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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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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보니아는 12세기부터 덴마크인과 독일인들의 경제적, 정치적 팽창의 대상이 되었고, 1198년 리보니아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1202년 검의 형제 기사단이 설립되었고, 1237년 튜턴 기사단에 편입되어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418년 리가 대주교는 리보니아 연맹을 조직했고, 1558년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 리보니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했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공동 영토가 되었다. 이후 스웨덴령 리보니아, 리보니아 보예보드십, 리가현, 리보니아현 등으로 분할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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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아
지도
개요
유형역사적 지역
명칭
라틴어Livonia (리보니아)
에스토니아어Liivimaa (리비마)
리보니아어Līvõmō (리보모)
핀란드어Liivinmaa (리빈마)
라트비아어Livonija (리보니야)
리투아니아어Livonija (리보니야)
폴란드어Inflanty (인플란티)
독일어Livland (리블란트), Liefland (리프란트), Eifland (아이플란트)
노르웨이어Livland (리블란트)
덴마크어Livland (리블란트)
스웨덴어Livland (리블란트)
아이슬란드어Lífland (리프란트)
네덜란드어Lijfland (레이프란트)
역사
기원리보니아인
1207년 ~ 1561년테라 마리아나 / 리보니아
관련 기사리보니아 대검 기사단
리보니아 기사단
동방 식민
발트 독일인
1562년 ~ 1795년쿠를란트-제미갈레 공국
관련 기사쿤타 킨테 섬 (1651년 ~ 1661년), 쿠를란트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관련 국가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1569년 ~ 1795년)
1629년 ~ 1721년발트 제국
관련 사건대북방 전쟁 (1700년 ~ 1721년)
관련 사건폴란드 분할 (1772년 ~ 1795년)
1721년 ~ 1918년러시아 제국
관련 사건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18년)
1918년 ~ 1940년라트비아 공화국
관련 사건발트 국가 점령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1940년 ~ 1990년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년 ~ 현재라트비아
구성 지역 (1260년경)
영토리보니아 기사단 (흰색)
쿠를란트 주교국 (보라색)
외젤-비크 주교국 (녹색)
도르파트 주교국 (파란색)
리가 시 (청록색)
리가 대주교국 (올리브색)

2. 역사

1200년경 발트족


12세기부터 리보니아는 덴마크독일의 경제적, 정치적 팽창 대상이었으며, 특히 한자 동맹과 시토회가 주도했다. 1160년경 뤼베크 출신 한자 상인들이 훗날 리가가 될 곳에 무역 거점을 세웠고, 1201년 리가 주교 알베르트 폰 부스호벤이 리가를 건설했다.[1]

이후 리보니아는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되면서 복잡한 역사를 겪는다.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리보니아 십자군과 검의 형제 기사단 (1198–1236): 검의 형제 기사단 설립, 기독교화, 덴마크와의 갈등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리보니아 기사단, 주교령, 리가의 갈등 (1237-1418): 튜튼 기사단의 자치적인 리보니아 기사단이 성립되고, 내부 갈등과 분쟁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리보니아 연맹 (1418-1561): 리보니아 연맹이 결성되고, 중세 저지 독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리보니아 전쟁 (1558-1583):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하고 리보니아가 분할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 분할 통치 시대:
  • 리보니아 공국 (1561-162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지배했다.
  • 스웨덴령 리보니아 (1629-1721): 스웨덴 제국이 지배했다.
  • 리보니아 보예보드십 (1620년대-177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잔존 영토였다.
  • 리가현, 리보니아현 (1721-1918): 러시아 제국이 지배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리보니아는 독립 국가인 라트비아에스토니아로 분할되었다.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 귀족들이 발트 연합 공국을 선포했지만, 곧 해체되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소비에트군과 독일 자유군단이 구 리보니아 지역 지배권을 놓고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군과 싸웠지만 실패했다.

2. 1. 리보니아 십자군과 검의 형제 기사단 (1198–1236)

12세기부터 리보니아는 덴마크독일의 경제적, 정치적 팽창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한자 동맹과 시토회가 주도했다.[1] 1160년경 뤼베크 출신 한자 상인들이 훗날 리가가 될 곳에 무역 거점을 세웠고, 1201년 리가 주교 알베르트 폰 부스호벤이 리가를 건설했다.[1]

1220년대의 ''헨리의 리보니아 연대기''는 리보니아의 기독교화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호엔슈타우펜 독일 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브레멘 대주교 하르트비히 2세의 조카인 알베르트 폰 리가 주교에게 리보니아를 봉토로 부여했다. 알베르트 주교는 리보니아 십자군의 일환으로 1200년에 동쪽에 가톨릭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십자군으로 가득 찬 배들을 이끌고 항해했다.

