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엄은 오대 십국 시대 남한의 초대 황제이다. 889년 당나라 소종 재위 기간에 태어나 유지겸의 아들로 성장했다. 917년 황제로 즉위하여 대월을 건국하고, 918년 국호를 한으로 변경했다. 통치 기간 동안 학교와 과거를 설립하고, 주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942년 사망했으며, 아들 유분이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량 (오대)의 청해군절도사 - 전원관
전원관은 오대십국 시대 오월의 제2대 국왕으로, 내정 안정과 외세 방어에 힘썼으며 조세 감면 정책과 남당의 침입을 막아낸 업적이 있으나 화재로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후량 (오대)의 청해군절도사 - 유은 (874년)
유은은 당나라 말기 오대십국 시대의 군벌이자 남한 건국자 유엄의 형으로, 봉주 자사를 거쳐 청해군절도사가 되어 광동과 광서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고 후량으로부터 남평왕에 봉해졌으며, 사후 남한 건국으로 양황제로 추존되었다. - 자오칭시 출신 - 려자
홍콩 배우 겸 가수 려자는 14세에 데뷔하여 1990년대 가수 활동 후 배우로 입지를 다졌으며, 드라마 《궁심계》로 TVB 연기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2008년 은퇴 후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 - 자오칭시 출신 - 장국량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운동 시기 군인인 장국량은 태평천국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강남제독까지 올랐으나, 강남대영 공격 실패 후 익사했으며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도 있다.
유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남한 고조 (南漢高祖) |
중국어 (정체자) | 劉龑 |
중국어 (간체자) | 刘龑 |
병음 | Liú Yǎn |
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천황대제(天皇大帝) |
능묘 | 강릉(康陵) (현대 광저우의 파뉴 구에 위치) |
신분 | |
작위 | 대월 황제 (917–918) 대한 황제 (918년 이후) |
왕조 | 남한 |
생애 | |
출생 | 889년 |
사망 | 942년 6월 10일 (53세) |
재위 | |
남한 황제 | 917년 9월 5일 – 942년 6월 10일 |
이후 | 유빈 |
연호 | 건형(乾亨) 917–925 백룡(白龍) 925–928 대유(大有) 928–942 |
관직 | |
청해군 절도사 | 911 – 917 |
이전 | 유은 |
이후 | 황제 칭제 |
가족 | |
성 | 류(劉) |
부친 | 유지겸 |
모친 | 단씨 |
배우자 | 마황후 |
이름 변천사 | |
초기 이름 | 유암(劉巖) |
변경 | 유척(劉陟) (~896년 변경) 유암(劉巖) (911년 변경) 유공(劉龔) (925년 변경) 유엄(劉龑) (925년 변경) |
기타 | |
regnal name | 911–917: 남해왕(南海王) 917–918: 대월 황제(大越皇帝) 918년 이후: 대한 황제(大漢皇帝) |
2. 생애
유지겸과 측실 단씨(段氏) 사이에서 889년 태어났다.[1] 유지겸의 정실 부인 위씨(韋氏)가 질투심에 생모 단씨를 살해했지만, 어린 유엄을 거두어 자신의 아들처럼 길렀다.[5][6] 성장하면서 키가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전해진다.[5]
911년, 형인 남해왕 유은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남해왕의 지위와 칭하이군 절도사 직을 계승하였다.[12][5] 917년, 광저우(당시 판위)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월(大越)이라 하고 연호를 건형(乾亨)으로 정하였다.[4] 이때 할아버지 유안인을 문황제(文皇帝), 아버지 유지겸을 성무황제(聖武皇帝), 형 유은을 양황제(襄皇帝)로 추존하였다.[4] 이듬해인 918년에는 국호를 한(漢)으로 변경하였다.(후대에 남한으로 구별하여 부른다.)[4]
