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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세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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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3세는 1537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핀란드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나 형 에리크 14세와 대립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오른 뒤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리나 야기에우워와 결혼하여 발트해 연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리보니아 전쟁에서 에스토니아를 확보했다. 가톨릭에 호의적이었지만 루터교와의 대립을 피하며, 1581년 핀란드 대공을 창설했다. 그는 스웨덴의 건축 발전에 기여했으며, 159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지그문트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웨덴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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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세 (스웨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한 3세, 1537-92, 스웨덴 국왕 - 국립 박물관 - 15074.tif
요한 밥티스타 반 우터르의 초상화, 1582년
이름요한 3세
스웨덴어Johan III
핀란드어Juhana III
통치
칭호스웨덴 국왕
핀란드 대공
재위1569년 1월 – 1592년 11월 17일
대관식1569년 7월 10일
이전 통치자에리크 14세
다음 통치자지그문트 3세 바사
결혼 및 자녀
배우자카타리나 야기엘론카 (1562년 결혼, 1583년 사망)
구닐라 비엘케 (1585년 결혼)
자녀지그문트 3세, 폴란드와 스웨덴의 왕
안나 바사
요한,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사생아: 소피아, 드 라 가르디 남작부인
루크레치아 길렌히엘름
왕가
가문바사 가문
아버지구스타브 1세
어머니마르가레타 레이온후부드
출생과 사망
출생일1537년 12월 20일
출생지스테게보리 성
사망일1592년 11월 17일
사망지트레 크로노르 성
매장일1594년 2월 1일
매장지웁살라 대성당
종교
종교루터교와 가톨릭 사이에서 중재 시도
서명

2. 생애

요한 3세는 구스타브 1세의 아들로, 핀란드를 통치하며 형인 에리크 14세와 대립하다 일시적으로 유폐되기도 했다. 에리크 14세의 정신병이 심해지자 동생 칼 9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에리크 14세를 폐위시켰다.

요한 3세는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지나와 결혼하여 아들 지기스문드를 얻었다. 이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발트해 진출을 막기 위해 강대국이었던 폴란드와 동맹을 맺으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핀란드의 투르쿠 성을 거점으로 발트해 연안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583년 리보니아 전쟁 종결 후 에스토니아를 확보했다.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던 요한 3세는 장남 지기스문트를 가톨릭교도로 키웠지만, 자신은 개종하지 않고 루터파와의 대립을 피했다. 1581년에는 핀란드 대공이 창설되었다.

요한 3세는 교회 및 재정 개혁을 추진했고, 북방 7년 전쟁을 무승부로 이끌었으며,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하여 핀란드 국경을 동쪽으로 넓혔다. 그러나 1590년부터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들 지기스문트는 1587년 폴란드 왕으로 즉위하여 '''폴란드 바사 왕조'''가 시작되었으나, 가톨릭 신앙으로 인해 스웨덴 상층부의 불만을 샀다. 스웨덴 귀족들은 스웨덴-폴란드 동군 연합에서 스웨덴이 폴란드의 지배를 받을 것을 우려했다.

요한 3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1592년 사망했으며, 섭정은 동생 칼이 맡았다. 아들 지기스문트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 채 왕위를 계승하여 스웨덴 왕위 청구권 문제가 발생했다.

2. 1. 어린 시절과 핀란드 공작

요한 3세는 1537년 12월 20일 스테게보리 성에서 구스타브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터) 레이온후부드의 아들로 태어났다.[2] 1556년 6월 27일부터 핀란드 공작 지위를 가졌으나, 국왕 구스타브 몰래 리보니아 문제에 간섭하려 해 아버지의 불만을 샀다. 구스타브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동부 발트해 지역에서 스웨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핀란드에 배치했다. 요한은 또한 형 에리크와 협력하여 에리크를 대신하여 런던으로 여행을 갔으며, 에릭은 리보니아에서 요한의 이익을 돌보았다. 이 결혼은 스웨덴이 서유럽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했을 것이다. 런던에서의 임무는 실패했지만, 그곳에서 요한은 개신교 재도입과 공동 기도서 (1559년)를 관찰했다. 핀란드 공작은 전례신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카린 한스도터라는 시녀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1556년에서 1561년 사이에 함께 살았으며, 이 기간 동안 네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요한 3세는 아버지 구스타브 1세로부터 핀란드를 받았지만(핀란드 공), 점차 본국과 멀어져 형인 에리크 14세와 대립하여 일시적으로 유폐되기도 했다.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지나와 결혼하여 외아들 지기스문드를 얻었다. 이는 당시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발트해 진출을 막기 위해 강대국이었던 폴란드 왕국과 동맹을 맺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핀란드의 투르쿠 성에 거처를 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영향력을 미쳤다. 1583년 리보니아 전쟁이 종결되어 리보니아에서 철수하는 대신 에스토니아를 확보했다.

