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케이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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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리케이드 사건은 1991년 1월, 소련의 무력 진압 위협에 맞서 라트비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주요 시설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저항한 사건이다. 소련의 개혁 정책과 라트비아의 독립 운동이 배경이 되었으며, 리투아니아의 1월 사건 이후 라트비아 정부를 지지하고 전략적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바리케이드를 건설했다. 소련군은 OMON 부대를 투입하여 진압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20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라트비아의 승리로 평가되며, 이후 독립 투표를 통해 독립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바리케이드 사건은 기념일 제정, 기념물 건립, 박물관 운영 등을 통해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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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케이드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사건 개요 | |
| 명칭 | 바리케이드 |
| 부분 | 1989년 혁명, 노래 혁명, 소비에트 연방 해체 |
| 시기 | 1991년 1월 13일 ~ 1991년 1월 27일 |
| 장소 | 라트비아, 주로 리가 |
| 교전 세력 | |
| 교전 세력 1 | 라트비아 라트비아 인민 전선 |
| 교전 세력 2 | 소비에트 연방 라트비아 인터프론트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아나톨리스 고르부노우스}} 이바르스 고드마니스 다이니 스 이반스 롬우알드스 라주크스 |
| 지휘관 2 |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푸고 블라디미르 안튜페예프 드미트리 야조프 빅토르 알크스니스 알프레드 루빅스 |
| 결과 | |
| 결과 | 라트비아의 승리 |
| 피해 규모 | |
| 피해 규모 1 | 경찰관 2명 사망 민간인 4명 사망 경찰관 4명 부상 민간인 10명 부상 |
| 피해 규모 2 | OMON 군인 최소 1명 사망 |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라트비아는 두 차례에 걸쳐 소련에 점령되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도입하여 소련 경제를 개혁하고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 내부 문제와 범죄가 드러나면서 대중의 불만을 야기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억압되었던 민족 감정이 소련 공화국에서 분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트비아에서는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990년 3월 18일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라트비아 인민 전선, 라트비아 녹색당, 라트비아 국민 독립 운동 등 독립 지지 세력이 승리했고,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선언하며 소련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소련 연방 및 공화국 헌법에 위배된다고 여겨 인정하지 않았고, 라트비아와 소련, 그리고 독립 운동 세력과 라트비아 노동자 국제 전선(Interfront) 및 라트비아 공산당 등 친소련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2. 1. 소련의 점령과 라트비아의 저항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라트비아는 두 차례에 걸쳐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1940년~1941년, 1944년 7월 1940/41년과 1944년 7월).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실패해가는 소련 경제를 구제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도입했다. 이 개혁은 또한 소련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제한을 완화했다. 이는 이전에 정부에 의해 비밀로 유지되고 부인되었던 소련 내부의 문제와 소련 정권의 범죄가 드러나면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고, 이는 대중의 불만을 야기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1986년 4월에 시작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글라스노스트가 소련 중앙 당국에 미친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민족 감정이 소련 공화국에서 분출된 것이다.소련 정권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독립 지지 세력인 라트비아 인민 전선, 라트비아 녹색당 및 라트비아 국민 독립 운동은 1990년 3월 18일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승리하여 라트비아 인민 전선 파벌을 구성했으며, 친소련 평등권 파벌은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1990년 5월 4일, 최고 소비에트는 이후 라트비아 공화국 최고 회의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선언하고 소련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시작했다. 소련은 이러한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소련 연방 및 공화국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결과적으로, 라트비아와 소련 간의 관계, 그리고 라트비아 노동자 국제 전선(Interfront) 및 라트비아 공산당을 비롯한 독립 운동과 친소련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2. 2.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독립 운동의 촉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5년, 소련 경제를 구제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도입했다. 이 개혁은 소련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제한을 완화했다. 이는 이전에 정부에 의해 비밀로 유지되고 부인되었던 소련 내부의 문제와 소련 정권의 범죄가 드러나면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고, 이는 대중의 불만을 야기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1986년 4월에 시작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글라스노스트가 소련 중앙 당국에 미친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민족 감정이 소련 공화국에서 분출된 것이다.[1]소련 정권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독립 지지 세력인 라트비아 인민 전선, 라트비아 녹색당 및 라트비아 국민 독립 운동은 1990년 3월 18일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승리하여 라트비아 인민 전선 파벌을 구성했으며, 친소련 평등권 파벌은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1]
1990년 5월 4일, 최고 소비에트는 이후 라트비아 공화국 최고 회의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선언하고 소련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시작했다. 소련은 이러한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소련 연방 및 공화국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결과적으로, 라트비아와 소련 간의 관계, 그리고 라트비아 노동자 국제 전선(Interfront) 및 라트비아 공산당을 비롯한 독립 운동과 친소련 세력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1]
2. 3. 1990년 라트비아 최고 소비에트 선거
1990년 3월 18일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라트비아 인민 전선, 라트비아 녹색당, 라트비아 국민 독립 운동 등 독립 지지 세력이 승리하여 라트비아 인민 전선 파벌을 구성했으며, 친소련 평등권 파벌은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1990년 5월 4일, 최고 소비에트는 라트비아 공화국 최고 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라트비아 독립 회복을 선언하며 소련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시작했다. 소련은 이를 소련 연방 및 공화국 헌법에 위배된다고 여겨 인정하지 않았다.
