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당강 전투 (938년)
1. 개요
박당강 전투는 938년 응오꾸옌이 지휘하는 베트남 군대가 남한의 침략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즈엉딘응에의 부하 키에우콩티엔이 살해된 후, 응오꾸옌은 키에우콩티엔을 처단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키에우콩티엔은 남한에 구원을 요청하여 유엄이 유홍조를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다. 응오꾸옌은 박당강에 쇠 말뚝을 박아 함정을 설치하고, 썰물 때를 이용하여 남한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939년 응오꾸옌은 왕을 칭하고 고 로아를 수도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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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
남한 (십국)
남한은 오대십국 시대에 유은의 가문이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유엄이 황제를 칭하며 건국하여 남해 무역으로 번성했으나 환관 정치로 혼란을 겪다 송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
응오 왕조 -
십이사군의 난
십이사군의 난은 960년대 베트남에서 응오 왕조 붕괴 후 12명의 군벌이 세력 다툼을 벌인 내전으로, 딘보린이 이들을 토벌하고 딘 왕조를 개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
베트남이 참가한 해전 -
투언안 전투
1883년 8월 프랑스가 투언안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한 투언안 전투는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력 강화와 보호령 조약 체결로 이어졌으며, 프랑스 해군의 공격에 베트남 조정은 굴복했다. -
베트남이 참가한 해전 -
스프래틀리 군도 해전
스프래틀리 군도 해전은 1988년 3월 14일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베트남 간에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을 두고 발생한 무력 충돌로, 중국이 존슨 남암초 등 6개의 암초와 환초를 점령하고 베트남은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2. 배경
930년 10월, 오대십국 시대 중국 남부의 남한은 당시 쿡씨 가문이 통치하던 베트남의 자치 지역인 띤하이 군(정해군)을 공격했다. 쿡씨 가문의 지도자 쿡트어미는 남한 황제 유엄에게 포로로 잡혔다. 931년, 지방의 유력자였던 즈엉딘응에는 군대를 이끌고 남한군을 띤하이 군 경계 밖으로 몰아냈다.
937년, 즈엉딘응에는 부하였던 끼에우꽁띠엔에게 암살당했다. 즈엉딘응에의 사위이자 휘하 장수였던 응오꾸옌은 끼에우꽁띠엔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궁지에 몰린 끼에우꽁띠엔은 남한 황제 유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엄은 이를 베트남을 다시 장악할 기회로 보고, 아들 유홍조를 원정 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통킹만을 거쳐 박당강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유엄 자신도 아들의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하이먼으로 향했다.
938년, 남한의 유홍조가 이끄는 수군이 침입해오자, 응오꾸옌은 먼저 내부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이라 성으로 진군하여 끼에우꽁띠엔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남한 침략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3. 전투 과정
938년, 남한의 황제 유엄(劉龑)은 유홍조(劉弘操)에게 수군을 이끌고 침공을 명했다. 황제 자신도 해문까지 진출하여 후방을 지원했다. 이에 맞서 응오꾸옌(吳權)은 먼저 남한에 협력하던 끼에우꽁띠엔(矯公羨)을 대라성에서 처단하고 방어 준비에 나섰다.
전투는 박당강 하구에서 벌어졌다. 응오꾸옌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박당강의 지형적 특징을 이용하여 강바닥에 쇠로 덮인 말뚝을 박아두는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만조 때 남한 함대를 강 안쪽으로 유인한 뒤, 썰물이 시작되자 총공격을 감행했다. 후퇴하던 남한 함대는 썰물로 드러난 말뚝에 막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응오꾸옌 군대의 백병전에 휘말려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남한군은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고 총사령관 유홍조마저 전사했으며, 남한 황제 유엄은 광저우로 철수했다.
3.1. 응오꾸옌의 전략
938년 남한의 침공 소식을 들은 응오꾸옌은 먼저 대라성(현재의 하노이)으로 진군하여 남한에 협력하던 끼에우꽁띠엔을 처단하고 침략군에 대비했다. 그는 박당강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전략을 세웠다.
박당강은 양쪽 강둑, 특히 좌안에 숲이 우거져 '숲의 강'이라 불렸으며, 해발고도가 낮고 경사가 완만하여 조수간만의 차가 큰 곳이었다. 응오꾸옌은 이러한 특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병사와 백성을 동원하여 숲에서 수천 개의 큰 나무를 베어내고, 그 끝을 날카롭게 깎아 쇠를 씌운 말뚝을 만들었다. 이 말뚝들을 강 하구 근처의 물길 중요 지점에 박아 만조 때는 물에 잠겨 보이지 않게 하고, 강 양쪽에는 군대를 매복시켰다.
