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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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갑순은 1872년에 태어나 1961년에 사망한 인물로,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와 부의 축적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공주 감영의 관노 출신이었으나, 충청남도 감영 아전으로 시작하여 부여 군수, 온성 군수, 공주 군수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토지 투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대전 지역의 상당한 토지를 소유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처벌받지 않았으며, "민나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놈)"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일대기는 1982년 MBC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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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순 | |
---|---|
인물 정보 | |
한글 이름 | 김갑순 |
한자 이름 | 金甲淳 |
로마자 표기 | Gim Gap-sun |
다른 한글 표기 | 순갑 |
다른 한자 표기 | 淳甲 |
다른 로마자 표기 | Sun-gap |
호 | 동우 |
호 한자 표기 | 東尤 |
호 로마자 표기 | Dong-u |
생애 | |
출생 | 1872년 |
사망 | 1961년 |
경력 | |
주요 활동 | 친일파, 조선귀족 |
관련 위원회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2. 생애
김갑순은 1872년 5월 22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공주읍 죽동 245번지였다. 어릴적 이름은 순갑(淳甲)이었다. 아버지 김현종은 그가 출세한 뒤 증 통정대부와 증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는 설과 천민이었다는 설이 있다. 1884년 12세에 아버지 김현종과 형을 여읜 후, 어머니가 국밥집과 행상으로 형제들을 부양하여 사실상 가장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유명한 지사가 발복지라고 말한 묘자리를 가재를 털어 구매하여 남편을 묻었고, 이후 김갑순은 40대 후반에 충청도 제일의 갑부로 꼽혔다고 한다.[7] 종교는 불교였고, 취미는 노래(성악)였다.
10대 초반부터 공주 감영의 사또 요강 청소 담당으로 일했다.[8] 초년에는 공주 감영에서 관노로 일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의남매를 맺은 여인이 충청감사의 첩이 되어 후견을 받게 되면서 1899년 충청남도 감영의 아전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성리학이나 소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관료 생활 중 독서하여 한글과 한자를 스스로 깨우쳤다.
공주군청의 관노로 생활하던 중, 저자거리에서 불한당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해주었고, 이 여인과 의남매를 맺었다. 이 여인이 충청남도 관찰사의 첩이 되면서 그 연줄로 충청남도 관찰부의 아전이 되었다.[8] 충청남도 관찰사부 아전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 감사를 만나러 온 가난한 선비를 만나 딱한 사연을 듣고 피륙과 엽전을 혼수에 보태라고 나귀에 실어 보냈다. 1년 후, 그 선비가 탁지부의 고관으로 발탁되면서 김갑순을 경성으로 불러 은혜를 갚았다.
1900년 8월 2일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忠淸北道觀察府主事) 판임관 8등에 임명되었으나 8월 27일 사퇴했다. 9월 25일 다시 임명되었으나 2개월만인 11월 20일 사퇴하였다. 그 뒤 충청남도 봉세관으로 나갔다가 1901년 6월 17일 6품으로 승진, 6월 20일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주임관 6등이 되었지만 9월 20일 사퇴했다. 10월 11일 내장원봉세관에 재임명되었다가 11월 21일 중추원 의관에 재임명되고 내장원 봉세관을 겸임하였다. 징세 직위인 봉세관으로 있을 때부터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고, 모은 돈으로 군수 자리를 사서 위세를 이용해 돈을 긁어모았다고 한다.
1902년 3월 12일 고종을 면담한 후, 고종은 의정부찬정 겸 내무대신 이건하(李乾夏)에게 명하여 그의 이름을 갑순이라 지어 주었다. 3월 1일 부여군수(扶餘郡守) 주임관 6등으로 부임하였고, 4월 19일 고종의 특명으로 순갑에서 갑순으로 개명했다. 5월 27일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충청남도독제관이 되었다가 1903년 4월 16일 관리서 주사직을 겸직하였다. 6월 29일 노성군수(魯城郡守) 주임관 6등으로 부임하였다. 노성군수로 재직 중 충청남도 관찰사부 봉세관을 겸임하였다. 김갑순이 노성군수로서 봉세관을 겸임할 때 연산군에 있는 선희궁(宣禧宮) 소유의 궁장 터 수천 마지기의 토지를 매부인 하치관에게 맡겼는데, 하치관은 궁장 터의 소작료를 한 마지기당 벼 한 섬씩 초과 징수하여 차액을 착복하였다. 또, 친위영 군대의 양식을 마련하려는 군영 농지의 사음도 매부에게 맡겨, 법정 세액 외에 터무니없는 소작료를 받아내 백성의 원성을 샀다.
