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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3세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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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그문트 3세 바사(1566-1632)는 폴란드 국왕이자 스웨덴 국왕이었다. 그는 스테판 바토리 사후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스웨덴 왕위 계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치세는 종교적 갈등, 스웨덴과의 전쟁, 러시아 원정,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가톨릭화를 추진했고, 절대 왕정을 강화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지그문트 3세는 예술과 건축을 후원하고 바르샤바를 수도로 이전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그의 통치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으며 폴란드 황금기의 종말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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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3세 바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기스문트 3세의 초상화. 1624년경 피터르 자우트만이 그림.
피터르 자우트만, 1624년경
이름시기스문트 3세
폴란드어Zygmunt III Waza
리투아니아어Žygimantas Vaza
스웨덴어Sigismund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즉위1587년 8월 19일
대관식1587년 12월 27일
이전 통치자안나 야기에우워와 스테판 바토리
다음 통치자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스웨덴 국왕
즉위1592년 11월 17일
퇴위1599년 7월 24일
대관식1594년 2월 19일
이전 통치자요한 3세
다음 통치자칼 9세
가문
왕가바사
아버지요한 3세
어머니카타지나 야기엘론카
결혼과 자녀
배우자안나 폰 외스터라이히 (1592년 5월 31일 결혼, 1598년 2월 10일 사망)
콘스탄체 폰 외스터라이히 (1605년 12월 11일 결혼, 1631년 7월 10일 사망)
자녀브와디스와프 4세
얀 2세 카지미에시
얀 알베르트, 바르미아 및 크라쿠프 주교
카롤 페르디난트, 오폴레 공작
안나 카타지나 콘스탄치아, 노이부르크의 세습 여백작
자녀 링크'#결혼과 자녀'
자녀 링크 설명기타...
종교
종교가톨릭교
생애
출생일1566년 6월 20일
출생지그립스홀름, 마리에프레드, 스웨덴
사망일1632년 4월 30일
사망지바르샤바, 폴란드
매장일1633년 2월 4일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서명

2. 생애

요한 3세와 카타르지나 야기에우온카의 아들로 1566년 6월 20일 그립스홀름 성에서 태어났다.[2][3] 구스타브 1세의 아들인 요한 3세는 1563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형 에리크 14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지그문트의 부모는 그립스홀름에 갇혔다.[4]

요한 3세, 그의 아내 카타르지나 야기에우온카와 어린 지그문트가 그립스홀름 성에 갇힌 모습. Józef Simmler의 1859년 그림.


어머니 카타르지나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와 밀라노 출신 보나 스포르차의 딸로, 지그문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2] 1566년 누나 이사벨라가 사망했고,[5] 여동생 안나는 루터교 신자였지만, 1625년 사망할 때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6]

1567년 10월 지그문트와 부모는 삼촌 칼의 요청으로 감옥에서 풀려났고,[7][8] 1569년 1월 에리크 14세가 폐위되고 아버지 요한 3세가 스웨덴 왕위에 올랐다.[9] 지그문트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0]

어린 시절 폴란드어스웨덴어를 모두 배워 이중 언어 구사자가 되었으며,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에도 능숙했다.[10][12][13] 어머니 카타르지나는 아들이 가톨릭 정신과 폴란드 애국심을 가지고 교육받도록 했으며, 지그문트는 200년 동안 폴란드를 통치했던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혈통적 연관성을 인식하게 되었다.[10][14]

1587년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하자 지그문트는 폴란드 왕위 선거에 출마했다.[2] 그의 출마는 국모 안나와 그를 야기에우워 가문의 후손으로 여긴 몇몇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즈보로프스키 가문과 정치적으로 연관된 귀족들은 반대했다.[18][19][20] 스타니스와프 카르코프스키 대주교 등의 지지로 1587년 8월 1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자로 선출되었다.[2] 그의 공식 칭호는 "신의 은총으로,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루테니아, 프로이센, 마조비아, 사모기티아, 리보니아의 통치자, 또한 세습 스웨덴 국왕, 고트족과 반데르족의 왕"이었다.[21]

