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홍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진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여성 해방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서울로 이주하여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대 경성트로이카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0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부녀총동맹에서 활동하며 여성 해방을 주장했으나, 남편 김태준의 사망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한국 전쟁 중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월북자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월북자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 박진홍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밀양 박씨 |
| 로마자 표기 | Bak Jin Hong |
| 인물 정보 | |
| 직업 | 前 대한제국 군인 |
| 생몰 기간 | 1883년 ~ 1920년 |
| 다른 이름 | 박진하(朴震夏) |
| 배우자 | 정부인 안동 김씨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박주병(朴주秉) |
| 어머니 | 정부인 여산 송씨 |
| 형제자매 | 3남 3녀 중 셋째 |
| 아들 | 박창한 |
| 딸 | 5녀 |
2. 생애
박진홍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가난을 못이겨 고향살림을 접은 부모를 좇아 서울로 온 것은 1928년이니, 15살 때였다. 천도교에서 세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입주 가정교사로 학자금을 대었다. 동덕여고는 3·1 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학교’다. 작가를 꿈꾸는 문학소녀였다. 공부도 잘했다. 박진홍은 줄곧 전교 1등을 해 ‘개교 이래 최고의 수재’로 불렸다'. 동덕여고 동기생이자 친구였던 이효정과 함께 사회주의자로 항일의 걸을 걸었다.[1]
경성 관훈동, 지금의 안국동 교차로 남쪽, 인사동 입구에 있던 동덕학원은 천도교 재단이 1915년 설립한 사립 여학교였다. 3학년 때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 남학생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사회주의 학습을 비롯하였다.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영향을 받아 학내 시위에 가담했고 1931년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 일로 퇴학당한 것이 4학년 때인 1931년 6월. 동덕여고생 중 먼저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한성제면, 조선제면, 대창직물, 대창고무공장 같은 곳에 직공으로 들어가 생활비를 벌면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5개월만에 구속된다.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이다.[1]
박진홍은 이효정과 함께 ‘전설적 혁명가’로 불린 이재유가 경성에서 조직한 ‘경성트로이카’라는 이름의 지하혁명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경성트로이카는 1930년대 국내 좌익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두 사람은 여성 노동자를 조직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를 위해 그들은 공장으로 들어갔다. 여성노동자의 인권 향상과 반일 투쟁을 세력화하기 위해 ‘위장취업’했던 것이다.
투쟁과 수감을 반복했다. 박진홍은 1930년대 국내 독립운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박진홍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총 5차례 붙잡혔다. 공장에 다니던 그녀는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으로 2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얽히어 구속되는 등 서대문형무소에서 4차례에 걸쳐 10년간 징역을 살아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이 수감됐다. 두번째 수감 당시인 1936년 첫 남편 이재유의 아이인 철한이를 낳았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식민지라는 ‘철’창에 ‘한’이 맺혔다는 의미로 박진홍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전향 요구를 받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2] 첫 남편이었던 이재유(李載裕 1905~1944)는 갓 마흔에 옥중고혼(獄中孤魂)이 되었다.
출소 직후인 1944년 11월 두번째 남편인 경성제대 교수 김태준과 함께 조선의용군과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옌안(延安)행을 택했다. 1945년 4월 연안에 도착했으나 이후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걸어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귀국한 박진홍은 조선부녀총동맹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위원장을 맡아 각종 강연을 통해 여성 해방을 설파했다. 1946년 11월5일 ‘독립신보’ 인터뷰에서 김태준에 대해 “집사람”이란 ‘혁명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새 세상 건설이라는 그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초대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남로당 간부로 활동했던 김태준은 1949년 지리산 유격대에 격려공연을 갔다가 국군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됐다.[3]
김태준마저 죽자 박진홍은 월북을 선택했다. 김태준과의 사이에 자녀가 2명이다. 그가 북한 정권 초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의 최고재판소 판사로 일하다 한국 전쟁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4][5]
2. 1. 초기 생애와 학창 시절
박진홍은 1913년 함경북도 명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1928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천도교 재단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1] 동덕여고는 3·1 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학교’였다.[1]동덕여고 재학 중 박진홍은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개교 이래 최고의 수재'로 불렸으며,[1]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다. 3학년 때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 남학생들과 독서모임을 통해 사회주의 학습을 시작했다.[1] 광주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학내 시위에 가담했고, 1931년에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했다.[1]
