 있으며,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휴양 도시들이 발달하여 최고의 휴양지로 알려졌으며, 차, 담배, 와인, 과일 등을 생산한다.
러시아어 명칭 Абхазия|압하지야ru는 조지아어 명칭 აფხაზეთი|압하제티ka에서 어원을 따왔다. 민그렐어로는 აბჟუა|압주아xmf 또는 სააფხაზო|사압하조xmf로 알려져 있다.[5]
3. 역사
러시아 제국의 카프카스 진출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1801년부터 1864년까지 조지아 영토는 단계적으로 러시아에 병합되었으며, 1829년부터 1842년 사이에 압하지야도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1864년에는 주권을 박탈당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압하지야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남겨진 땅에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러시아인들이 정착하면서 압하지야인들은 소수 민족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11년 수후미 인구 4만 3천 명 중 3분의 2는 조지아계 메그렐인, 3분의 1이 압하지야인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압하지야는 볼셰비키 정권으로부터 문화적·정치적 자치를 부여받았다. 1921년 3월 31일에는 아브하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립되었으나, 1931년 요시프 스탈린에 의해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는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조지아화가 강하게 추진되었고, 스탈린 사후에 압하지야의 자치는 회복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가 시작되면서 조지아의 독립을 둘러싸고 압하지야인과 조지아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1989년 수후미에서 대학생 입학을 둘러싼 폭동이 발생하여 16명이 사망하고 137명이 부상당했다.
1991년 조지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1992년 조지아 군사 평의회는 소련 시대의 헌법을 폐지하고 1921년 조지아 민주 공화국 헌법을 부활시켰다. 압하지야인들은 이를 자치권 폐지로 간주하고 1992년 7월 23일 독립을 선포했지만,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후 압하지야 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북캅카스 지역의 여러 공화국에서 온 의용군이 압하지야 분리주의 단체에 합류하면서 조지아군은 열세에 놓였다. 1992년 말에는 반군이 수후미 서쪽 압하지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1993년 7월, 압하지야군은 수후미를 공격하여 포위했고, 9월 27일 수후미는 압하지야군의 손에 넘어갔다.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정부는 트빌리시로 망명했다.
이 과정에서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 대대"가 압하지야 분쟁에 개입하여 조지아군과 싸웠으며, 배후에는 러시아 연방군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의 공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6] 유엔 안보리는 아브하즈의 군사 행동과 민족 정화를 비난했다.
1994년 5월 15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국제 연합의 평화 유지군이 휴전 감시를 담당하고 있다. 이후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반복되는 협상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크게 진전되지 않고 있다.
압하지야 정부는 1994년 11월 4일에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주권을 선포했다. 1996년과 2004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당시 러시아군과 압하지야군은 코드리 계곡을 공격하여 조지아군을 축출했고,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정부는 다시 트빌리시로 망명했다.
2008년 8월 26일,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남오세티아와 함께 압하지야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이후 압하지야는 러시아에 의한 러시아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16] 그러나 2022년 3월 남오세티아가 러시아 편입을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압하지야는 동조하지 않았다.[17]
3. 1. 고대 역사
기원전 9세기부터 6세기까지, 현재의 압하지야 지역은 콜키스라는 조지아인 왕국의 일부였다. 이 왕국은 기원전 63년에 동로마 제국 문헌에 '라지카'로 알려진 에그리시 왕국에 흡수되었다.[1]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550년 사이에는 그리스인들이 흑해 연안을 따라, 특히 피춘다와 현재 압하지야의 수도인 수후미에 교역 기지를 세웠다. 이때 그리스인들은 히뇨치라는 호전적인 종족을 만났다. 아리아노스, 플리니우스, 스트라본 등 고전 작가들은 이 지역에 살았던 다양한 종족들과 그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언어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특히, 흑해 동쪽 연안의 압하지야 지역에 살았던 아바스고이족(지금의 압하지야인의 조상), 모스초이족(지금의 조지아 메스케티인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1]
로마 제국은 1세기에 에그리시를 정복하여 4세기까지 통치하였고, 이후 에그리시는 독립하였지만 여전히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압하지야인들이 정확히 언제 기독교로 개종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춘다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1]
3. 2. 압하지야 왕국과 조지아 통합
19세기 초, 러시아와 오스만이 이 지역 통치를 두고 경쟁하는 동안 압하지야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분열로 자주 교체되었다. 1803년 키알라쉬 베이가 러시아 제국에 처음으로 접촉을 시도했지만, 1808년 그의 아들 아슬란-베이가 그를 암살한 후 짧은 기간 친오스만 성향이 지속되었다.[1] 1810년 7월 2일, 러시아 해군이 수후미를 공격하여 아슬란-베이 대신 그의 형제 시퍼-베이를 지도자로 교체했다. 시퍼-베이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조지로 바꾸었으며, 압하지야는 1810년 자치 공국으로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1] 그러나 조지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는 수후미와 비지브 지역에 한정되었다.[1]
이후 러시아-오스만 전쟁을 거치며 러시아의 지위가 강화되었고, 이는 압하지야 지식인들의 종교적 분열로 이어졌다.[1] 크림 전쟁 (1853~1856) 동안 러시아 군대가 압하지야에서 철수하면서 미카엘 왕자(1822~1864)는 오스만 제국으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1]
1864년, 러시아는 서코카스 산악 지방을 예속시켰다. 러시아는 압하지야의 자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1864년 11월 미카엘 왕자는 강제로 권리를 포기하고 보로네시에 재정착했다.[1] 같은 해, 압하지야는 수후미 특별 군사지역으로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고, 1883년에는 쿠타이시 현의 일부인 ''오크러그''로 재편되었다.[1] 1864년부터 1878년 사이에 무슬림 압하지야인 다수가 오스만 제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이는 ''무하지리즘''으로 알려져 있다.[1]
많은 지역이 미거주지로 남겨지면서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러시아인 등이 압하지야로 이주하여 재정착하였다.[1] 일부 조지아 역사학자들은 스반족과 밍그렐리아족 등 조지아 부족들이 콜키스 왕국 시절부터 압하지야에 거주했다고 주장한다.[1]
러시아 관리들은 압하지야와 사무르자카노 주민들에게 러시아어로 공부하고 기도하도록 강요했다.[1] 1878년 대규모 추방 이후 남은 소수의 압하지야인들은 "죄지은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러시아화 통치에 저항할 지도자도 없었다.[1] 1898년 3월 17일, 러시아 정교회 조지아-이메레티 지부 시노드는 수후미 지역 교회와 학교에서 조지아어 사용을 금지했고, 이에 압하지야와 사무르자카노 내 조지아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1] 1898년 9월 3일, 최고 종교 회의는 밍그렐리아인(조지아인) 교구에서는 조지아어로, 압하지야 교구에서는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의식과 교육을 진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1] 테도 사코키아는 러시아 관리들에게 압하지야어와 조지아어 도입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그와 "조지아당" 지도자들은 탄압받았다.[1]