925년, 궁궐에 백룡이 나타났다는 상서로운 징조를 이유로 연호를 백룡(白龍)으로 바꾸고, 자신의 이름도 원래의 암(巖)에서 용(龍)의 형상을 포함한 공(龔)으로 개명하였다.[18] 그러나 얼마 후, 한 승려가 참서(讖書)에 '유씨를 망하게 하는 자는 공(龔)이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알려주자, 유엄은 《주역》의 '비룡재천(飛龍在天,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이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새로운 글자인 엄(龑)을 만들어 다시 개명하였다.[19][20] 이 글자는 '하늘을 나는 용'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두 번째 개명 시점에 대해서는 941년이라는 기록도 있다.[21])
대유 15년(942년),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2] 그의 능은 강릉(康陵)이라 불리며, 황위는 셋째 아들인 유분이 계승하였다.[2]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유엄은 889년 당나라 소종 재위 기간에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유지겸은 당시 펑주(封州, 현재 광둥성 자오칭시)의 지주였으며, 유지겸의 정실 부인은 이전 링난둥도(嶺南東道, 본부는 현재 광저우시, 광둥성)의 군사 지휘관(절도사)이었던 위주(韋宙)의 조카인 위씨(韋氏)였다. 그러나 유지겸은 집 밖에 비밀리에 첩인 단씨(段氏) 부인을 두었고, 유엄은 단씨에게서 태어났다. 정실 위씨는 이 사실을 알고 단씨를 살해했지만, 갓난아기였던 유엄을 거두어 자신의 아들인 유인(유은)과 유태(劉台)의 동생으로 키웠다.[5][6]유엄은 성장하면서 키가 크고 말타기와 궁술에 모두 능했다고 전해진다.[5] 896년, 형 유인이 당시 군사 지휘관 이지유가 설왕(薛王)으로 임명되면서 칭하이군(清海軍)으로 개명된 도의 군사령관(절도사)이 된 후,[7] 유엄 또한 설왕 이지유의 군사 고문 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유엄'에서 '유지'(劉陟)로 바뀌었다.[5]
901년, 유인의 후임이었던 서언약이 사망하자, 당나라 조정에 유인을 임시 절도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고, 유인은 이후 그 직함을 받았다.[8] 유지는 형 유인 휘하에서 계속 복무했다. 902년에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루광추는 첸주(虔州, 현재의 장시성 간저우시) 지역을 자사로서 통치하며 칭하이군을 공격하여 소주(韶州, 현재의 광둥성 사오관시)를 점령하고 아들 루연창에게 맡겼으며, 조주(潮州, 현재의 광둥성 차오저우시)를 포위했다. 유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주에서 루광추를 격퇴한 후 소주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유지는 직접 공격은 루연창 군대의 기세가 강해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소주를 포위하여 방어를 약화시키자고 조언했다. 유인은 이 조언을 따랐으나, 강물의 수위가 높아져 칭하이 군대의 식량 보급이 어려워지면서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루광추는 첸주에서 구원군을 보내 유인을 소주에서 격퇴했다.[9]
한편, 당나라 조정은 재상 최원을 칭하이의 새로운 절도사로 임명했지만, 최원은 부임 도중 지역 민중 봉기 소식을 듣고 유인이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당시 수도였던 뤄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유인이 당시 당나라 조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강력한 군벌이자 선무절도사였던 주전충에게 뇌물을 바치자, 904년 당 애제는 유인을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10] 유지는 형 유인의 부절도사(副節度使)로 복무했다. 당시 칭하이 관할 지역 내에는 루광추와의 지속적인 분쟁 외에도 여러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곡호(曲顥)는 교주(交州, 현재의 베트남 하노이), 유사정(劉士政)은 계주(桂州, 현재의 광시성 구이린시), 엽광략(葉廣略)은 옹주(邕州, 현재의 광시성 난닝시), 방거소(龐巨昭)는 용주(容州, 현재의 광시성 위린시), 유창루(劉昌魯)는 고주(高州, 현재의 광둥성 마오밍시), 그리고 유지의 아버지와는 다른 인물인 유잠(劉潜)은 신주(新州, 현재의 광둥성 윈푸시)를 각각 통치했다. 또한 주강 동쪽에는 유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약 70개의 진영이 있었다. 유인이 군사 문제를 유지에게 맡긴 후, 유지는 점차 이들 군벌을 몰아내거나 복종시켜 영남 지역 최고의 장군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5]