1202년, 알베르트 주교는 검의 형제 기사단(Fratres militiæ Christi Livoniae|리보니아의 그리스도 군대 형제단la, link=no|Schwertbrüderorden|검의 형제 기사단de)이라는 군사 기사단을 창설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04년에 이 기사단의 설립을 승인했다. 기사단의 목적은 리가 주교령이 리가 만 연안에 거주하는 이교도 쿠로니아인, 리보니아인, 세미갈리아인, 라트갈리아인을 개종시키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기사단 구성원은 독일인 "전사 수도사"로 이루어졌다. 이 기사단의 다른 이름으로는 그리스도 기사단, 검 형제단, 리보니아의 그리스도 군대가 있다. 창설 이후 기사단은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1215년 알베르트는 리가에 대성당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1218년, 그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발데마르는 대신 형제 기사단과 거래를 맺고 에스토니아 북부를 덴마크를 위해 정복했다.

형제 기사단의 본부는 현재 에스토니아의 펠린 (빌랸디)에 있었으며, 그곳에는 기사단장의 성벽이 남아 있다. 다른 요새로는 벤덴 (체시스), 세게볼드 (시굴다), 아셰라덴 (아이즈크라우클레)가 있었다. 펠린, 골딩겐 (쿨디가), 마리엔부르크 (알루크스네), 레발 (탈린)의 지휘관과 바이센슈타인 (파이데)집정관은 기사단장의 5인 수행원에 속했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1232년 11월 24일 서한에서 형제 기사단에게 노브고로드의 공격으로부터 핀란드를 방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기사단의 활동에 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스웨덴은 결국 1249년 제2차 스웨덴 십자군 이후 핀란드를 점령했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투아니아인과 세미갈리아인은 기사단을 궤멸시켰다. 이 참사로 인해 살아남은 형제 기사단은 이듬해 튜튼 기사단에 편입되었으며, 이때부터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체 기사단장(그 자신은 튜튼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에게 복종하는 ''de jure'' 지위)이 이끄는 튜턴 기사단의 자치 지부로서 모든 면(규칙, 의복 및 정책)에서 계속 활동했다.

2. 2. 리보니아 기사단, 주교령, 리가의 갈등 (1237-1418)

튜튼 기사단의 기사(왼쪽)와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의 1870년 그림.


1229년 1월, 리가의 알베르트가 사망하면서 리가 대주교구에서 교구 분쟁이 일어났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추기경 토넹고의 오토를 통해 알나의 발드윈을 분쟁 해결을 위한 교황 사절로 임명했다. 발드윈은 쿠를란트의 항복을 확보했지만, 리보니아의 여러 파벌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1232년 초 뒤나뮌데로 도망쳐 리보니아를 잠시 떠났다. 교황은 그를 세미갈리아의 주교로 임명하고 리보니아 대부분 지역에 교황 사절 지위를 부여했으며, 발드윈은 1233년까지 돌아왔다. 그는 검의 형제 기사단으로부터 레발(현대 탈린) 성을 빼앗으려 했지만, 1233년 8월~9월에 그들은 발드윈을 격파했고, 발드윈은 보복으로 많은 검의 형제 기사단을 파문했다.

당시 리보니아는 발드윈의 세미갈리아 주교구, 도르파트 주교구, 리가의 알베르트의 벅스호벤 가문과 여러 수도원, 대부분의 에스토니아인과 쿠로니아인, 그리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니콜라스의 리가 주교구, 그리고 리가 시의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이전 세대의 역사가들은 발드윈이 발트해 지역 전체를 교회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했지만, 만프레트 헬만(Manfred Hellmann) (1993)은 이러한 생각을 "공상적인 추측"으로 일축했다. 발드윈이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개종시키려는 광범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조사 결과 뒷받침되지 않으며, 교황이 발드윈과 주고받은 서신은 로마에 유리한 조건으로 리보니아의 내부 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리보니아의 내부 갈등이 외부로 번져 리보니아의 외부 안보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교도든 노브고로드인이든 외부 세력과 동맹을 맺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1234년 교황은 발드윈을 소환하고 모데나의 윌리엄으로 교체했다. 교황은 1236년 4월까지 판결을 내리지 않았고, 그때 검의 형제 기사단은 레발을 덴마크 왕에게 반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합의 조건은 스텐스비 조약(1238년 6월 7일)까지 확정되지 않았으며, 이 조약에서 사울레 전투에서 패배하여 현재 튜튼 기사단에 복종하게 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덴마크에 레발과 북부 에스토니아의 대부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향후 영토 획득을 덴마크 왕에게 3분의 2,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3분의 1로 분배하기로 했다.