3. 소련의 군사적 위협과 대응
1990년 12월, 소련 친위 세력은 라트비아에서 폭력을 유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소련 원수 드미트리 야조프는 군대가 처음 4건의 폭탄 테러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소련 정부와 친소련 단체들은 비상사태 선포를 위협하며,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라트비아에서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하고 군사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소련군 OMON 부대와 KGB 병력이 라트비아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유르말라에서 대규모 KGB 전투 부대가 발각되기도 했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은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사임했다.[3]
이에 라트비아 인민 전선은 1990년 12월 11일, 'X시'(대통령의 무제한 권한이 발동되는 시점)에 대비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독립 지지, 국제 사회 관심 유도, 자원 방위 부대 합류,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설득 등을 포함했다. 또한, 소련 통제 확립 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여 소련 당국 명령 거부, 선거 및 국민투표 거부, 파업 등을 통해 소련 경제를 약화시키고, 독립 운동을 지속하며, 소련군 범죄를 기록하는 내용을 담았다.[4][5]
3. 1. 소련의 군사적 개입 위협
소련 원수 드미트리 야조프가 처음 4건의 폭탄 테러에 군대가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1990년 12월의 일련의 폭탄 테러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 친위 세력은 라트비아에서 폭력을 유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다른 폭탄 테러의 범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당시 친공산주의 언론은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를 비난했다.[3]소련 정부와 다른 친소련 단체들은 비상사태가 선포될 것이라고 위협했는데, 이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라트비아에서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발트해 연안 공화국"에 질서를 "실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소련군은 OMON 부대와 KGB 병력이 라트비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1990년 12월 23일, 대규모 KGB 전투 부대가 유르말라에서 발각되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나 독재 정권이 수립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련 외무부 장관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1990년 12월 20일에 사임하면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확인하는 듯했다.[3]
1990년 12월 11일, 인민전선은 X시(대통령의 무제한 권한이 발동되는 시점)라고 명명된 상황에서 공포와 히스테리가 필요 없으며, 모든 사람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인민전선은 X시 이전과, 소련군이 성공할 경우 X시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제안도 했다. 이 계획은 독립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고, 자원 방위 부대에 합류하며, 라트비아의 러시아인들에게 인민전선의 사상이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설명하는 내용, 특히 군 장교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경제를 보호하고 정보 유통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다.[4]
소련의 통제가 성공적으로 확립될 경우, 이 계획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요구했는데, 이는 소련 당국의 모든 명령과 요청을 무시하고, 모든 소련 선거 및 국민투표를 거부하며, 파업을 하고 터무니없이 복잡한 소련식 제조 지침을 문자 그대로 따라 생산을 마비시킴으로써 소련 경제를 약화시키고, 독립 운동이 불법적으로 활동을 계속하도록 돕고, 그 지지자들이 소련 기관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을 포함했다. 마지막으로, 비상사태 동안 소련군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신중하게 기록했다.[5]
3. 2. 라트비아의 대응과 X시 계획
1990년 12월 11일, 라트비아 인민 전선은 X시(대통령의 무제한 권한이 발동되는 시점)에 공포와 히스테리가 필요 없으며, 모든 사람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인민전선은 X시 이전과, 소련군이 성공할 경우 X시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제안을 담은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4]- 독립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끈다.
- 자원 방위 부대에 합류한다.
- 라트비아의 러시아인들, 특히 군 장교들에게 인민전선의 사상이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점을 설명한다.
- 경제를 보호하고 정보 유통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소련의 통제가 성공적으로 확립될 경우,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한다. 시민 불복종 운동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5]
- 소련 당국의 모든 명령과 요청을 무시한다.