선거 결과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의 출마를 지지하는 폴란드 귀족들에 의해 반대받았고, 그들은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22] 지그문트는 발트해를 건너 10월 7일 폴란드에 상륙, 세임 (의회)에 왕실 특권을 부여하기로 동의하여 반대 세력을 진정시켰다.[23] 얀 둘스키 재무관에 의해 국가 원수 안제이 오팔린스키를 대신하여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크라쿠프에 도착한 후 12월 27일 바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4]

얀 자모이스키가 비치나 전투에서 막시밀리안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으면서 지그문트의 입지는 굳건해졌다.[25] 교황 식스토 5세의 요청에 따라 대공은 풀려났고, 1589년 폴란드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26] 1592년 오스트리아 대공녀 합스부르크의 안나와 결혼하여 남쪽 이웃과의 평화를 유지했다.[27]

1592년 아버지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지그문트는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28] 스웨덴인들은 요한 3세를 가톨릭 음모자이자 반역자로 선언했지만, 새 군주가 루터교를 국교로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자 누그러졌다.[29] 1594년 2월 19일 웁살라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나,[30] 교황 사절이 왕실 행렬에 참석하면서 그의 개신교 신앙 지지 약속은 불안하게 시작되었다.[31]

2. 1. 초기 생애

요한 3세와 카타르지나 야기에우온카의 아들로 1566년 6월 20일 그립스홀름 성에서 태어났다.[2][3] 아버지 요한 3세는 구스타브 1세의 아들이었다. 1563년 요한 3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형 에리크 14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지그문트의 부모는 그립스홀름에 갇혔다.[4]

어머니 카타르지나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와 밀라노 출신 보나 스포르차의 딸로, 지그문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2] 1566년 누나 이사벨라가 두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5] 여동생 안나는 루터교 신자였지만, 두 남매는 1625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6]

1567년 10월, 지그문트와 그의 부모는 삼촌 칼의 요청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7][8] 1569년 1월, 에리크 14세가 폐위되고 아버지 요한 3세가 스웨덴 왕위에 올랐다.[9] 지그문트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0]

어린 시절, 폴란드어스웨덴어를 모두 배워 이중 언어 구사자가 되었다.[10]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에도 능숙했다.[12][13] 어머니 카타르지나는 아들이 가톨릭 정신과 폴란드 애국심을 가지고 교육받도록 했으며, 지그문트는 200년 동안 폴란드를 통치했던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혈통적 연관성을 인식하게 되었다.[10][14]

2. 2. 폴란드 왕위 계승

1587년,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하자, 지그문트는 폴란드 왕위 선거에 출마했다.[2] 그의 출마는 국모 안나와 몇몇 유력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그를 야기에우워 가문의 후손으로서 토착 후보로 여겼다. 그러나 즈보로프스키 가문과 정치적으로 연관된 귀족들은 그의 출마에 반대했다.[18][19][20] 스타니스와프 카르코프스키 대주교의 축복과 다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지지로, 그는 1587년 8월 19일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자로 선출되었다.[2] 그의 공식적인 이름과 칭호는 "신의 은총으로,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루테니아, 프로이센, 마조비아, 사모기티아, 리보니아의 통치자, 그리고 또한 세습 스웨덴 국왕, 고트족과 반데르족의 왕"이었다.[21]

선거 결과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의 출마를 지지하는 폴란드 귀족들에 의해 강력하게 반대받았고, 그들은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22] 이 소식을 들은 지그문트는 발트해를 건너 10월 7일 폴란드에 상륙했으며, 세임 (의회)에 왕실 특권을 부여하기로 동의하여 반대 세력을 진정시켰다.[23] 그는 얀 둘스키 재무관에 의해 국가 원수 안제이 오팔린스키를 대신하여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크라쿠프에 도착한 후 12월 27일 바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24]