이러한 전투 중 하나는 910년경에 있었는데, 당시 유인은 주전충이 세운 후량의 봉신으로서 남평왕(南平王) 또는 남해왕(南海王)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유지는 고주에서 유창루를 공격했다. 유창루는 공격을 막아냈지만, 유씨 형제에게 계속 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방거소와 함께 초나라 왕 마은에게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마은은 군대를 보내 유창루와 방거소를 안전하게 초나라 영토로 호송하고, 그의 장수 요언장에게 용주를 지키도록 했다.[11]
911년, 유인이 병이 깊어졌다. 그는 유지를 임시 절도사로 추천하는 상소를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유지는 절도사 직을 이어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량 태조는 유지를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12] 그의 이름은 다시 '유엄'(劉巖)으로 바뀌었다.[5]
2. 2. 황제 즉위 및 통치
형 유은이 911년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남해왕·정해군 절도사가 되었다.[4]917년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는 대월(大越), 연호는 건형으로 정했다. 할아버지 유안인을 문황제(文皇帝), 아버지 유지겸을 성무황제(聖武皇帝), 형 유은을 양황제(襄皇帝)로 추존하였다.[4] 같은 해, 형 유은의 딸이자 자신이 청원공주로 책봉한 조카 유화를 북동쪽 이웃 나라인 민의 왕 왕심지의 아들 왕연군과 결혼시켜 양국 관계를 공고히 했다.[4][5][14]
건형 2년(918년),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국호를 월(越)에서 한(漢)으로 변경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후 그의 국가는 남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
건형 3년(919년), 월국부인(越國夫人) 마씨(馬氏)를 황후로 책봉하였다.[4]
920년, 양동건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학교와 과거 제도를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촉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모색했다.[15]
922년, 점술가의 말을 믿고 수도 흥왕(興王)을 떠나 민(閩)과의 경계 근처 메이커우(梅口, 현재의 메이저우)를 방문했다. 민의 장군 왕염미(王延美)가 기습을 시도했으나, 유엄은 미리 정보를 듣고 민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탈출했다.[15]
924년, 민(閩)을 공격하여 팅저우(汀州, 현재의 룽옌)와 장저우(漳州, 현재의 장저우) 경계까지 진격했으나, 민의 반격에 패배하여 후퇴했다.[16]
925년, 북쪽의 후당 건국 소식을 듣고 두려움을 느껴 관리 허사(何詞)를 보내 자신을 '대한국왕(大漢國王)'으로 칭하며 후당 황제에게 겸손한 태도로 우호 관계를 모색했다. 그러나 허사가 돌아와 후당 황제가 오만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하자, 유엄은 더 이상 후당과 교류하지 않았다.[16] 같은 해, 궁궐에서 흰 용이 나타났다는 보고에 따라 연호를 백룡(白龍)으로 바꾸고 이름도 공(龔)으로 개명했다.[18] 그러나 외국 승려가 '공(龔)' 자가 남한의 운세에 불길하다고 하여, 주역의 '비룡재천(飛龍在天)'의 뜻을 따와 직접 만든 글자인 엄(龑)으로 다시 개명했다.[19][20] (''자치통감''은 이 두 번째 개명을 941년의 일로 기록하기도 한다.[21]) 또한 장화국(長和國) 황제 정민(鄭旻)의 요청으로 조카 증성공주(增城公主)를 정민에게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6][18][19]
928년, 초(楚)나라 함대가 봉주(封州)를 포위하자, 주역 구절을 길조로 여겨 연호를 대유(大有)로 바꾸었다. 장군 소장(蘇章)에게 함대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여, 소장은 거짓 후퇴 후 매복 작전으로 초나라 함대를 격파했다.[22]