- 모든 소련 선거 및 국민투표를 거부한다.
- 파업을 하고 터무니없이 복잡한 소련식 제조 지침을 문자 그대로 따라 생산을 마비시킴으로써 소련 경제를 약화시킨다.
- 독립 운동이 불법적으로 활동을 계속하도록 돕고, 그 지지자들이 소련 기관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 비상사태 동안 소련군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신중하게 기록한다.
4. 바리케이드 구축과 전개
1991년 1월 초, 소련군과 OMON은 라트비아에서 군사적 압력을 강화했다. 1월 2일, OMON은 라트비아의 국립 인쇄소인 Preses Nams|프레스 하우스lv를 점거하고, 이 사건을 취재하던 형사들을 공격했다.[6] 최고회의는 이 사건을 라트비아 공산당의 불법 행위로 규정했다.[7] 인민전선은 공산당 건물 앞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대응했다.[6]
1월 4일, OMON은 Vecmīlgrāvis에 있는 전화 교환소를 점거했고, 이후 내무부도 점거했다.[9] 보리스 카를로비치 푸고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보고받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소련군은 계속해서 움직였다.[9] 1월 7일, 드미트리 야조프는 특공대 부대를 라트비아를 포함한 여러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으로 파견했다.
1월 11일, 발트 군관구 군사위원회가 열려 소련 장교와 사관생도에게 기관총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리가 거리에서는 소련군의 공개적인 이동과 장갑차의 이동이 목격되었다.[6]
4. 1. 바리케이드 구축의 시작
1991년 1월 11일, 소련군은 라트비아의 이웃 국가인 리투아니아를 공격했다.[6]1월 12일, 인민전선은 1월 13일에 라트비아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하고 전략적 목표를 방어하기 위한 전국적인 시위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는 소련 정부에 발트 3국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라트비아 정부 지도자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나 무력 사용은 없을 것이라는 확약을 받았다. 그날 밤, 인민 전선은 리투아니아의 소련군이 빌뉴스 TV 타워를 공격하여 13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전략적 목표를 방어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모여달라고 요청했다.[6] 노래 혁명의 이전 해에 발트 3국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 연대했기 때문에, 그들 중 한 곳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었다.[10]
1월 13일 오전 4시 45분, 라트비아 라디오는 인민 전선의 발표를 방송하여 사람들에게 리가 대성당 광장에 모여달라고 요청했다. 정오 12시에는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최고 회의가 열렸다. 오후 2시에는 인민 전선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약 70만 명이 모였으며, 이 시점에서 소련 헬리콥터가 군중 위에 경고 전단을 뿌렸다. 인민 전선은 사람들에게 바리케이드를 건설할 것을 요청했다. 최고 회의는 시위 이후 다시 회의를 열었고, 국회의원들에게 밤에 최고 회의에 머물 것을 요청했다. 저녁 회의에서는 소련 군인들에게 민간인에 대한 무력 사용과 관련된 명령을 따르지 말 것을 요청했다.[11] 밤이 되자, 라트비아 정부의 명령에 따라 농업 및 건설 기계와 통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이 리가에 도착하여 바리케이드를 건설했다. 트럭, 건설 장비 및 농업 기계가 거리에 진입하여 도로를 막았다.
사람들은 이미 낮 동안 모여들고 있었다. 일부는 인민 전선이 아침에 발표한 대로 리가 대성당 광장에 모였고, 다른 사람들은 정오 시위 이후에 모였다. 동료와 학생, 고용주와 모교에 의해 조직된 사람들, 여성, 노인,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가족들이었다. 그 무렵 대부분은 이미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전국에서 도착했다. 바리케이드는 주로 비폭력 저항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으며, 사람들은 인간 방패를 형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금속 조각으로 만든 방패 및 민방위 물품 등 가능한 모든 것을 사용하여 무장했다. 일부는 화염병도 준비했지만, 화재 안전을 위해 압수되었다. 라트비아 민병대는 기관단총과 권총으로 무장했다.
라트비아 정부는 나중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OMON이 내무부를 점거하고 상당수의 무기를 제거한 후에 증명되었듯이, 라트비아 정부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내무부에는 200개의 총기가 있었다고 주장되었다).