지그문트의 입지는 얀 자모이스키가 비치나 전투에서 막시밀리안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으면서 더욱 굳건해졌다.[25] 교황 식스토 5세의 요청에 따라 대공은 풀려났고, 1589년 폴란드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26] 그는 또한 1592년 오스트리아 대공녀 합스부르크의 안나와 결혼함으로써 강력한 남쪽 이웃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27]

2. 3. 스웨덴 왕위 계승

1592년 아버지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지그문트는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28] 스웨덴인들은 이전에 요한 3세를 가톨릭 음모자이자 반역자로 선언했지만, 새 군주가 루터교를 국교로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자 누그러졌다.[29] 지그문트는 1594년 2월 19일 웁살라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나,[30] 교황 사절이 왕실 행렬에 참석하면서 스웨덴에서 개신교 신앙을 지지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불안하게 시작되었다.[31]

3. 스웨덴과의 전쟁

1594년 웁살라 결의는 스웨덴 개신교도들의 권리와 안전을 규정했지만, 지그문트 3세는 이를 훼손하려 했다.[56] 그는 군사적 지원을 받아 자신의 사령관들을 스웨덴 성에 배치하고, 클라우스 플레밍을 스웨덴령 핀란드의 영주로 임명했다.[56] 스톡홀름 총독으로 임명된 에릭 브라헤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다.[56]

1595년 가을, 칼은 쇠데르셰핑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이 국왕 부재 시 섭정으로 스웨덴을 통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57] 클라우스 플레밍이 이끄는 핀란드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고, 칼은 몽둥이 전쟁으로 알려진 농민 반란을 선동했다.[59] 1597년 클라우스 플레밍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59]

1598년 9월 28일 린셰핑 성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양측은 군대를 해산하기로 합의했다.[65] 그러나 달라르나에서 지그문트 지지자인 야콥 내프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처형당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66] 지그문트를 지지했던 스웨덴인들은 린셰핑 대학살에서 살해되었다.[64]

1599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위에서 공식적으로 폐위되었고, 칼 9세가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었다.[67]

3. 1.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내 정책

Zygmunt III Wazapl는 1595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가톨릭화를 추진하여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금지했다.[44] 1596년에는 브레스트 연합을 성립시켜 동방 전례를 지키면서도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동방 가톨릭 교회를 성립시켰다. 이는 지배하에 있는 정교회의 가톨릭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44] 또한 1596년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했다(다만 지그문트 3세가 바르샤바에 거주한 것은 1611년 이후의 일이다).[44]

지그문트 3세는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반종교 개혁 정책이 강화되었다.[53] 국왕의 측근들은 주로 고위 성직자들과 예수회에서 충원되었으며, 이들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1573년 바르샤바 연합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44]

1591년 빌뉴스크라쿠프에서 비가톨릭교도에 대한 폭력 사태가 발생하자, 얀 자모이스키는 "보안 보장"을 요구하는 회의를 소집했다.[44] 지그문트 3세는 요구에 굴복했지만, 미래의 회의를 금지했다.[44] 그러나 이 금지령은 효과가 없었고, 반대파들의 모임은 계속되었다.[44]

1592년, 자모이스키는 옌제유프에서 미코와이 제브지초프스키, 스타니스와프 죌키에프스키 등 유력 인사들이 참석한 또 다른 연합을 결성했다.[45] 이 자리에서 그는 지그문트 3세가 퇴위할 경우 에르네스트 대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는 증거를 폭로했다.[44]

지그문트 3세의 절대주의적 경향과 가톨릭 우선 정책에 대한 반발은 1606년 제브지드프스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45] 폴란드 귀족(슐라흐타)의 일부가 일으킨 이 반란은 1609년에 진압되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정치적, 종교적 긴장은 계속되었다.[45]

