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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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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만식은 대한제국 시기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유교적 교육을 받았으나 개신교로 개종하여 장로가 되었으며, 일본 유학 중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3·1 운동 참여로 투옥된 후, 물산 장려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신간회 활동 등 민족 역량 강화에 힘썼다. 해방 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나, 신탁통치 반대 및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로 인해 김일성 세력과 갈등을 겪다 연금되었고, 한국 전쟁 중 살해되었다. 사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조선의 간디'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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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만식
이름조만식
본명조만식
한자曺晩植
고당(古堂)
로마자 표기Cho Mansik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Jo Mansik (개정 로마자 표기법)
출생일1883년 2월 1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강서군
사망일1950년 10월 (향년 67세)
사망 장소평양, 북한
사망 원인총살형
국적조선
학력
모교메이지 대학
직업
직업독립운동가
가족 관계
배우자박씨 부인(사별)
이의식(사별)
전선애(삼혼)
자녀첫 번째 결혼: 아들 1명
두 번째 결혼: 아들 2명, 딸 2명
세 번째 결혼: 아들 2명, 딸 1명
아버지조경학(曺景學)
어머니김경건(金敬虔, 본관은 경주 김씨)
형제자매조은식(누이동생)
친인척강의홍(둘째 사위)
정치 활동
소속 정당조선민주당
주요 활동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당 총재
임기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주석이오시프 스탈린(소련 대원수)
의장김일성(북조선 인민위 위원장 직무대리)
종교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교)
기타
웹사이트고당 조만식 선생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두산백과

2. 생애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조만식은, 본관은 창녕이며,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이후 개신교로 개종하여 장로가 되었다. 1905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면서 개신교에 입교하였다.[1]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며,[1] 간디의 비폭력, 자급자족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1] 1910년 대한제국 병합 이후 독립 운동에 관여하였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구금되었고,[1]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민족적 자긍심을 지켰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설립하여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고 경제적 자립을 추구했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1927년 신간회 평양 지부장을 맡았다. 193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교육·언론·문화 사업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그러나 소련 군정과의 마찰, 신탁통치 반대 운동으로 1946년 1월 5일 연금되었다.[64][65]

1950년 한국 전쟁 중 10월 15일 (혹은 10월 18일)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84]

2. 1. 생애 초반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녕이다. 그는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여 장로가 되었다. 1905년 평양의 선교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개신교에 입교하였다.[1]

1908년 6월부터 1913년까지 일본 도쿄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1] 도쿄에 머무는 동안 간디의 비폭력과 자급자족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레프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존경했다.[1] 이러한 비폭력 저항 사상은 훗날 일제의 지배에 저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 1. 1. 유년기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아버지 조경학(曺景學)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경건(敬虔)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아버지 조경학은 강서 출신의 향반으로, 평양에서 물산객주 일을 하던 상인이었다.[13]

1888년 6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96년 한문 수학을 마쳤다. 아버지 조경학은 "사람이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절의(節義)를 존중하고 지켜야 하느니라"하며 의리와 절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조만식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4]

어린 시절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어린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 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14] 그 뒤 체력을 단련하고 무예를 연마하여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익혀 호신술로 활용,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나기도 했다.[15]

1895년 부모의 권유로 2세 연상의 박씨(朴氏) 부인과 결혼하였다.[16] 1897년 15세 때부터 포목상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포목상을 경영하다가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았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1902년 결혼생활 7년 만에 첫 부인 박씨와 사별하였다.[16] 같은 해 전주 이씨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16]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장사를 그만두고 가족들을 이끌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섬에 있는 벽도지리(碧島只里) 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22살 때 피난 생활 중 급우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16]

1905년 평양의 개신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또는 숭실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13]

2. 1. 2. 포목상 경영

1897년 15세 때부터 포목상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경영하여 재산을 모았다. 이 무렵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16]

1895년 부모의 권유로 2세 연상의 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16] 1902년 사별하였다.[16] 같은 해 전주 이씨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16]

조만식의 가족 관계[16]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부인박씨(朴氏)1880년 - 1902년1895년 결혼, 1902년 사별
아들조칠숭(曺七崇)1899년 - 1909년
부인이의식(李義植)1885년 - 1935년 12월 18일전주 이씨, 1902년 재혼
조선부(曺善富)1910년 - ?
아들조연창(曺然昌)
아들조연명(曺然明)1914년 5월 20일 - 1989년
조선희(曺善姬)1916년 - ?
부인전선애(田善愛)1904년 9월 22일 - 2000년 3월 29일
아들조연흥(曺然興)1940년 2월 6일 -
아들조연수(曺然洙)
조선영(曺善英)


