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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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칼마르 동맹 해체와 연합의 기원
- 3. 발트해에서의 덴마크-노르웨이의 야망
- 4. 북방 7년 전쟁 (1563년 ~ 1570년)
- 5. 칼마르 전쟁 (1611년 ~ 1613년)
- 6. 30년 전쟁 (1618년 ~ 1648년)과 덴마크-노르웨이
- 7. 토르스텐손 전쟁 (1643년 ~ 1645년)
- 8. 제2차 북방 전쟁 (1655년 ~ 1660년)
- 9. 절대주의 도입과 중앙집권화
- 10. 스코네 전쟁 (1675년 ~ 1679년)
- 11. 식민지 확장
- 12. 사회와 문화
- 13. 나폴레옹 전쟁과 연합의 해체
- 14.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에 대한 노르웨이 민족주의 관점
- 참조
1. 개요
덴마크-노르웨이는 138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섭정이었던 마르그레테 1세가 양국을 통치하면서 시작되어, 1397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칼마르 동맹을 맺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스웨덴은 1521년 동맹에서 탈퇴했고, 노르웨이는 1537년 덴마크에 병합되어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발트해를 장악하고 북방 7년 전쟁, 칼마르 전쟁을 겪었으며, 30년 전쟁에 개입했으나 토르스텐손 전쟁과 제2차 북방 전쟁에서 패배하며 영토를 잃었다. 1660년 절대주의가 도입되어 중앙집권화되었고, 스코네 전쟁과 식민지 확장을 통해 세력을 유지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섰다가 영국에게 공격을 받아 킬 조약으로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면서 연합이 해체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은 노르웨이의 경제적 번영과 자치를 보장했지만, 일부 노르웨이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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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노르웨이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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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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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덴마크어 및 노르웨이어: |
통칭 | 덴마크 노르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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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표어 | Regna firmat pietas ("신앙심은 왕국을 강화한다.") |
국가 | Kong Christian stod ved højen mast ("크리스티안 왕은 높은 돛대 옆에 섰네") |
수도 | 코펜하겐 |
공용어 | 공식: 덴마크어, 독일어, 르네상스 라틴어 그 외 사용 언어: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사미어, 그린란드어, 북프리지아어 |
종교 | 루터교 |
존속 기간 | 1537년 – 1814년 |
정치 체제 | 군주제 동군 연합 (실질적 연합) (1537–1814) 덴마크: 선거 군주제 (1537–1660) 세습 군주제, 절대 군주제 (1660–1814) 노르웨이: (사실상) 세습 군주제 (1537–1814) (사실상) 절대 군주제 (1661년부터) |
역사 | |
건국 이전 | 칼마르 동맹 해체 |
건국 | 노르웨이 릭스라드 해체 |
주요 사건 | 브룀세브로 조약 (1645) 로스킬레 조약 (1658) 덴마크 릭스라드 해체 (1660) 렉스 레기아로 절대 군주제 확립 (1665) |
해체 | 킬 조약 |
해체 이후 | 빈 회의 |
통치자 | |
군주 | 왕 |
초대 군주 | 크리스티안 3세 |
초대 군주 통치 기간 | 1537–1559 |
최장 통치 군주 | 크리스티안 4세 |
최장 통치 군주 통치 기간 | 1588–1648 |
군주 | 프레데리크 3세 |
군주 통치 기간 | 1648–1670 |
마지막 군주 | 프레데리크 6세 |
마지막 군주 통치 기간 | 1808–1814 |
입법부 | |
입법부 | 릭스라드 및 헤레다그 (1537–1660) 노르웨이 정부 위원회 (1807–1810) |
인구 및 면적 | |
1645년 인구 | 1,315,000명 |
1801년 인구 | 1,859,000명 |
1800년 면적 | 2,655,567 km² |
통화 | |
통화 | 덴마크 릭스달러 (1625–1814) 노르웨이 릭스달러 (1625–1814)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독일 |
2. 칼마르 동맹 해체와 연합의 기원
1397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세 왕국은 칼마르 동맹을 맺어 하나의 연합 왕국을 이루었다.[23] 1521년 스웨덴이 동맹에서 완전히 탈퇴하면서 동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덴마크-노르웨이(북대서양의 해외 영토와 현 에스토니아의 사아레마아 섬 포함)만 남게 되었다. 백작의 싸움 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트 올덴부르크의 왕인 크리스티안 3세와 가톨릭 귀족 반란군이 덴마크 왕위를 놓고 다투는 동안, 상대적으로 가톨릭 국가였던 노르웨이는 1530년대에 연합에서 탈퇴하고자 했으나, 덴마크의 우월한 군사력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1537년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티안 3세는 칼마르 동맹 시대에 존재했던 노르웨이의 동등한 지위를 박탈하고 노르웨이를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으로 만들었다.[9]