중세 리보니아 대략 1260년


리보니아 기사단은 튜튼 기사단(또는 독일 기사단)의 자치적인 지부였으며 1418년부터 1561년까지 리보니아 연맹의 일원이었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에 패배한 후, 검의 형제 기사단의 잔당은 1237년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튜튼 기사단에 편입되었다. 1237년에서 1290년 사이, 리보니아 기사단은 쿠를란트, 리보니아, 세미갈리아를 모두 정복했지만, 북부 러시아에 대한 공격은 라크베레 전투 (1268년)에서 격퇴되었다. 1346년, 성 게오르기우스 밤 봉기 이후 기사단은 덴마크발데마르 4세 왕으로부터 에스토니아의 나머지를 매입했다. ''리보니아 헨리 연대기''와 ''리보니아 운문 연대기''는 기사단 영토 내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튜튼 기사단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의 패배와 1525년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 의한 프로이센 영토의 세속화 이후 쇠퇴했지만, 리보니아 기사단은 독립적인 존재를 유지했다.

2. 3. 리보니아 연맹 (1418-1561)

리가 대주교 요하네스 암분디는 1418년에 중세 리보니아(리보니아 기사단, 쿠를란트, 외젤-비크, 도르파트, 리가)의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다섯 개의 교회 국가를 리보니아 연맹으로 조직했다.[3][4] 1419년에는 의회 또는 ''란트탁''이 구성되었다. 발크는 의회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자 동맹의 도시에서 사용되었던 언어인 중세 저지 독일어는 리보니아 지역의 공용어로 기능했지만, 이후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고지 독일어가 공식 언어로 이를 대체했다.[5]

2. 4. 리보니아 전쟁 (1558-1583)

알브레히트 뒤러의 ''리보니아 여인''(1502)


테아트룸 오르비스 테라룸의 1573년 지도에 나타난 리보니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폴란드 왕국 역시 구스타브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구스타브 1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1560년, 마그누스는 외젤-비크 주교령과 쿠를란트 주교령으로부터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도르파트 주교령과 레발 주교령도 그를 지지했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에스토니아 공국에 대한 그의 소유권을 조건부로 인정했다.

1560년 9월 스웨덴의 에릭 14세가 왕이 되자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레발시에 복종을 대가로 상품을 제공하고 위협했다. 1561년 6월 6일 레발시는 그에게 복종했다. 1562년 에릭 14세의 동생 요한은 폴란드 공주 카타르지나 야겔론카와 결혼하여 리보니아 영토를 얻으려 했으나, 에릭 14세는 이를 금지했다.

에릭 14세는 동맹을 잃었고,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는 1561년 8월 스웨덴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2세는 1562년 8월 7일 이반 4세와 조약을 맺어 형제가 더 많은 토지를 얻도록 도왔다. 이로 인해 북방 7년 전쟁 (1563-1570)이 발발하여 스웨덴은 뤼베크 자유 도시, 덴마크, 폴란드와 대립하게 되었다. 1568년 에릭 14세는 정신병에 걸렸고 요한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요한 3세는 폴란드와의 우호로 인해 모스크바에 반대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모든 당사자가 재정적으로 고갈된 후, 1570년 12월 15일 슈테틴 조약으로 북방 7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리보니아 지주와 시민들 사이에는 친 독립파인 "평화당"이 등장했다. 이들은 모스크바와의 합의를 통해 전쟁의 잔학 행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575년, 모스크바가 리보니아에서 덴마크의 주장을 공격한 후 프레데리크 2세는 경쟁에서 물러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요한 3세는 스웨덴이 통제하는 영토를 모스크바가 얻으면서 더 많은 영토를 얻으려는 노력을 중단했다. 1578년에 그는 레치 포스폴리타와 맺은 이해 관계 때문에 리보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싸움을 재개했다. 1578년, 마그누스는 레치 포스폴리타로 은퇴했고 그의 형제는 리보니아의 토지를 거의 포기했다.