2. 1. 3. 개신교 입문

1905년 평양의 선교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개신교에 입교하였다.[1]

2. 2. 청년기

숭실중학교 재학 중 평양의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20] 1906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설립에 참여하고 유학생 보호 활동을 했다.[21] 1910년 여름, 고향에 잠시 귀국했을 때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고 분노했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직접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참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깨달았다.[20]

2. 2. 1. 일본 유학

1908년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学校)에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했다.[1] 일본 유학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주의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의 지표로 삼았으며, 조선의 간디일본어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1]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学)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여 송진우, 김성수 등과 교류하였다.[1]

2. 2. 2. 계몽·사회 활동

1910년 대한제국 병합 이후 조만식은 독립 운동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수만 명의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1], 한국인들에게 일본식 성으로 창씨개명하도록 압박하는 일본 제국 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2년 조만식은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고 한국인들이 순수하게 국산품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가지고 한국 제품 진흥회를 설립했다. 조만식은 이 회를 모든 종교 단체와 사회 단체, 특히 일반 한국인들이 지지하는 국가 운동으로 만들고자 했다.

한국 제품 진흥회, 그의 강력한 비폭력 저항, 그리고 정치적 또는 사회적 권위보다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얻은 조만식에 대한 존경은 비판가들로부터 "한국 간디"라는 칭호를 얻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학생들의 일본군 입대를 장려한 사실 때문에 일부 동료 민족주의자들과는 복잡한 평가를 받았다.

2. 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1910년 대한제국 병합 이후 조만식은 한국 독립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1913년 대학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1915년에는 교장으로 승진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1]

192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평안도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기간 동안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풀뿌리 민족운동'을 실천하였다. YMCA를 거점으로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하고, 물산장려회 등을 통해 지역의 개신교계, 상공업계, 교육계, 여성계, 청년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가하여[13]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었다.[24]

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 (1923년 3월 20일동아일보)


3·1 운동 참여와 창씨개명 거부로 유명하며, 3·1 운동을 조직한 혐의로 투옥되기도 하였다.[1] 비폭력 저항과 모범적인 삶으로 "한국의 간디"라는 칭호를 얻었다.

2. 3. 1. 민립대학 설립 운동

1923년 김성수, 송진우 등과 연정회를 조직하고,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목적으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25]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후 숭인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26년 사퇴하였다.

2. 3. 2. 실력양성운동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고, 석방 후에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의 선두에 섰다.[1]

1922년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는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고 한국인들이 순수하게 국산품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가졌다. 조만식은 이 회를 모든 종교 단체와 사회 단체, 특히 일반 한국인들이 지지하는 국가 운동으로 만들고자 했다.

1923년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목적으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양 지부장에 취임하였다.

1930년에는 관서체육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조만식은 비판가들로부터도 존경을 얻었고, "한국의 간디"라는 칭호를 얻었다.

193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교육·언론·문화 사업 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기독교 민족주의 입장에서 신사참배와 일제강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병 제도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였다. 1943년에는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회유하려 했던 조만식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지원병 제도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2. 3. 3. 사회단체 활동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한 안창호가 간경화 및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하자, 조만식은 일제의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안창호 장례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윤치호, 양주삼, 장택상 등과 함께 서울에서 장례를 집행하였다.[33]

1939년 12월 18일 정동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으며,[34] 조만식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4]

1943년 일제는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 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며 회유했지만, 조만식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18] 총독부는 그를 이용하여 민심을 회유하려던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을 거절하고 지원병제를 반대하다 구금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943년 11월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조만식의 이름으로 조작된 학병 지원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는 도용이었고, 당시 평양 지사장 고영한이 날조하였음이 나중에 당시 평양 특파원 김진섭 씨의 증언으로 밝혀졌다.[35] [36]

2. 3. 4. 창씨개명 거부와 태평양 전쟁 전후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열린 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조만식은 2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34]

1943년 일제는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며 회유했지만, 조만식은 총독부의 협조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18] 그는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을 거절하고 지원병제를 반대하다 구금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조만식의 이름으로 조작된 학병 지원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는 도용이었고, 당시 평양 지사장 고영한이 날조한 것이 훗날 당시 평양 특파원 김진섭의 증언으로 밝혀졌다.[35][36] 조만식은 또한 한국인들에게 일본식 성으로 창씨개명하도록 압박하는 일본 제국 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2. 4. 정치 활동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조만식은 건국 운동을 일으켰다.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평양에서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평안도 치안유지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8월 17일에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로 이관되었다.[10]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준비위원회는 해체되었고, 새롭게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수립되어 조만식이 위원장에 임명되었다.[10]

당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당국에게는 평양에서 활동하던 조만식만이 김일성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11] 소련군 특별 선전부장 그리고리 메클렐은 점령 후 차기 지도자 선출을 위해 조만식을 만났으나, 조만식은 소련 군정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반공 사상과 반공 태도를 내면에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소련에 보고했다.