발트해는 유럽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무역 지역 중 하나였다. 한자 동맹이 이 지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지만, 동맹의 점진적인 쇠퇴로 덴마크-노르웨이가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외레순 해협을 장악함으로써 외레순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부과되는 해협 통행세를 강제할 수 있었다. 이 통행세는 덴마크 국가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크리스티안 4세와 같은 덴마크-노르웨이 국왕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백작의 분쟁에서 스웨덴의 지원을 받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웨덴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스웨덴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노르웨이는 주로 북독일 및 기타 개신교 국가들과 함께 가톨릭 국가들에 맞서 싸웠다.[9][16]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덴마크-노르웨이는 이득을 얻지 못했다. 스웨덴은 이 지역의 권력 변화의 기회를 포착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스웨덴을 위협하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묄레 푼트세(Sound Dues)는 스웨덴에게 지속적인 골칫거리였다. 1643년 스웨덴 비밀평의회는 덴마크-노르웨이에 대한 전쟁에서 스웨덴이 영토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를 침공했다.
칼마르 동맹은 1536년 백작 전쟁의 결과로 덴마크 왕국 의회가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주(州)로 선포하면서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노르웨이는 세습 군주제였기 때문에, 국왕은 노르웨이의 독립성을 더욱 억제하여 덴마크 왕가가 장래에 걸쳐 덴마크 국왕으로 선출될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노르웨이는 법과 일부 기관을 독자적으로 유지했지만, 그때까지 노르웨이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는 덴마크 국왕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3. 발트해에서의 덴마크-노르웨이의 야망
덴마크-노르웨이는 발트해 동부로의 확장도 추구했다. 그들은 주요 무역 기지였던 고틀란드 섬을 장악했고, 프리드리히 2세 국왕은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1560년에 오셀 섬을 구입했다.[9] 덴마크-노르웨이는 발트해에서 새로운 경쟁자들을 파괴하며 자신의 패권을 지켰다. 1571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해군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자, 덴마크-노르웨이 함대는 헬 해전에서 폴란드 함대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거나 나포했다.
4. 북방 7년 전쟁 (1563년 ~ 1570년)
전쟁의 또 다른 주요 요인은 스웨덴의 리보니아(현재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목표였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러시아와 함께 이전 한자 동맹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는데, 이 지역은 발트해를 장악하는 데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덴마크가 오셀을 구입했을 때, 프리드리히 2세의 형제인 마그누스 공작에게 섬의 통치권이 주어졌다. 마그누스는 자신을 에스토니아의 왕이라고 주장하려고 했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쫓겨났다. 러시아를 두려워한 에스토니아인들은 보호를 위해 에릭 14세 국왕에게 연락했다. 그러자 스웨덴은 에스토니아를 합병하여 그 지역을 스웨덴의 지배하에 두었다.
에릭이 러시아와의 무역을 방해하기 위해 해상봉쇄를 실시하자, 뤼벡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덴마크-노르웨이와 전쟁 동맹을 맺었다. 외교적 노력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평화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문장인 삼개관을 자신의 문장에 포함시키자, 스웨덴은 이것을 덴마크의 스웨덴에 대한 영유권 주장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에릭 14세(재위 1560~1568)는 자신의 문장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문장을 추가했다.[9]
그 후 덴마크-노르웨이는 스웨덴에 대한 일련의 해상 공격을 감행했고, 이것이 전쟁을 효과적으로 시작했다. 7년간의 전투 끝에, 이 분쟁은 1570년 ''전쟁 전 상태''로 종결되었다.
