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베네벤툼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베네벤툼 전투는 기원전 275년,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이끄는 군대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지휘하는 로마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피로스 전쟁의 일부로, 시칠리아 원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피로스가 로마군과 맞붙게 된 것이다. 피로스는 야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여 이탈리아를 떠나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전투 이후 로마는 도시의 이름을 말벤툼에서 베네벤툼으로 변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75년 - 피로스 전쟁
    피로스 전쟁은 기원전 280년부터 275년까지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도시 국가들을 지원하여 로마 공화국과 벌인 전쟁으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고 헬레니즘 세계와 로마 간의 충돌을 예고했다.
  • 피로스 전쟁 - 피로스의 승리
    피로스의 승리는 승리했지만 너무 큰 손실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패배와 다름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용어이다.
  • 피로스 전쟁 -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는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정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피로스 전쟁에서 활약하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 태도로 명성을 얻은 금욕주의적 인물이다.
베네벤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베네벤툼 전투
분쟁피로스 전쟁
시기기원전 275년
장소베네벤툼(오늘날의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베네벤토)
결과로마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국
교전국 2에페이로스(고대 국가)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공화국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에페이로스피로스
병력 규모
로마 공화국병력 규모 미상
에페이로스병력 규모 미상, 코끼리 여러 마리
피해 규모
로마 공화국미상
에페이로스코끼리 2마리 전사, 코끼리 8마리 포획, 병력 손실 심각
기타 정보
전쟁의 부분피로스 전쟁
위치이탈리아 내 위치

2. 배경

피로스 전쟁의 주요 장소


피로스 전쟁은 그리스 에피루스 왕 피로스가 로마와 분쟁 중이던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 타렌툼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건너오면서 시작되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실제 동기가 이탈리아 정복이었다고 보았다.[2][3] 피로스는 헤라클레아 전투와 아스쿨룸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어 로마와 계속 싸우기 어려웠다. 로마의 군사력은 강력했고, 병력 충원도 쉬웠기 때문이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로부터 카르타고에 맞서 싸워달라는 요청을 받고 시칠리아로 갔다. 릴리바에움을 제외한 모든 카르타고 영토를 점령했지만, 릴리바에움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만들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독재적으로 다루어 많은 도시가 등을 돌렸다. 결국 피로스는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왔다.[2][3]

2. 1. 피로스 전쟁의 발발

피로스 전쟁은 그리스 에피루스 왕 피로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 타렌툼과 로마 간의 분쟁에서 타렌툼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건너오면서 시작되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실제 동기가 이탈리아 정복이었다는 데 동의한다.[2][3] 타렌툼 외에도 로마와 분쟁 중이던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 등 이탈리아 남부의 3개 이탈리아 민족이 피로스의 군대와 함께 싸웠다.

2. 2. 피로스의 초기 승리와 시칠리아 원정

피로스 전쟁은 그리스 에피루스 왕 피로스가 로마와 분쟁 중이던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도시 타렌툼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건너오면서 시작되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실제 동기가 이탈리아 정복이라고 보았다.[2][3] 타렌툼 외에도 로마와 분쟁 중이던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 등 이탈리아 남부 3개 민족이 피로스 군대와 함께 싸웠다.

피로스는 헤라클레아 전투와 아스쿨룸 전투에서 두 번 승리했지만,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그에게 매우 소모적인 싸움이 되었다. 로마군은 피로스 군대의 병력을 고갈시켰지만, 로마의 군사 인력 풀이 훨씬 우월했기 때문에 피로스는 더 이상 로마와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피로스는 동부 및 남부 시칠리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로부터 섬 서부에 있는 카르타고인들을 상대로 도움을 요청받았을 때 이를 받아들여 시칠리아로 향했다. 이는 로마에 맞서 스스로 싸우도록 남겨진 이탈리아 남부 동맹국들을 분노하게 했다.[2][3] 피로스는 릴리바에움을 제외한 모든 카르타고 영토를 점령했지만, 릴리바에움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함대의 병력을 충원하고 장비를 갖추기 위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독재적으로 대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피로스는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2][3]