3. 2. 스웨덴 왕위 탈환 시도

1598년,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으로 건너가 숙부 칼의 반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여 폴란드로 돌아갔다.[65] 1599년 지그문트 3세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릭스다그(의회)에 의해 스웨덴 왕위에서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67] 그는 아들인 라도슬라우스 (블라디슬라프) 바사 공자를 스웨덴의 후계자로 보내되, 그 소년이 개신교 신앙으로 양육된다는 조건 하에 6개월[65] (또는 자료에 따라 12개월)[67]의 시간을 받았다.[65]

1600년 2월, 찰스 공작(칼 9세)은 신분 의회를 린셰핑으로 소집했다.[67] 지그문트가 답변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 의회는 찰스 공작을 왕위 계승자로 선출했지만, 그는 4년 후 대관식을 거쳐 칼 9세가 되었다.[67]

1605년 칼 9세가 리가를 침공하자 이를 격퇴했다.

4. 러시아 원정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숄키에프스키의 지휘 아래 1609년 9월 29일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98] 1610년 7월 4일, 클루시노 전투에서 폴란드군은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폴란드 후사르의 전술적 역량 덕분이었다.[99] 이 전투로 차르 바실리 4세는 일곱 보야르에 의해 축출되었고, 숄키에프스키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크렘린을 2년간 점령했다.[100] 일곱 보야르는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러시아의 새 차르로 선포했다.[101] 1611년 6월 스몰렌스크는 폴란드군에게 함락되었다.[101]

폐위된 바실리 슈이스키는 바르샤바로 이송되어 1611년 10월 29일 바르샤바 왕궁에서 지그문트 3세와 폴란드 원로원에게 슈이스키 조공을 바쳤다. 그는 고스티닌의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03]

1611년, 쿠즈마 미닌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는 폴란드 점령군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다.[105] 폴란드군은 1612년 9월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106] 지그문트 3세는 구원군을 이끌고 갔지만 공격할 수 없었다.[106] 전쟁은 1618년 데울리노 휴전으로 폴란드가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영토를 얻으며 끝났다.[107] 그러나 러시아는 독립을 유지했고, 미하일 로마노프가 1613년에 차르로 즉위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수립했다.[106]

지그문트 3세는 1600년 전후부터 러시아의 대혼란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폴란드 의회(세임)에서 국왕에 대한 양보를 얻어낼 기회였다. 류리크 왕조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가짜 드미트리 1세가 폴란드에 나타나자, 지그문트 3세는 그를 지원하는 폴란드 귀족들을 묵인했지만, 자신은 거리를 두었다.

1608년, 스웨덴이 혼란에 개입하고 모스크바의 차르가 세력을 회복하자,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폴란드 전쟁에 개입했다. 지그문트 3세는 스몰렌스크를 포위했지만, 1611년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가톨릭화를 목표로 모스크바를 침공했다.

1610년, 모스크바-스웨덴 연합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를 점령한 지그문트 3세는 러시아 귀족들에게 환영받았고, 폴란드 국왕 또는 왕태자를 차르로 한다는 선언도 지지받았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는 동방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의 가톨릭화를 고집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반발을 샀고, 러시아인들과 갈등을 빚었다.

1612년, 폴란드 왕관령 대헤트만대법관인 스타니스와프 죨키에프스키가 폴란드군 주력을 이끌고 귀국하자, 모스크바에 남은 지그문트 3세의 폴란드군은 러시아 국민군에게 패배하여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지그문트 3세는 차르 즉위를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지만, 1618년에 러시아 서방 등을 폴란드에 할양하고 차르 즉위를 단념했다.

5. 폴란드-오스만 전쟁

폴란드는 1590년대에 스페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영국, 오스만 투르크와 충돌했다.[68] 당시 영국은 해군을 유지하기 위해 폴란드로부터 많은 양의 곡물과 목재를 구매했고, 폴란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70] 에드워드 바턴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는 투르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 영국이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70]

이후 지그문트는 스페인 왕실 및 영국과 무역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75]

6.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1629)

1621년 지그문트 3세의 조카 구스타브 2세 아돌프리가를 침공하면서 스웨덴-폴란드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스웨덴군은 우세를 보이며 폴란드령 프로이센을 점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네츠폴스키가 활약하여 스웨덴의 바르샤바 침공을 저지했다. 1629년 알트마르크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스웨덴에게 리보니아 지배권이 부여되었다.