5. 칼마르 전쟁 (1611년 ~ 1613년)
덴마크-노르웨이가 발트해(`dominium maris baltici`) 및 북해를 지배하면서, 스웨덴은 덴마크의 오레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카를 9세가 라플란드와 노르웨이 북부를 통과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려 했다. 1607년 카를 9세는 자신을 "노르드란드 라플란드의 왕"으로 선포하고 노르웨이 영토에서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덴마크-노르웨이와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은 다른 독립 무역로가 개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스웨덴의 행동에 항의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또한 스웨덴이 덴마크-노르웨이와의 동군연합에 재가입하도록 강제할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1611년 덴마크-노르웨이는 마침내 6,000명의 병력으로 스웨덴을 침공하여 칼마르를 점령했다. 1613년 1월 20일, 크네레드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라플란드를 노르웨이에 편입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노르웨이의 육로가 회복되었고, 덴마크-노르웨이가 전쟁에서 점령한 두 개의 요새에 대한 엘프스보르그 몸값을 스웨덴이 지불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오레순 세금 면제를 달성했다.
스웨덴이 지불한 거액의 몸값(엘프스보리 몸값(Älvsborg Ransom)이라고 불림)은 크리스티안 4세가 글뤼크슈타트,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화재 이후 재건), 크리스티안스하운, 크리스티안스타드, 크리스티안산 등 여러 도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는 또한 덴마크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에 많은 덴마크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나머지 돈은 크리스티안의 이미 막대한 개인 재산에 추가되었다.
6. 30년 전쟁 (1618년 ~ 1648년)과 덴마크-노르웨이
합스부르크가를 약화시키려는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 잉글랜드, 하사크센 주의 개신교 국가들과 함께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를 위해 개입하면 덴마크의 군사 작전에 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9][16] 크리스티안 4세는 이들 국가와 자신의 재산을 이용하여 대규모 용병 군대를 고용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북독일 루터교 국가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으며, 베르덴 공국 주교령과 같은 북독일의 교회 직책을 얻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1626년 뤼터 전투에서 덴마크는 크게 패배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독일 개신교 국가들은 크리스티안 4세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볼가스트 전투에서 또 다시 패배한 후, 1629년 뤼벡 조약에 따라 덴마크-노르웨이는 독일 내정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하면서 전쟁에서 물러났다.
7. 토르스텐손 전쟁 (1643년 ~ 1645년)
덴마크는 전쟁 준비가 부족했고, 노르웨이는 스웨덴을 공격하기를 꺼려 스웨덴에게 유리한 입장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스웨덴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고,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에 따라 덴마크-노르웨이는 노르웨이 영토인 옘틀란드, 헤리에달렌, 이드레와 세르나와 덴마크령 발트해의 고틀란드 섬과 외셀(사아레마아) 섬 등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따라서 30년 전쟁은 스웨덴 제국의 부상을 촉진했지만, 덴마크-노르웨이의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8. 제2차 북방 전쟁 (1655년 ~ 1660년)
덴마크-스웨덴 전쟁(1657-1658)은 제2차 북방 전쟁의 일부로, 덴마크-노르웨이에 큰 피해를 준 전쟁 중 하나였다. 이 전쟁에서 큰 손실을 본 덴마크-노르웨이는 로스킬레 조약에 따라 영토의 4분의 1을 스웨덴에 넘겨줘야 했다.[1] 여기에는 노르웨이 트뢴델라그 주, 보후슬렌, 스웨덴 본토에 남아 있던 덴마크령 전 지역, 뵬른홀름 섬이 포함되었다.[1]
그러나 2년 후인 1660년, 코펜하겐 조약을 통해 트뢴델라그와 뵬른홀름은 덴마크-노르웨이에 반환되었다.[1]
9. 절대주의 도입과 중앙집권화
1660년 덴마크의 비상사태에서 프레데리크 3세는 귀족과 시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절대주의와 세습 군주제를 도입했다.[18] 이로 인해 덴마크 귀족들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왕권은 강화되었다. 1500년대 동안 덴마크와 노르웨이 귀족들의 인구가 감소했고, 왕실은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9] 오레순드 해협에서 덴마크-노르웨이 국왕들의 부가 증가함에 따라 귀족과 덴마크 국무원(Rigsraad)의 동의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덴마크-노르웨이 국왕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절대 권력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절대주의의 도입으로 "구귀족"은 영향력과 전통적인 특권의 대부분을 잃었고 덴마크 왕국 참사회는 폐지되었다.