리보니아 전쟁 동안, 리보니아 기사단은 1560년 에르게메 전투에서 모스크바 러시아 군대에 패배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나르바 무역로와 북부 무역의 위협을 경고했다. 종교 개혁의 혼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군대를 보낼 수 없었고, 프로이센 공국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한자 동맹도 약해졌다.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이반 4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1561년, 리보니아 전쟁 중, 리보니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하게 되었고[6][7][8] 리투아니아의 종속국이 되었다.[8] 1569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하면서, 리보니아는 국왕과 대공이 직접 관할하는 공동 영토가 되었다.[6][8][9][10][11][12]

이반 뇌제는 1579년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크림 칸국의 침략, 가뭄, 전염병, 오프리치니나로 인해 정부는 혼란스러웠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 (1385–1569)과 연합하여 스테판 바토리를 얻었다. 바토리는 모스크바에 세 차례의 공세로 대응했다. 1582년, 모스크바는 울트라두넨시스 공국에 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인정했다. 마그누스 폰 리프란트가 1583년에 사망한 후, 폴란드는 쿠를란트 공국의 그의 영토를 침공했고, 프레데리크 2세는 그의 상속 권리를 팔기로 결정했다. 외셀 섬을 제외하고, 덴마크는 1585년까지 발트해 지역에서 철수했다. 1598년 기준으로 인플란티 보이보드십은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보이보드십중심 도시
벤덴 보이보드십키에스
도르파트 보이보드십도르파트
파르나와 보이보드십파르나와



1560년대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보장에 따라, 독일어는 공식적인 지위를 유지했다.[5]

1577년, 이반 4세는 연방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리가와 레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2. 4. 1. 리보니아 왕국 (1570-1578)

1570년, 러시아이반 4세는 마그누스 공작을 리보니아 왕국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다른 세력들은 이 임명에 반대했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에게 보호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대표자들 (특히 미코와이 "검은" 라드지비우)과 빌뉴스 조약을 체결한 후, 마지막 리보니아 단장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기사단을 세속화하고 루터교로 개종했다.

이반 뇌제의 군대는 초기에 성공했지만, 결국 1569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은 루블린 연합에 따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결성했다.[1]

1578년, 리보니아의 마그누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권을 인정했지만,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세임에서 비준되지 않았고 덴마크에서도 인정하지 않았다.[2] 리보니아 왕국은 모든 전선에서 모스크바에 의해 패배했다.[2] 같은 해, 마그누스는 쿠를란트 주교령으로 물러났고 그의 형제는 리보니아의 땅을 거의 포기했다.[2]

2. 5. 분할 통치 시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폴란드 왕국 역시 구스타브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1560년 9월 29일 구스타브 1세가 사망하면서 성과를 얻지 못했다.

1560년, 마그누스 (쿠를란트와 외젤-비크의 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은 외젤-비크 주교령과 쿠를란트 주교령으로부터 그들의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도르파트 주교령과 레발 주교령에게도 잠재적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에스토니아 공국에 대한 그의 소유권을 조건부로 인정했다. 리가 대주교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와 그의 보좌 대주교 크리스토프 폰 메클렌부르크, 튜턴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 케틀러는 마그누스에게 리보니아 왕국의 일부를 넘겨주었지만, 더 이상의 양도는 거부했다.

1560년 9월 스웨덴의 에릭 14세는 즉위 후 전쟁 개입을 위해 모스크바와 평화를 협상하고 레발 시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위협했다. 1561년 6월 6일, 레발은 케틀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에릭 14세에게 복종했다. 1562년, 에릭 14세의 동생 요한은 폴란드 공주 카타르지나 야겔론카와 결혼하여 리보니아 영토를 얻고자 했으나, 에릭 14세는 요한의 대외 거래를 금지했다.