7. 암살 시도

1620년 11월 15일 일요일 아침, 지그문트 3세가 바르샤바성 요한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려 할 때, 왕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134][135]

바르샤바에서 피에카르스키가 지그문트를 암살하려 시도하는 그림 묘사. 피에카르스키는 전쟁 망치를 들고 있다
피에카르스키의 지그문트 암살 시도


지그문트 3세는 왕궁과 성전을 연결하는 통로를 건너 성당으로 가고 있었다. 왕의 행렬이 성당 문에 가까워지자, 근처에 숨어 있던 하급 귀족 미하우 피에카르스키가 전쟁 도끼를 들고 왕에게 달려들었다.[135] 피에카르스키는 왕의 등과 뺨을 두 번 찌르고 팔을 쳤지만, 왕의 경호원과 궁정 원수 우카시 오팔린스키가 왕을 보호하고, 왕자 브와디스와프가 사브르로 암살범의 머리에 상처를 입혀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는 못했다.[135] 다른 설명에 따르면, 경호원은 없었고 수행원들은 격식을 갖추지 않았으며, 암살범은 참석자들에게 제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36]

성 요한 대성당이 있는 바르샤바 구시가지
암살 시도 이후 예방 조치로 바르샤바 성과 성 요한 대성당 사이의 관문이 건설되었다.


사건 직후, 교구민들은 쓰러진 국왕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경호원과 마친 시슈코프스키를 포함한 수행원들이 왕을 소생시켰고, 의료 검사 결과 상처는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135] 그러나 국왕의 옷에 피가 묻자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고, 이탈리아 사제의 "traditore!"(반역자)라는 외침이 "타타르인"으로 잘못 해석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135]

피에카르스키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우울증 환자로, 프랑수아 라바이야크에 의한 앙리 4세 암살(1610년)에 동기를 부여받아 명성과 인정을 얻기 위해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135][137] 그는 10년 동안 암살을 준비했으며, 재판에서 범죄를 부인하지 않고 국왕을 모욕하며 실패한 국왕 시해에 대해 자신을 탓했다.[137][138] 피에카르스키는 1620년 11월 27일 바르샤바에서 라바이야크와 비슷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는데, 공개적으로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시신은 말에 의해 사지 절단된 후 불태워졌으며, 그 재는 대포로 흩어졌다.[139][140][138]

8. 종교

지그문트 3세의 통치는 반종교개혁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프로테스탄티즘 탄압과 관련이 깊다. 그의 복음주의에 대한 반감은 예수회 사제들의 영향과 맞물려 종교적 억압으로 이어졌고, 이는 수십 년 후 폴란드 형제단의 멸망과 1658년 그들의 추방으로 이어져 유니테리언주의의 세계적 확산에 기여했다.[142] 한때 번성했던 폴란드 개혁 교회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142]

이러한 종교 탄압은 다른 소수 집단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43] 지그문트는 동방 정교회를 경멸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동부 지역의 루테니아인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이는 현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기반이 되었다.[144]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종교 개혁이 지속되고 반가톨릭주의 정서가 강화되었다.[145]

유대인과 무슬림(타타르족) 역시 차별 대상이었으며, 이들의 권리는 이미 제한되어 있었다.[146] 1573년 바르샤바 연맹을 통해 유럽 다른 지역과는 달리 종교적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보장 정도는 달랐다. 1588년, 지그문트는 "이스라엘인"과 타타르족의 공직 및 정치적 역할 수행을 법으로 금지했다.[146] 기독교인과의 일상 접촉이 제한되었고, 기독교인을 유대교나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는 사형으로 처벌되었다.[146] 불복종자는 화형, 기독교 여성과 결혼한 무슬림 남성은 참수되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 어린이를 할례하는 것 역시 사형죄였다.[146] 그러나 무역은 계속 번성했으며, 폴란드는 30년 전쟁 동안 다른 지역에서 억압을 피해 온 난민들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146]