3. 3.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지배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 통치를 두고 경쟁하면서 압하지야 지도자들은 종교적 분열로 자주 교체되었다. 1803년 키알라쉬 베이는 러시아 제국에 처음으로 접촉을 시도했지만, 1808년 그의 아들 아슬란-베이에게 암살당한 후 짧은 기간 동안 친오스만 성향이 지속되었다. 1810년 7월 2일, 러시아 해군이 수후미를 공격하여 아슬란-베이를 그의 형제 시퍼-베이로 교체했다. 시퍼-베이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조지로 바꾸었다. 압하지야는 1810년에 자치 공국으로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으나, 조지와 그 후계자들의 통치는 수후미와 비지브 지역에 한정되었다. 이후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러시아의 지위를 강화했고, 이는 압하지야 지식인들 사이의 종교적 분열을 야기했다. 크림 전쟁 (1853-1856) 동안 러시아 군대가 압하지야에서 철수하면서 왕자 미카엘 (1822-1864)은 오스만 제국으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1864년, 러시아는 서코카스 산악 지방을 예속시켰다. 압하지야의 자치는 러시아 정부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1864년 11월 미카엘 왕자는 강제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보로네시에 재정착했다. 같은 해, 압하지야는 수후미 특별 군사지역으로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고, 1883년에는 쿠타이시 현의 일부인 ''오크러그''로 재편되었다. 1864년부터 1878년 사이, 무슬림 압하지야인 다수가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했는데, 이 과정은 ''무하지리즘''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지역이 비거주지로 남겨졌고,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러시아인 등이 압하지야로 이주하여 재정착하였다. 일부 조지아인 역사가들은 조지아 부족 (스반족과 밍그렐리아족)들이 콜키스 왕국 시절부터 압하지야에 거주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관리들은 압하지야와 사무르자카노 주민들에게 러시아어로 공부하고 기도하도록 강요했다. 1898년 3월 17일, 러시아 정교회 조지아-이메레티 지부 시노드는 수후미 지역의 교회와 교회 학교에서 조지아어 사용을 금지했고, 이에 압하지야와 사무르자카노 내 조지아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1898년 9월 3일, 최고 종교 회의는 신자가 밍그렐리아인(조지아인)인 교구에서는 조지아어로, 압하지야 교구에서는 고대 슬라브어로 의식과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테도 사코키아는 러시아 관리들에게 압하지야어와 조지아어 도입을 요구했지만, 관리들은 그와 "조지아당" 지도자들에게 범죄 혐의를 씌웠다.
3. 4. 소련 시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1918년 압하지야를 포함한 조지아가 독립했다. 독일의 지원으로 조지아인들은 1918년 압하지야로의 볼셰비키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1921년 헌법은 압하지야에 자치를 부여하였다.
1921년,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가 조지아를 침공하여 조지아의 짧은 독립은 끝이 났다. 압하지야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SSR 압하지야)이 되었고, '조약상의 공화국'이라는 모호한 지위로 그루지야 SSR와 연결되었다. 1931년, 스탈린은 압하지야를 그루지야 SSR에 속하는 자치 공화국(압하지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줄여서 압하지야 ASSR)으로 만들었다. 명목상의 자치에도 불구하고, 압하지야는 중앙 소비에트 세력의 강력한 직접 통치를 받았다. 스탈린 통치하에 그리고 베리야의 주도로 압하지야인 학교들이 폐교되면서, 압하지야 어린이들은 조지아어를 배워야 했다. 압하지야어로 된 출판물은 급격히 줄었고 결국 모두 중단되었다. 압하지야인 학교들은 1945/46년에 문을 닫았다.[1]
억압적인 정치는 스탈린의 사망과 베리야의 사형 집행 이후 완화되었고, 공화국 정치에서 압하지야인의 세력도 성장하였다. 대부분의 자치 공화국에서처럼, 소련 정부는 문화 발전, 특히 문학의 발전을 장려하였다.[1]
3. 5. 소련 붕괴와 압하지야 전쟁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와 함께 조지아의 독립을 둘러싸고 압하지야인과 조지아인 사이에 민족 갈등이 고조되었다. 많은 압하지야인들은 조지아가 독립하면 자치권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조지아로부터의 독립을 반대하고, 대신 압하지야를 독립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분리시키기를 원했다. 1989년 7월 16일 수후미에서는 대학 입학 문제로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16명이 사망하고 137명이 부상당했다.
1991년 4월 9일, 조지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초대 대통령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이후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92년 2월 21일, 조지아 군사 평의회는 소련 시대의 헌법을 폐지하고 1921년 조지아 민주 공화국 헌법을 부활시켰다. 많은 압하지야인들은 이를 자치권 폐지로 해석했다. 1992년 7월 23일, 압하지야 자치 정부는 조지아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선포했지만,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조지아 정부는 군대를 파병했고, 수후미에서 압하지야 분리주의 무장 단체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캅카스 지역의 여러 공화국에서 온 의용군이 압하지야 분리주의 단체에 합류하여 조지아 정부군과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 1992년 9월, 반군의 공세로 조지아군은 열세에 놓였다. 셰바르드나제 정권은 러시아가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에게 은밀히 군사적 지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92년 말에는 반군이 수후미 서쪽 압하지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1993년 7월, 압하지야군은 수후미를 공격했다. 도시는 포위되었고, 셰바르드나제도 갇히는 상황이 되었다. 7월 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9월 중순 압하지야군이 공격을 재개하면서 깨졌다. 1993년 9월 27일, 수후미는 압하지야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정부는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로 망명했다.
샤밀 바사예프는 아브하즈 분쟁에 무장 세력 "체첸 대대"를 이끌고 개입하여, 의용군을 자칭하며 아브하즈 독립을 저지하는 입장의 조지아군과 싸웠다. 배후에는 러시아 연방군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의 공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6] 1993년 10월, 유엔 안보리는 아브하즈의 군사 행동과 민족 정화를 비난했다.
전쟁 기간 동안 양측 모두에서 끔찍한 인권 침해 사례가 보고되었다. 조지아 군대는 전쟁 초반에 압하지야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살인과 폭행을 했다고 비판받았고, 조지아는 압하스 세력과 그들의 연합원들이 압하지야 내의 조지아인들을 상대로 인종청소를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 사실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회의에서도 인정되었다.[16] 전쟁 전에는 조지아인이 압하지야 전체 인구의 반을 차지하였고, 압하지야인들은 전체 인구의 5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하였다. 전쟁이 심화되면서,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은 조지아인 인구를 줄이기 위해 인종 청소를 하였다. 대략 25만명의 조지아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3. 6. 전쟁 이후
2004년 10월 3일, 압하지야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러시아는 라울 하짐바를 지지했는데, 그는 병세로 퇴임한 분리주의 성향의 블라디슬라프 아르진바를 대신한 총리였다. 하짐바는 친러 성향이었고, 과거 KGB 요원이었다. 수후미 곳곳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있는 하짐바의 포스터가 걸렸고, 러시아 의원들과 가수들이 압하지야에 와서 하짐바를 위한 유세를 펼쳤다.