노르웨이는 왕실 재무장관과 같은 별도의 법률과 일부 기관, 별도의 화폐와 군대를 유지했다.[17] 1748년까지 자체 왕실 깃발을 사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Dannebrog이 연합의 유일한 공식 상선 깃발이 되었다.[17] 1536년 덴마크 왕국 의회는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주(州)로 선포했지만, 노르웨이는 세습 군주제였기 때문에 국왕의 관심은 노르웨이의 독립성을 더욱 억제하는 데 있었다. 노르웨이는 법과 일부 기관을 독자적으로 유지했지만, 그때까지 노르웨이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는 덴마크 국왕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합 전체에 새로운 행정 제도가 도입되었고, 1687년에는 크리스티안 5세가 새로운 법을 도입했다. 노르웨이에서는 그때까지 13세기 마그누스 개정법왕 이래의 전국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10. 스코네 전쟁 (1675년 ~ 1679년)
덴마크는 로스킬레 조약 이후 스코네 지방을 잃었고, 항상 그 땅을 되찾고자 했지만, 스웨덴이 강대국으로 성장했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5세는 스웨덴이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 개입하자 기회를 포착했고, 망설임 끝에 1675년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군이 스웨덴을 침공했다.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군의 공격은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19세의 칼 11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반격하여 점령당한 땅을 되찾았다. 프랑스가 평화를 중재하여 전쟁은 종결되었고, 양국 모두 영토상의 영구적인 손익은 없었다.
11. 식민지 확장
덴마크-노르웨이는 북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에 에스토니아, 그린란드,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와 같은 영토를 소유했다. 17세기부터는 아프리카, 카리브해, 인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15]
덴마크-노르웨이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인도 여러 지역에 트란케바르, 세람포르를 포함한 많은 식민지를 유지했다. 마지막 정착지는 1845년에 영국에 매각되었고, 니코바르 제도의 권리는 1869년에 매각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주로 버진아일랜드를 중심으로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설립했다. 이 식민지는 1917년 미국에 매각될 때까지 덴마크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으며, 이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가 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서아프리카의 골드 코스트 지역에서 여러 식민지와 요새를 지배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요새들은 1850년 영국에 매각되었다.
12. 사회와 문화
덴마크-노르웨이는 경제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 노르웨이는 덴마크 농산물에 의존했고, 덴마크는 노르웨이의 목재와 금속을 필요로 했다.[19] 노르웨이 제철업은 덴마크 철 공급을 독점했고, 덴마크는 노르웨이 곡물 공급을 독점하는 등 내부 무역이 활발했다.[19]
덴마크는 대지주 귀족 중심 사회로, 농노와 유사한 ''스탄스반트(Stavnsbånd)'' 제도가 있었다. 반면 노르웨이는 자유 농민이 많았고, 이들은 덴마크 농민보다 부유했다.
덴마크어와 독일어가 공용어였다.[13][14] 덴마크어는 덴마크, 노르웨이 등에서 행정, 종교, 문학 등에 널리 쓰였다. 독일어는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등 독일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코펜하겐에서 교육을 받아야 관직 진출이나 해군 장교가 될 수 있었기에, 노르웨이인들은 덴마크어와 덴마크 문화 영향을 받았다.