930년, 장군 양극정(梁克貞)과 이수부(李守鄜)를 보내 교주(交州)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곡승미(曲承美)를 사로잡아 곡씨 정권을 종식시켰다. 잠시 정해군(靜海軍)을 통치 하에 두었으며, 양극정은 참파까지 진격하여 약탈했다. 이진(李進)을 교주 수비로 남겼다.[23] 그러나 931년 애주(愛州)의 즈엉 딩 응에(楊廷藝)가 군사를 일으켜 교주를 포위했다. 뇌물을 받은 이진은 방비하지 않았고,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교주는 함락되었다. 이진은 흥왕(興王)으로 도주했으나 처형되었고, 구원군 장수 정보(程寶)는 교주 탈환에 실패하고 전사했다.[23]
932년, 아들 19명을 왕으로 봉했다.[24]
934년, 마황후가 사망했다.[25] 같은 해, 당시 생존한 장남인 진왕(秦王) 유홍도에게 호위군 편성을 허락했으나, 이들이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문제를 일으켰다. 재상 양동천(楊洞潛)이 유홍도의 행실을 지적하며 간언했으나 유엄은 듣지 않았고, 양동천은 호위병들의 약탈 행위에 실망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한 후 복귀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5]
936년, 초나라의 몽주(蒙州, 현재의 우저우)와 계주(桂州, 현재의 구이린)를 공격했으나, 초나라 왕자 마희범이 직접 방어에 나서자 물러났다.[26]
937년, 교공선(矯公羨)이 즈엉 딩 응에를 살해하고 정해군을 장악했다. 938년, 오권(吳權)이 애주에서 봉기하여 교공선을 공격하자, 교공선은 남한에 구원을 요청했다. 유엄은 이를 기회로 삼아 아들 유홍조를 교왕(交王)으로 봉하고 경해 절도사로 삼아 군대를 보내 정해군을 다시 장악하려 했다. 유엄 자신도 후속 부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그러나 유홍조가 백당강에 접근했을 때, 오권은 이미 교공선을 격파하고 교주를 점령한 상태였다. 오권은 백당강에서 쇠말뚝을 이용한 함정으로 만조 때 진격한 유홍조의 함대를 썰물 때 좌초시킨 후 공격하여 유홍조를 포함한 남한군 과반수를 섬멸했다(백당강 전투). 이 소식을 들은 유엄은 비통해하며 자신의 함대를 철수시켰다.[27]
939년, 관리 조광의(趙匡義)는 마황후 사망 이후 남한과 초나라 사이에 사절 왕래가 없었음을 지적하며 관계 개선을 건의했다. 유엄은 이를 받아들여 이서(李紓)를 사절로 보냈고, 이후 초나라도 사절을 보내 양국 관계가 재개되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941년, 유엄은 후진의 고조에게 초나라를 함께 공격하여 영토를 나누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21]
942년, 유엄은 병이 깊어졌다. 그는 두 아들 진왕(晉王) 유홍도와 진왕(秦王) 유홍희가 오만하고 절제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어린 아들 월왕(越王) 유홍창을 적절한 후계자로 여겼다. 그는 유홍도와 유홍희를 수도 밖으로 내보내고 유홍창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장자를 폐하면 혼란이 생길 것이라는 관리 소익(蕭益)의 설득으로 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는 곧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능은 강릉(康陵)이라 이름하였다. 유홍도가 황제(상제)가 되었다.[2]
''자치통감''은 유엄의 통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2]
: 고조[(유엄)]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정치적 수완이 있었지만, 자만심이 강하여 종종 중원의 황제들을 "낙주(洛州)의 태수"[(뤄양)]라고 불렀다. 영남 지역은 희귀한 보석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그의 생활은 사치스러웠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여 금, 옥, 진주로 궁궐을 장식했다. 그는 형벌이 잔혹하여 코를 베고, 혀를 자르고, 사지를 절단하고, 임산부를 가르고, 사람을 뜨거운 쇠 기둥에 묶고, 삶아 죽이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때때로 독사를 물에 넣어 죄수를 던져 넣고 이를 "물 감옥(水牢)"이라고 불렀다. 재상 양동천이 그의 방식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는 양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만년에는 지식인에 대해 특히 의심하여 관료들이 국가보다는 자손의 안위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환관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에는 많은 환관들이 생겨났다.