그러나 라울 하짐바는 세르게이 바갑시에게 패배했다. 대법원은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지만, 이후 두 사람은 바갑시를 대통령 후보로, 하짐바를 부통령 후보로 하는 팀을 이루어 선거에 다시 나섰고, 90% 이상의 표를 얻었다.
2006년 7월, 조지아는 코도리 협곡의 반정부 관리자 임자르 크비차니에 대한 경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크비차니는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체포는 피했다. 코도리 협곡은 트빌리시 중앙정부의 영향 아래로 돌아왔다.
전쟁 이후에도 산발적인 폭력 행위가 계속되었다. 조지아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압하지야 반군을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러시아 루블을 사실상 화폐로 유통하고, 압하지야인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하며 지원을 강화했다. 2008년 4월에는 러시아 MIG가 조지아 국적의 무인 항공기에 발포하기도 했다.
2008년 8월 9일, 압하지야 군은 남오세티야 전쟁과 동시에 코도리 협곡에서 조지아 군에 발포했다. 이 분쟁은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008년 8월 11일에 러시아는 압하지야 공화국에 평화유지군 강화 명목으로 9000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35] 당시 1000여 명의 압하지야 군인들이 업퍼 크다리 협곡에 거주하는 조지아 세력을 추방시키는데 동원되었다. 8월 12일까지 조지아 세력과 시민들은 조지아 정부의 통제 아래 압하지야에서 대피하였다. 결국 2008년 8월 13일에 조지아군은 압하지야에서 군대를 완전히 철수했다.[36] 2008년 8월 17일에 압하지야군은 조지아의 13곳 마을을 점령했다.[37] 2008년 8월 25일 러시아 상원은 남오세티야와 함께 압하지야 공화국의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하였다.[38] 2008년 8월 26일, 러시아는 압하지야의 독립을 인정했다.[39] 9월 2일에는 압하지야에 러시아군이 영구 주둔할 가능성을 시사했다.[39] 남오세티야는 수후미에 대사관을 개설했다.[40] 2008년 10월 23일에 압하지야 국방부 관리가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41] 압하지야 공화국은 러시아 자본 유입으로 점점 경제가 발전하였다.[42] 2008년 11월 17일, 압하지야 의회는 러시아 해군 기지 건설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비준했다. 세르게이 바갑시 대통령은 2009년 1월 26일에 러시아가 압하지야 공화국에 해군기지 건설을 연내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43] 3월 6일에 러시아는 압하지야 공화국에 있는 기지를 49년간 임차하기로 결정했다.[44]
러시아의 독립 인정 이후, 러시아와 압하지야는 주요 국가 재산 임차 및 국경지대 권한 포기를 포함하는 논란 많은 조약을 맺었다. 2009년 5월, 반대 정치 세력과 전쟁 참전 세력들은 이 조약이 국가 독립을 약화시킨다고 항의했다. 라울 하짐바 부통령은 사임했고, 반대 당들은 그를 2009년 압하지야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으나, 세르게이 바갑시에게 패배했다.
4. 언어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압하지야' 문서의 '언어' 섹션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주로 압하지야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
5. 국제적 지위
압하지야는 러시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나우루, 시리아 등 일부 국가로부터 독립 국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대한민국을 포함한 대다수의 국가는 압하지야를 조지아의 자치 공화국으로 간주한다.[35]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러시아는 압하지야의 독립을 공식 인정하고 군사적 지원을 강화했다.[38],[39] 러시아는 압하지야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주요 국가 재산을 임차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43],[44]
유엔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등 국제기구는 압하지야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25] 러시아와 서방 국가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해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5. 1. 조지아의 피점령 지역들에 대한 법률
2012년 7월 9일, OSCE 의회는 모나코에서 열린 연례 총회에서 조지아의 영토 보전을 강조하고 독립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를 "점령된 지역"으로 지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25] 이 결의안은 압하지야, 조지아, 남오세티야의 사실상 관리들과 러시아 정부 및 의회가 유럽 연합 감시단의 점령 지역 접근을 방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25] 또한 OSCE 의회는 "난민들이 원래의 삶의 터전으로 복귀할 권리를 거부당할 뿐만 아니라 조지아와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의 점령 지역에 있는 난민들의 인도적인 상황도 우려한다"고 밝혔다.[25] OSCE 의회는 러시아를 포함한 57개 참가국에서 온 320명의 입법자들로 구성된 부서이다.[25]5. 2. 중립 국적 여권
2008년 10월 말, 사카슈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조지아 의회가 통과시킨 '피점령 지역에 대한 법률' 제정에 서명했다. 이 법률은 압하지야와 츠힌발리(이전의 남오세티야 자치주 지역)의 분리된 지역을 다루며, 이 지역 내에서의 독립운동과 경제활동에 관한 규제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21]특히, 이 법률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조지아 영토 내에서만 두 분리된 지역으로 출입해야 한다. 압하지야는 주그디디 지역에서만, 남오세티야는 고리 지역에서만 출입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은 "특별한" 경우에는 분리된 지역으로의 출입을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특별 허가는 분리된 지역으로의 이동이 "조지아의 국가 이익에 부합할 때,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할 때, 비점령 혹은 인도주의적인 목적일 때" 발부된다.[21]
또한 이 법률은 조지아 법률과 연계되는 허가, 면허, 등록이 요구되는 모든 종류의 경제활동(영리, 비영리 포함)을 금지했다. 더불어 항공, 해양, 철도 통신과 지역을 경유하는 국제 소송, 광물 탐사, 은행 송금도 금지했다. 경제활동 관련 조항은 1990년대까지 소급 적용된다.[21]
이 법률은 러시아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에서의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책임이 있다고 명시했다. 러시아는 조지아에 있거나 적절한 허가를 받고 점령 지역에 있는 조지아 시민, 무국적자, 외국인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에 대한 책임도 있다. 법률은 피점령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실상 국가기관과 관리들은 조지아에 의해 불법으로 간주된다고 규정한다. 이 법률은 분리된 지역에 대해 "조지아 관할권이 완전히 복원될 때"까지 효력이 유지된다.[21]
5. 3. 러시아의 개입
2004년 10월 3일, 압하지야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러시아는 라울 하짐바를 지지했는데, 그는 병세로 퇴임한 분리주의 성향의 블라디슬라프 아르진바를 대신한 총리였다. 하짐바는 친러 성향이었고, 과거 KGB 요원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있는 하짐바의 포스터가 수후미 곳곳에 걸렸고, 러시아 의원들과 가수들이 압하지야를 방문하여 하짐바를 위한 유세를 펼쳤다.그러나 라울 하짐바는 세르게이 바갑시에게 선거에서 패배했다. 대법원은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지만, 이후 두 후보는 바갑시를 대통령 후보, 하짐바를 부통령 후보로 하는 팀을 이루어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90% 이상의 표를 얻었다.