에릭 14세는 동맹을 잃었고,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는 1561년 8월 에릭 14세와 조약을 맺었다. 마그누스는 홀슈타인 상속 문제로 좌절했고, 프레데리크 2세는 1562년 8월 7일 이반 4세와 조약을 맺어 스웨덴을 견제했다. 북방 7년 전쟁 (1563-1570)이 발발하여 스웨덴은 뤼베크 자유 도시, 덴마크, 폴란드와 대립했다. 1568년 에릭 14세가 정신병에 걸리자 요한이 스웨덴 요한 3세로 즉위했다.

요한 3세는 폴란드와의 우호 관계로 모스크바에 반대 정책을 펼쳤다. 1570년 12월 15일 슈테틴 조약으로 북방 7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한편, 리보니아 지주와 시민들 사이에서는 "평화당"이 형성되어 모스크바와의 합의를 통해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1575년, 모스크바가 덴마크의 리보니아 주장을 공격하면서 프레데리크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경쟁에서 물러났다. 요한 3세는 모스크바의 영토 확장에 대한 우려로 1578년 레치 포스폴리타와 협력하여 전쟁을 재개했고, 마그누스는 레치 포스폴리타로 은퇴했다.

리보니아 전쟁 (1558–1582) 동안, 리보니아 기사단은 1560년 에르게메 전투에서 모스크바 러시아 군대에 패배했다. 유럽 국가들은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모스크바의 위협을 경고했다. 종교 개혁의 혼란 속에 신성 로마 제국은 군대를 파견하기 어려웠고, 프로이센 공국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한자 동맹 역시 약화된 상태였다. 막시밀리안 2세는 이반 4세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위협을 분산시키려 했다.

1570년, 이반 4세는 마그누스 공작을 리보니아 왕으로 임명했으나, 다른 세력들은 반대했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폴란드 왕국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윌노 조약 체결 후, 마지막 리보니아 단장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기사단을 세속화하고 루터교로 개종했다. 기사단 남부 토지에는 쿠를란트와 세미갈리아 공국이 세워졌고, 나머지 토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압수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에스토니아 북부를 재점령했다.

2. 5. 1. 리보니아 공국 (1561-1621)

1561년, 리보니아 전쟁 중, 리보니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하게 되었고,[6][7][8] 리투아니아의 종속국이 되었다.[8] 1569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하면서, 리보니아는 국왕과 대공이 직접 관할하는 공동 영토가 되었다.[6][8][9][10][11][12]

이반 뇌제는 적들의 평화 제안을 거부하여 1579년에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 영토를 초토화하고 모스크바를 불태웠으며(러시아-크림 전쟁 참조), 가뭄과 전염병이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고, 오프리치니나는 정부를 완전히 혼란시켰다. 리투아니아 대공국루블린 연합을 통해 폴란드 왕국 (1385–1569)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는 강력한 지도자 스테판 바토리를 얻었다(1576). 스테판 바토리는 모스크바에 세 차례의 공세로 대응하여 리보니아 왕국을 모스크바 영토에서 분리하려 했다. 1579년 첫 번째 공세에서 22,000명의 병력으로 폴로츠크를 탈환했고, 1580년 두 번째 공세에서는 29,000명의 병력으로 벨리키예 루키를 점령했으며, 1581년에는 100,000명의 병력으로 프스코프 포위전을 시작했다. 덴마크 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2세는 스웨덴 제국과 폴란드와 달리 모스크바와의 전쟁을 계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580년 스웨덴의 요한 3세와 합의하여 리보니아의 권리를 넘겨주었다. 이 전쟁은 1577년부터 1582년까지 지속되었다. 모스크바는 1582년에야 울트라두넨시스 공국에 대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인정했다. 마그누스 폰 리프란트가 1583년에 사망한 후, 폴란드는 쿠를란트 공국의 그의 영토를 침공했고, 프레데리크 2세는 그의 상속 권리를 팔기로 결정했다. 외셀 섬을 제외하고, 덴마크는 1585년까지 발트해 지역에서 철수했다. 1598년 기준으로 인플란티 보이보드십은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보이보드십중심 도시
벤덴 보이보드십 (województwo wendeńskie)키에스
도르파트 보이보드십 (województwo dorpackie)도르파트
파르나와 보이보드십 (województwo parnawskie)파르나와



1560년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보장에 따라, 독일어는 공식적인 지위를 유지했다.[5]

2. 5. 2. 스웨덴령 리보니아 (1629-1721)

스웨덴은 1626~1629년 폴란드-스웨덴 전쟁 이후 옛 리보니아 공국과 거의 같은 지역을 스웨덴령 리보니아로 획득했다.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스웨덴 지배령이 되었고, 리가는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으며, 리보니아는 스웨덴 전쟁 비용의 3분의 1을 지불했다. 스웨덴은 거의 100년 후인 1710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항복과 1721년 니스타드 조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에 스웨덴령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공국, 스웨덴령 잉그리아를 상실했다.[13]

2. 5. 3. 리보니아 보예보드십 (1620년대-1772)

인플란티 보예보드십, 1620년대–1772.