같은 해 1945년 11월 3일에는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당 위원장이 되었다. 또한, 소련군 당국의 요청으로 각지의 인민위원회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여 북한 최초의 통치 기구라고 할 수 있는 북조선오도행정국이 설립되었다. 조만식은 그 국장(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제시되면서 한국은 찬반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오도행정국 또한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기능이 마비되었다. 조만식은 북한의 유력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기에, 소련은 1946년 1월 2일, 4일, 5일 세 차례에 걸쳐 그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를 제안하며 신탁통치를 지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신탁통치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여 소련군 당국 및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조만식은 신탁통치 반대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1946년 1월 5일부터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64][65]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소련 해방군 환영 평양 시민대회에 참가한 조만식(오른쪽 두 번째 인물)과 소련군 장교들. 뒤에 태극기가 꽂혀 있다.

2. 4. 1. 해방 직후의 정치활동

1945년 8월 17일, 조만식은 5도(道)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도 참여하여 북부 지부로 만들었다.[2] 일본 항복 후 소련 군정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조만식은 평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14] 소련 장교들은 정기적으로 조만식을 만나 북한 행정부를 이끌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조만식은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외세를 신뢰하지 않아 거절했다.[14]

1945년 9월 21일, 소련은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를 둔 부르주아민주정권 수립을 지시했다.[52] 소련군정은 김일성최용건을 통해 조만식에게 독자적인 정당 창당을 권유했다.[53] 조만식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았고,[42] 10월 16일 ~ 10월 17일 평양의 요리집 가선(歌扇)에서 김일성 가족을 위한 환영연을 주관하였다.[42]

10월 중순, 김일성은 조만식을 만나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는데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54] 그러나 조만식은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만의 정당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53] 김일성은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선생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했지만, 돌아와서는 조만식을 제거하려 했다고 한다.[53]

조만식은 11월 15일 김일성과의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정부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울 방문 계획을 협의했다.[55] 그러나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해서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했고, 조만식은 "12월 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 군대 철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일성이 점령군 철수를 방해한다고 비난했다.[55] 결국 조만식의 남한 방문은 소련 군정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2. 4. 2. 조선민주당 창당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민족·민주계열이자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49] 조선민주당은 ‘105인 사건’을 기념하여 105인의 창당발기인을 두었고,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중앙상임위원은 33인으로 하였다.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의 당수(黨首)가 되어 반공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23] 부당수에는 그의 제자였던 이윤영최용건[58]이 선출되었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 결성대회.


조선민주당은 곧 면단위 지구당을 만들었으며, 11월의 지방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56] 창당 수개월 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59][60] 당원 대부분은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을 보고 입당하였다.[59] 조만식의 지지기반은 그가 세운 조선민주당의 지지자였던 개신교세력과 자산계급이었다.[61] 특히 평안남도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수적인 미국장로교도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12]

소련군은 어떻게든 조만식이 친소련적 입장에 서도록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으나,[59] 조만식과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의 북조선 점령 과정에서 점차 공산주의자들 및 소련과 충돌하게 되었다.[61]

2. 4. 3.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조만식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22] 김구가 주도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62]

소련은 조만식이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하자 당황하였다. 로마넨코 장군은 신탁통치가 아닌 후견이라며 조만식을 설득하려 했고, 협력하면 조선 정부의 고위직과 김일성을 군부에만 두겠다는 제안까지 했다.[63] 소비에트 연방 극동사령부 정치위원 스티코프는 조만식에게 신탁 지지 성명을 요구하며 권총으로 위협했지만, 조만식은 "쏘아라"라며 맞섰다.[59] 치스차코프 점령군 사령관도 신탁통치 결정서에 서명하면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조만식은 거절하였다.[59]

1946년 1월 초, 소련은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며 모스크바 협정 지지를 요청했다.[64][65] 김일성최용건도 조만식을 설득하려 했지만, 조만식은 끝내 모스크바 의정서 지지를 거부하였다.[64][65]

1946년 1월 5일 이후 조만식은 연금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계속했지만, 김일성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내무인민위원회 총책 아노힌 소장은 조만식에게 일본 첩자 누명을 씌워 연금했다고 레오니드 바신이 증언했다.[66][67][68] 미군 기록에도 조만식이 친일 반역자로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다고 언급되어 있다.[69]