2006년 7월, 조지아는 코도리 협곡의 반정부 성향 관리자 임자르 크비자니에 대한 경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크비자니는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작전 결과 코도리 협곡은 트빌리시 중앙정부의 영향 아래로 돌아왔다.
전쟁 이후에도 산발적인 폭력 행위가 계속되었다. 조지아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압하지야 반군을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루블이 사실상 화폐로 유통되고, 러시아가 압하지야인들에게 여권을 발급하는 등 러시아의 지원은 더욱 확연해졌다. 2008년 4월, 러시아 MIG는 조지아 국적의 무인 항공기에 발포했다.
2008년 8월 9일, 압하지야 군은 코도리 협곡에서 조지아 군에 발포했다. 이는 남오세티야 전쟁과 동시에 일어났으며, 분쟁은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008년 8월 11일에 러시아는 압하지야 공화국에 평화유지군 강화 명목으로 9000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35] 2008년 8월 13일에 조지아군은 압하지야에서 군대를 완전히 철수했고,[36] 8월 17일에 압하지야군은 조지아의 13개 마을을 점령했다.[37] 8월 25일, 러시아 상원은 남오세티야와 함께 압하지야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38] 8월 26일, 러시아는 압하지야의 독립을 인정했고, 9월 2일에는 압하지야에 러시아군 영구 주둔 가능성을 시사했다.[39] 남오세티야는 수후미에 대사관을 개설했다.[40] 2008년 10월 23일에 압하지야 국방부 관리가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조지아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41] 압하지야 공화국은 러시아 자본 유입으로 점차 경제가 발전하였다.[42] 2008년 11월 17일, 압하지야 의회는 러시아 해군 기지 건설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비준했다. 세르게이 바갑시 대통령은 2009년 1월 26일에 러시아가 압하지야 공화국에 해군 기지 건설을 연내에 착수한다고 발표했고,[43] 3월 6일에 러시아는 압하지야 공화국에 있는 기지를 49년간 임차하기로 결정했다.[44]
독립 인정 이후, 러시아와 압하지야는 국가 재산 임대 및 국경 지대 권한 포기를 포함하는 논란 많은 조약을 맺었다. 2009년 5월, 여러 반대 세력들은 이 조약이 국가 독립을 약화시킨다고 항의했고, 라울 하짐바 부통령은 사임했다. 이후 하짐바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세르게이 바갑시에게 패배했다.
압하지야-조지아 분쟁 동안, 러시아는 분리주의자 측에 전략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현재도 러시아는 압하지야에 강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2000년부터 압하지야인들에게 여권을 발급하고, 퇴직 연금 등 금전적 이익을 제공했다. 2006년까지 80% 이상의 압하지야 인구가 러시아 여권을 발급받았다.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 인정이 전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인정을 암시했다. 2008년 4월 1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와 정식 국교를 맺으라고 지시했고, 조지아는 이를 "사실상 합병" 시도라고 비판했다.
2008년 4월, 러시아는 조지아가 압하지야를 강제 통제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군사적 보복을 약속했다. 남오세티야 침공에 대응하여, 러시아는 2008년 8월 25일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인정을 논의하는 회의를 소집했고, 8월 26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양국을 공식 인정했다. 러시아의 인정은 NATO 회원국 등에게 "영토보전과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받았다.
러시아는 해군 기지 건설을 위해 오참치레 해안을 준설하고 있다. 조지아 해양 경찰이 압하지야 관련 선박을 단속하자, 러시아는 흑해 순찰을 통해 대응하고 있다.

5. 4. 국제적 개입
2004년 10월 3일, 압하지야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러시아는 라울 하짐바를 지지했는데, 그는 병세로 퇴임한 분리주의 성향의 블라디슬라프 아르진바를 대신한 총리였다. 하짐바는 친러 성향이었고, 과거 KGB 요원이었다. 수후미 곳곳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있는 하짐바의 포스터가 걸렸고, 러시아 의원들과 가수들이 압하지야를 방문하여 하짐바를 위한 유세를 펼쳤다.[35]그러나 라울 하짐바는 세르게이 바갑시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공화국 내 긴장이 이어져 대법원에서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다. 이후, 이전의 라이벌들이 극적으로 합의하여 바갑시를 대통령 후보로, 하짐바를 부통령 후보로 한 팀을 이루어 선거를 치렀다. 그들은 다음 선거에서 90% 이상의 표를 얻었다.[35]
2006년 7월, 조지아는 코도리 협곡의 반정부 성향 관리자 임자르 크비치아니에 대한 경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크비치아니는 이전 조지아 대통령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장미 혁명 이후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크비치아니는 체포를 피했지만, 코도리 협곡은 트빌리시 중앙정부의 영향 아래로 돌아왔다.[35]
전쟁 직후 몇 년 동안 산발적인 폭력 행위가 발생했다. 조지아 관료들은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압하지야 반군에게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압하지야 지원은 러시아 루블이 사실상 화폐로 유통되고, 러시아가 압하지야인들에게 여권을 발급해주는 것으로 더욱 확연해졌다. 조지아는 러시아가 코도리 협곡 공격을 위해 영공을 침범했다고 비판했다. 2008년 4월, 러시아 MIG는 조지아 국적의 무인 항공기에 발포했다.[35]
2008년 8월 9일, 압하지야 군은 코도리 협곡에서 조지아 군에 발포했다. 이는 남오세티야 전쟁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조지아에 공격받는 오세트인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분쟁은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008년 8월 11일에 러시아는 압하지야 공화국에 평화유지군 강화의 명목으로 9000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35] 당시 1000여 명의 압하지야 군인들이 업퍼 크다리 협곡에 거주하는 조지아 세력을 추방시키는데 동원되었다. 8월 12일까지 조지아 세력과 시민들은 조지아 정부의 통제 아래 압하지야에서 대피하였다. 결국 2008년 8월 13일에 조지아군은 압하지야에서 군대를 완전히 철수했다.[36] 2008년 8월 17일에 압하지야군은 조지아의 13곳 마을을 점령했다.[37] 2008년 8월 25일 러시아 상원은 남오세티야와 함께 압하지야 공화국의 조지아로부터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하였다.[38] 그리고 2008년 8월 26일에는 러시아가 압하지야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9월 2일에는 압하지야에 러시아군이 영구 주둔할 가능성을 시사했다.[39] 남오세티야는 수후미에 대사관을 개설했다.[40] 2008년 10월 23일에 압하지야 국방부의 관리가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두고 일부에선 조지아의 소행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1] 압하지야 공화국은 러시아 자본의 유입으로 점점 경제가 발전하였다.[42] 2008년 11월 17일에는 압하지야 의회에서 2009년 압하지야 내의 러시아 해군 기지의 건설에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비준하였다. 세르게이 바갑시 대통령은 2009년 1월 26일에 러시아가 압하지야 공화국에 해군기지 건설을 연내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43] 그리고 3월 6일에 러시아는 압하지야 공화국에 있는 기지를 49년간 임차하기로 결정했다.[44]