리보니아 보예보드십 (Livonijos vaivadija|리보니아스 바이바디야lt; Województwo inflanckie|보예부츠트보 인플란츠키에pl)은 리보니아 공국의 행정 구역이자 지방 정부 단위로, 1620년대에 벤덴 보예보드십에서 형성되어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해 있었다.[1]

2. 5. 4. 리가현, 리보니아현 (1721-1918)

러시아 제국대북방 전쟁 과정에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정복하고 1710년 에스토니아 및 리보니아 항복에서 이 지역을 획득했으며, 1721년 니스타드 조약으로 확인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독일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확정했다.[5] 그 후 러시아는 1772년 폴란드 분할 동안 폴란드령 리보니아를 추가했다.

리보니아 현, 1820


1796년, 리가 현은 리보니아 현(Лифляндская губе́рния|Liflyandskaya guberniya|리플랸츠카야 구베르니야ru, Vidzemes guberņa|비제메스 구베르냐lv, Liivimaa kubermang|리비마 쿠베르망et)으로 개칭되었다. 1845년부터 1876년까지, 역사적인 중세 리보니아와 대략 일치하는 지역인 에스토니아 현, 리보니아 현, 쿠를란트 현의 발트 해 지역은 공동 총독의 행정 관할을 받았다. 이 직책을 맡은 사람으로는 백작 알렉산드르 아르카디예비치 수보로프[14]와 백작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슈발로프가 있었다.

리보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이후 독립 국가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분할되었다.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 귀족들이 선포한 "리보니아 대공국"으로도 알려진 발트 연합 공국은 어떤 국가로부터도 승인받지 못했고,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해체되었다. 리보니아는 소멸되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소비에트군과 독일 자유군단은 구 리보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군과 싸웠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3. 1918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던 리보니아는 이후 독립 국가인 라트비아에스토니아로 분할되었다. 1918년 4월 12일 발트 독일 귀족들이 발트 연합 공국("리보니아 대공국")을 선포했지만, 어떤 국가로부터도 승인받지 못했고,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해체되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소비에트군과 독일 자유군단은 구 리보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군과 싸웠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다.[14]

4. 유산

1918년 이후 라트비아에스토니아로 분할된 리보니아의 역사적 지역에서 리보니아어는 100명 미만의 사람들이 제2언어로 사용하며, 사어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리보니아어 원어민은 2013년 6월에 사망했다.[1]

리보니아인들의 비공식 국가는 "민 이잠오"이며, 핀란드의 국가와 에스토니아의 국가의 멜로디를 공유한다.[1]

참조

[1] EB1911 Livonia
[2] 웹사이트 Letter by Pope Gregory IX http://193.184.161.2[...]
[3] 서적 The History of the Baltic States https://books.google[...]
[4] 서적 Conquest and the Law in Swedish Livonia (ca. 1630–1710): A Case of Legal Pluralism in Early Modern Europe https://books.google[...] Brill 2020-06-19
[5] 서적 Deutsch als Fremdsprache im Russland des 18. Jahrhunderts Walter de Gruyter
[6] 서적 Senosios Lietuvos istorija 1009 – 1795 R. Paknio leidykla
[7] 서적 Companion to Russian Studies: Volume 1 Vol 1 Introduction to Ru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서적 Foreword to the Past: a cultural history of the Baltic People https://books.googl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9] 서적 Europe: a Histo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History, philosophically illustrated, from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to the French revolution
[11] 서적 Baltic Essays https://books.google[...] The Latvian Legation
[12] 서적 The Counter-reformation, 1550–1600 https://books.googl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3] 서적 The Northern Wars. War, State and Society in Northeastern Europe 1558–1721 Longman
[14] 웹사이트 Suvorov A.A. governor-general in 1861–66 :: ENCYCLOPAEDIA OF SAINT PETERSBURG http://www.encspb.ru[...]
[15]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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