어린 요한 알베르트 바사의 초상화, 붉은 추기경 모제타 착용
요한 알베르트는 아버지의 명성 덕분에 아홉 살에 주교, 스무 살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지그문트 치하와 그의 사후, 종교적 족벌주의가 두드러졌다. 그의 세 아들 요한 카지미에르, 요한 알베르트, 카롤 페르디난드는 사제로 서품되어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147] 카롤은 1625년 브로츠와프 주교, 1640년 플로츠크 주교가 되었다. 요한 알베르트는 1621년 아홉 살에 바르미아 주교, 1632년 스무 살에 추기경-크라쿠프 주교가 되었다.[148] 요한 카지미에는 왕위에 오르기 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요청으로 추기경이 되었다.[149]

폴란드에서 지그문트 3세는 15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가톨릭화를 추진하며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금지했다. 1596년 브레스트 연합을 통해 동방 전례는 유지하되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동방 가톨릭 교회를 성립시켰는데, 이는 정교회의 가톨릭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9. 죽음

지그문트 3세는 통치 말년에 정치에서 물러나 가족 문제와 공연 예술에 전념했다. 건강 상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그문트 1세에게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통풍과 관절통으로 고생했다.[150] 그의 삼촌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또한 관절염을 앓았다.[151]

두 번째 부인 콘스탄체가 사망한 후, 지그문트 3세는 심각한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로 병을 앓았다.[152] 1631년 아카치 그로초프스키 주교는 국왕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기록했지만,[153] 통풍성 관절염은 악화되었고, 의사들의 치료에도 효과가 없었다.[153]

죽음을 직감한 지그문트 3세는 귀족 회의를 소집했고, 1632년 4월 1일 '비상 의회'(''sejm ekstraordynaryjny'')에서 아들 브와디스와프의 왕위 계승을 보장했다.[154] 4월 25일, 카스페르 도엔호프는 지그문트 3세가 뇌졸중으로 마비된 것을 발견했다.[155] 지그문트 3세는 "죽음의 의지에 대항할 치료법은 없다"고 중얼거렸고,[155] 마비는 악화되어 우르술라 메이에린이 그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155] 4월 28일, 예수회 사제들이 엑소시즘과 같은 기도를 드렸고, 지그문트 3세는 "허무 중의 허무(모든 것은 덧없다)"라는 라틴어 말을 남겼다.[155]

Sigismund's body placed on top of a funeral bier, surrounded by candelabra and royal regalia
지그문트 3세가 사망 후 영구차에 안치되었다.


며칠 후, 지그문트 3세는 1632년 4월 30일 바르샤바 왕궁에서 사망했다.[3][156] 알브레히트 S. 라지비우는 부검 결과 국왕의 내장은 건강했다고 기록했다.[155] 그의 시신은 군인, 전투 장면, 악기 모티프 등으로 장식된 주석 관에 안치되어,[157] 1633년 2월 4일 크라쿠프바벨 대성당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158]

10. 유산

지그문트 3세의 통치는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폴란드 황금기의 종말과 은세기의 시작을 알렸다.[168] 그의 시대는 건축, 예술,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졌지만, 스웨덴과의 갈등과 종교적 반감이 심화된 시기이기도 했다.[159][160][161]

바르샤바 왕궁 광장의 지그문트 3세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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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으로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의 전환을 이끌었으며, 폴란드어가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라틴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169] 야쿱 부예크의 성경 폴란드어 번역본(1599년)은 20세기 중반까지 사용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170] 또한, 피오트르 스카르가의 ''세임 전의 여덟 편의 설교''와 같이 사회 풍자와 정치적 논평이 담긴 작품들이 등장했지만, 1606년 반란 이후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기도 했다.[171][172]