2. 3. 대외 관계
유엄은 절도사가 된 이후 주변 세력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902년, 첸주(虔州, 현재의 장시성 간저우) 자사 루광추가 칭하이(淸海)를 공격하여 소주(韶州, 현재의 광둥성 사오관)를 점령하고 조주(潮州, 현재의 차오저우)를 포위했다. 유엄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주에서 루광추를 격퇴했으나, 소주 공략에는 실패하고 루광추의 구원군에게 패배했다.[9]
904년, 유엄은 당시 중원의 실력자였던 선무절도사 주전충에게 뇌물을 보내 당나라 애제로부터 정식으로 칭하이 절도사로 임명받았다.[10] 이후 유엄은 동생 유지에게 군사 업무를 맡겨 령남 지역의 다른 군벌들을 점차 복속시켰다.[5]
910년경, 당시 후량의 봉신(남평왕 또는 남해왕)이었던 유엄은 고주(高州, 현재의 마오밍)의 유창루(劉昌魯)를 공격했다. 유창루는 초나라 왕 마인에게 항복했고, 마인은 장수 요언장을 보내 용주(容州, 현재의 위린)를 점령했다.[11] 911년, 유엄은 사오주(韶州)를 점령하고 다시 롱주(容州)를 공격하여 야오 옌장을 몰아내고 롱주와 가오주(高州)를 장악했다. 후량 태조 주전충이 마인과 유엄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려 했으나, 유엄은 후량에 대량의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 응답했다.[12][5]
913년, 유엄은 마인과 혼인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고,[12] 915년 마인의 딸 마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유엄은 오월의 첸 류가 자신보다 높은 왕호를 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후량에 난위에왕(南越王)으로 봉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후량 황제 주전(朱瑧)이 이를 거절하자, 유엄은 중원이 혼란한 상황에서 천명을 받은 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멀리 떨어진 가짜 왕조를 섬길 이유가 없다고 선언하며 후량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조공을 중단했다.[13]
917년 가을, 유엄은 수도 판위(潘禺, 현재의 광저우)에서 스스로 월(Yue)국의 황제를 선포했다.[4] 그는 자신의 조카이자 청원공주로 책봉한 유화를 북동쪽 이웃인 민나라 왕 왕심지의 아들 왕연군과 결혼시켜 양국 관계를 다졌다.[4][5][14] 918년에는 국호를 한(漢)으로 변경했다.(이후 남한으로 불림)[4] 920년에는 전촉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모색했다.[15]
922년, 민(閩)과의 국경 지역을 방문했을 때 민나라 장수 왕염미(王延美)의 기습 공격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15] 924년에는 민나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배하여 물러났다.[16]
923년 후량이 후당에 의해 멸망하고 이존욱(후당 장종)이 황제를 칭하자, 유엄은 새로운 강대국의 출현에 잠시 긴장하여 925년 사신 허사(何詞)를 보내 우호 관계를 모색하는 한편 후당의 실정을 파악하려 했다. 허사가 돌아와 후당 장종이 오만하고 사치스러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하자, 유엄은 더 이상 후당과 교류하지 않았다.[16] 같은 해, 장화(대장화국) 황제 정민(鄭旻)의 요청으로 조카 증성 공주를 정민에게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6][18][19]
928년, 초(楚)나라 함대가 남한의 봉주(封州, 현재의 펑카이 현)를 포위하자, 유엄은 장군 소장(蘇章)을 보내 매복 작전으로 초 함대를 격파했다.[22] 930년에는 장군 양극정(梁克貞)과 이수부(李守鄜)를 보내 교주(交州, 현재 베트남 북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지역 토착 세력인 곡씨 가문의 곡승미(曲承美)를 사로잡아 경해(靜海, 베트남어: Tĩnh Hải) 지역을 일시적으로 남한의 통치하에 두었다. 양극정은 더 나아가 참파까지 진격하여 보물을 약탈하기도 했다.[23] 그러나 이듬해인 931년, 즈엉 딩 응에가 봉기하여 교주를 탈환하면서 남한의 경해 지배는 단명으로 끝났다. 남한의 구원군은 패배했고 지휘관들은 처형되거나 전사했다.[23]