1581년, 핀란드 귀족층의 요청을 받아 핀란드 대공이 창설되었다.

2. 2. 형과의 갈등과 투옥

형인 에리크 14세가 왕이 되어 왕권을 강화하면서, 형제는 곧 사이가 틀어졌다.[3] 핀란드 공작이었던 그는 이복 형인 에리크 14세(1560–1569)가 레발과 그 밖의 동발트해 항구를 확보하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요한은 1561년,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아르보가 조약''에 극히 꺼려 하면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이 에릭의 뜻에 반하여 1562년 10월 4일 빌뉴스에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인 캐서린 야기에우온 공주와 결혼했을 때, 그리고 결혼 직후 두 매형이 요한이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리보니아의 영구적인 성 7개를 담보로 받고, 12만달러를 선불로 지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을 때, 갈등은 노골화되었다.

에릭은 이 계약이 ''아르보가 조약''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여겼고 - 실제로도 그랬다 - 이를 알게 되자마자 요한에게 리보니아 성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공작이 이를 거부하고, 그가 스웨덴과 폴란드 중 어느 편을 따를 것인지 분명히 밝히라는 국왕의 요구에 모호한 답변을 하자, 1563년 4월에 반역 혐의로 스웨덴으로 소환되었다.[4]



요한이 소환에 불응하자, 그는 1563년 6월 스톡홀름에서 소집된 신분 의회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생명, 재산, 왕국에 대한 상속권이 박탈되었다. 형을 집행하기 위해 상당한 군대가 준비되었다.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요한은 투르쿠 성에 갇혀 12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몇 주 동안 그곳을 방어하다가, 왕자 대우의 투옥을 약속받고 1563년 8월 12일에 항복했다(Åbo 포위전).[6] 그는 스웨덴으로 끌려가 아내와 함께 그립스홀름 성에 투옥되었다. 요한과 그의 아내가 배를 타고 그립스홀름으로 갈 때, 그들은 30명의 요한 지지자들이 처형된 ''쇠데르포르트''를 지나갔다. 요한은 4년 넘게 포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투옥 생활은 비교적 가벼웠는데, 특히 에릭이 나중에 겪게 될 일과 비교하면 그러했다. 다른 것들 중, 부부는 대량의 책을 받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했던 요한은 아내와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 자녀는 1564년, 두 살에 사망한 엘리자베스(이자벨라), 1566년 지그문트, 1568년 5월 안나로 감금 상태에서 태어났다.

2. 3. 즉위와 통치

1567년 가을, 에리크 14세의 정신 이상 상태 동안( 스투레 살해 사건 참조), 요한은 풀려났고, 이후 공작의 권리 회복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1568년 에릭의 행동은 요한이 새롭게 얻은 자유를 다시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요한은 그의 동생 카를과 일부 귀족들과 함께 에릭의 미움을 받던 부대에 대항하는 공동 봉기를 위한 협정을 맺었다. 이 반란은 7월에 시작되어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9월 중순까지 공작들의 군대가 이미 스톡홀름 외곽에 도착했으며, 1568년 9월 29일에 성문이 열렸다. 에릭 14세는 포로로 잡혔고, 그 직후 요한은 시 당국과 그곳에 모인 귀족 및 전사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 직후 요한은 동생의 가장 신뢰받는 고문인 요란 페르손을 처형했다.[6]

1569년 1월, 요한 3세는 에릭 14세를 폐위시킨 같은 의회 (국회)에 의해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인정은 요한의 양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찰스 공작은 그의 공작령을 확인받았으며, 이는 '아르보가 조항'에 의해 그의 권한에 부과된 제약이 없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그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의무를 제한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귀족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나타낸다. 또한, 고위 귀족들에게는 특별한 특권이 부여되어, 스웨덴 귀족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양한 귀족 계급 간의 구분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켰다.