러시아가 독립을 인정한 이후, 러시아와 압하지야는 주요 국가 재산을 임차하거나 팔고 국경지대 권한을 포기하는 조약을 맺었다. 2009년 5월, 여러 반대 정치 세력과 전쟁 참전 세력들은 이 조약들이 국가 독립을 약화시키고 지배 세력을 조지아에서 러시아로 교체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당시 부통령 라울 하짐바는 반대세력 비판에 동조하여 5월 28일 사임했다. 반대 성향의 당들은 2009년 압하지야 대통령 선거 후보로 라울 하짐바를 지명했으나, 이 선거 역시 세르게이 바갑시에게 패배했다.[35]
유엔은 분쟁과 평화 협상 과정에서 군사적 감시(UNOMIG), 외교, 인도주의, 재건, 인권 수호, 절제 능력과 신뢰 구축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유엔은 국경에 강압적인 변화가 없어야 하며, 합의는 다민족 인구 구성원들이 귀환하여 국제적 감시 아래 국민 투표를 한 결과에 의해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했다. 서방 세계는 조지아가 독립 국가로서 자국 영토 내 질서를 지키고 영토를 보전할 권리에 기반하여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35]
OSCE는 비정부 기구와 미디어 계통 관리, 시민 대표들과 대화에 개입했고, 갈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OSCE는 1996년 리스본 정상회담에서 압하지야 내 조지아인 인종청소에 대해 비난과 우려를 표했다.[35]
미국은 압하지야의 일방적인 분리를 거부하고, 자치 구역으로서 조지아와의 통합을 촉구한다. 1998년 미국은 갈리 지역 기반 시설 재건에 1500만 달러를 할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 국제개발청은 압하지야를 위한 인도 지원 계획에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은 조지아 군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렸으나, 압하지야에 대한 평화강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35]
2006년 8월 22일, 리차드 루가 상원 의원은 러시아의 평화유지작전을 비난하며, "미국 행정부는 압하지야와 츠힌발리 구역 내 분쟁 지역에서 러시아 평화유지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조지아 정부의 주장을 지지한다"라고 했다.[35]
2006년 10월 5일, 유럽 연합 외교 문제·안보 정책 고위대표 하비에르 솔라나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을 유럽 연합군과 배치하는 가능성을 배제했다. 2006년 10월 10일, 유럽 연합 남코카서스 특사 피터 셈네비는 "조지아 간첩망에 대한 러시아의 행동은 유럽 연합 내 흑해 지역의 중립적 평화유지 세력으로서의 러시아의 신용성을 훼손했다"고 했다.[35]
2006년 10월 13일,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채택하여 2007년 4월 15일까지 UNOMIG 활동을 연장했다. 결의안은 조지아가 모스크바 정전 협정에 의해 인정되지 않은 군대가 코도리 협곡 상류 지역에 없음을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압하지야 지도부가 피난민과 국내 실향민의 안전 귀환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갈리 구역 주민들의 거주권과 신분을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조지아에게는 압하지야의 안전에 적법한 관심을 두고 위협적인 행동, 특히 코도리 협곡 상류에서의 군사적 도발 행위를 삼갈 것을 촉구했다.[35]
결의안은 양측 모두 대화적 해결을 따르고, 군사 분리를 걱정하는 세력에 비폭력과 신뢰 구축에 관한 이전 합의를 따르라고 했다. 독립국가연합 평화유지군의 역할에 관하여 UNOMIG와의 긴밀하고 효과적인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양측 모두 평상시의 작전을 연장할 것으로 보았다. 결의안은 "조지아와 국제적으로 인정된 조지아 국경의 자주, 독립, 영토보전에 대한 모든 회원국들의 결의"를 재확인했다.[35]
할로 트러스트는 1999년부터 압하지야에서 활동하며 수후미와 갈리 구역 내 지뢰 제거를 완료했다. 그들은 2011년에 압하지야를 "무지뢰 지역"이라 선언했다.[35]
압하지야에서 활동하는 주요 NGO 단체는 프랑스에 본부를 둔 국제 비영리 단체인 프비에 르쟝스 (Première-Urgence, 약자로 PU)이다. PU는 거의 10년간 극한 분쟁으로 영향 받은 위험 인구를 지원하기 위한 재건 및 경제 복구 사업을 도입했다.[35]
6. 정치와 행정
압하지야의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며, 행정부 수반도 겸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2회까지 중임할 수 있다.[26] 내각은 대통령에게 직속되며, 대통령 임기 동안 활동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총사퇴한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임기는 5년, 의원 정수는 35명이다.
압하스 공화국은 7개의 구(라욘)로 나뉘며, 각 구의 명칭은 중심 도시의 이름을 따고 있다. 1995년 오캄치라와 갈 구의 일부를 분할 합병하여 설립된 트쿠아르찰 구를 제외하고는 소비에트 연방 시대와 동일하다.[26]
공화국 대통령은 구 의회가 선출한 자를 구의 수장으로 임명하며, 마을의 수장은 의회가 선출한 자를 구의 수장이 임명한다.[26]
조지아에서 사용하는 압하스 자치 공화국의 지방 행정 구역은 트쿠아르찰 구를 제외하고 동일하다.
번호 | 구역명 | 영문 표기 |
---|---|---|
1 | 가그라 구 | Gagra |
2 | 구다우타 구 | Gudauta |
3 | 수후미 구 | Sukhumi |
4 | 굴립시 구 | Gulripsh |
5 | 오캄치라 구 | Ochamchira |
6 | 트쿠아르찰 구 | Tquarchal (Tkvarcheli) |
7 | 갈 구 | Gali (Gal) |
6. 1.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정부 (법적 망명 상태)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정부는 조지아가 압하지야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망명정부이다. 이 친조지아 정부는 2006년 7월까지 코도리 계곡 상류에서 기반을 유지했었으나, 2008년 8월에 일어난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하였다. 이 정부는 또한 1992년 압하지야 전쟁과 이에 따른 인종 청소로 인해 발생한 25만 명의 국내실향민 문제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현재 정부의 수장은 바크탕 칼바야이다.
압하지야 전쟁 동안, 당시 "압하지야 장관 의회"의 조지아 파였던 압하지야 자치 공화국 정부는 압하지야 분리주의 세력이 수도 수후미를 점령한 이후 압하지야를 떠나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정부를 옮겨 압하지야의 망명 정부로 13년 가까이 있었다. 이 시기 동안 타마즈 나다레쉬빌리가 망명 정부를 이끌었는데, 그는 평소 압하지야 문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분쟁은 오직 분리주의로 향한 조지아의 군사적 대응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종종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이후 나다레쉬빌리 행정부는 내부적인 논란에 연루되었고, 압하지야 정치계에서 큰 역할을 해내지 못하자 미하일 사카슈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그의 압하지야 특사 아라클리 알라사냐를 새로운 후임자로 임명하였다.