1904년 6월 28일 겸임하던 충청남도관찰사부 봉세관직을 사퇴하였다. 8월 22일 온성군수(穩城郡守)로 부임하였다. 1906년 1월 가선대부로 승진한 뒤, 7월 19일 공주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공주로 부임하자 공주 출신 사대부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본래 '공주 관노' 출신인 김갑순이 공주 군수로 금의환향하자 공주의 사대부들과 아전들은 "문벌이 깨진 세상이기는 하나 어찌 세칭 사대부로서 관노 따위에게 '칭소인'(稱小人[9])'을 하고 굽실거릴 것인가"라고 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였다.[10] 김갑순은 그들에게 적절한 선물과 회유로 다스렸다. 김갑순은 공주 씨 양반들의 견제와 시샘에도 1년 이상 공주 군수직을 무리 없이 수행하였고, 이임할 때는 충청남도 관찰사로부터 내무부 표창을 품신받기까지 했다.[11]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김갑순은 공주군을 중심으로 자동차운수업을 하여 재력을 쌓았고, 공주군과 인근 지역의 토지를 매입했다.[12] 1911년 아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고, 대전극장, 공주극장, 논산극장 설립과 경성부 국일관에 투자하여 수익을 올렸다. 1914년 충청남도 참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퇴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조선총독부의 특혜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조선총독부의 차별로 다시 공직에 투신, 읍회원, 면협의원, 충남 도회원, 도농회 부회장, 우성수리조합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민원 해결, 금융 및 세제 특혜를 얻었다.[12] 1920년 충청남도 도평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21년 대전온천 개발에 참여, 대전온천주식회사 사장이 되어 유성온천 개발 사업도 참여하였다. 대전생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연기군 지역 금강대도 신도들이 단군을 숭배하다 체포된 사건은 김갑순의 밀고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갑순은 금강대도교의 단군성전을 압수, 건물을 헐고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 사진을 진열한 열전각을 건립하여 참배를 강요했다. 자재는 자신의 호텔을 짓는 데 사용했다. 자선사업으로 공주구제원장을 맡기도 했다. 공주 산성교 건설에 비용과 인력을 지원했다. 콘크리트-석재 교각을 건설하고,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도록 교폭을 넓혔다고 공주군지에 기록되었다.[13]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처벌받지 않았다. 공주군 출신 국회의원이자 반민특위 위원 김명동(金明東)은 김갑순을 추가 기소하려 했으나, 김갑순 측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17] 4월 11일 대법원 재판에서 고령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석방 후,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 총선거에 아들(김종석, 김종락)과 손자(김승태)를 출마시켰으나 모두 낙선했다.[18] 만년에 1949년 농지개혁, 1953년 화폐개혁, 재산 분쟁 등으로 토지를 잃었으나, 사망 직전까지 3371정보(1정보는 3000평)의 토지를 소유했다. 1961년 6월에 사망했다.
김갑순은 "민나 도로보데스[19]"(모두가 도둑놈들)라는 말을 반복했는데, 1982년 MBC 드라마에서 이 발언이 방송되며 1980년대 내내 유행어가 되었다. 사후,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 용산부락에 안장되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활동
김갑순은 1872년 5월 22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공주읍 죽동 245번지였다. 태어날 때 이름은 순갑(淳甲)이었다. 아버지 김현종은 그가 출세한 뒤 증 통정대부와 증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는 설과 천민이었다는 설이 있다. 1884년 12세에 아버지 김현종과 형을 여읜 후, 어머니가 국밥집과 행상으로 형제들을 부양하여 사실상 가장 역할을 했다.어머니는 유명한 지사가 발복지라고 말한 묘자리를 가재를 털어 구매하여 남편을 묻었고, 이후 김갑순은 40대 후반에 충청도 제일의 갑부로 꼽혔다고 한다.[7] 종교는 불교였고, 취미는 노래(성악)였다.
10대 초반부터 공주 감영의 사또 요강 청소 담당으로 일했다.[8] 초년에는 공주 감영에서 관노로 일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의남매를 맺은 여인이 충청감사의 첩이 되어 후견을 받게 되면서 1899년 충청남도 감영의 아전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성리학이나 소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관료 생활 중 독서하여 한글과 한자를 스스로 깨우쳤다.
공주군청의 관노로 생활하던 중, 저자거리에서 불한당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해주었고, 이 여인과 의남매를 맺었다. 이 여인이 충청남도 관찰사의 첩이 되면서 그 연줄로 충청남도 관찰부의 아전이 되었다.[8] 충청남도 관찰사부 아전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 감사를 만나러 온 가난한 선비를 만나 딱한 사연을 듣고 피륙과 엽전을 혼수에 보태라고 나귀에 실어 보냈다. 1년 후, 그 선비가 탁지부의 고관으로 발탁되면서 김갑순을 경성으로 불러 은혜를 갚았다.
1900년(광무 3년) 8월 2일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忠淸北道觀察府主事) 판임관 8등에 임명되었으나 8월 27일 사퇴했다. 9월 25일 다시 임명되었으나 2개월만인 11월 20일 사퇴하였다. 그 뒤 충청남도 봉세관으로 나갔다가 1901년(광무 4년) 6월 17일 6품으로 승진, 6월 20일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주임관 6등이 되었지만 9월 20일 사퇴했다. 1901년 10월 11일 내장원봉세관에 재임명되었다가 11월 21일 중추원 의관에 재임명되고 내장원 봉세관을 겸임하였다. 징세 직위인 봉세관으로 있을 때부터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고, 모은 돈으로 군수 자리를 사서 위세를 이용해 돈을 긁어모았다고 한다.
1902년(광무 5년) 3월 12일 고종을 면담한 후, 고종은 의정부찬정 겸 내무대신 이건하(李乾夏)에게 명하여 그의 이름을 갑순이라 지어 주었다. 1902년 3월 1일 부여군수(扶餘郡守) 주임관 6등으로 부임하였고, 4월 19일 고종의 특명으로 순갑에서 갑순으로 개명했다. 5월 27일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충청남도독제관이 되었다가 1903년 4월 16일 관리서 주사직을 겸직하였다. 6월 29일 노성군수(魯城郡守) 주임관 6등으로 부임하였다. 노성군수로 재직 중 충청남도 관찰사부 봉세관을 겸임하였다. 김갑순이 노성군수로서 봉세관을 겸임할 때 연산군에 있는 선희궁(宣禧宮) 소유의 궁장 터 수천 마지기의 토지를 매부인 하치관에게 맡겼는데, 하치관은 궁장 터의 소작료를 한 마지기당 벼 한 섬씩 초과 징수하여 차액을 착복하였다. 또, 친위영 군대의 양식을 마련하려는 군영 농지의 사음도 매부에게 맡겨, 법정 세액 외에 터무니없는 소작료를 받아내 백성의 원성을 샀다.