요한 3세는 아버지 구스타브 1세로부터 핀란드를 받았지만(핀란드 공), 점차 본국과 멀어져 형인 에리크 14세와 대립하여 일시적으로 유폐되었다. 그러나 에리크 14세의 정신병이 심화되자 동생 칼(후의 칼 9세)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에리크 14세를 폐위시켰다.

카타리나 야기에우워 (1526–1583), 요한 3세의 첫 번째 부인(1562년부터), 1569년부터 스웨덴의 왕비,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어머니이자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


요한 3세는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지나와 결혼하여 외아들 지기스문드를 얻었다. 이는 당시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발트해 진출을 막기 위해 강대국이었던 폴란드 왕국과 동맹을 맺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핀란드의 투르쿠 성에 거처를 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영향력을 미쳤다.

요한은 덴마크-노르웨이 및 뤼베크와의 평화 회담을 시작하여 북유럽 7년 전쟁을 종결하려 했지만, 그의 사절들이 광범위한 덴마크의 요구를 수락한 로스킬데 조약을 거부했다. 2년 더 전투를 벌인 후, 전쟁은 스웨덴의 많은 양보 없이 슈테틴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와 성공적으로 싸웠고, 1583년 플루사 조약으로 종결되었는데, 이 전쟁은 스웨덴이 나르바를 재정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반적으로 그의 외교 정책은 그의 아들 지그문트 3세 바사1587년에 왕으로 즉위한 폴란드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았다. 1583년리보니아 전쟁이 종결되어 리보니아에서 철수하는 대신 에스토니아를 확보했다.

요한 3세는 폴란드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인지 가톨릭에 호의적이었고, 장남 지기스문트(후의 폴란드 왕 겸 스웨덴 왕 지그문트 3세)를 가톨릭교도로 키워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폴란드에 살게 하며 폴란드의 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나 국익을 생각해 자신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하지 않았고, 스웨덴 국내에 영향력을 가진 루터파와의 대립을 피했다. 1581년, 핀란드의 귀족층의 요청을 받아 핀란드 대공이 창설되었다.

요한 3세는 스웨덴을 위해 헌신하며 교회 개혁과 재정 개혁을 했다. 또한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을 무승부로 이끌었고,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러시아를 격파하여 핀란드의 국경을 더욱 동쪽으로 넓히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1590년부터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아들 지기스문트(폴란드 왕으로서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왕으로 즉위했다. (1587년) '''폴란드 바사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지기스문트가 가톨릭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폴란드-스웨덴 동군 연합 국가의 성립에 대해 스웨덴 상층부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졌다. 바사 왕조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당시 폴란드는 귀족의 20% 이상이 프로테스탄트였고, 게다가 프로이센 지방 주민의 대부분이 루터파 프로테스탄트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폴란드조차도 완전한 가톨릭 국가는 아니었지만, 스웨덴 귀족은 스웨덴-폴란드 동군 연합에서 스웨덴의 군주가 가톨릭교도인 것으로 인해 스웨덴이 당시 강대국 폴란드의 지배하에 놓일 것을 우려했다.

요한 3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592년에 사망했다. 이 기간 동안의 섭정은 동생 칼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요한 3세의 아들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 채 왕위를 계승하여 스웨덴 왕 지기스문트라고 칭했다. 이로 인해, 후에 스웨덴의 왕위 청구권 문제가 발생한다.(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소멸)

2. 4. 폴란드와의 관계와 종교 정책

요한 3세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야기에우는 아들 지기스문트가 폴란드 왕위를 얻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가톨릭 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러한 목표는 1587년에 달성되었으며,[1] 요한은 스웨덴에 칼마르 동맹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새로운 동군 연합을 안겨주었다. 스웨덴과 폴란드는 발트해에서 종종 직접적인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자신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고, 지기스문트의 스웨덴 귀환을 헛되이 요구했지만, 고위 귀족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이것이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이는 28년간의 전쟁을 치른 스웨덴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요한은 정치적 변화로 대응했다. 이전처럼 의회 귀족에 의존하는 대신, 그는 대부분의 이전 통치 기간 동안 앙숙 관계였던 그의 형제인 의 도움을 구했다. 1587년에 그는 마침내 그의 형제를 설득하여 자신이 1569년에 폐지했던 '아르보가 조항'과 매우 유사한 법령을 승인하게 했다.