938년 가을, 유홍조가 이끄는 남한 수군이 박당강 하구를 통해 침입해 왔다. 응오꾸옌은 만조 시간을 이용하여 일부러 작은 배들을 보내 남한 함대를 강 상류 쪽으로 유인했다. 남한 함대는 각 함선에 50명(선원 20명, 전사 25명, 궁병 2명)을 태운 빠른 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응오꾸옌의 계략에 빠져 함정이 설치된 곳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썰물이 시작되는 것을 신호로 삼아 응오꾸옌은 매복시킨 군대와 함께 총반격을 명령했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빠지는 물살에 당황한 남한군은 서둘러 바다 쪽으로 후퇴하려 했으나, 썰물로 인해 수면 위로 드러난 날카로운 말뚝들에 가로막혀 배들이 좌초되거나 파괴되었다. 남한 함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응오꾸옌의 군대는 기동성이 좋은 작은 배들을 이용해 신속하게 접근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결국 남한군은 배를 버리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과 총사령관 유홍조를 잃는 참패를 당했다. 패배 소식을 들은 남한 황제 유엄은 해문에 있던 본대와 함께 광저우로 철수했다.
3.2. 전투 경과
938년, 남한의 황제 유엄(劉龑)은 유홍조(劉弘操)가 지휘하는 수군을 보내 대월을 침공하게 했다. 유엄 자신도 군대를 해문(海門)으로 이끌고 가 유홍조를 지원했다. 이에 응오꾸옌(吳權)은 수도 대라성(大羅城)으로 진군하여 남한에 붙었던 끼에우꽁띠엔(矯公羨)을 처단하고 침략군에 맞설 준비를 마쳤다.
박당강(白藤江)은 양쪽 강 언덕, 특히 왼쪽 언덕에 숲이 우거져 속칭 '숲의 강'으로 불렸다. 이곳은 해발고도가 낮고 경사가 완만하여 조수간만의 영향을 크게 받는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응오꾸옌은 이러한 지형을 활용하기로 하고, 병사와 백성을 동원해 숲에서 수천 개의 큰 나무를 베어 끝을 뾰족하게 깎고 쇠를 씌운 말뚝을 만들었다. 이 말뚝들을 박당강 하구 근처의 물길 중요 지점에 박아두고, 만조 때는 물에 잠기도록 했으며, 강 양쪽에는 군대를 매복시켰다.
938년 가을, 유홍조가 이끄는 남한 수군이 박당강 하구를 통해 침입해 왔다. 남한 함대는 각 함선에 50명(선원 20명, 전사 25명, 궁병 2명)을 태운 빠른 군함으로 구성되었다. 응오꾸옌은 만조가 되자 일부러 소형 선박들을 내보내 남한 함대를 강 상류 쪽으로 유인했다. 남한 함대가 깊숙이 들어온 후 썰물이 시작되자, 응오꾸옌은 이를 신호로 삼아 매복시킨 군사들과 함께 총공격을 개시했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함께 썰물로 강물이 빠지면서 남한군은 당황하여 바다 쪽으로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물이 빠지면서 수면 위로 드러난 날카로운 말뚝들이 이들의 퇴로를 막았다. 남한 함대는 말뚝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거나 부서지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때 응오꾸옌의 군대는 기동성이 좋은 소형 선박들을 이용해 빠르게 접근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결국 남한군은 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으나, 이 전투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며 총지휘관 유홍조마저 전사했다. 유홍조의 패배 소식이 해문에 있던 황제 유엄에게 전해지자, 그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광저우로 황급히 후퇴했다.
4. 전투의 결과
939년 봄, 응오 꾸옌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고 로아를 수도로 정했다. 이 전투는 찐하이 순 Tĩnh Hải quânvie 지역이 사실상 독립을 달성하면서 베트남 역사가 시작된 중요한 시점으로 평가받는다.
5. 역사적 의의 및 영향
938년의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의 승리는 오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이 실질적인 독립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응오 꾸옌이 사용한 독창적인 전술은 후대의 베트남 군사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5.1. 베트남 독립의 시작
939년 봄, 응오 꾸옌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고 로아를 수도로 정했다. 이 사건은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고 베트남 역사가 시작된 시점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