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 왕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사 왕조는 1523년 구스타브 1세에 의해 시작되어 1654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퇴위로 단절된 스웨덴의 왕조이다. 바사 왕조는 스웨덴의 독립을 이끌었으며, 16세기에는 리보니아 전쟁에 참여하여 발트 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3대 요한 3세의 아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의 왕위를 겸임하면서 가톨릭 정책을 추진했으나, 스웨덴 내에서는 반발을 샀다. 이후 스웨덴은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북독일에 영토를 확장하고 발트 해 패권을 쟁취했으나, 크리스티나 여왕의 퇴위로 바사 왕조는 막을 내리고 팔츠 왕조가 들어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사가 - 칼 샌드버그
칼 샌드버그는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미국의 시인, 작가, 언론인이자 민속 음악가로,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시, 퓰리처상을 수상한 『옥수수 껍질』, 에이브러햄 링컨 전기, 그리고 미국 민속 음악을 소개한 『미국의 노래자루』 등을 통해 미국 문학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바사가 - 칼 9세
칼 9세는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셋째 아들로, 이복형 에리크 14세에 대항하여 요한 3세를 옹립하고 루터교를 옹호하며 스웨덴을 통치하다가 1599년 왕위에 올라 폴란드,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르고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며 바사 왕조의 통치권을 확립했다. - 유럽의 왕가 - 스포르차가
스포르차 가문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밀라노 공국을 지배한 이탈리아 귀족 가문으로, 용병대장 무치오 스포르차를 시조로 하여 르네상스 문화를 후원하고 유럽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으나 권력 투쟁과 이탈리아 전쟁으로 몰락했다. - 유럽의 왕가 - 오스만 왕조
오스만 왕조는 1299년 오스만 1세가 건국한 술탄 통치 튀르크계 왕조로, 600년 이상 존속하며 넓은 영토를 지배했으나 1922년 멸망 후 오스만 가문은 튀르키예에서 추방되었고 장자 상속 제도를 유지하며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바사 왕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유형 | 왕가 |
국가 | 스웨덴 [[File:Chorągiew_królewska_króla_Zygmunta_III_Wazy.svg|23px|link=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창건자 | 구스타브 1세 |
마지막 통치자 |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 (1632–1654)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1648–1668) |
해산 | (부계 계통에서 절멸) |
퇴위 | 스웨덴: (퇴위)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퇴위) |
방계 가문 | 바사보리 가문 (사생아) |
통치 | |
작위 | 스웨덴 국왕 (1523–1654) 폴란드 국왕 (1587–1668) 리투아니아 대공 러시아 차르 (1610–1613, 미즉위) (1613-1634, 명목상) 핀란드 대공 |
종교 | |
종교 | 루터교 (공식) |
2. 스웨덴 바사 왕조
- 구스타브 1세 (1523년 ~ 1560년)
- 에리크 14세 (1560년 ~ 1568년)
- 요한 3세 (1568년 ~ 1592년)
- 지그문트 3세 바사 (스웨덴 국왕: 1592년 ~ 1599년, 폴란드 국왕: 1587년 ~ 1632년)
- 칼 9세 (스웨덴 섭정: 1599년~1604년, 스웨덴 국왕: 1604년 ~ 1611년)
- 구스타브 2세 아돌프 (1611년 ~ 1632년)
- 크리스티나 (1632년 ~ 1654년)
1558년에 시작된 리보니아 전쟁에서 덴마크-노르웨이와 독일 기사단의 리보니아 검 형제 기사단과 손을 잡고 모스크바 대공국(러시아 차르국)의 발트해 진출을 막았다. 이때 바사 가문과 야기에우오 가문과의 혼인으로 바사 가문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조로 받아들여졌지만, 양국의 종교적 불일치로 인해 바사 가문은 17세기 중반까지 내분과 항쟁을 반복하게 되었다.
제3대 요한 3세의 아들 지그문트는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에우카가 폴란드 공주였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폴란드로 보내져 예수회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며, 야기에우오 왕조의 단절 후 국왕 자유 선거를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원수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로 추대되어 지그문트 3세 (폴란드 국왕으로서의 이름)로 즉위했다. 요한 3세가 죽은 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으로 귀국하여 폴란드 왕을 겸임한 채 지기스문드로서 스웨덴 왕위에 즉위했다. 지기스문트가 부재 중일 때는 숙부인 카를이 섭정으로서 스웨덴을 통치했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개신교루터파가 퍼져 있었지만, 폴란드는 프로테스탄트나 정교회 신자도 상당수 있었지만, 정치 무대에서는 상대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우위에 있는 국가였다.