사회적으로는 폴란드 사회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프란치셰크 시아르친스키는 이전의 검소한 관습 대신 이탈리아나 독일의 화려한 문화가 유행했다고 기록했다.[173][174] 의복은 더욱 다양해지고 사치스러워졌으며, 마차와 같은 운송 수단도 과시적으로 변했다.[175]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아버지 지그문트 3세를 기리기 위해 바르샤바 중심부에 지그문트 기둥을 세웠다.[177] 이 기둥은 고대 로마의 기념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갑옷을 입고 십자가와 칼을 든 왕의 청동 조각상이 22미터 높이의 코린트식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177][178]

지그문트 3세와 그의 아들들은 기념 주화 (화폐학), 유물함, 은제품, 식기, 보석, 왕실 모노그램 또는 문장이 새겨진 귀중한 개인 소지품을 남겼다.

11. 사생활

지그문트 3세는 예술과 초기 바로크 건축을 존경했으며, 폴란드에 온 외국 거장과 기술자들을 후원했다.[186] 그는 파사드와 구조 요소, 성작, 십자가, 촛대 등 성찬례 물건을 설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87] 1621년 르부프 베르나딘 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사찰이 불균형해 보이도록 만든 수석 계획가들을 꾸짖기도 했다.[189] 지그문트는 재능 있는 화가이자 장인이었으며,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에 있는 성 아달베르트의 은제 유물함 등으로 남아 있다.[190][191] 그는 연금술에도 매료되어 연금술사이자 철학자인 미카엘 센디보기우스와 실험을 하기도 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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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는 통치 기간 내내 높은 예절과 궁정 생활을 유지했다.[18] 그는 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무도회와 가면 무도회를 열었으며, 쳄발로를 연주하기도 했다.[179] 국왕은 뛰어난 무용가였으며 폴란드 민속춤과 살타렐로, 파사메초와 같은 이탈리아 춤을 췄다.[180] 1592년 11월 25일 첫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결혼한 후에는 크라쿠프 메인 마켓 광장에서 가면 무도회를 열고, 신하들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181] 지그문트는 젊은 시절 신체 활동을 즐겼으며, 사냥, 스케이트 타기, 축구를 즐겨 했다. 그는 폴란드에 축구를 도입하고 대중화시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182] 하지만 궁정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을 군주에게 부적절하다고 여겼다.[182]

학자들은 지그문트의 극단적인 경건함을 자주 언급했으며, 일부는 그를 광신자라고 부르기도 했다.[164] 그러나 지지자들은 이를 종교적 헌신과 로마 가톨릭 준수로 묘사했다.[18]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보낸 사절들에 따르면, 지그문트는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합창 음악, 설교를 들으며, 단식금욕을 실천했다.[18] 역사학자 파베우 파비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가 반교황적 함의가 있는 책을 보냈을 때, 지그문트가 그 선물을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고 기록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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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의 개인적인 성격은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웠으며 충동적이었다고 한다.[183] 요아힘 르레벨은 그의 성격을 독재적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비교했지만, 지그문트는 비가톨릭교도를 공개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다.[184]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으며,[184] 측근 알브르히트 스타니스와프 라지비우는 국왕이 중요한 조언을 적는 대신 수첩에 올빼미를 스케치했다고 회상했다.[185]

11. 1. 결혼과 자녀

지그문트 3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안나 합스부르크 (1573–1598)로, 1592년 5월 31일에 결혼했다. 안나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와 마리아 안나 (바이에른)의 딸이었다.[193] 안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스웨덴과 개신교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로 알려졌다.[195] 이들 부부 사이에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201]

이름출생사망비고
안나 마리아 (Anna Maria|안나 마리아pl)1593년 5월 23일1600년 2월 9일
카타지나 (Katarzyna|카타지나pl)1594년 5월1594년 6월
브와디스와프 (Władysław|브와디스와프pl)1595년 6월 9일1648년 5월 20일1632년부터 1648년까지 폴란드 국왕으로 재위
카타지나 (Katarzyna|카타지나pl)1596년 9월 27일1597년 6월
크시슈토프 (Krzysztof|크시슈토프pl)1598년 2월 10일1598년 2월 10일