1904년(광무 7년) 6월 28일 겸임하던 충청남도관찰사부 봉세관직을 사퇴하였다. 8월 22일 온성군수(穩城郡守)로 부임하였다.
1906년 1월 가선대부로 승진한 뒤, 7월 19일 공주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공주로 부임하자 공주 출신 사대부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본래 '공주 관노' 출신인 김갑순이 공주 군수로 금의환향하자 공주의 사대부들과 아전들은 "문벌이 깨진 세상이기는 하나 어찌 세칭 사대부로서 관노 따위에게 '칭소인'(稱小人[9])'을 하고 굽실거릴 것인가"라고 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였다.[10] 김갑순은 그들에게 적절한 선물과 회유로 다스렸다.
김갑순은 공주 씨 양반들의 견제와 시샘에도 1년 이상 공주 군수직을 무리 없이 수행하였고, 이임할 때는 충청남도 관찰사로부터 내무부 표창을 품신받기까지 했다.[11]
2. 1. 1. 불우한 유년기
김갑순은 1872년(고종 9년) 5월 22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본적지는 공주군 공주읍 죽동(竹洞) 245번지였다. 태어날 때 이름은 순갑(淳甲)이었다. 아버지 김현종은 훗날 김갑순이 출세하면서 증 통정대부와 증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이라는 설과 천민이었다는 설이 있다. 1884년 12세에 아버지 김현종과 형이 일찍 죽어서 어머니가 국밥집과 행상을 하여 형제들을 돌봤다. 곧 그가 사실상 가장이 되었다.국밥 장사를 하던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지사가 당대의 발복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가재를 털어 어느 묘자리를 사들였다.[7] 김갑순의 모친은 남편을 이곳에 묻었다. 그 후 김갑순은 40대 후반에 당대 충청도 제일의 갑부로 꼽혔다고 한다.[7] 그의 종교는 불교였고 취미는 노래하기였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공로자 연감에는 그의 취미가 성악으로 나타나 있다.
10대 초반 시절부터 공주 감영의 사또 요강 청소 담당으로서 일하였다.[8] 그는 초년에는 공주 감영에서 관노로 일하는 보잘것없는 신분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의남매를 맺은 여인이 충청감사의 첩이 되어 그를 후견하는 행운으로 1899년 충청남도 감영의 아전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성리학도 배우지 못하였고 소학교조차 다니지 못하였지만, 그는 관료 생활 중 독서하여 한글과 한자를 스스로 깨우쳤다.
2. 1. 2. 공주 감영 및 충청남도 감영 아전 생활
공주군청의 관노로 생활하던 어느 날 공주읍내 투전판의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저자거리에서 불한당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몰린 어떤 여자를 사력을 다해 구했다. 이때 이 여자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비범함을 보고 이 인연으로 그 여자와 의남매를 맺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중에 이 여자가 충청남도 관찰사의 첩으로 들어간 뒤 그 연줄로 충청남도 관찰부의 아전이 되었다.[8] 충청남도 관찰사부의 아전으로 재직 중 그는, 충청남도 감영으로 당시 충청남도 관찰사를 면회하러 온 허름한 행색의 한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초라한 선비가 딱하여 사연을 물으니 그는 어릴 적 절친한 친구였던 충청남도 감사를 만나러 왔으나 귀찮고 별 볼일 없는 친구라고 판단한 충청남도 관찰사가 면담을 거부하여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에게는 과년한 딸아이가 있어 혼사를 치르게 되었는데 가세가 빈한하여 혼수를 준비할 수 없어 세월을 보내다가 혼기가 꽉 차서 할 수 없이 옛 친구였던 충청남도 관찰사에게 재정과 관련해 도와 달라고 하러 왔다가 만나 주지 않아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갑순은 측은히 여겨 자신이 가진 피륙과 엽전을 혼수에 보태라고 나귀에 실어 보냈다. 1년 후, 당시 그 선비가 탁지부(호조의 후신)의 고관으로 발탁되면서 그날의 은혜를 갚고자 김갑순을 경성으로 불러들였다.
2. 1. 3. 관직 생활과 청년기
1900년(광무 3년) 8월 2일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忠淸北道觀察府主事) 판임관 8등에 임명되었으나 8월 27일 사퇴했다. 그해 9월 25일 다시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 판임관 8등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만인 11월 20일 사퇴하였다. 그 뒤 충청남도 봉세관으로 나갔다가 고속으로 승진하여 1901년(광무 4년) 6월 17일 6품으로 승진하고, 6월 20일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주임관 6등(奏任官六等)이 되었지만 9월 20일 사퇴했다. 1901년 10월 11일 내장원봉세관에 재임명되었다가 11월 21일 중추원 의관에 재임명되고 내장원 봉세관을 겸임하였다. 징세하는 직위인 봉세관으로 있을 무렵부터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은 돈으로 군수 자리를 사서 그 위세를 이용해 돈을 다시 긁어모았다고 한다.1902년(광무 5년) 3월 12일 고종을 면담한 후, 고종은 의정부찬정 겸 내무대신 이건하(李乾夏)에게 명하여 그의 이름을 갑순이라 지어 주었다. 그때까지 그는 순갑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이것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1902년 3월 1일 부여군수(扶餘郡守) 주임관 6등(奏任官六等)으로 부임하였고, 4월 19일 고종의 특명으로 순갑(淳甲)에서 갑순(甲淳)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해 5월 27일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충청남도독제관(忠淸南道督制官)이 되었다가 1903년 4월 16일 관리서 주사직을 겸직하였다. 그해 6월 29일 노성군수(魯城郡守) 주임관 6등(奏任官六等)으로 부임하였다. 노성군수로 재직 중 충청남도 관찰사부 봉세관을 겸임하였다. 김갑순이 노성군수로서 봉세관을 겸임할 때 연산군에 있는 선희궁(宣禧宮) 소유의 궁장 터 수천 마지기의 토지를 매부인 하치관에게 맡겼는데, 하치관은 궁장 터의 소작료를 한 마지기당 벼 한 섬씩 초과 징수하여 차액을 착복하였다. 또, 친위영 군대의 양식을 마련하려는 군영 농지의 사음도 매부에게 맡겨, 법정 세액 외에 터무니없는 소작료를 받아내 백성의 원성을 샀다.