크리스티안 3세는 1537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루터교를 공식 종교로 확립했다.[9] 덴마크 국교회와 노르웨이 국교회가 설립되었고, 국왕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세금을 부과하며 종교로 왕권을 강화했다.[9] 크리스티안 6세 시대에는 경건주의가 유행했다.
12. 1.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관계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였으며,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농산물에 의존하고 덴마크가 노르웨이의 목재와 금속에 의존하는 등 상당한 내부 무역을 했습니다.[19] 노르웨이는 16세기부터 산업화되었고 수출 중심 경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해운업, 임업 및 광업은 노르웨이를 "덴마크-노르웨이의 발전되고 산업화된 부분"이자 덴마크와 경제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게 만들었습니다.[19]경제적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관계는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노르웨이를 괴롭혀 온 농작물 부족은 덴마크의 농업에 의해 보충되었습니다. 북방전쟁에서 스코네 영토를 잃은 후 강력한 해군을 유지해야 했던 덴마크는 목재가 부족했고, 노르웨이의 삼림이 최대 무기가 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화에 있어서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노르웨이의 제철업은 덴마크의 철 공급을 독점했고, 덴마크는 반대로 노르웨이의 곡물 공급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노르웨이는 또한 두 왕국의 더 평등한 부분이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국왕(즉, 국가)이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 반면, 덴마크는 대지주 귀족들이 지배했습니다. 덴마크에는 태어난 농장에 얽매이는 ''스탄스반트(Stavnsbånd)''로 알려진 농노제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반면 노르웨이의 모든 농민들은 자유로워서 어디든 정착할 수 있었고 평균적으로 덴마크 농민들보다 더 부유했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취임하려면 코펜하겐에 있는 대학에서 경력을 시작해야 했고, 해군 장교 교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덴마크로 간 노르웨이 사람들은 코펜하겐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덴마크어가 유일한 문어였지만, 노르웨이 민중의 구어와는 달랐습니다.
12. 2. 언어
덴마크어와 독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13][14] 덴마크어는 덴마크, 노르웨이, 그린란드, 페로 제도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행정, 종교,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독일어는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등 독일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덴마크어 – 공용어로 인정되었고, 대부분의 연합 귀족이 사용했으며, 덴마크, 노르웨이, 그린란드, 페로 제도, 슐레스비히 일부 지역의 교회 언어이기도 했다.
- 고지 독일어 – 공용어로 인정되었고, 소수의 귀족과 홀슈타인 및 슐레스비히 일부 지역의 교회 언어로 사용되었다.
- 저지 독일어 –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 일부 지역의 주요 구어였다. 베르겐에서는 주로 한자 상인들이 어느 정도 사용했다.
- 라틴어 – 외교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제2언어로 인기가 있었다.
- 노르웨이어 –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주로 노르웨이에서 구어로 사용되었다.
- 아이슬란드어 – 종교 개혁 이후 아이슬란드에서 교회 언어로 인정되었으며, 아이슬란드에서 구어와 문어로 사용되었다.
- 페로어 –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주로 페로 제도에서 구어로 사용되었다.
- 사미어 –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노르웨이 사미족이 사용했다.
- 그린란드어 –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그린란드 이누이트가 사용했다.
- 북프리지아어 –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주로 슐레스비히 일부 지역에서 구어로 사용되었다.