교회의 정화와 쇄신을 목표로 가톨릭 개혁 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는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지그문트 3세(지기스문드)는 스웨덴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 했다. (1595년에 공화국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숙부 카를 등은 지그문트 3세에 대한 반감을 키웠고, 그가 폴란드로 돌아가자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스웨덴 제후들을 규합하여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지기스문드는 가톨릭 계열 스웨덴 제후들과 함께 이러한 동기의 원정에 미온적인 폴란드 의회(세임)군을 이끌고 반란 토벌을 위해 다시 왔지만 패배하고, 반란자 카를(칼 9세)이 사실상의 스웨덴 왕이 되었다. (1604년에 정식 즉위). 1600년에는 가톨릭계 스웨덴 제후들을 숙청하고 루터파의 국교를 확립하면서 지그문트 3세와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섭정 카를의 행위는 폴란드-바사 가문에게는 모반이었지만, 스웨덴 입장에선 1593년의 웁살라 종교 회의의 결의 위반을 근거로 스웨덴의 종교 개혁의 일부였으며, 루터파 국가로서의 독립을 원하는 스웨덴인들에게는 지그문트 3세의 정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스웨덴인 자신에 의한 사신분제 의회 (귀족, 성직자, 시민, 농민)의 권위도 이 시대에 확립하게 된다. 이는 스웨덴의 왕권을 지탱하는 것이 되었다.
이 갈등으로 인해 스웨덴과 폴란드의 바사 가문 사이의 반목이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스웨덴군이 폴란드령이었던 리보니아 방면으로 침공하여 리가의 도시를 함락시켰다. (스웨덴-폴란드 전쟁). 1626년에는 동프로이센을 제압했지만, 한편 폴란드는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 장군을 등용하여 전쟁 후반에는 폴란드가 반격하여 전쟁 자체에서는 우위를 되찾았지만, 프랑스의 개입으로 스웨덴이 간신히 승리했다. 폴란드 정복에는 좌절했지만, 스웨덴은 사실상 동유럽의 대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빼앗는 데 성공했고 (1660년에 정식 인정), 로서 실효 지배가 이루어졌다.
이 전쟁을 지도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북방의 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토를 할양한 데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발트해를 제패당함으로써, 폴란드-바사 가문은 명목상 스웨덴 왕을 자칭할 수 있어도, 실질적인 왕위 요구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30년 전쟁에도 개입하여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맹주로서, 가톨릭의 맹주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황제)과 싸우고 (고트 기원설의 이념 확산에 따라), 프랑스와 연계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자신은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프랑스의 직접적인 개입도 있어서 스웨덴군은 그 후에도 독일에서 싸움을 계속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웨덴은 북독일에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여 단숨에 북방의 대국이 되었고, 유럽에서의 강국 중 하나로 부상했다. (발트 제국). 더욱이 북유럽에서 숙적 관계였던 덴마크와도 30년 전쟁 후반에 토르스텐손 전쟁을 벌여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덴마크를 격파했다. 이 승리로 스웨덴은 북유럽에서의 패권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여왕은 개인적인 이유로 퇴위했고, 그 사촌인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 방계의 카를 구스타프(칼 10세)가 즉위했기 때문에 스웨덴의 바사 왕가는 단절되었고 팔츠 왕조로 바뀌었다. 팔츠-클레부르크 가문 출신의 카를 구스타프는 스웨덴-바사 가문의 외척이었으며, 구스타브 아돌프의 이복 누이의 아들이었다. 칼 10세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즉위 다음 해인 1655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시작하여, 그의 사망까지 전장 아래에 있었다. (북방 전쟁). 칼 10세는 연방에게 군사적 패배를 겪었지만, 발트해에서의 우위를 유지했고, 1660년에 폴란드-바사 가문의 스웨덴 왕위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하는 동시에, 자가를 스웨덴의 왕가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2. 1. 구스타브 1세 시대 (1523년 ~ 1560년)
구스타브 에릭손은 1496년에 세실리아 몬스도터와 에릭 요한손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아버지 에릭의 영지인 스톡홀름 북동쪽에 위치한 리브홀름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4세기 말부터 덴마크-노르웨이와 칼마르 동맹을 맺고 있던 스웨덴은 덴마크의 지배에 반발하여 독립을 시도했다. 구스타브와 그의 아버지 에릭은 젊은 스텐 스투레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에 맞선 그의 투쟁을 지지했다.1518년 브레크키르카 전투에서 스텐 스투레 군대가 승리한 후, 스텐 스투레와 크리스티안 국왕은 외스터하닝에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크리스티안은 나타나지 않고 인질들을 코펜하겐으로 데려갔는데, 이 중에 구스타브 에릭손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스타브 에릭손이 섭정으로 선출되면서 많은 스웨덴 귀족들이 크리스티안 왕에게 등을 돌렸다. 1522년, 뤼베크와의 협상 끝에 한자 동맹 도시가 덴마크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했고, 1523년 겨울, 연합군은 스카니아, 할란드, 블레킹에, 보후슬렌의 덴마크 및 노르웨이 지역을 공격했다. 