3. 전투

플루타르코스는 베네벤툼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피로스가 삼니움족의 지원 없이 로마군과 교전했다고 기록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피로스가 숲과 험준한 바위를 통과하는 긴 길로 진군하여 병사들이 지치고 갈증을 느꼈다고 묘사했다.[6] 이 때문에 피로스는 새벽에 높은 곳에서 적에게 노출된 채 진군해야 했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적의 선봉 부대를 공격하여 코끼리 몇 마리를 포획했다. 평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적 일부를 격파했지만, 코끼리 부대의 돌격으로 야영지로 후퇴했다. 야영지 경비병들이 코끼리에게 창을 던져 쫓아냈고, 코끼리들은 피로스 군대를 휩쓸며 혼란을 일으켰다.[7]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부상당한 코끼리 새끼가 혼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로마군은 코끼리 두 마리를 죽이고 여덟 마리를 생포했으며, 많은 병사들을 죽였다.[8][9]

3. 1. 양측 군대의 배치와 전략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피로스는 삼니움족이 로마에 여러 차례 패배하여 영토를 잃은 상황에서 그들의 불만을 샀다. 카시우스 디오는 삼니움족이 로마에 압박받자 피로스가 그들을 돕기 위해 다시 출병했다고 전한다.[4]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피로스가 삼니움족의 지원 없이 로마군과 교전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로마의 두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각각 루카니아와 삼니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5] 피로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렌툴루스를 견제하고, 자신은 밤에 베네벤툼 근처에 주둔 중이던 마니우스 쿠리우스를 기습하려 했다.

하지만 피로스군은 숲을 통과하는 긴 우회로를 택했고, 횃불마저 오래가지 못해 길을 잃고 뒤처졌다.[6]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피로스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긴 길... 염소길에 불과했고... 갈증과 피로로 몸이 약해질 것"이라고 묘사했다.[6] 새벽녘, 피로스군은 높은 곳에서 로마군에게 노출된 채 진군해야 했다.

마니우스 쿠리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나와 적의 선봉 부대를 공격하고 코끼리 몇 마리를 포획했다. 이 성공으로 평지에서 피로스와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로마군은 적의 일부를 격파했으나, 코끼리 부대의 돌격에 야영지로 후퇴했다. 야영지 경비병들이 코끼리에게 창을 던져 쫓아냈고, 코끼리들은 피로스 군대를 휩쓸며 혼란을 야기했다.[7]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부상당한 코끼리 새끼가 혼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로마군은 코끼리 두 마리를 죽이고 여덟 마리를 생포했으며,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8][9]

기원전 275년,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보병 17,000명, 기병 1,200명으로 말벤툼(Malventum) 근교에 진영을 구축했다. 피로스 군은 보병 20,000명, 기병 3,000명, 전차 20마리를 보유하고 말벤툼으로 향했다.

피로스는 정찰병을 통해 로마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야습을 계획했지만, 로마군 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뜨고 있었다. 로마군은 피로스 군의 야습을 미리 감지하고 요격하여 피로스 군 전차의 절반을 잃게 했다.

다음 날, 로마군은 공세를 가했지만 첫 번째 공격은 피로스 군의 저항에 막혔다. 그러나 두 번째 공격으로 피로스 군의 전차 부대를 혼란시키고 팔랑크스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투 후, "나쁜 바람"을 의미하던 말벤툼은 "좋은 바람"을 의미하는 베네벤툼으로 개칭되었다.[12][13]

3. 2. 전투 경과

플루타르코스는 베네벤툼 전투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카시우스 디오는 삼니움족이 로마인에게 압박을 받자 피로스가 그들을 돕기 위해 다시 출병했다고 기록했다.[4]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피로스는 삼니움족의 지원 없이 로마군과 교전했다. 기원전 275년의 두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코디누스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각각 루카니아와 삼니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5]