조만식이 물러난 후, 조선민주당 위원장에는 최용건이, 부위원장에는 홍기주가 선출되어 찬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70]

2. 4. 4. 정계 축출 이후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면서 조만식은 평양의 일본 총독으로부터 권력 공백 이후의 안정 유지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요청받았다.[2] 그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45년 8월 17일 5도(道)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도 참여하여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북부 지부로 만들었다.[2]

일본 항복 후, 소련 민정청은 조만식에게 새롭게 등장하는 북한 행정부를 이끌 것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조만식은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자신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련의 요청을 거부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평안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남았다.[1]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대한민주당을 설립했으나, 소련의 영향으로 최용건이 당의 초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당은 소련의 이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

김일성과의 이념 갈등, 1945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는 조만식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1946년 1월 1일, 소련 지도자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는 조만식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소련은 조만식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1]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은 소련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평양의 고려호텔에 구금되었다.[1]

2. 5. 죽음

1950년 5월 16일 북조선 당국은 조만식을 남쪽에서 체포된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했으나, 이승만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북조선이 고당 선생을 먼저 보여주길 원했다. 그러나 북조선은 동시 교환을 주장하여 결국 결론 없이 끝났다.[84]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84]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따르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13][85][86]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조선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했다.[13]

1952년 1월 23일자 미국 CIA 보고서에는 1951년 9월~10월 현재 북한에서 구금 중이거나 추적 중인 도망자 명단에 조만식이 나오며, 수년간 구금되었던 그가 도주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87] 이로 보아 당시 미군도 조만식의 생사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것 같다.

3. 사후

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5]

1965년 '고당의 날' 기념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고당경모회' 행사가 거행되었다. 1966년 평남민보사 발행으로 일대기인 <고당조만식>이 발간되었다. 1976년 1월 21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초대 회장 한경직, 상임위원장 박재창)가 창립되었다. 1976년 12월 7일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2년 10월 20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고당선생 추모-안장식 때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75] 1993년 8월 23일 '고당조만식선생 물산장려운동73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1995년 10월 저서 《고당조만식회상록》이 출간되었다. 현재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경기 파주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0년 3월 27일 후처 전선애가 사망하자 국립묘지 조만식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75] 매년 10월 16일~10월 17일 사이에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조만식, 류계준, 김동원, 오윤선은 평양의 산정현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진다.[6][7][8]

태권도 품새 고당(Ko-Dang)은 조만식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9]

4. 평가

조만식은 '조선의 간디'로 불릴 정도로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주의를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지조를 지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함석헌은 그를 두고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89]

4. 1. 친일 의혹설과 이에 대한 비판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그도 학도병 지원을 독려했다는 의혹이 북조선으로부터 제기되었는데, 1943년 11월 16일조선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에 '학생들에게 일본의 전쟁에 지원할 것'을 공식적으로 독려하는 학병권유문 1건을 근거로 삼고있다.[61] 이는 조만식의 명성에 엄청난 손상을 입히게 되는데[61][95] '조만식의 징병 호소 의혹'은 후에 해방정국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에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던 그를 '민족반역자'라고 선동하여 일방적으로 정치적 악용으로 몰아붙였으며, 조선민주당이 조만식에서 최용건으로 바뀔때 정적 숙청과 비판의 명분을 제공하였다.[96]

그러나 이에 대해서 친일청산 문제 연구가인 김삼웅(전직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이 학병권유문 글이 매일신보 평양지사장 고영한 등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규정짓고 있다.[96] 그 근거로 당시 매일신보 평양 특파원으로 근무한 김진섭이 쓴 '조만식 선생 인터뷰 조작기사 쓴 평양지사장 자살(대한언론인회보, 2000년 9월 1일자)'이라는 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고영한 지사장이 내게 고당 선생을 취재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생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나' 하시곤 함구했다. 지사로 돌아와 '안 계시더라'고 허위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고 지부장이 직접 나섰고 사흘쯤 뒤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조작 기사였다. 광복 후 고 지사장에게 함께 상경하자고 권했더니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해서 헤어졌다. 다음날 새벽에 찾아갔더니 지사장 어머니께서 '우리 애가 어젯밤 자살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뚜렷한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만 며칠 뒤 소문이 돌았다. 지사 직원 중 한 사람이 고 지사장을 평소 친일파로 몰아세워 괴로워했을 뿐 아니라 고당 선생의 인터뷰 조작 사건으로 많이 자책하는 것을 보았다는 주변의 이야기들이 무성했다."