동덕여고 동기생이자 친구였던 이효정과 함께 사회주의자로 항일의 길을 걸었다.[1] 이들은 ‘전설적 혁명가’로 불린 이재유가 경성에서 조직한 ‘경성트로이카’라는 지하혁명 조직원으로 활동했다.[1][2]
2. 2. 항일 독립운동 투신
박진홍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1928년 15세 때 가족과 함께 경성으로 이주하여 천도교에서 세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자금은 입주 가정교사로 충당했다.[1] 동덕여고는 3·1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학교’였다.[1] 박진홍은 동기생 이효정과 함께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투신했다.[1]3학년 때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 남학생들과 독서모임을 통해 사회주의 학습을 시작했다.[1]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학내 시위에 가담했고, 1931년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4학년 때인 1931년 6월 퇴학당했다.[1] 이후 한성제면, 조선제면, 대창직물, 대창고무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5개월 만에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으로 구속되었다.[1]
출소 후, 박진홍은 이효정과 함께 이재유가 조직한 '경성트로이카'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힘썼다.[1] 경성트로이카는 1930년대 국내 좌익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1] 1935년 1월에는 용산 적색 노조 사건으로 이재유와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서 이재유의 아이를 출산했다.[1] 1937년 석방 후, 이관술, 박헌영, 김태준 등과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지하 활동을 지속했다.[1]
박진홍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총 5차례 붙잡혔으며, '경성학생알에스(RS)사건'으로 2년간 수감, '조선공산당재건운동'으로 구속되는 등 서대문형무소에서 4차례에 걸쳐 10년간 징역을 살아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이 수감됐다.[2] 두번째 수감 당시인 1936년 첫 남편 이재유의 아이인 철한이를 낳았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아이의 이름은 식민지라는 ‘철’창에 ‘한’이 맺혔다는 의미였다.[2]
2. 3. 옌안 행과 해방 이후 활동
1944년 11월, 박진홍은 출소 직후 두 번째 남편인 경성제대 교수 김태준과 함께 조선의용군과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옌안(延安)행을 택했다.[1] 1945년 4월 옌안에 도착했으나,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걸어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1] 이 당시의 모습은, 패전으로 인한 해방 후, 김태준이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창간호(1946년)에 발표한 기행문 『연안』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귀국한 박진홍은 조선부녀총동맹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위원장을 맡아 각종 강연을 통해 여성 해방을 설파했다.[1] 1946년 11월 5일 ‘독립신보’ 인터뷰에서 김태준에 대해 “집사람”이란 ‘혁명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1]
새 세상 건설이라는 그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초대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남로당 간부로 활동했던 김태준은 1949년 지리산 유격대에 격려공연을 갔다가 국군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됐다.[1]
2. 4. 월북과 최후
박진홍은 남편 김태준이 1949년 지리산 유격대에 격려공연을 갔다가 국군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되자 월북을 선택했다.[3] 김태준과의 사이에 자녀가 2명 있었다. 북한 정권 초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평양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했다.[4][5] 한국전쟁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4][5]3. 사상과 평가
박진홍은 일제강점기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 해방과 여성 해방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경성으로 이주하여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이관술의 지도를 받았다. 광주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학내 데모에 참여하고,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이재유가 조직한 "경성 트로이카"라는 지하 혁명 조직에서 활동하며, 용산 적색 노조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이재유의 아이를 출산했다. 석방 후, 이관술, 박헌영, 김태준 등과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여 지하 활동을 지속했다. 1941년 검거되어 1944년 출소했지만, 이재유의 옥사를 겪고, 김태준과 함께 중국 연안으로 향하여 조선의용군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에 참여하여 문교부장 겸 서울 지부 위원장을 맡아 여성 해방을 역설했지만, 미국 군정청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인권 향상과 반일 투쟁을 위해 적극적인 실천을 보여주었다.
4. 가족 관계
박진홍은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남편은 독립운동가 이재유(1905~1944)로, 박진홍은 이재유가 조직한 "경성 트로이카"라는 지하 혁명 조직에서 활동하다 옥중에서 이재유의 아이를 출산했다. 이재유는 1944년 옥중 사망했다. 두 번째 남편은 독립운동가이자 학자인 김태준(1905~1949)이다. 박진홍은 이재유의 동지였던 김태준과 함께 중국 연안으로 가서 조선의용군과의 연계를 모색하기도 했다. 김태준은 1949년 총살당했다.
참조
[1]
저널
"[현대사 아리랑]혁명전사가 된 문학소녀 박진홍"
https://news.naver.c[...]
주간경향
2009-01-15
[2]
저널
"'내 이름은 항일투사'…일제와 맞선 '동덕'의 딸들"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14-06-02
[3]
저널
최고의 한글학자도, 백마 탄 여장군도… 좌익 낙인에 ‘지워진 독립운동’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9-07-17
[4]
저널
다·만·세 100년, 독립에 목숨 건 두 여인…해방 뒤 불운했던 그들의 삶 [신년기획]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9-01-22
[5]
저널
"'내 이름은 항일투사'…일제와 맞선 '동덕'의 딸들"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14-06-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