1904년(광무 7년) 6월 28일 겸임하던 충청남도관찰사부 봉세관직을 사퇴하였다. 그해 8월 22일 온성군수(穩城郡守)로 부임하였다.
2. 1. 4. 공주 금의환향과 좌절
1906년 1월 가선대부로 승진한 뒤, 그해 7월 19일 공주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공주로 부임하자 공주군 출신 사대부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본래 '공주 관노' 출신인 김갑순이 출세하여 공주 군수로 금의환향하자 공주군의 사대부들과 아전들은 "문벌이 깨진 세상이기는 하나 어찌 세칭 사대부로서 관노 따위에게 '칭소인'(稱小人[9])'을 하고 굽실거릴 것인가"라고 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였다.[10] 김갑순은 그들에게 적절한 선물과 회유로 다스렸다.김갑순은 공주 씨 양반들이 견제하고 시샘하는데도 1년 이상 공주 군수직을 무리 없이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임할 때는 충청남도 관찰사로부터 내무부 표창을 품신받기까지 했다.[11]
2. 2. 일제강점기 활동
김갑순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공주군을 중심으로 자동차운수업을 하여 재력을 쌓았고, 공주군과 인근 지역의 토지를 매입했다.[12] 1911년 아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고, 대전극장, 공주극장, 논산극장 설립과 경성부 국일관에 투자하여 수익을 올렸다. 1914년 충청남도 참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퇴하였다.관직에서 물러난 후 조선총독부의 특혜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조선총독부의 차별로 다시 공직에 투신, 읍회원, 면협의원, 충남 도회원, 도농회 부회장, 우성수리조합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민원 해결, 금융 및 세제 특혜를 얻었다.[12] 1920년 충청남도 도평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21년 대전온천 개발에 참여, 대전온천주식회사 사장이 되어 유성온천 개발 사업도 참여하였다. 대전생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연기군 지역 금강대도 신도들이 단군을 숭배하다 체포된 사건은 김갑순의 밀고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갑순은 금강대도교의 단군성전을 압수, 건물을 헐고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 사진을 진열한 열전각을 건립하여 참배를 강요했다. 자재는 자신의 호텔을 짓는 데 사용했다. 자선사업으로 공주구제원장을 맡기도 했다.
공주 산성교 건설에 비용과 인력을 지원했다. 콘크리트-석재 교각을 건설하고,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도록 교폭을 넓혔다고 공주군지에 기록되었다.[13]
2. 2. 1. 한일병합 직후
1910년(융희 4년) 10월부터 김갑순은 공주군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노선을 개설, 자동차운수업을 하여 자금을 모았다. 재력을 쌓은 그는 공주군과 인근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1911년 아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같은 해 대전극장(大田劇場), 공주극장(公州劇場), 논산극장(論山劇場) 설립에 투자하고, 경성부 국일관(國一館)에도 투자하여 영화 관람객 증가로 수익을 올렸다. 1914년 충청남도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퇴하였다.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갑순은 재임 시절 인맥과 조선총독부의 인허가 특혜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로 공직에 다시 투신, 읍회원, 면협의원, 충남 도회원, 도농회 부회장, 우성수리조합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로비'나 '진정' 같은 뒷거래 정치, 민원 해결, 금융 및 세제 특혜를 얻었다.[12] 1920년 충청남도 도평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21년 대전온천 개발에 참여, 대전온천주식회사 사장이 되어 유성온천 개발 사업도 참여하였다. 대전생산주식회사(大田生産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단군을 숭배하는 연기군 지역 금강대도 신도들이 체포되어 수십 명이 구금되고, 이 중 여럿이 감옥에서 사망한 사건은 김갑순의 밀고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갑순은 금강대도교의 단군성전을 압수, 건물을 헐고 조선총독부 역대 총독 사진을 진열한 열전각(列傳閣)을 건립하여 참배를 강요했다. 자재는 자신의 호텔을 짓는 데 사용했다. 자선사업으로 공주구제원장을 맡기도 했다.
공주 산성교 건설에 비용과 인력을 지원했다. 대형 목선 25척으로 연결해야만 지나다닐 수 있던 다리에 콘크리트-석재 교각을 건설하고,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도록 교폭을 넓혔다고 공주군지에 기록되었다. 땅 투기로 큰 부자가 된 김갑순은 산성교 가설에 큰 돈을 내놓았다.[13]
2. 2. 2. 사회 단체 활동과 토지 매입
1920년 충청남도 도평의원(道評議員)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21년 중추원 참의에 선임되었다. 이후 공주읍 읍회의원에 2선, 충청남도 도평의회 의원에 4선 되었다. 1926년 충청남도농회 부회장, 1927년 조선농회 통상위원회 위원에 피선되고 공주군 우성수리조합장에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 충청남도지부 평의원이 되었다.관직에서 물러난 뒤 국민협회 등 관변 단체에서 활동하며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특히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다른 친일파들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을 위해 조직된 각종 친일 단체의 임원을 맡았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14][15] 1920년대에는 공주군의 부군면협의회 선거에서 공주군 군협의회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돈과 인맥을 배경으로 조선인 부자들의 돈을 끌어들이거나 자동차 사업, 유성온천 개발에 많은 투자자를 유치했고, 대전, 논산, 공주에 세운 영화 극장에 관객이 몰렸으며, 식산은행의 대출금으로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나온 값싼 매물들을 집중 매입했다.