요한 3세는 처음에는 교회와의 관계가 좋았지만, 로렌티우스 페트리 대주교는 반란을 승인하는 데 오랫동안 망설였다. 국내 정치에서 요한은 폴란드 출신 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은 분명한 가톨릭적 성향을 보였고, 이는 스웨덴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마찰을 일으켰다. 1575년, 그는 스웨덴에 남아 있는 가톨릭 수도원들이 다시 견습생을 받기 시작하도록 허가했다.

이 모든 것은 요한이 강하게 영향을 받은 중재 신학의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시 유럽을 분열시키고 있던 다양한 경쟁 신앙 사이의 모순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요한은 기독교 초 5세기의 합의(consensus quinquesaecularisla)를 기반으로 로마와 비텐베르크 사이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1571년 로렌티우스 페트리 대주교의 루터교 ''스웨덴 교회 칙령'' 출판을 승인했지만, 1575년 교회로 하여금 교부적 자료로의 회귀를 보여주는 교회 칙령의 부록, Nova ordinantia ecclesiasticala를 승인하게 했다.[10]

스톡홀름의 성 야고보 교회. 요한 3세의 명령에 따라 1580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의 스웨덴-라틴어 ''적색 서(The Red Book)''(''Liturgia suecanae ecclesiae catholicae & orthodoxae conformis'')[11][12]의 반포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으며, 이는 여러 가톨릭 관습을 재도입했고, 20년 동안 지속된 전례 투쟁과 교황과의 협상 시도로 이어졌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요한의 측근인 페테르 페흐트가 로마의 성좌로 여행하는 동안 익사했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했다. 그는 또한 아내의 가족 재산을 나폴리에서 동결된 상태에서 해제하는 데 교황청의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예수회가 스톡홀름의 왕립 신학 대학에 비밀리에 직원을 배치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때때로 칼뱅주의적 성향을 가진 그의 남동생 칼 9세와 신학적으로 대립했으며, 칼 9세는 그의 공작령에서 요한 왕의 전례를 장려하지 않았다.

2. 5. 건축과 문화에 대한 관심

요한 3세는 예술, 특히 건축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스웨덴 역사상 가장 건축에 열정적인 군주였다.[13] 그는 건축가와 건설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건축은 우리의 가장 큰 열망"이라고 직접 쓸 정도로 건축에 대한 열정이 컸다.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숙련된 건축가, 조각가, 화가를 불러들였으며, 성기매너리즘을 포함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원리에 익숙했다.[13]

thumb. 요한 3세는 1556년부터 1563년까지 이곳에 거주하며 중세 요새를 르네상스 건축 궁전으로 변화시켰다.]]

요한 3세는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의 건축술 책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예술 운동의 중심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빌렘 보이, 아렌트 데 로이, 한스 플레밍 등 뛰어난 예술가와 장인들을 주변에 두었다.[13] 또한 파르 가문의 건축가들인 프란치스쿠스 파르, 요한 바프티스타 파르, 도미니쿠스 파르와 같은 외국인 장인들을 고용했다. 그 외에도 회반죽 예술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했다.