936년, 유엄은 초나라의 몽주(蒙州, 현재의 우저우)와 계주(桂州, 현재의 구이린)를 공격했으나, 초나라 왕자 마희범의 방어로 물러났다.[26] 938년, 경해 지역에서 교공선이 즈엉 딩 응에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자, 즈엉 딩 응에의 부하였던 오권이 교공선을 공격했다. 교공선이 남한에 구원을 요청하자 유엄은 이를 기회로 삼아 아들 유홍조를 보내 경해를 다시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유홍조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오권은 이미 교공선을 죽이고 교주를 점령한 상태였다. 유홍조는 오권과의 백당강 전투에서 오권의 함정에 빠져 대패하고 전사했으며, 유엄은 큰 슬픔 속에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27]
939년, 조광의의 건의로 초나라와 사절을 교환하며 관계를 복원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941년에는 후진의 고조에게 초나라를 함께 공격하여 영토를 나누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21]
2. 4. 최후
대유 15년(942년), 유엄은 심각한 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 중 진왕(秦王) 유홍두(劉弘度)와 진왕(晉王) 유홍희(劉弘熙)가 오만하고 절제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반면, 어린 아들인 월왕(越王) 유홍창을 더 적합한 후계자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유엄은 유홍두와 유홍희를 수도 밖으로 보내고 유홍창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하인 소익(蕭益)이 나이가 많은 아들을 제치고 어린 아들을 세우면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간언하자, 유엄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2]같은 해, 유엄은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능의 이름은 강릉(康陵)이라 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셋째 아들인 유홍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2]
3. 가족 관계
- '''조부''': 유안인(劉安仁)
- '''아버지''': 유지겸(劉知謙) 또는 유겸(劉謙). 사후 대조(代祖)로 추존되었고, 시호는 성무황제(聖武皇帝)이다.[5][6]
- '''적모''': 무황후(武皇后) 위씨(韋氏)
- '''생모''': 단 부인(段夫人). 아버지 유지겸의 첩이었으며, 889년 정실 위씨에게 살해당했다.[5][6]
- '''형''': 유은(劉隱, 사후 열종(烈宗)으로 추존), 유대(劉臺)
- '''황후''': 마황후(馬皇后, ? ~ 934년). 초의 건국자 마은(馬殷)의 딸이다.[13][4] 919년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원래 봉호는 월국부인(越國夫人)이었다. 934년에 사망했다.
- '''후궁'''
- 소의 조씨(昭儀 趙氏). 훗날 황제가 되는 유분을 낳았으며, 아들이 즉위한 후 황태비(皇太妃)가 되었다.[19][28]
- 재인 소씨(才人 蘇氏)
3. 1. 자녀
유엄은 총 19명의 아들을 두었다.[6] 이 중 첫째 유요추와 둘째 유귀도는 일찍 사망했고,[6] 셋째 유분(유홍도)과 넷째 유성(유홍희)이 차례로 황위를 계승했다.[2] 아홉째 유홍조는 전투 중 사망했으며,[32] 나머지 아들 대부분은 황제가 된 넷째 아들 유성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29][30][31][33][34]3. 1. 1. 황자
순서 | 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별칭 | 비고 |
---|---|---|---|---|---|---|
1 | 옹왕(邕王) | 유요추(劉耀樞) | ? ~ ? | 요절함[6] | ||
2 | 강왕(康王) | 유구도(劉龜圖) | ? ~ ? | 요절함[6] | ||
3 | 진왕(秦王) | 유홍도(劉弘度) (개명 후: 유분(劉玢)) | 920년 ~ 943년 | 소의 조씨[19][28] | 빈왕(賓王) | 제2대 황제 상제(殤帝)[2] |
4 | 진왕(晉王) | 유홍희(劉弘熙) (개명 후: 유성(劉晟)) | 920년 ~ 958년 | 제3대 황제 중종(中宗)[2] | ||
5 | 월왕(越王) | 유홍창(劉弘昌) | ? ~ 944년 | 944년 유성에게 살해됨[29] | ||
6 | 제왕(齊王) | 유홍필(劉弘弼)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7 | 소왕(韶王) | 유홍아(劉弘雅) | ? ~ 945년 | 945년 유성에게 살해됨[31] | ||
8 | 진왕(鎭王) | 유홍택(劉弘澤) | ? ~ 944년 | 944년 유성에게 살해됨[29] | ||
9 | 교왕(交王) | 유홍조(劉弘操) | ? ~ 938년 | 만왕(萬王) | 938년 전투 중 사망[32] | |
10 | 순왕(循王) | 유홍고(劉弘杲) | 923년 ~ 943년 | 943년 유성에게 살해됨[6] | ||
11 | 은왕(恩王) | 유홍위(劉弘暐)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12 | 고왕(高王) | 유홍막(劉弘邈) | ? ~ 954년 | 954년 유성에게 살해됨[33] | ||
