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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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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주 석씨는 중국 명나라의 석성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석성은 명나라에서 진사로 급제하여 호부상서와 병부상서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데 기여했다. 석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주와 해주에 정착했고, 장남 석담은 해주에 정착하여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해주 석씨는 경상남도 산청군과 함양군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1985년에는 2,664명, 2000년에는 942명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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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주 석씨 - 석성 (명나라)
    석성은 명나라의 관료로, 조선의 종계변무 해결에 기여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을 청원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하려다 실패하여 삭탈관직 후 옥사했으며 그의 자식은 한국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해주 석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족 이름해주 석씨
한자 표기海州 石氏
관향황해도 해주시
시조석성(石星)
중시조석담(石潭)
집성촌경상남도 산청군 영서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나라한국
1985년 인구2,664명

2. 역사

명나라병부상서였던 석성임진왜란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심유경을 통해 추진했던 왜군과의 화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투옥되었다.[5] 석성은 옥중 유언을 남겼고, 그의 아들들은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정착하였다. 차남 석천(石洊)은 성주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고, 장남 석담(石潭)은 해주에 정착하여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5]

2. 1. 시조 및 유래

시조 '''석성'''(石星)은 명나라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1559년 진사가 되고,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에 발탁되었으며, 신종 때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 종계변무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

《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따르면, 석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 호부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5]

그 후 명나라 신종은 사신(使臣) 심유경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성에게 물어 투옥시켰다.[5]

석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중 차남 석천(石洊)은 1597년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면서 성주 석씨가 되었고, 장남 석담(石潭)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해주(海州)로 사적(賜籍)하였다. 그 후 석담(石潭)의 작은 아들 석귀당(石貴棠)과 손자 석난(石亂 : 귀실의 아들)이 청나라 사람을 피하여 산음현(山陰縣) 모호리(毛好里 :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를 이어왔다.[5]

2. 2. 임진왜란과 석성

석성명나라 위군 동명(東明) 사람으로, 1559년 진사가 되고, 신종 때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1584년 종계변무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

《해주석씨족보》에 따르면, 석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종계변무임진왜란 때 원병을 지원하는 데 공헌했다고 한다.[5]

이후 신종은 심유경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석성에게 책임을 물어 투옥시켰다.[5]

2. 3. 해주 정착

명나라 신종은 심유경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和議)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성에게 물어 투옥시켰다.[5]

석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장남 석담(石潭)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柳氏)를 모시고 해주에 이르자 왕(王)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해주로 사적(賜籍)하였다.[5] 그 후 석담의 작은 아들 석귀당(石貴棠)과 손자 석난(石亂 : 귀실의 아들)이 청나라 사람을 피해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추내동(산음현(山陰縣) 모호리(毛好里))으로 이주하여 세계를 이어왔다.[5]

2. 4. 분파

해주 석씨는 분파되지 않았다. 다만, 시조 석성(石星)의 아들 대에서 성주 석씨(星州石氏)와 해주 석씨로 나뉘었다.

  • 장남 석담(石潭)은 어머니 류씨(柳氏)와 함께 해주에 정착하여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 차남 석천(石洊)은 1597년 배를 타고 성주 대명동(星州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5]

3. 집성촌

지역1985년2000년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580가구 2,664명270가구 942명
경상남도 함양군580가구 2,664명270가구 942명


4. 항렬자

12세13세14세15세16세17세
尙 (상)宗 (종)章 (장)鳳 (봉)相 (상)熙 (희)


참조

[1] 서적 Smiles of the Baby Buddha: Appreciating the Cultural Heritage of Kyongju Changbi Publishers
[2]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해주석씨 海州石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3] 논문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4]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0
[5]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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