또한, 다른 반론으로는 고당 조만식은 1943년에 조선군 주둔 사령관이던 이타가키의 지원병제도 협조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다가 구금까지 당했던 철저한 우국지사였던 인물이다. 그리고, 설령 학병권유문이나 친일단체에 그의 명의가 있다해도 중요한것은 '무슨 활동을 했으며, 그 반대급부는 무엇을 얻었느냐?'를 제시해야 한다.[97] 그러나 고당은 실제 일제말기 총독부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협박을 당하기만 했었다. 즉, 고당 조만식의 '친일 의혹설'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이름 도용'된 것이다.[36]

5. 가족

구 분내용
아버지조경학(曺景學, ? ~ 1930년 음력 4월 14일)
어머니경주 김씨 김경건(金敬虔, ? ~ 1931년 음력 4월 14일)
여동생조은식(1887년 ~ ?)
배우자 및 자녀
박씨(朴氏, 1880년 ~ 1903년)
첫째 아들 : 조칠숭(曺七崇, 1899년 ~ 1909년)
이의식(李義植, 1885년 ~ 1935년)
둘째 아들 : 조연명(曺然明, 1914년 5월 20일 ~ 1989년)
셋째 아들 : 조연창
첫째 딸 : 조선부(曺善富, 1910년 음력 3월 25일 ~ )
둘째 딸 : 조선희(曺善姬, 1916년 음력 5월 15일 ~ )
사위 : 강의홍
전선애(田善愛, 1904년 9월 22일 ~ 2000년 3월 29일),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조만식의 제자이자 후처.[75]
넷째 아들 : 조연흥(曺然興, 1940년 2월 6일 ~ ), 언론인·조선일보사 이사 역임[98]
* 손자 조경규(1974년 10월 8일 ~ ) 만화가
다섯째 아들 : 조연수(曺然守, 1942년 11월 14일~)
셋째 딸 : 조선영



차남 조연창과 사위 강의홍은 한국 전쟁 직전에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88] 전선애가 월남할 때 데려온 자녀들 중 조연흥조선일보 전무와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6. 기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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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Cho Man-sik https://digitalarchi[...] 2022-05-03
[3] 서적 The Impossible State: North Korea, Past and Future http://archive.org/d[...] Ecco
[4] 서적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https://www.worldcat[...] Yuksabipyungsa
[5] 웹사이트 Movement Activists http://www.i815.or.k[...] Independence Hall of Korea 2008-11-14
[6] 웹사이트 [특별 기고]유계준ㆍ유기진 장로, 유기천 총장 http://www.koreadail[...] 2020-11-04
[7] 웹사이트 평양대부흥 http://www.1907reviv[...] 2020-11-04
[8] 웹사이트 [미래를 여는 한국교회] 서울 산정현교회는 빛나는 신앙 전통 계승 http://news.kmib.co.[...] 2020-11-04
[9] 서적 Tae Kwon Do: Art of Self Defence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10] 서적
[11] Youtube 지도자 제전 - 북한 지도자 후보 총정리! fGLq9Fin3Tc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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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웹사이트 빛을 남긴 선진들(2) / 조만식 장로편 http://reformednews.[...] 2008-12-03
[15] 웹사이트 빛을 남긴 선진들(5) / 조만식 장로편 http://reformednews.[...] 2008-12-03
[16] 웹사이트 빛을 남긴 선진들(4) / 조만식 장로편 http://reformednews.[...] 2008-12-03
[17] 웹사이트 빛을 남긴 선진들(3) / 조만식 장로편 http://reformednews.[...] 2008-12-03
[18] 웹사이트 (대한민국 건국 영웅들(3)) 조만식 -그는 누구인가? http://weekly.chosun[...]
[19] 웹사이트 빛을 남긴 선진들(6) / 조만식 장로편 http://reformednews.[...] 200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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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귀신이 되어서라도 팔아라 밀리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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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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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뉴스 여운형 학도병 권유 기사는 조작됐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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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간행물 일제강점기 당시 북조선 지역, 특히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릴만큼 개신교가 주류였던 도시였고, 상업이 일찍이 발전했던 곳이었다. 조만식은 평안도지역 뿐만이 아니라 북조선 지역에서 가장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39] 뉴스 蘇軍(소군) 北韓(북한)서 日軍(일군) 항복받을 때 한국인 曺晩植(조만식)선생 유일 참석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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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간행물 孫世一의 비교 評傳 (7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聯合軍과 함께 國內進入 바라 -1945年 8月(下)-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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