13 | 동왕(同王) | 유홍간(劉弘簡)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14 | 익왕(益王) | 유홍건(劉弘建)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15 | 변왕(辨王) | 유홍제(劉弘濟)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16 | 귀왕(貴王) | 유홍도(劉弘道)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17 | 선왕(宣王) | 유홍소(劉弘昭)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
18 | 통왕(通王) | 유홍정(劉弘政) | ? ~ 955년 | 955년 유성에게 살해됨[34] | ||
19 | 정왕(定王) | 유홍익(劉弘益) | ? ~ 947년 | 947년 유성에게 살해됨[30] |
4. 평가
《자치통감》은 여러 자료의 의견을 종합하여 유엄의 통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2]
유엄은 뛰어난 관찰력과 정치적 수완을 지녔지만, 자만심이 강하여 종종 중원의 황제들을 "낙주(뤄양)의 태수"라고 칭하며 얕잡아 보았다. 영남 지역은 희귀한 보물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그의 생활은 매우 사치스러웠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여 금, 옥, 진주 등으로 궁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의 형벌은 매우 잔혹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코를 베거나 혀를 자르고,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을 시행했으며,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가르거나 사람을 뜨거운 쇠기둥에 묶고 삶아 죽이는 등의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독사를 풀어놓은 물에 죄수를 던져 넣는 형벌도 있었는데, 이를 "물 감옥"이라고 불렀다. 재상 양동천이 이러한 잘못된 방식을 바로잡으려 간언했지만, 유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말년에는 지식인 관료들을 특히 의심하여, 그들이 국가보다는 자신의 자손을 더 챙길 것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환관들을 신임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남한 조정에는 환관 세력이 크게 늘어나는 폐단을 낳았다.[2]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2]
서적
Zizhi Tongjian
[3]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https://archive.org/[...]
[6]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https://archive.org/[...]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간행물
The Study and Explanation of the Fujian Discovery of the Tombstone Text of the Deceased Lady Minghui, Lady Liu of Yan, from Pengcheng, of Tang
http://3xb.nbu.edu.c[...]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Zizhi Tongjian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20]
서적
Book of Southern Tang
[21]
서적
Zizhi Tongjian
[22]
서적
Zizhi Tongjian
[23]
서적
Zizhi Tongjian
[24]
서적
Zizhi Tongjian
[25]
서적
Zizhi Tongjian
[26]
서적
Zizhi Tongjian
[27]
서적
Zizhi Tongjian
[28]
서적
Zizhi Tongjian
[29]
서적
Zizhi Tongjian
[30]
서적
Zizhi Tongjian
[31]
서적
Zizhi Tongjian
[32]
서적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33]
서적
Zizhi Tongjian
[34]
서적
Zizhi Tongjian
[35]
논문
남한劉氏の祖先につきて
http://id.nii.ac.jp/[...]
東洋文庫
1916-05
[36]
뉴스
劉復愚遺文中年月及其不祀祖問題
http://www2.ihp.sini[...]
中央研究院歴史語言研究所
193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