트럭에는 건설 및 해체 폐기물, 통나무 및 기타 화물이 실렸다. 대형 콘크리트 블록, 벽, 철조망 및 기타 재료도 사용되었다. 건물 공사는 1월 13일 저녁에 시작되어 약 3시간이 걸렸다. 전략적 관심의 주요 대상은 최고 회의 건물(구시가지, 리가 성 야고보 성당 근처), 각료 회의 ( 그리스도 탄생 대성당 근처 시내), 라트비아 텔레비전(자쿠살라), 라트비아 라디오(구시가지, 리가 대성당 근처), 국제 전화 교환 사무실 (시내), 울브로카 라디오 및 다리였다. 리예파야와 쿨디가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도 바리케이드가 건설되었다.
4. 2. 바리케이드 방어와 비폭력 저항
라트비아 국민들은 바리케이드를 방어하면서 비폭력 저항의 원칙을 지켰다. 1991년 1월 13일, 소련군의 위협에 맞서 리가 대성당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인간 방패를 형성할 준비를 하였다.[11] 이들은 노래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대 의식을 갖고, 외부의 공격에 함께 맞섰다.[10]시민들은 금속 조각으로 만든 방패와 민방위 물품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보호했다. 일부는 화염병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안전을 위해 압수되었다.[11] 라트비아 민병대는 기관단총과 권총으로 무장하여 시민들과 협력했다.[11]
바리케이드는 건설 및 해체 폐기물, 통나무, 콘크리트 블록, 철조망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11] 구시가지의 최고 회의 건물, 각료 회의, 라트비아 텔레비전, 라트비아 라디오 등 주요 전략 거점을 중심으로 방어선이 구축되었다.[11]
바리케이드 방어는 정보 전달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라트비아 라디오와 라트비아 텔레비전은 밤낮으로 방송을 계속했고, 국제 전화 교환 사무실은 외국과의 통신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자원봉사자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고, 털 양말과 장갑을 나누어 주며 서로를 도왔다. 학교는 잠자리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고, 구급대가 설치되어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9]
바리케이드 지휘는 인민 전선이 주도했으며, 지역별로 조직되어 효율성을 높였다. 친소련 세력의 파괴 공작 시도와 공격 계획에 대한 소문이 있었지만, 시민들은 비폭력 저항의 원칙을 굳건히 지켰다.[9]
4. 3. OMON의 공격과 충돌
1991년 1월 14일, 발트 군관구의 소련군 사령관 표도르 쿠즈민은 라트비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아나톨리야스 고르부노프스에게 채택된 법률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15] 같은 날 OMON은 브라사와 베츠밀그라비스 다리를 공격하여 차량 17대가 불탔다. 1월 15일 밤, OMON은 민스크 민병대 아카데미의 리가 지부를 두 번 공격했다. 이날 10,000명이 인터프론트 회의에 모여 전 라트비아 공공 구조 위원회가 라트비아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선언했으며, 이 발표는 소련 언론을 통해 방송되었다.[9]1월 16일, 최고회의는 의결 정족수를 확보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최고회의 건물에서 밤을 새도록 조직했다. 오후 4시 45분, 베츠밀그라비스 다리에 대한 또 다른 공격에서 로베르츠 무르니에크스 라트비아 교통부 운전사가 자동 소총에 머리 뒤쪽을 맞아 리가 병원 1번 중환자실에서 오후 6시 50분에 부상으로 사망하여 바리케이드의 첫 번째 사망자가 되었다.[12] 다른 두 명도 부상을 입었다. 오후 6시 30분, OMON이 브라사 다리를 공격하여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8시 45분에는 또 다른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9]
1월 17일, 바리케이드에서 경보가 울렸고, 라트비아 공산당의 파업 위원회는 파시즘이 라트비아에서 부활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소련 최고 소비에트 대표단이 리가를 방문했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대표단은 라트비아가 소련 대통령의 무제한 권한 확립을 지지한다고 보고했다.
1월 18일, 최고 소비에트는 국가 자위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인민 전선은 바리케이드를 보호하라는 요청을 철회했다.

1월 19일, 로베르츠 무르니에크스의 장례식은 시위로 바뀌었다. 그날 밤 OMON은 자원 경비대원 5명을 체포하고 구타했다.[13]
1월 20일, 약 100,000명이 발트 국가를 지지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모여 빌뉴스 사건과 관련하여 소련 관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날 저녁, OMON과 기타 신원 미상의 전투 집단이 라트비아 내무부를 공격하여, 두 명의 경찰(블라디미르 고마노비치와 세르게이스 코노넨코), 카메라 기사 겸 감독 안드리스 슬라피뉴, 17세의 학생 에디스 리에크스티뉴가 사망했다.[14] 기브도 즈바이지네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2월 5일에 부상으로 사망했다.[15] 바우츠카 경찰 4명, 바리케이드 참가자 5명, 헝가리인 야노스 토도르, 핀란드 언론인 겸 TV 기사 한누 바이스앤넨, TV 프로그램 Vzglyad의 러시아 카메라 기사 블라디미르 브레즈네프가 부상을 입었다.[14] 공격자도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후 OMON은 라트비아 공산당 건물로 이동했다.