이 겨울 동안 크리스티안 2세가 폐위되고 프레데리크 1세가 즉위했다. 1523년 6월, 스트렝네스에서 구스타브 에릭손을 스웨덴의 왕으로 선출하는 공식적인 의식이 거행되었다. 라우렌티우스 안드레아가 주도한 의식에서 구스타브는 왕의 선서를 했고, 스트렝네스 대성당에서 구스타브 에릭손은 스웨덴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1983년, 6월 6일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으로 선출된 것을 기념하여 그 날짜가 스웨덴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브 바사는 칼마르 동맹 이후 120년 동안 지속된 덴마크 왕권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스웨덴을 독립으로 이끌어 바사 왕조를 세웠다. 이후에도 북방 7년 전쟁 등 덴마크와의 전쟁이 이어졌지만, 덴마크가 스웨덴을 탈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 2. 에리크 14세 시대 (1560년 ~ 1568년)
에리크 14세는 1533년 12월 13일 트레 크로노르에서 태어나 1560년에 구스타브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두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를 잃었고, 1536년 그의 아버지 구스타브 바사는 스웨덴 귀족 여인인 마가레타 레이온후부드(1516–51)와 결혼했다. 에리크 14세는 왕위에 올랐지만,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14번째 스웨덴 왕은 아니었다. 그와 그의 동생 칼 9세 (1604–11)는 요하네스 마그누스의 부분적으로 허구적인 스웨덴 역사를 따라 재위 번호를 사용했다.국내 정치에서 에리크의 야망은 그의 이복형제이자 훗날 요한 3세를 포함한 스웨덴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핀란드 공작이었던 요한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공주와 결혼하여 폴란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요한은 리보니아(현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팽창 정책을 추진했고, 이로 인해 형제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1563년, 요한은 에리크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1568년 가을, 공작들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에리크는 폐위되었다. 그는 권력을 잡은 요한 공작에 의해 투옥되었다. 에리크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귀족에 대한 조치에 대한 비난을 대부분 받았던 에릭의 가장 신뢰하는 고문인 예란 페르손(Jöran Persson, 1530–68)은 요한 3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처형되었다.
2. 3. 요한 3세 시대 (1568년 ~ 1592년)
요한 3세는 에리크 14세의 동생으로, 1568년 에릭 14세를 폐위시키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요한 3세는 즉위 후 북방 7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덴마크 및 뤼베크와 평화 회담을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덴마크의 과도한 요구로 인해 로스킬데 조약 (1568년)을 거부했다. 2년간의 전투 끝에 슈테틴 조약 (1570년)을 체결하여 큰 양보 없이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후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하고 1583년 플루사 조약을 통해 나르바를 되찾았다.요한 3세의 외교 정책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들 지그문트 3세 바사는 1587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요한 3세는 폴란드 공주 카타지나 야기에우카와 결혼하여 가톨릭 교육을 받은 아들 지그문트를 폴란드 왕으로 세움으로써 폴란드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요한 3세는 에릭 14세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왕위에 대해 불안감을 느껴, 1571년 에릭의 경호원들에게 탈출 시도가 있을 시 그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1577년 에릭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1]
서적
Gustav Vasa – landsfader eller tyrann?
Prisma
2002
[2]
문서
Berättelser ur Sweriges Medeltid, Tredje Bandet
[3]
웹사이트
Gustav I Vasa ! King of Sweden, Reformer & Founder of Modern Sweden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10-24
[4]
문서
2002
[5]
서적
Biographiskt lexicon öfver namnkunnige svenska män: Tjugonde bandet
Wahlström & Låstbom. På P.M. Lindhs förlag
1852
[6]
문서
1952
[7]
문서
1981
[8]
웹사이트
Avertissement de redirection
http://www.google.fr[...]
2023-04-13
[9]
서적
Armorial general
https://books.google[...]
Genealogical Publishing Co.
2023-06-13
[10]
웹사이트
Image
http://www.nordicpho[...]
2014-05-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