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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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선행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기업가로 활동하며 자선 사업에 기여한 인물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객산리에 백선교 건설을 지원하고, 광성보통학교 등 교육 기관에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조만식의 요청으로 평양에 백선행기념관 건립을 지원한 것이 대표적인 공헌으로 꼽힌다. 출생지는 대한민국에서는 수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으로 알려져 있으며, 평양에서 사망했다. 북한에서는 애국심이 있는 자본가로 묘사되었으며, 2006년 평양에 기념비가 복원되었고, 수원 남문시장에도 흉상이 세워졌다.

백선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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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행 초상
본명백선행
출생1848년 11월
출생지평양 중구역 또는 수원
사망1933년
국적한국
직업사업가 및 자선가
활동 기간불명
알려진 업적사업가 및 자선 활동
한국어 이름
한글백선행
한자白善行
로마자 표기Baek Seonhaeng
마 McCune–Reischauer 표기Paek Sŏnhaeng
개인 정보
배우자안재욱
아버지백지용
본관수원 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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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백선행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아가', '새댁', '과부' 등으로 불리다가, 기업가로 활동하면서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불렸다. 출생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중구역 중성동, 대한민국에서는 경기도 수원으로 알려져 있다.

16세에 남편 안재욱과 사별한 후, 억척스럽게 생활하며 절약했다. 기업가로서 다양한 자선 사업을 펼쳤으며, 환갑 때는 평안남도 대동군 객산리에 백선교 건설을 지원했다.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숭인상업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교육 기관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백선행기념관(설립 당시 공회당)은 그녀의 대표적인 공헌으로, 조만식의 요청으로 설립되었다. 백선행은 인생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보냈으며,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일성1992년 회고록에서 백선행이 일제강점기에 재산을 모은 것을 두고 전쟁 영웅으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언급했다. 2006년 7월 평양에서 그녀의 기념비가 재발견 및 복원되었고, 경기도 수원시 남문시장에도 그녀를 기리는 작은 흉상이 세워졌다.

2.1. 어린 시절과 결혼

조선 말기에 이름 없이 태어나 아가, 새댁, 그리고 과부라는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선행'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기업가로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린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녀가 평양 중구역 중성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배우자 안재욱과 혼인한 지 2년 만인 16세의 나이로 과부가 되었고, 그 이후의 삶에서도 억척같이 살면서 돈을 적게 썼다.

2.2. 기업 활동과 자선 사업

선행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기업가로서 하였던 활동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린 것이다. 기업가로서 다양한 자선 사업을 하였다고 잘 알려져 있다. 환갑을 맞아 평안남도 대동군 객산리에 백선교라는 다리를 건설하는데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서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숭인상업학교, 창덕보통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백선행의 다양한 공헌 중 잘 알려진 것은 대표적으로 오늘날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백선행기념관(설립 당시 공회당)이다. 당시 평양의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 대공회당 설립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2.3. 말년과 사후

조선 말기에 이름 없이 태어나 아가, 새댁, 그리고 과부라는 명칭으로 불려왔다고 한다. '선행'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기업가로서 하였던 활동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린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녀가 평양 중구역 중성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배우자 안재욱과 혼인한 지 2년 만인 16세의 나이로 과부가 되었고, 그 이후의 삶에서도 억척같이 살면서 돈을 적게 썼다. 기업가로서 다양한 자선 사업을 하였다고 잘 알려져 있다. 환갑을 맞아 평안남도 대동군 객산리에 백선교라는 다리를 건설하는데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서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숭인상업학교, 창덕보통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백선행의 다양한 공헌 중 잘 알려진 것은 대표적으로 오늘날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백선행기념관(설립 당시 공회당)이다. 당시 평양의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 대공회당 설립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아무튼 인생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지냈으며, 평양에서 눈을 감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에서는 그녀를 애국심이 없고 인색한 보통 자본가의 모습과 대비시켜 좋은 자본가로 묘사했다. 김일성1992년 회고록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일제강점기에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전쟁 영웅으로 존경했다고 썼다. 2006년 7월 평양에 그녀의 기념비가 재발견되고 복원되었다. 그녀가 태어나 짧은 유년기를 보냈던 경기도 수원시 남문시장에도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흉상이 세워져 있다.

3. 평가

백선행은 조선 말기에 이름 없이 '아가', '새댁', '과부'로 불리다가, 기업가로서 자선 활동을 통해 '선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에서는 경기도 수원이라는 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중구역 중성동이라는 설이 있다.

16세에 과부가 된 후 억척스럽게 살면서 절약하여 돈을 모았고, 기업가로서 다양한 자선 사업을 펼쳤다. 환갑 때는 백선교 건설에 자금을 지원했고,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숭인상업학교, 창덕보통학교 등 교육 기관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만식의 요청으로 평양에 대공회당(현 백선행기념관) 건립을 지원한 것은 대표적인 공헌으로 꼽힌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백선행이 일제 강점기에 돈을 모은 것을 두고 전쟁 영웅으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언급했다. 2006년 7월 평양에서 백선행의 기념비가 재발견 및 복원되었고, 수원시 남문시장에도 흉상이 세워졌다.

3.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백선행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이름 없이 '아가', '새댁', '과부'로 불렸다. '선행'이라는 이름은 기업가로서 자선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린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백선행이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16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억척스럽게 살면서 절약하며 돈을 모았다. 기업가로서 다양한 자선 사업을 하였는데, 환갑 때 평안남도 대동군 객산리에 백선교라는 다리를 건설하는데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숭인상업학교, 창덕보통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오늘날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백선행기념관(설립 당시 공회당)은 백선행의 대표적인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평양의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 대공회당 설립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백선행은 인생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보냈고,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일성1992년 회고록에서 어떤 사람들이 백선행이 일제 강점기에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전쟁 영웅으로 존경했다고 썼다. 2006년 7월 평양에서 백선행의 기념비가 재발견되고 복원되었다. 백선행이 태어나 짧은 유년기를 보냈던 경기도 수원시 남문시장에도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흉상이 세워져 있다.

3.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평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에서는 백선행을 애국심이 없고 인색한 보통 자본가와 대비시켜 좋은 자본가로 묘사했다. 김일성1992년 회고록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일제 강점기에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전쟁 영웅으로 존경했다고 썼다. 2006년 7월 평양에서 그녀의 기념비가 재발견되고 복원되었다.

4. 기념

백선행의 다양한 공헌 중 잘 알려진 것은 대표적으로 오늘날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백선행기념관(설립 당시 공회당)이다. 당시 평양의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이 대공회당 설립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2006년 7월 평양에서 그녀의 기념비가 재발견되고 복원되었다. 그녀가 태어나 짧은 유년기를 보냈던 경기도 수원시 남문시장에도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흉상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