6. 2. 압하지야 공화국 정부 (사실상)


압하지야는 이원집정부제 국가이다. 세르게이 바갑시는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권을 장악, 이후 2009년 12월 12일 열린 선거에서도 59.4%를 득표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알렉산드르 앙크바브는 부통령이었는데, 2011년 5월 29일 대통령 서거 이후 대통령으로 바로 승격되어 대통령 업무를 수행하다 이후 2011년 8월 26일 선거에서 다시 한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입법권은 인민 의회에게 부여된다. 인민 의회는 35명의 선출된 인원으로 구성된다. 가장 최근의 총선거는 2012년 3월 10일과 24일에 치러졌다. 압하지야 민족이 아닌 민족 단체들(아르메니아, 러시아 그리고 조지아 계통의)은 의회에서 그들의 발언권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1992-1993 전쟁에서 발생한 피난민 (대부분 조지아계 민족) 중 대부분은 여태까지 귀환하지 못하였고 행정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현 대통령은 2020년 4월에 취임한 아슬란 브자니야이다.
압하지야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행정부 수반도 겸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중임은 2회까지 가능하다.
내각은 대통령에게 직속이며, 대통령 임기 중 활동하고, 새로운 대통령 선출과 함께 총사퇴한다.
의회는 단원제이다. 임기는 5년이며, 의원 정수는 35명이다.
6. 3. 독립에 대한 지지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에서 2010년에 출판한 학술 자료에 따르면, 압하지야 인구의 대부분이 독립을 지지하는 데 반해, 극히 드문 수만이 러시아에 편입되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조지아와의 재통일에 대한 지지도는 매우 낮다. 조지아계 민족들도 현재 상황에 적응한 듯, 인구의 50% 가까이가 압하지야가 독립 국가로 남기를 바라고 있으며, 20%도 안 되는 인구가 조지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압하지야계 민족들 사이에서는 1%도 안되는 인구가 조지아와의 재통일을 바라고 있으며, 이런 낮은 지지도는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계통의 민족들에게도 비슷한 실정이다.[1]7. 국방
압하지야 군대는 "압하지야 공화국"의 군대이다. 1992년 설립된 압하지야 민족 방위군을 기반으로 하며, 대부분의 무기는 구다우타에 있는 이전 소련 공군 기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압하지야 군대는 주로 육군으로 구성되나, 작은 규모의 해상 부대와 공군 부대도 존재한다. 러시아는 현재 압하지야 내에 1,600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1]
압하지야 군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8. 경제
압하지야의 경제는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러시아 루블을 화폐로 사용한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과 러시아의 압하지야 독립 인정 이후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압하지야 국가 예산의 거의 절반은 러시아의 지원금으로 구성된다.[27]
관광업은 주요 산업으로, 2007년에는 약 100만 명의 관광객(주로 러시아인)이 압하지야를 방문했다. 압하지야는 비옥한 토지에서 차, 담배, 와인, 과일(특히 탄제린과 개암) 등을 생산한다. 전기는 압하지야와 조지아 사이에 있는 인구리 강에 위치한 인구리 수력 발전소에서 양국이 공동으로 생산하여 공급한다.[27]
2012년 상반기 압하지야의 주요 교역 상대국은 러시아(64%)와 터키(18%)였다. 1996년 압하지야에 도입된 CIS 경제 조약은 공식적으로 유효하지만, 2008년 러시아는 이 조약에서 탈퇴했다. 러시아는 다른 CIS 회원국에도 탈퇴를 요구했으나, 다른 회원국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27]
독립 문제와 관련된 논란, 낙후된 기반 시설에도 불구하고, 2008년 러시아의 독립 인정 이후 많은 러시아 관광객이 압하지야를 찾고 있다. 2009년 러시아 관광객 수는 20% 증가하여 총 100만 명을 넘었다. 낮은 가격과 비자 면제 혜택은 터키, 이집트, 불가리아 등 다른 인기 관광지를 방문하기 어려운 러시아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이다. 관광 붐 이후 러시아 기업들은 압하지야 관광 인프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2014년 주요 고속도로가 재건되었고, 가그라의 호텔들은 복구되거나 철거되고 있다. 2014년에는 116만 명의 러시아 관광객이 압하지야를 방문했다.[27]
러시아의 독립 승인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가상화폐 채굴(마이닝)이 활발해졌다. 저렴한 전기 요금을 찾아 오르도스시 등과 함께 아브하지아에도 투자가 집중되었다. 2019년 초에는 마이닝 시설이 15곳, 전력량은 1800가구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취약한 전력 인프라로 인해 아브하지아 정부는 겨울철 전력 공급 확보를 위해 시설의 일시적 폐쇄를 발표했다.[27][28]
9. 사회
1990년대 초 압하스 분쟁으로 압하지야의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인구는 절반 이하로 감소했고, 민족 구성도 크게 달라졌다.
9. 1. 인구
201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압하지야에는 240,705명이 거주하고 있다. 2003년 인구조사에서는 215,972명으로 조사되었으나, 조지아 당국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7] 조지아 통계청은 2003년 압하지야 인구를 179,000명, 2005년에는 178,000명으로 추정했다.[8]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2007년 압하지야 인구를 약 18만 명으로 추정했으며,[9] 국제 위기 그룹은 2006년 압하지야 인구를 157,000명에서 190,000명 사이로 추정했다.2011년 인구 조사 결과,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가 약 52만 명이었으며, 그중 48%가 그루지야인(대부분 메그렐인)이었고, 17%가 압하스인이었다.[7] 그 외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등 소수 민족도 거주했다. 1990년대 초 압하스 분쟁으로 인해 80% 이상의 그루지야계 주민이 해외로 탈출했고, 압하스인 등도 유출되어 인구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그루지야계 주민 감소의 원인으로 민족 청소가 지적되기도 한다.[9]
9. 2. 민족
압하지야-조지아 분쟁은 압하지야의 민족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92년 압하지야 전쟁으로 인해 1989년 기준 525,061명의 인구가 추방되거나 피난했다.[7]전쟁 이후 압하지야에는 압하지야인, 조지아인(대부분 밍그렐리아족),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이 주로 거주한다.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그리스인, 오세트인, 타타르족, 튀르키예인, 롬족 등도 소수 거주한다. 전쟁 전 조지아인이 인구의 45.7%를 차지했으나, 1993년 이후 대부분 탈출하거나 인종 청소의 희생양이 되었다.[7]
소련 시대 이오시프 스탈린과 라브렌티 베리야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이 대거 유입되어 압하지야인보다 인구가 많아졌다. 1950~60년대에는 아르메니아 교회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2003년 기준 아르메니아인은 두 번째로 큰 소수민족 집단(약 45,000명)이지만, 1989년(약 77,000명)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7]
압하스인은 이 지역을 Аҧсныab(Apsny)라고 부르며, "영혼의 땅(나라)"이라는 의미이다.[4] 조지아어로는 აფხაზეთიka(Apkhazeti)라고 하며, 러시아어 명칭 Абхазияru(Abkhazia)는 조지아어에서 유래했다.
