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채
1. 개요
백남채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베이징 대학을 졸업하고 계성중학교 교감, 조선기독교장로회 회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 임시정부 경상북도 내무부장 등을 지냈으며,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에는 축첩 공무원 추방을 건의하기도 했다. 1977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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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중학교 동문 -
조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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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중학교 동문 -
강윤성 (축구 선수)
강윤성은 대구공고 주장으로 전국체전 준우승 후 대전 시티즌과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했으며, U-20 및 U-23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2020년 AFC U-23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한 축구 선수이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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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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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 국회의원 -
김시현 (1883년)
김시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2대 및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
경상북도의 국회의원 -
이진우 (1934년)
이진우는 1934년에 출생하여 2010년에 사망한 법조인 출신 정치인으로, 검사, 국회의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으며 변호사로 활동했다.
2. 생애
1918년 대구 계성학교 교감 및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병우, 홍주일, 이만집, 김마리아 등과 시위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년 간 복역하였다. 베이징 대학을 졸업했고 계성중학교 교감, 조선기독교장로회 회장을 역임했다.
출옥 후에는 희도보통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의 다른 학교와의 합병 및 설립에 관여하여 동교 교장, 대구 요업 주식회사의 사장을 역임했다.
1945년 해방 후 백남채는 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 임시정부 경상북도 내무부장, 대한민국 민주당 대구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과도입법의원을 거쳐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민국 민주당 공천으로 대구 병구에서 입후보하여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재임 중 1949년 동료의원 9명과 함께 축첩공무원 추방에 대한 의견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1950년에 사망했다.
1977년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2년 7월 8일 대전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2.1. 독립운동과 투옥 (1919년 ~ 1921년)
1918년 대구 계성학교 교감 및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병우, 홍주일, 이만집, 김마리아 등과 시위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년 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희도보통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의 다른 학교와의 합병 및 설립에 관여하여 동교 교장, 대구 요업 주식회사의 사장을 역임했다.
2.2. 해방 전 교육 및 기업 활동 (1921년 ~ 1945년)
1918년 대구 계성학교 교감 및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병우, 홍주일, 이만집, 김마리아 등과 시위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년 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희도보통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의 다른 학교와의 합병 및 설립에 관여하여 동교 교장, 대구 요업 주식회사의 사장을 역임했다.
2.3. 해방 후 정치 활동 (1945년 ~ 1950년)
1945년 해방 후 백남채는 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 임시정부 경상북도 내무부장, 대한민국 민주당 대구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과도입법의원을 거쳐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민국 민주당 공천으로 대구 병구에서 입후보하여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재임 중 1949년 동료의원 9명과 함께 축첩공무원 추방에 대한 의견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4. 경력
경상북도 경산 또는 대구 출신이다. 베이징 대학을 졸업했다. 계성중학교 교감, 조선기독교장로회 회장을 역임한 후, 서병우, 홍주일, 이만집, 김마리 등과 함께 대구의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희도보통학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의 다른 학교와의 합병 및 설립에 관여하여 동교 교장, 대구 요업 주식회사의 사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치안유지위원회 위원장, 임시정부 경상북도 내무부장, 대한민국 민주당 대구지부 부위원장,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민국 민주당 공천으로 대구 병구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9년에는 동료 의원 99명과 함께 첩을 둔 공무원의 추방에 대한 의견을 대통령 이승만에게 제안했다。 1950년에 사망했다。
1977년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2년 7월 8일 대전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5. 사후
1977년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2년 7월 8일 대구에서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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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8년)
백남채는 1948년 총선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북 대구부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9,876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46.41%였다.
6.2.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백남채는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2,779표를 얻어 7.7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5위로 낙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