요한 3세는 오래된 기념비적인 건물을 보존하고 도시 미관을 가꾸는 데에도 힘썼다. 웁살라 대성당, 베스테로스 대성당, 린셰핑 대성당, 스카라 대성당 등 여러 대성당을 복원하고, 핀란드 투르쿠 대성당과 에스토니아 탈린 성모 마리아 대성당도 복원했다. 또한 바른헴 수도원, 브레타 수도원, 알바스트라 수도원 등 파괴된 수도원 교회들도 복원했다. 스톡홀름에서는 스토르키르칸, 리다르홀멘 교회, 독일 교회, 스톡홀름 등을 복원하고, 클라라 교회와 성 야고보 교회를 새로 지었다.

thumb은 구스타브 바사에 의해 방어 시설로 건설되었으나, 요한 3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요한 3세는 주요 성에 예배당을 지었는데, 바드스테나 성과 칼마르 성의 예배당이 대표적이다. 그는 스톡홀름의 트레 크로노르 궁전을 확장하고 재장식했으며, 웁살라 성을 재건하고, 바드스테나 성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궁전으로 확장했다.[14] 스바르트셰 궁전은 독특한 건물이었고, 칼마르 성에서는 에릭 14세 시대에 시작된 장식이 계속되었다.[14] 보르홀름 성은 요한 3세의 가장 큰 신축 건물이었지만 완공되지 못했다. 브로보르 성과 드로트닝홀름 궁전도 새로 지어졌다.

투르쿠 성, 베스테로스 성, 예블레 성, 스테게보르 성, 린셰핑 성도 재건되었으며, 여러 성에 요새가 추가되었다. 스웨덴은 이탈리아식 시스템을 도입하여 북유럽 국가의 요새 건축 기술을 선도했다.

요한 3세는 웁살라 대성당에 아버지 구스타브 1세와 그의 부인들의 장례 기념비, 그리고 카타리나 야기에우워의 묘비를 세웠다.

2. 6. 죽음과 유산

요한 3세는 형인 칼과의 새로이 시작된 우정마저 곧 시들해졌고, 말년에는 완전히 고독했다. 1592년 봄, 그는 매우 불안하게 만드는 열병에 걸렸다. 그는 공기가 도시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던 스케프스홀멘에 지어둔 정원으로 거처를 옮기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한여름에 이르러 병세는 악화되었다.

thumb에 있는 요한 3세의 묘상 조각, 빌렘 판 덴 블로케의 작품, 웁살라 대성당.]]

그는 1592년 11월 17일 스톡홀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왕국은 대외적 및 내부적 분쟁으로 약화되었고, 혼란과 방치 속에 놓여 즉각적인 미래에 가장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요한 3세는 웁살라 대성당에 묻혔다.

국왕으로서 요한은 발트해에 집중하여 러시아의 풍부한 무역을 장악하려 했다. 1570년 7년 전쟁을 종결하고 덴마크 및 뤼베크와 평화 조약을 맺은 후, 그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1595년까지 다양한 강도로 지속되었다. 1581년 나르바를 점령한 것은 그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공이었다.

핀란드의 도시인 포리는 "Deus Protector Noster"(요한 3세의 모토)를 도시의 모토로 사용한다. 2008년에는 요한 3세가 포리를 건설한 지 450주년을 기념하여 포리 시청 앞에 요한 공작의 동상이 세워졌다.

요한 3세는 스웨덴을 위해 헌신하며 교회 개혁과 재정 개혁을 했다. 또한 덴마크와의 북방 7년 전쟁을 무승부로 이끌었고,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러시아를 격파하여 핀란드의 국경을 더욱 동쪽으로 넓히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1590년부터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아들 지기스문트(폴란드 왕으로서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왕으로 즉위했다. (1587년) '''폴란드 바사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지기스문트가 가톨릭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폴란드-스웨덴 동군 연합 국가의 성립에 대해 스웨덴 상층부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졌다. 바사 왕조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당시 폴란드는 귀족의 20% 이상이 프로테스탄트였고, 프로이센 지방 주민의 대부분이 루터파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폴란드조차도 완전한 가톨릭 국가는 아니었지만, 스웨덴 귀족은 스웨덴-폴란드 동군 연합에서 스웨덴의 군주가 가톨릭교도인 것으로 인해 스웨덴이 당시 강대국 폴란드의 지배하에 놓일 것을 우려했다.