1920년대에는 자동차 회사 겸 택시, 운수업을 하는 공주운수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공주를 중심으로 각 방면에서 버스, 택시, 화물 운송 등 운수업의 영업권을 획득, 도로가 각지에 개통되면서 대중교통도 확산되어 돈을 벌게 되었다.
2. 2. 3. 땅 투기와 충청남도 도청 이전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조선식산은행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 대전역 주변의 땅을 사들였다.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될 때, 대전 지역 유지들을 동원하여 도청이 자신의 땅으로 오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땅값이 크게 올라 큰돈을 벌었는데, 1~2전에 산 땅이 하루아침에 100원 이상으로 뛰었다.[16] 도청 이전으로 막대한 보상금을 받아 공주군과 논산군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였다.1930년 말, 공주, 논산, 대전 지역에 소유한 땅은 3,371정보(약 10,110,000평)였다. 이 중 대전 시내에 있던 땅만 총 220,000평으로, 1930년 당시 대전부 전체 토지의 40%를 소유했다.
2. 2. 4.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 행적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직에 개인으로 참여한 후 7월 19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담역에 위촉되었다. 이후 조선신문사를 인수하여 사주가 되었지만,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경영난을 맞아 타인에게 넘기게 된다. 1941년 임전보국단 조직에 참여하였다.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총력연맹 평의원이 되었으며, 1941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선출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충남도 도평의회 의원을 거쳐 중추원 참의에 선출되었다.
김갑순은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5남 4녀를 모두 세도가의 자녀들과 결혼시켜 인맥 관리에 능숙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 박영효의 심복으로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 윤치호의 사촌 동생 윤치오,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 등 이름난 친일파들과 두루 사돈 관계를 맺었다.
그의 회갑 때 들어온 축하 시문을 편집한 책 《東尤壽集(동우수집)》(1937)에는 구한말 대신급 고관대작들과 일본인 사회단체 임원, 총독부 내무국 경보국장, 일본 정부 경시총감, 중의원 대의사, 총독부 비서관, 도지사, 도경찰부장, 도세무감독국장, 법원장, 군수, 경찰서장 등 전현직 관료 100여 명과 한시(漢詩)를 지을 줄 알았던 유생 200여 명의 명단이 올라 있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렀다. 또한 그는 역대 총독 열전각 건립에 자신의 사재를 기부하였다.
2. 3. 광복 이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처벌받지 않았다. 공주군 출신 국회의원이자 반민특위 위원 김명동(金明東)은 김갑순을 추가 기소하려 했으나, 김갑순 측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17] 4월 11일 대법원 재판에서 고령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석방 후,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 총선거에 아들(김종석, 김종락)과 손자(김승태)를 출마시켰으나 모두 낙선했다.[18]
만년에 1949년 농지개혁, 1953년 화폐개혁, 재산 분쟁 등으로 토지를 잃었으나, 사망 직전까지 3371정보(1정보는 3000평)의 토지를 소유했다. 1961년 6월에 사망했다.
김갑순은 "민나 도로보데스[19]"(모두가 도둑놈들)라는 말을 반복했는데, 1982년 MBC 드라마에서 이 발언이 방송되며 1980년대 내내 유행어가 되었다.
사후,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 용산부락에 안장되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3. 1. 반민특위 체포와 석방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별달리 처벌받지 않았다. 공주군 출신 국회의원이자 반민특위 위원 김명동(金明東)은 고향에서 전해지는 각종 정보를 폭로하고 김갑순을 반민특위에 추가로 기소하려 했다. 그러나 김갑순 쪽 사람들은 김명동을 매장하려 억지로 술을 먹이고 돈을 호주머니에 넣기도 했다.[17] 그해 4월 11일 대법원에서 재판받았지만, 고령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석방 후 김갑순은 자신을 체포해 기소하고 조사관을 맡았던 제헌의회 국회의원 김명동에게 당한 모욕을 씻고자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 총선거에 아들 둘(김종석, 김종락)과 손자 김승태를 공주 갑구, 을구와 대전 유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출마시켰다.[18] 아들 김종석은 공주 갑구, 손자 김승태는 공주 을구, 아들 김종락은 대전에 입후보하게 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2. 3. 2. 한국전쟁과 생애 후반
한때 조선 제일의 땅 부자였던 김갑순은 당시 공주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고 한다. 만년에 이르러 김갑순이 대전으로 이사하던 날 공주의 촌로들은 "당신이 떠나시면 공주는 망합니다. 영감님, 못 가십니다!"라며 길을 막았다고 한다.김갑순은 늘 입버릇처럼 '민나 도로보데스[19]'(모두가 도둑놈들) 또는 "다 도둑놈들이다", "다 날강도들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는데, 1982년 김갑순의 일대기를 찍은 MBC 드라마에서 "민나 도로보데스, 다 도둑놈들이야"라던 김갑순의 발언이 공중파를 타면서 1980년대 내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만년에 김갑순은 1949년 농지개혁, 1953년 화폐개혁 그리고 자손들과 친인척 간 재산 분쟁과 소송 등으로 토지를 잃었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김갑순의 수중에는 3371정보(1정보는 3000평)의 토지가 있었다. 무일푼의 머슴으로 사회에 발을 들인 김갑순은 해방 이후 1949년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으로 땅값이 하락했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1953년 화폐개혁 등으로 몰락했지만, 죽던 때도 토지 3371정보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1961년 6월에 죽었다.
