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익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순익은 대한제국 관료 출신으로, 1919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두 차례의 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를 제작·배포했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국독립당 행정위원과 당무위원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슬하에 6남 8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 중 박승하와 박병하는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순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순익
원래 이름朴順益
출생일1881년 7월 23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이
사망일1934년 10월 30일
사망지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
거주지조선 경상남도 함안
조선 전라북도 전주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
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
대한제국 경상남도 함안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
본관밀양(密陽)
직책
직책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군 예하 군서기관
임기1906년 6월 15일 ~ 1908년 5월 20일
정치 활동
정당무소속
경력한국독립당 행정위원 겸 당무위원
종교
종교유교(성리학) → 불교 → 개신교
가족 관계
배우자전주 최씨 부인(사별), 한점순(재혼)
자녀슬하 6남 8녀 (장남 박기하, 차남 박문하, 5남 박승하, 6남 박병하)
학력
학력전라북도 전주소학교
훈장
서훈1992년 3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기타 정보
웹사이트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군주
군주대한제국 고종 이형
대한제국 순종 이척
섭정황태자 이척(前)
의친왕 이강(前)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불교를 이탈한 사람 -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군사 전략가, 공산주의 이론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아버지로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최고지도자로서 중국을 통치했고, 마오쩌둥 사상의 창시자로서 그의 정책과 통치는 중국 사회, 경제, 문화,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불교를 이탈한 사람 - 안철수
  • 일제강점기의 개신교도 - 김형직
    김형직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의 아버지로, 조선국민회에 참여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북한에서는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로 추앙받지만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는 증언도 있다.
  • 일제강점기의 개신교도 - 심우섭 (1890년)
    심우섭은 청송 심씨로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일신보》 기자와 소설가로 활동하며 이광수 소설 등장인물의 모델이기도 했으나, 친일 활동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 밀양 박씨 - 박원순
  • 밀양 박씨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2. 생애

박순익은 대한제국 시기 잠시 하위 관료직을 지냈으나, 1908년 관직에서 물러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경상남도 함안에서 두 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활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징역 8개월을 복역하였다. 출소 후에는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한국독립당의 행정위원과 당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2.1. 대한제국 관료 퇴임과 독립운동 투신 (1908년 ~ 1919년)

대한제국 시기 잠시 하위 관료직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1908년 관료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10년 고향인 경상남도 함안에서 경술국치를 겪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3월 24일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함안군 칠원읍의 장날을 이용하여 대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평안남도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같은 해 겨울 출소하였다.

2.1.1. 3·1 운동 참여와 함안 만세 시위 주도

대한제국 시기 잠시 하위 관료직을 지냈던 그는 1908년 관료직에서 물러난 후, 1910년 고향인 경상남도 함안에서 경술국치를 겪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3월 24일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함안군 칠원읍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상징적 기관 중 하나인 칠원주재소를 습격하고 "대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평안남도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같은 해 겨울,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하였다.

2.1.2. 체포, 재판, 그리고 투옥

1919년 3월 24일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의 장날을 이용하여 대한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여러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太極旗)를 직접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함안 칠원주재소를 습격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국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평안남도 평양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같은 해인 1919년 겨울에 출소하였다.

2.2. 정당 활동 (1920년 ~ 1921년)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한국독립당의 행정위원과 당무위원을 겸임하며 활동하였다.

2.3. 대한민국 정부 포상 (199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2년 3월 1일에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했다.

3. 가족 관계

생전에 상배(喪配)하여 한 차례 재혼하였으며, 슬하에 6남 8녀를 두었다.

* 오남(다섯째 아들): 박승하(朴勝夏, 1923년 7월 12일 ~ 1972년 8월 19일) - 첫 부인인 전주 최씨 소생이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임관하여 1951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 육남(여섯째 아들): 박병하(朴秉夏, 1932년 5월 23일 ~ 2013년 1월 30일) - 재혼한 부인인 해주 석씨 소생이다. 1956년 육군사관학교 12기(하나회)로 임관하여 1971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