요한 3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592년에 사망했다. 이 기간 동안의 섭정은 동생 칼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요한 3세의 아들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 채 왕위를 계승하여 스웨덴 왕 지기스문트라고 칭했다. 이로 인해, 후에 스웨덴의 왕위 청구권 문제가 발생한다.(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소멸)

3. 가족

요한 3세는 1562년 10월 4일 빌뉴스에서 폴란드 야기엘로 왕가의 카타르지나 야기엘론카(1526–1583)와 결혼했다. 스웨덴에서는 그녀를 "카타리나 야겔로니카"라고 불렀다. 그녀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이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 엘리자베트(이사벨라)(1564–1566)
  • 지그문트(1566–1632), 폴란드 국왕(1587–1632), 스웨덴 국왕(1592–99), 핀란드 대공, 리투아니아 대공
  • 안나(1568–1625)


1585년 2월 21일에는 두 번째 부인인 구닐라 비엘케(1568–1592)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 요한 (1589–1618), 처음에는 핀란드 공작이었으며, 1608년부터는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이었다. 젊은 공작은 사촌 마리아 엘리자베트(1596–1618)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스웨덴의 칼 9세 (재위 1599–1611)의 딸이었다.


그는 정부 카린 한스도터(1532–1596)와의 사이에서 적어도 네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요한 3세는 1562년 카타르지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한 후에도 카린과 그들의 자녀들을 돌보았다. 그는 카린과 아이들을 돌볼 남편을 찾아주었다. 1561년, 그녀는 요한의 친구이자 하인이었던 귀족 클라스 안데르손(웨스트괴테)과 결혼했다. 그들은 브리타라는 딸을 낳았다.

요한은 1568년부터 국왕이 된 후에도 카린과 사생아들을 계속 지원했다. 1572년, 카린은 1563년 에리크 14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첫 번째 남편 대신 라르스 헨릭손과 재혼했고, 요한은 1576년 그에게 귀족 작위를 주어 카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돌보게 했다. 같은 해, 그는 딸 소피아를 여동생 스웨덴의 엘리자베스 공주의 시녀로 성에 들였다. 1580년, 요한은 그녀를 폰투스 데 라 가르디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나중에 야코브 데 라 가르디를 낳다가 사망했다.

  • 소피아 옐렌힐름(1556–1583), 폰투스 데 라 가르디와 결혼[1]
  • 아우구스투스 옐렌힐름(1557–1560)[2]
  • 율리우스 옐렌힐름(1559–1581)[3]
  • 루크레치아 옐렌힐름(1560–1585)[4]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Martin Luther and the Reformation, Volume 2 https://books.google[...]
[2] 웹사이트 Project Runeberg-Nordisk familjebok, Uggleupplagan. 12, sp. 1431. https://runeberg.org[...] 2024-11-12
[3] 웹사이트 Project Runeberg, Svensk uppslagsbok, Andra upplagan. Bd.14, sp.1228. https://runeberg.org[...] 2024-11-10
[4] 웹사이트 Project Runeberg-Nordisk familjebok, Uggleupplagan. 12, sp. 1432. https://runeberg.org[...] 2024-11-12
[5] 웹사이트 Vaakuna - Kansallisarkisto https://heraldica.na[...] National Archives of Finland 2021-05-26
[6] 웹사이트 Project Runeberg, Svensk uppslagsbok, Andra upplagan. Bd.14, s.1229-1230 https://runeberg.org[...] 2024-11-09
[7] 웹사이트 Svenskt biografiskt handlexikon 3. Bielke, Gunilla https://runeberg.org[...] 2024-11-15
[8] 서적 Vasadöttrarna Historiska Media 2010
[9] 서적 Nordisk familjebok / Uggleupplagan. 7. Egyptologi - Feinschmecker
[10] 서적 Johan III och Nova Ordinantia CWK Glerups 1973
[11] 서적 Liturgia svecanae ecclesiae catholicae et orthodoxae conformis 1966
[12] 서적 Christian Worship – Catholic and Evangelical Fortress 1997
[13] 웹사이트 Project Runeberg-Nordisk familjebok, Uggleupplagan. 12, sp. 1436. https://runeberg.org[...] 2024-11-16
[14] 웹사이트 Project Runeberg-Nordisk familjebok, Uggleupplagan. 12, sp. 1435. https://runeberg.org[...] 2024-11-16
[15] 웹사이트 King Johan III https://www.kungli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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