1월 21일, 최고회의는 청년들에게 내무부 시스템에서 일자리를 신청하도록 요청했다. 고르부노프스는 라트비아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떠났다. 1월 22일, 푸고는 내무부 공격을 명령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15] 바리케이드에서 또 다른 사람이 사망했다.
1월 24일, 각료 회의는 바리케이드를 지키기 위해 공공 안전 부서를 설립했다.
1월 25일, 1월 20일 희생자들의 장례식 이후, 바리케이드 수비대가 떠났다.[15]
5. 결과 및 영향
바리케이드 사건 이후, 여러 OMON 장교들이 재판을 받았지만, 많은 이들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라트비아 공산당 등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여러 조직은 의회에 의해 금지되었고, 일부 지도자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1999년 11월 9일, 리가 지방 법원은 리가 OMON의 전직 장교 10명에게 공격에 대한 관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20]
빅토르 알크스니스는 다수의 발트해 OMON 병력을 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으로 이동시켜 분리주의 정권을 지원했다. 리가 OMON 부대 사령관 블라디미르 안튜페예프는 그곳에서 블라디미르 셰브스토프라는 가명으로 보안 장관 역할을 맡았으며, 2014년에는 러시아가 지원하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부총리"로 나타났다.[21]
5. 1. 라트비아의 승리와 독립 회복
바리케이드는 리가 거리에 실제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최고 평의회에 있던 바리케이드는 1992년 가을에야 철거되었다.[9] 1월 사건에 대한 부분적인 대응과 라트비아가 보이콧할 예정이었던 소련 연방 보존 국민투표가 임박함에 따라, 3월에 독립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었고, 참가자의 3/4이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라트비아는 1991년 후반에 친소련 세력의 추가 공격에 직면했다. 5월 23일, OMON이 5개의 라트비아 국경 초소를 공격했고,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 동안 바리케이드가 지키던 여러 전략적 목표가 점령되었으며, 시민 1명(운전사 라이몬즈 살미니슈)이 소련군에 의해 사망했다.
쿠데타 시도로 인해 원래 소련으로부터 점진적인 분리를 의도했던 라트비아 정부는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고, 이는 9월 6일 소련에 의해 인정되었다. 소련은 1991년 12월에 해체되었다.

5. 2. 진상 조사와 논란
1991년 1월 25일, 이 사건은 라트비아의 승리로 종결된 것으로 여겨진다. OMON이 라트비아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20명이 사망하였다. 2005년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고, 사상자 수를 기준으로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쪽이 패배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라트비아 측에서는 총 42구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러시아 측에서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16]리가 OMON의 주요 공격 외에도, 내무부 공격 당시 알파 그룹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전투 부대가 목격되었다. 영화 감독 유리스 포드니에크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OMON 장교는 원래 리가가 아닌 빌뉴스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공격 일주일 전 갑자기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또한 당시 리가 OMON이 잘 준비되어 있어 소련 군대의 개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고 주장했다.[17]
OMON은 단독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Preses Nams 점령 후, OMON은 보리스 푸고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소련 정부 고위 관리들이 공격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은 모두 관여를 부인했고, 최고 회의는 라트비아 공산당을 비난했다. 사건 전 12월, 인민전선은 X 시에 대한 지침에서 소련 최고 소비에트 국회의원들의 "소유즈" 그룹에 의한 쿠데타가 계획되었다고 주장했다.[4]
드미트리 유시코프는 소련 군대가 최초의 폭탄 테러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다른 폭탄 테러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주장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언론은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을 비난했다.[6] 이러한 사건과 후속 사건을 바탕으로 여러 OMON 장교들이 재판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라트비아 공산당, 인터프론트, 전 라트비아 공공 구조 위원회 및 몇몇 관련 조직은 쿠데타 시도로 인해 의회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CPL과 ALPRC의 두 지도자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18][19] 1999년 11월 9일, 리가 지방 법원은 리가 OMON의 전직 장교 10명에게 공격에 대한 관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20]
빅토르 알크스니스는 다수의 발트해 OMON 병력을 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으로 이동시켜 분리주의 정권을 지원했으며, 그곳에서 리가 OMON 부대 사령관 블라디미르 안튜페예프는 블라디미르 셰브스토프라는 가명으로 보안 장관 역할을 맡아 2012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안튜페예프는 2014년 7월 러시아가 지원하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부총리"로 우크라이나에 나타났다.[21]