죽은 뒤 김갑순의 상여 행렬을 보려고 모여든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길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인절미를 나눠주려고 떡을 수십 가마 쪘다고 한다.[20] 상여를 뒤따르는 만장만도 수백 장에 문상객만 해도 까마득하게 늘어섰다고 한다.[21] 김갑순의 빈소에 찾아가 절하려고 하루, 이틀 정도 대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향년 89세를 一期로 죽었다.
2. 3. 3. 사후
김갑순의 장례식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대하게 치러졌고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 용산부락에 안장되었다. 김갑순의 무덤 앞에는 사당 복락정(復樂亭)과 김씨의 자선송덕비가 있었고, 김씨의 무덤 주변에는 2000년대까지 아버지 김현종, 어머니 밀양 박씨, 장남·손자의 무덤이 인근에 있었다. 한편 맨손으로 가세를 일으켜 3371정보의 대토지를 소유한 김갑순의 이력은 화제가 되어 1982년 MBC에서 특집 《거부실록》을 방영할 때, 김갑순의 일대기는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공주갑부 김갑순〉 편으로 방송되었다.김갑순의 집안은 김씨가 죽은 뒤 몰락했으나 2005년 성명을 밝히지 않은 손녀가 공주, 연기, 부여에 위치한 김씨의 땅 일부를 찾아간 사실이 있다.[22]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김갑순의 무덤 앞에는 '가선대부 행공주군수 김공갑순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김갑순의 묘소 앞에 있던 사당 복락정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2000년대 무렵에는 흉가처럼 방치되다가 파손되었다. 그 후 파손된 복락정 잔해와 함께 오석으로 된 자선송덕비만 남아 있다. 2012년께 김갑순의 아버지 무덤을 비롯한 가족 무덤은 공주군에서 다른 곳에 있던 김씨의 어머니인 밀양 박씨의 무덤 근처로 이장되었다. 김갑순의 아버지 유골은 화장하여 김씨의 어머니 무덤 옆에 안장하였고, 다른 자손들의 무덤 몇 기도 화장하여 그 근처에 뿌려졌다 한다.
3. 논란과 비판
김갑순은 이재에 밝아 세도가와 친분을 맺고[25], 인맥과 이권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자동차 운수업과 유성온천 개발 등으로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다.[25] 돈을 끌어모으는 데 재주가 있어 '화폐 제조기[26]'라고도 불렸다. 경성에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는 전설도 있다.
1949년까지 김갑순의 토지는 총 10110000m2이었고, 1930년 말까지 대전 지역에만 토지 220000m2을 소유했다.[27] 공주 지역에만[27] 마름 최소 40여 명과 소작인 2천여 명을 거느렸다.[28] 김갑순은 마름과 소작인들이 평균 수확량 이상으로 생산하면 그것을 그대로 갖도록 하여, 이들은 자기 땅처럼 작물을 최대한 많이 생산했다.
그러나 김갑순 사후, 그의 손자들은 토지 문제로 소송에 휘말려 상속받은 토지를 대부분 잃기도 했다.
3. 1. 부의 축적 과정
김갑순은 이재에 밝아 세도가와 친분을 맺고[25], 인맥과 이권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 자동차 운수업, 유성온천 개발 등으로 다시 일약 거부로 중추원 참의까지 벼락출세했다.[25] 돈을 끌어모으는 데 재주가 있었던 그는 일명 '화폐 제조기[26]'라고도 불렸다. 경성에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는 전설도 있다.1949년까지 김갑순의 토지는 총 3,371정보, 즉 10110000m2이었고, 충청남도청이 들어오기 전인 1930년 말까지 대전 지역에만 토지 220000m2을 소유하고 있었다.[27] 공주 지역에만[27] 마름 최소 40여 명과 소작인 2천여 명을 거느렸다.[28] 김갑순은 마름들과 소작인들이 평균 수확량 이상으로 생산하면 그것은 그대로 마름들과 소작인들이 갖도록 했다. 마름들과 소작인들은 자기 땅처럼 작물을 최대한 많이 생산했다.
그러나 김갑순이 죽은 뒤 김 씨의 손자들 중에는 토지 문제로 소송에 휘말려서 유산으로 상속받은 토지를 대부분 잃기도 했다.
4. 사상과 신념
김갑순은 근검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처세술에 능했다. 그는 재산을 모은 뒤에도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고, 기운 옷을 입었으며, 자기 집에서만 용변을 보는 등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24] 또한, 자손들이 밥그릇에 쌀 한 톨도 남기지 못하게 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불리고, 소작료를 엄격하게 받아 토지를 늘려 대전, 논산, 공주 등지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24] 또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을 김윤환, 이병길, 윤치오 등 당대 재력가와 유력자의 자녀들과 정략결혼을 시켰다.