12. 3. 종교
프로테스탄티즘은 크리스티안 2세 통치 시대부터 덴마크에서 종교 운동이었다. 프레데리크 1세 통치 기간 동안 덴마크는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고, 노르웨이에서는 당시 큰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작의 싸움에서의 승리는 프로테스탄트 국왕 크리스티안 3세 치하에서 덴마크를 확보했고, 1537년에는 노르웨이도 확보하여 두 왕국 간의 동맹을 형성했다.[9]이후 몇 년 동안 덴마크-노르웨이는 마르틴 루터를 따른 국가들 중 하나였으며, 루터교를 공식 종교로 확립했다. 덴마크 국교회와 노르웨이 국교회도 이 기간에 설립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에 루터교가 도입된 것은 정치적 조치이기도 했다. 국교의 설립으로 국왕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의 교회 십일조를 부과하고, 교황청에 세금을 내는 것을 중단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는 덴마크-노르웨이의 절대주의에 도움이 되었고 국왕의 부를 증가시켰다.[9]
크리스티안 6세 통치 기간 동안 경건주의 추종자인 왕의 통치하에 왕국에는 또 다른 종교적 "개혁"이 있었다. 1735년부터 그가 1746년에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은 새로운 법률과 규정이 경건주의를 옹호하여 "국가 경건주의"라고 불린다. 경건주의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 후 200년 동안 수많은 새로운 소규모 경건주의 부흥이 일어났다. 결국 경건주의는 지속적인 종교 집단으로 확고히 자리 잡지 못했지만, "경건주의 국왕"이 제정한 정책은 오늘날까지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3. 나폴레옹 전쟁과 연합의 해체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덴마크-노르웨이는 프랑스와 영국 양국과의 무역을 계속하기 위해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장 중립 동맹에 가입하자 영국은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1801년과 1807년에 코펜하겐을 공격했다. 1807년 코펜하겐 공격에서 영국은 덴마크-노르웨이 해군 전체를 함락시켜 함대 대부분을 불태우고 나머지 함선들을 영국 해군에 편입시켰다.[1] 덴마크-노르웨이는 패배하여 킬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왕국을 스웨덴 국왕에게 할양해야 했다. 노르웨이의 해외 영토는 덴마크가 유지했다.[1]
1807년 이후 영국 해군이 카테가트 해협에 진출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교류는 차단되었다. 노르웨이는 기근에 시달리고 경제는 파탄났지만, 프레데리크 6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지속했다.[2] 국왕은 노르웨이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사촌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후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8세)를 총독으로 파견했다.[2]
1814년 킬 조약에 의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긴밀한 정치적 관계는 끊어졌다.[2] 한때 노르웨이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는 동군연합 이전 노르웨이의 법적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가 이를 얻게 되었다.[2]
노르웨이인들은 스웨덴과의 합병을 피하기 위해 독립을 선포하고, 1814년 5월 17일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독립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선출했다.[1] 하지만 노르웨이의 이 독립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세자 카를 요한이 이끄는 스웨덴군이 7월에 침공했고, 8월 14일 노르웨이는 휴전을 강요당했다.[3] 11월 4일 노르웨이 의회는 형식적으로 자발적으로 스웨덴의 카를 13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3]
1811년에 설립된 왕립 프레데리크 대학교(현재의 오슬로 대학교)에 의해 노르웨이인들은 더 이상 교육을 받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갈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노르웨이의 교육 제도는 여전히 덴마크의 것과 유사했다.[3] 하지만 19세기 중반에는 아우센이 만든 란스몰이라는 새로운 표기법도 등장한다.[3]
14.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에 대한 노르웨이 민족주의 관점
19세기 노르웨이의 일부 작가들은 덴마크와의 연합 시기를 "400년의 밤"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400년의 밤"이라는 개념이 국민 낭만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웨덴과의 연합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수사적 장치로 만들어진 신화라고 설명합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에 대한 노르웨이의 역사 연구는 더욱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당시 노르웨이 경제가 번영했으며, 덴마크와의 연합 기간 동안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노르웨이가 자체 군대, 법 체계 등을 갖춘 독립된 국가였으며, 내정에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고, "덴마크" 국왕의 이름으로 노르웨이인 정체성을 가진 현지 관리 엘리트에 의해 주로 통치되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노르웨이인들은 덴마크-노르웨이의 군대, 공무원, 사업 엘리트, 카리브해 및 기타 지역의 식민지 행정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군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고, 노르웨이 산업은 덴마크에서 법적 독점권을 누렸으며, 덴마크는 노르웨이에 농산물을 공급하는 무역 관계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습니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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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르웨이 왕국이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페로 제도는 덴마크령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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