6. 비폭력 저항과 그 의의
바리케이드 사건은 비폭력 저항 운동의 중요한 사례이다. 참여자들은 소련의 잔혹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무기도 휴대하지 않도록 공개적으로 권장되었다.[2]
이 사건은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비폭력으로 맞서는 시민들의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라트비아 국민들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6. 1. 비폭력 저항의 원칙과 실천
라트비아 인민전선은 1990년 12월 언론에 "X시 지침"이라는 계획을 게재하였다. 이 지침은 소련의 침략 행위와 적대 행위에 대비하여 일반 대중이 취해야 할 행동을 제시했다. 모든 시위는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크렘린 선전에 대응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해야 한다고 명시했다.[2]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트 3국에서 무력으로 권력을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1월 소련군과 내무 구조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지방 정부와 전략적 시설을 공격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살해했다.[22] 바리케이드 사건은 참여자들이 시위대에 대한 소련의 잔혹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무기도 휴대하지 않도록 공개적으로 권장되었기에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6. 2. 시민 불복종과 연대
바리케이드 사건은 참여자들이 시위대에 대한 소련의 잔혹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무기도 휴대하지 않도록 공개적으로 권장되었기에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라트비아 인민전선은 1990년 12월 언론에 "X시 지침"이라는 계획을 게재했다. 이 지침은 소련의 침략 행위와 적대 행위에 대비하여 일반 대중이 취해야 할 행동을 제시했다. 모든 시위는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크렘린 선전에 대응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해야 한다고 명시했다.[2]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트 3국에서 무력으로 권력을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1월 소련군과 내무 구조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지방 정부와 전략적 시설을 공격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살해했다.[22]
7. 유산과 기념

바리케이드 사건은 라트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희생자들을 기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용기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5년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지원 기금이 조성되어 희생자 가족을 지원하고 참가자 정보를 수집했으며, 2001년 '1991년 바리케이드 박물관'을 설립하여 역사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23][24]
1월 20일은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념일이며, 11월 18일, 5월 4일, 8월 21일에도 이들을 기린다. 바리케이드 참가자들은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념 메달을 받으며, 이 상은 국가에서 바리케이드 기간 동안 용기와 헌신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수여한다.[25][26]
7. 1. 기념일과 기념 행사
1995년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지원 기금이 조성되어 희생자 가족들을 지원하고 참가자 정보를 수집했다.[23] 2001년 이 기금은 '1991년 바리케이드 박물관'을 설립, 수집된 역사 자료를 공개했다.[24]1월 20일은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념일이며, 11월 18일, 5월 4일, 8월 21일에도 이들을 기린다. 바리케이드 참가자들은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념 메달을 받는다. 이 상은 1996년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금에 의해 제정되었고, 1999년부터는 국가가 바리케이드 기간 동안 용기와 헌신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수여한다.[25][26] 바리케이드는 라트비아의 여러 기념비로도 기념된다.
7. 2. 기념물과 박물관
1995년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지원 기금이 조성되었다. 이 기금은 희생자 가족들을 지원하고 참가자 관련 정보를 수집한다.[23] 2001년 이 기금은 '1991년 바리케이드 박물관'을 설립하여 수집한 역사 자료를 공개했다.[24]1월 20일은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념일이며, 11월 18일, 5월 4일, 8월 21일에도 이들을 기린다. 바리케이드 참가자들은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념 메달을 받는다. 이 상은 1996년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기금에 의해 제정되었다. 1999년부터는 바리케이드 기간 동안 용기와 헌신을 보여준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수여한다.[25][26] 바리케이드는 라트비아의 수많은 기념비로도 기념된다.
7. 3. 바리케이드 참가자 지원 기금
1995년 '1991년 바리케이드 참가자' 지원 기금이 조성되었다. 이 기금은 희생자 가족들을 지원하고 참가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23] 2001년 이 기금은 '1991년 바리케이드 박물관'을 설립하여 수집한 역사 자료를 대중에게 공개했다.[2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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