공주군청 관노 시절, 김갑순은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조선 사또가 방안의 요강에 용변을 보면, 하루에도 7~8회씩 사또의 방을 드나들며 요강을 비우고 씻었다. 겨울에는 놋쇠 요강을 품에 안고 있다가 사또 방에 갖다 두어, 사또의 엉덩이가 차갑지 않게 배려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8] 그는 상전에게 인정받아 공주감영의 아전(衙前)이 되었으며,[8] 공무원 월급을 상전에게 모두 상납할 만큼 처세에 능했다.[8]
4. 1. 민나 도로보데스 (みんな 泥棒です)
김갑순이 입에 달고 산 '민나 도로보데스', 곧 "모두 도둑놈"이라는 말은 현대까지도 유효하다. 김갑순은 이 말을 통해 사람답고 어른다운 어른을 향한 갈구를 드러냈다.[23] 그는 해방 이후에도 친일 행적이나 소극적 협력을 숨기고 자신의 무용담만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환멸과 조소를 느꼈다.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정의사회 구현’을 외쳤지만 '더 큰손은 청와대'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이때 TV드라마 '거부실록'에서 공주 갑부 김갑순이 내뱉은 '민나 도로보데스(모두가 도둑놈들!)'라는 일본어 대사가 크게 유행했는데,[29] 이는 당시 부패상에 대한 비판 여론과 맞물려 김갑순이 생전에 즐겨 쓰던 이 말이 크게 유행어가 된 것이다.
4. 2. 근검절약과 처세술
땅 투기, 세금 횡령 등으로 거액을 모았다고 알려져 있다.[22] 김갑순은 재산을 어느 정도 모은 뒤에도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상에 놓지 않았고, 기운 옷을 입었으며, 오줌도 자기 집에서만 누는 등의 행동을 하였다.[24] 또한 자손들이 쌀밥 한 알이라도 밥그릇에 남기지 못하게 했다.김갑순은 권력을 이용해 치부하거나 고리대로 돈을 모으고, 소작료를 모질게 받아 토지를 늘려나갔다.[24] 대전, 논산, 공주 등지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김갑순은 자녀 대부분을 김윤환, 이병길, 윤치오 등 당대 재력가와 유력자의 자녀들과 정략결혼을 시켰다. 이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공주군청 관노 시절 김갑순은 궂은일을 도맡았다. 조선 왕조의 사또가 방안의 요강에 용변을 보면, 김갑순은 하루에도 7~8회씩 사또의 방을 드나들며 요강을 비우고 씻었다. 겨울에는 놋쇠 요강을 품안에 안고 있다가 사또 방에 갖다 두어, 사또의 엉덩이가 차갑지 않게 배려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8]
겨울에 눈이 오면 새벽부터 감영 마당의 눈을 쓸었다. “갑순아! 이리 와서 화로에 손을 녹였다가 쓸어라!”라는 사또의 말에도 “아닙니다 나으리. 이거 마저 쓸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요강 당번은 최하층 천민의 더러운 일이지만, 상전과 대면할 기회이기도 했다. 김갑순은 상전에게 인정받아 공주감영의 아전(衙前)이 될 수 있었다.[8] 천민이 말단 9급 공무원이 되는 것은 노예가 시민권을 얻는 것과 같았다.[8] 김갑순은 공무원 월급을 상전에게 모두 상납할 만큼 처세에 능했다. 그는 부스러기 부수입으로 생활했고, 상전은 이런 김갑순을 기특하게 여겼다.[8]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김인식 (金寅植) | |
생부 | 김현종 (金顯宗, ? - 1885년 4월) | |
생모 | 밀양 박씨 (密陽 朴氏, ? - 1914년 2월) | |
형 | ? | 요절 (1885년 사망) |
누이 | 김해 김씨 (金海金氏) | |
매부 | 하치관 (河致寬) | |
부인 | 우숙경 | |
부인 | 김씨 (金氏) | |
아들 | 김종석 (金鍾奭, 1899년 - ?) | 법조인 |
자부 | 김학필 (金學筆, ? ~ 1932년) | 김윤환의 딸 |
손자 | 김승태 (金昇泰, 1920년 2월 3일 - 2001년 12월 24일) | |
손자 | 김영태 (金永泰) | 처음 이름은 기태(基泰) |
손자 | 김성태 (金成泰) | |
자부 | 이절자 (李節子) | 이규완의 딸 |
딸 | 김정자 (金正子, 1909년 - ?) | |
사위 | 윤명선 (尹明善, 1900년 9월 1일 - 1946년 2월 21일) | 윤치오의 아들 |
외손자 | 윤일구 | |
외손자 | 윤오구 | |
아들 | 김종락 (金鍾樂, 1912년 - 1979년 10월) | |
손자 | 김경태 (金京泰) | |
손자 | 김영태 (金英泰) | |
손자 | 김유태 (金有泰) | |
아들 | ? | 요절 |
딸 | 김옥자 (金玉子, 1914년 - ?) | |
부인 | ? | |
아들 | 김종탁 (金鍾澤, 1912년 - ?) | |
손자 | 김한태 (金漢泰) | |
손자 | 김석태 (金碩泰) | |
손자 | 김완태 (金完泰) | |
딸 | 김봉자 (金鳳子, 1914년 - ?) | |
아들 | 김종하 (金鐘河) | 요절 |
아들 | 김종환 (金鍾煥, 1919년 - ?) | |
손자 | 김광태 (金光泰) | |
손자 | 김민태 (金民泰) | |
손자 | 김형태 (金亨泰) | |
부인 | ? | |
아들 | 김종기 (金鍾埼) | 요절 |
딸 | 김송자 (金松子, 1924년 - ?) | |
아들 | 김종소 (金鍾素 또는 金鐘昭, 1925년 - ?) | |
자부 | 우봉 이씨 (牛峰 李氏) | 이병길의 딸 |
손자 | 김수태 (金水泰) | |
손자 | 김흥태 (金興泰) | |
손자 | 김원태 (金源泰) | |
첩 | ? | |
딸 | 김씨 | 덕수 이씨 가문으로 출가 |
사돈 | 윤치오 | |
사돈 | 윤보선 | 사위 윤명선의 사촌 |
사돈 | 윤치소 | |
사돈 | 김윤환 (金閏煥, 1870년 ~ 1936년) |
김갑순은 처가 10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10번째 처는 1980년대까지 공주 장터에서 국밥집을 운영하였다고 한다.[6] 김갑순의 아들 김종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판사를 역임한 법조인이었다.