2011년 인구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10]
1989년 소련의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가 약 52만 명이었고, 그중 48%가 조지아인(대부분 카르트벨리인의 여러 부족 중 메그렐인), 17%가 압하스인(압하스인)이었다.[7] 1990년대 초 압하스 분쟁으로 80% 이상의 조지아계 주민이 해외로 탈출했고, 압하스인 등도 유출되어 인구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조지아계 주민 감소는 민족 청소가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9]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진출 과정에서 1864년 아브하스는 주권을 박탈당했고, 많은 아브하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남겨진 땅에는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러시아인들이 정착하여 아브하스인들은 소수 민족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러시아 혁명 후, 아브하스는 볼셰비키 정권으로부터 자치를 부여받아 1921년 아브하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1년 스탈린에 의해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는 자치 공화국이 되었고, 조지아화가 강하게 추진되었다. 스탈린 사후 아브하스의 자치는 회복되었다.
9. 3. 디아스포라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침략에 저항하다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 간 압하지야인들을 '무하지룬'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터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압하지야인 디아스포라 사회가 있다. 터키에 거주하는 압하지야인들의 수는 추정치가 다양한데, 디아스포라 지도자들은 100만여 명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압하지야 측 추정치는 15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이다. 터키의 압하지야인들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이다.9. 4. 종교
압하지야 국민 대다수는 동방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등 기독교인, 수니파 무슬림 혹은 무교인이나, 종교 예배를 보는 사람은 적다. 압하지야 신이교는 최근 몇십 년간 크게 부흥했다. 압하지야에는 적은 수의 유대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신흥 종교 지지자들이 존재한다. 여호와의 증인 조직은 1995년부터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나, 법령이 강제적이진 않다.[12][13][14]압하지야와 조지아 헌법에 따르면, 모든 신앙인(무신론자 포함)들은 법 이전에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한다.[15]
2003년에 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0%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 하였고, 16%는 무슬림, 8%는 무신론자 혹은 무교자, 8%는 압하지야 토속 신앙 혹은 압하지야 신이교 신자, 2%는 기타 종교 신자, 6%는 미정이라 답하였다.[13]
9. 5. 국적 논란
압하지야는 1992년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적으로는 조지아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어 국적 논란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국적 도입과 조지아인 관련 논란이 주요 쟁점이다.9. 5. 1. 러시아 국적의 도입
소련 해체 이후, 압하지야인들은 소련 시민 신분을 유지하거나 10년 넘게 소련 여권을 소지했다.2002년 이전 러시아 법률은 이전 소련 거주민들이 새로운 독립 국가의 국민이 되지 않은 경우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2002년 5월 31일, 새롭게 도입된 러시아 시민권 법률은 이전 소련 거주자들이 현재 거주지에 관계없이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간소화된 절차를 도입했다.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에서는 신청 과정이 더욱 간소화되어 집을 떠나지 않고도 신청할 수 있었다. 러시아 관료 집단과 가까운 러시아 국수주의 성격의 비정부기구들이 서류를 인근 러시아 도시에 전달해 주었다.
압하지야인들은 2002년에 대규모로 러시아 여권을 받기 시작했다. 압하지야 내 러시아인 사회 의회라는 공공 기구가 소련 시기 압하지야인들의 여행 서류를 수집하고 있다고 보고되기도 했다. 수집된 서류들은 소치에 러시아 외무부가 특별히 세운 영사 부서에 보내졌다. 서류 확인 후에는 압하지야인들에게 러시아 여권이 발급되었다. 2002년 6월 25일까지 약 15만 명의 압하지야인들이 새로운 여권을 받아, 이미 러시아 시민권을 보유한 5만 명에 추가되었다. 수후미 관리들은 러시아 국적 취득 과정에 공식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았으나, 공개적으로 장려했다. 정부 각료들은 2002년 5월 졔르게니야 압하지야 총리의 모스크바 방문 때 푸틴 대통령 행정부가 여권 취득에 동의했다고 비밀리에 전했다.
여권 문제는 트빌리시에 폭동을 일으켜, 이전에도 불안정했던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조지아 외무부는 압하지야인들은 조지아 국민이며 여권 할당이 "전례 없는 불법 행위"라고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조지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설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니노 부르자나제 의회 대변인은 이 문제를 다가오는 OSCE 의회의 안건으로 올릴 것이라고 했다.
2011년 2월 1일은 러시아-압하지야 국경을 건너는데 소련 여권이 유효한 마지막 날짜였다. 압하지야 여권비자국의 직원 말에 따르면, 2천 명에서 3천 명 정도(대부분 노인)의 사람들이 새로운 서류를 챙기지 못한 채 소련 여권만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이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지만, 먼저 내부 압하지야 여권을 발급받고 러시아를 방문할 수 있는 여행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
9. 5. 2. 조지아인 논란
2005년, 압하지야 지도부는 동부 지역 조지아인들의 통합을 위해 갈리, 오참치레, 트크바르첼리 구역 거주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펼쳤다. 압하지야 법률에 따르면, 1999년 10월 독립 이전에 5년 이상 거주한 비(非)압하지야인도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1992-1993년 전쟁으로 압하지야를 떠났다가 갈리 구역으로 돌아온 조지아인들이 압하지야 여권을 얻는 것을 어렵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압하지야 법률은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국가와의 이중 국적을 금지하고 있다.갈리 지역으로 돌아온 조지아인들이 압하지야 여권을 받으려면 조지아 시민권을 포기했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바갑시 대통령은 갈리의 조지아인들을 "조지아화된 압하지야인"으로 간주하며, 이들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라브렌티 베리야 시기에 "조지아화"된 압하지야인이라고 주장했다. 바갑시는 공식 연설에서 이들을 압하지야인 인구에 포함시키며, 그들이 스스로를 조지아인으로 여기는 사실을 무시했다.[7]
2013년 초, 조지아인들의 여권화 과정은 압하지야 반대파에 의해 주요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여권 발급은 연기되었다. 반대파는 동부 지역 조지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독립과 영토 보전을 잃는" 위험을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압하지야 안전 보장 의회 총무 스타니슬라브 라코바는 "우리는 압하지야의 완전 조지아화 과정을 직면하고 있다"고 말했다.[7]
2013년 중반, 갈리의 조지아인 학교 임원들은 수후미 당국으로부터 학교를 러시아어 교육기관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013년 9월, 압하지야 의회는 내무부에 "불법적으로 발급된 여권" 취소를 요구하기 위해 검찰 조사를 지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압하지야 당국은 갈리, 오참치레, 트크바르첼리 구역의 많은 주민들이 압하지야 여권을 받으면서 동시에 조지아 시민권을 유지하여 "압하지야 시민권법을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26,000개 이상의 여권이 이 지역들에서 발급되었고, 그 중 23,000개는 2008년 8월 러시아가 압하지야 독립을 인정한 이후에 발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갈리 구역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주민들에게 시민권 박탈 및 추방에 대한 우려를 야기했다.[7]
2013년 10월, 알렉산더 안클레프는 스타니슬라브 라코바를 해임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라코바는 자신의 해임이 갈리 거주 조지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압하지야 안전보장회의 자료를 근거로 갈리 지역 주민 128명이 압하지야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했다. 지방 정당들과 시민 단체들은 라코바의 해임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대통령이 "불법적인 행위를 합법화했다"고 주장했다.[7]
10. 문화
압하지야어 문학은 20세기 초에 문서화가 시작되어 비교적 역사가 짧다. 그러나 압하지야인들은 신화 속 인물들에 관한 설화인 나트 사가를 다른 캅카스인들과 공유한다. 압하지야 알파벳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최초의 압하지야어 신문은 1917년에 창간된 '압하지야'로, 드미트리 굴리아가 편집하였다.