안나가 1598년에 사망한 후,[198][199] 지그문트는 1605년 12월 11일에 안나의 여동생인 콘스탄체 합스부르크 (1588–1631)와 재혼했다.[203] 콘스탄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지그문트의 정치적 노력을 지원했다.[210] 이들 부부 사이에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다.[214]

이름출생사망비고
얀 카지미에시 (Jan Kazimierz|얀 카지미에시pl)1607년 12월 25일1608년 1월 14일
얀 카지미에시 (Jan Kazimierz|얀 카지미에시pl)1609년 3월 22일1672년 12월 16일1648년부터 1668년까지 폴란드 국왕으로 재위
얀 알베르트 (Jan Albert/Olbracht|얀 알베르트/올브라흐트pl)1612년 5월 25일1634년 12월 22일
카롤 페르디난트 (Karol Ferdynand|카롤 페르디난트pl)1613년 10월 13일1655년 5월 9일
알렉산데르 카롤 (Aleksander Karol|알렉산데르 카롤pl)1614년 11월 4일1634년 11월 19일
안나 콘스탄차 (Anna Konstancja|안나 콘스탄차pl)1616년 1월 26일1616년 5월 24일
안나 카타르지나 콘스탄차 (Anna Katarzyna Konstancja|안나 카타르지나 콘스탄차pl)1619년 8월 7일1651년 10월 8일필리프 빌헬름의 첫 번째 부인


11. 2. 우르술라 마이레린

우르술라 마이레린(Ursula Meyerin)은 뮌헨에서 우르술라 깅거로 태어나, 1592년 미래의 왕비 안나의 수행원과 함께 폴란드로 왔다.[216] 국왕은 매력적이고 경건하기로 알려진 우르술라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217]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국정에 관여하게 되었고, 왕비의 궁정에서 오흐미스트르지니(ochmistrzyni)로 임명되었다.[216] 그녀의 정치적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녀의 칭호에 해당하는 옛 독일어 표현인 "마이레린"을 예명이자 공식 이름으로 채택했다.[216] 우르술라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216]

마이레린이 배후 실력자로서 왕실 부부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를 극도로 미움받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왕을 대신해 통치한 스페인의 레르마 공작에 비유되었고, "국왕의 정부", "탐욕스러운 돈벌이", "치마를 입은 장관", "예수회의 편협함" 등으로 경멸적으로 묘사되었다.[215][218] 지그문트의 비서 얀 슈체스니 헤르부르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녀를 "음란한 총애"라고 불렀다.[219]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가 육체적인 것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220][221]

12. 정식 칭호

Sigismundus Tertius Dei gratia rex Poloniæ, magnus dux Lithuaniæ, Russiæ, Prussiæ, Masoviæ, Samogitiæ, Livoniæque, necnon Suecorum, Gothorum Vandalorumque hæreditarius rexla

일본어 번역: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프로이센, 마조비아, 사모기티아대공이자, 스웨덴인, 고트족, 반달족의 세습 왕을 겸하는 신의 은총으로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

지그문트 3세는 예루살렘 왕도 겸하고 있었으며, 스웨덴의 고트족 기원설에 따른 상기 3부족의 왕 및 핀란드 대공의 칭호도 지니고 있었다.

13. 갤러리

지그문트 3세 바사 재위 기간 동안 사용된 깃발

14. 계보

1. 지그문트 3세 바사
요한 3세[222]
카타르지나 폴스카[222]
구스타브 1세[222]마르가레타 레이요호프부드[222]
지그문트 1세[222]보나 스포르차[222]
에리크 요한손 바사[222]세실리아 몬스도터[222]
에리크 아브라함손 레이요호프부드[222]에바 에릭스도터 바사[222]
카지미에시 4세[222]엘리자베스 오스트리아[222]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222]이사벨라 나폴리[2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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