6. 김갑순을 연기한 배우
7. 기타
공주시내 공주의료원 쪽에서 한일당 다리를 건너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大通寺[30]址 당간지주가 보이고, 대통사지 오른편에 김갑순이 지은 양옥과 일본식 다다미방을 개량한 김 씨의 집이 2008년까지 남아 있었다.
김갑순은 일제강점기 농지 약 1,500여 정보를 소작 경영하였는데, 도지료 대신 수확량을 철저히 검사하고서 추수 후 절반 소작료 지불로 계약해 생산물의 반은 자신이 차지하고 절반은 경작자가 차지하게 했다. 생산량이 많더라도 절반 이상은 가져가지 않아 경작자들은 별 반발 없이 오히려 많은 양을 수확했다 한다. 당시 김갑순의 토지는 공주군 내 각 면을 비롯하여 대덕군, 예산군 등지에 산재해 있었는데 대략 30~40여 명, 혹은 50여 명이었고 공주 주변 읍면 1개에 최소한 1, 2명 정도의 소작인이 있었다 한다.
한편 명당에 어머니의 무덤을 써서 충남 지역 3군수(노성군수, 아산군수, 공주군수)와 기타 지방관을 지냈다는 전설이 공주군 계룡면 지역에 전해진다.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당시 노성군 지역)에는 1904년에 건립된 군수 김갑순 청덕선정비와 월오면(月午面) 면민이 세운 군수 김갑순 애민청덕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공주 시내 야산의 암벽에도 김갑순의 성명을 새긴 선정비가 하나 있다. 공주시 동학사 근처 야산 암벽에도 암벽의 일부를 평평히 깎고 여기에 공주군수 김갑순 선정비라고 새겨 두었다.
참조
[1]
웹사이트
김갑순(金甲淳)
http://encykorea.aks[...]
2022-08-20
[2]
뉴스
조용헌의 八字기행 조상 묫자리 덕에 구한말 갑부 된 김갑순…노비로 태어나 부동산 투기로 축재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2-07-30
[3]
웹사이트
金甲淳
http://koreandb.nate[...]
[4]
뉴스
친일파 김갑순 후손, 행정도시 주변 '조상땅' 되찾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9-14
[5]
뉴스
친일파 김갑순 후손, 행정도시 주변 '조상땅' 되찾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9-14
[6]
웹인용
조용헌 칼럼리스트「차가운 자본주의는 가고 따뜻한 자본주의 4.0시대가 오다」
http://www.khdi.or.k[...]
2013-06-27
[7]
서적
묘지풍수
좋은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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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용헌의 八字기행 조상 묫자리 덕에 구한말 갑부 된 김갑순…노비로 태어나 부동산 투기로 축재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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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한일병합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사대부나 부자라고 하더라도 관직이 없으면 관료에게 소인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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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편집부
2003
[11]
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편집부
2003
[12]
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편집부
2003
[13]
서적
나의 국토 나의 산하
한길사
2008
[14]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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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200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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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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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2004-03-18
[16]
간행물
역사비평:1999년 여름
역사비평사
1999
[17]
서적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증언 반민특위
삼인
1999
[18]
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편집부
2003
[19]
서적
자랑스러운 한국인
하서출판사
2007
[20]
간행물
작가들 29호:2009년 여름호
작가들 펴냄
2009
[21]
간행물
작가들 29호:2009년 여름호
작가들 펴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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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친일파 김갑순 후손, 행정도시 주변 '조상땅' 되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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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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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신경민의 개념사회
메디치미디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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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 이야기 22: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
한길사 펴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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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명산 찾아 10년
신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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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윤치호일기 1916~1943
인물과 사상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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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역사비평:1999년 여름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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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사 이야기 22: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
한길사 펴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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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명동어음풍향계 '위변조 어음에서 '李ㆍ張 사건까지' 1
https://news.naver.c[...]
[30]
문서
충청남도 公州市 班竹洞 301번지 濟民川 邊에 소재한, 南夫餘의 제26 代 國王인 聖王 扶餘明禯이 창건한 大通寺는 朝鮮半島에서 그 위치가 확실히 알려진 最古의 寺刹이다。扶餘明禯이 西曆紀元 제525년 先王인 武寧王 扶餘斯摩을 追福하고 자신의 儲嗣인 威德王 扶餘昌의 건강을 冀願하고 《法華經》의 大通佛을 모시고 서력기원 제527년 南朝 시대의 梁 武帝 蕭衍을 配慮해 창건한 大通寺址에 殘存하는, 신라 후기에 세워진, 대한민국 지정 보물 제150 호 幢竿支柱로 斟量하건대 南夫餘가 唐羅 연합군에게 敗喪하고서도 신라 후기까지 大通寺가 유지되다가 그 후에 廢寺刹이 된 듯하다。일제강점기에 大通寺 一帶에서 石槽 2基와 銘文으로서 「大通」이 있는 瓦甎이 收拾됐고 서력기원 제2000년 公州大學校 박물관 측이 당간지주 부근을 발굴하려고 조사했으나 남부여 시대의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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