축구는 압하지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그 외에도 농구, 복싱, 레슬링 등이 인기 있다.
압하지야는 1994년부터 아마추어 압하지야 축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국제 축구 연맹 회원 자격은 없다.
참조
[1]
웹사이트
Citypopulation.de/Republic of Georgia
http://www.citypopul[...]
2017-09-15
[2]
웹사이트
Tuvalu 'Recognizes Abkhazia, South Ossetia'
http://www.rferl.org[...]
CNN
2009-09-19
[3]
뉴스
Syria Recognizes Independence of Abkhazia, S Ossetia
https://sptnkne.ws/h[...]
Sputnik
2018-09-09
[4]
웹사이트
Contested Borders in the Caucasus : Chapter I (3/4)
http://poli.vub.ac.b[...]
2017-09-15
[5]
서적
Contrasts and Solutions in the Caucasus
http://www.abkhazall[...]
Aarhus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Abkhazia (Apsny)
http://abkhazworld.c[...]
abkhazworld.com
2017-09-15
[7]
웹사이트
Population censuses in Abkhazia: 1886, 1926, 1939, 1959, 1970, 1979, 1989, 2003
http://www.ethno-kav[...]
[8]
간행물
Statistical Yearbook of Georgia 2005
Department for Statistics, Tbilisi
[9]
웹사이트
Abkhazia
http://www.britannic[...]
브리타니커 백과사전
2012-02-13
[10]
뉴스
THE POPULATION OF ABKHAZIA STANDS AT 240,705
http://apsnypress.in[...]
2012-02-13
[11]
서적
シベリア・グルジア抑留記考
彩流社
2005-07-20
[12]
서적
The Abkhazians: a handbook
Palgrave Macmillan
[13]
웹사이트
ЕДИНАЯ ВЕРА АБХАЗСКИХ "ХРИСТИАН" И "МУСУЛЬМАН". Особенности религиозного сознания в современной Абхазии
http://www.portal-cr[...]
2011-05-30
[14]
웹사이트
Georgia: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Report 2005
http://www.state.gov[...]
미국 국무부
2007-05-24
[15]
웹사이트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Abkhazia, art. 12
http://dp.abhazia.co[...]
[16]
웹사이트
プーチンがメドヴェージェフを切る? ロシア指導部に「亀裂」
https://wedge.ismedi[...]
2012-09-15
[17]
뉴스
南オセチアにロシア編入論 ウクライナ侵攻さなか―プーチン政権「戦果」模索
https://web.archive.[...]
2022-05-31
[18]
웹사이트
Президент России Указ «О признании Республики Абхазия»
http://www.kremlin.r[...]
러시아 정부 공식 사이트
2008-08-27
[19]
웹사이트
Russia recognises Georgian rebels
http://news.bbc.co.u[...]
BBC 뉴스
2008-08-27
[20]
뉴스
ロシア大統領がアブハジア訪問 紛争9年、実効支配誇示
https://www.nikkei.c[...]
Nikkei
[21]
웹사이트
Островное государство Вануату признало независимость Абхазии - МИД
http://rian.ru/world[...]
РИА Новость
2011-09-26
[22]
웹사이트
Vanuatu scraps recognition of Georgia breakaway region
http://www.globalpos[...]
2013-05-21
[23]
웹사이트
Georgia Says Vanuatu Has Withdrawn Recognition of Abkhazia
http://www.bloomberg[...]
Bloomberg
2013-07-12
[24]
웹사이트
Tuvalu 'Recognizes Abkhazia, South Ossetia'
http://www.rferl.org[...]
Radio Free Europe
2011-09-26
[25]
웹사이트
Statement of the Georgian Foreign Ministry regarding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and consular relations
http://www.mfa.gov.g[...]
2014-03-31
[26]
보고서
Abkhazia Today
http://www.crisisgro[...]
국제 위기 그룹
2007-05-30
[27]
웹사이트
アブハジア共和国がマイニング施設を一時閉鎖、冬の電力供給に備えるため
https://crypto-times[...]
[28]
웹사이트
マイニング
https://bitflyer.com[...]
[29]
설명
[30]
설명
[31]
설명
[32]
설명
[33]
설명
[34]
설명
[35]
뉴스
러시아, 압하지야에서 군병력 증강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36]
뉴스
그루지야군, 압하지야에서 완전히 철수
https://news.naver.c[...]
[37]
뉴스
압하지야軍, 그루지야 13개 마을 점령
https://news.naver.c[...]
[38]
뉴스
러' 상원, 남오세티야 독립 인정 지지(1보)
https://news.naver.c[...]
[39]
뉴스
압하지야 대통령, 러시아군 영구주둔 시사
https://news.naver.c[...]
[40]
웹사이트
South Ossetia opens embassy in Abkhazia
http://www.tiraspolt[...]
2008-04-22
[41]
웹인용
아브하지야 국방부 관리 저격, 그루지야 소행?
http://www.dabai.com[...]
2008-11-12
[42]
뉴스
압하지야, 러' 자본 유입으로 변화 물결
https://news.naver.c[...]
[43]
뉴스
러시아, 압하지야에 해군기지 건설 연내 착수
https://news.naver.c[...]
[44]
뉴스
러시아, 압하지야 기지 49년간 임차
https://news.naver.c[...]
[45]
웹인용
Constitution of Abkhazia
https://en.wikisourc[...]
2017-07-25
[46]
웹인용
Nation Profile; Abkhazia
http://www.nationali[...]
Ceimen: Centre Internationale Escarré per a les Minories Étniques i les Nacions
2017-07-25
[47]
뉴스인용
In Abkhazia, worried about the language law
https://www.balcanic[...]
Osservatorio Balcani e Caucaso Transeuropa
2017-07-25
[48]
일반
[49]
일반
[50]
일반
[51]
일반
[52]
일반
[53]
일반
[54]
일반
[55]
일반
[56]
일반
[57]
일반
[58]
일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