플루타르코스는 피로스가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한 부대를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에게 보냈고, 다른 군대와 함께 밤에 베네벤툼 근처에 진을 치고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던 마니우스 쿠리우스를 향해 진군했다. 피로스는 그의 동료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하여 마니우스 쿠리우스와 서둘러 교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길을 잃고 뒤쳐졌는데, 그가 숲을 통해 멀리 우회했고 횃불이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피로스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긴 길을 따라 진군했는데, 숲과 험준한 바위를 통과하는 염소길에 불과했고,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적을 보기 전에 갈증과 피로로 몸이 약해질 것"이라고 기록했다.[6] 이는 피로스를 지연시켰고, 그는 새벽에 높은 곳에서 적을 향해 진군하면서 적에게 완전히 노출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니우스 쿠리우스가 병사들을 야영지에서 이끌고 나와 적의 선봉 부대를 공격하여 뒤처진 코끼리 몇 마리를 포획했다고 기록했다. 이 성공으로 그는 평원으로 나와 평지에서 피로스와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그는 적의 일부 부대를 격파했지만, 코끼리 부대의 돌격으로 인해 자신의 야영지로 후퇴했다. 그는 성벽의 참호에 서 있던 야영지 경비병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내려와 코끼리에게 창을 던졌고, 코끼리들은 방향을 돌려 도망갔다. 코끼리들은 피로스 군대의 대열을 휩쓸고 혼란에 빠뜨렸고, 그 결과 로마군은 에피루스군을 후퇴시켰다.[7]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이렇게 기록했다. "피로스와 그의 부하들이 코끼리와 함께 올라갔고, 로마인들은 이를 알아차리고, 코끼리 새끼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로 인해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큰 혼란과 도주가 발생했다. 로마인들은 코끼리 두 마리를 죽였고, 출구가 없는 곳에 여덟 마리를 가두어 인도 마후트가 항복했을 때 생포했다. 그리고 그들은 병사들에게 큰 학살을 가했다."[8]

카시우스 디오 또한 부상당한 코끼리 새끼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피로스가 도주하게 된 이유를 "어린 코끼리가 부상을 입고, 기수를 떨쳐내고, 어미를 찾아 돌아다녔고, 이에 따라 어미가 흥분하고 다른 코끼리들이 격렬해지면서 모든 것이 끔찍한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로마인들이 승리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코끼리 여덟 마리를 포획했으며, 적의 참호를 점령했다."라고 기록했다.[9]

기원전 275년, 로마군은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를 장군으로 하여 보병 17,000명, 기병 1,200명을 거느리고 피로스 군을 요격하기 위해 로마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말벤툼 근교에 진영지를 구축했다. 피로스 군은 보병 20,000명 (대부분이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군이었다), 기병 3,000명 및 전차 20마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로마군이 포진한 말벤툼으로 향했다.

피로스가 보낸 정찰병의 정보로 로마군의 군영지 위치를 발견한 피로스는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야습 작전을 결심했다. 피로스는 예정대로 야습을 위해 군대를 이끌었지만, 로마군 영지로 향하는 데 시간이 걸려 이미 해가 뜨고 있었다. 한편 로마군은 피로스 군이 야습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고, 마침내 로마군 영지에 도착한 피로스 군의 공격을 요격하여, 피로스 군은 전차의 절반을 잃었다.

야습 다음 날, 로마군은 피로스 군에게 공세를 가했지만, 첫 번째 공격은 피로스의 훌륭한 지휘와 피로스 군의 중장보병의 저항에 막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로마군은 두 번째 공격으로 피로스 군의 전차 부대를 혼란시키고 (아마도 화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피로스 군의 팔랑크스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투가 벌어진 베네벤툼은 전투 당시 "나쁜 바람"을 의미하는 '''말벤툼''' (Malventum)이라고 불렸지만, 전투 후에 "좋은 바람"을 의미하는 '''베네벤툼'''으로 개칭되었다.[12][13]

4. 전투 이후

베네벤툼 전투는 피로스가 이탈리아반도에서 철수하고, 로마가 마그나 그라에키아 지역을 장악하여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0][11]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로마군은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피로스와 그의 군대에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하여 소모전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 지중해 세계에 그 강대함을 알리게 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 강력한 부대로 여겨졌던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에 비해 유연성과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는 로마 군단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는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피로스만큼 로마를 위협한 지휘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4. 1. 피로스의 귀환과 전쟁의 종결

양측의 병력 규모나 사상자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이 패배 이후 피로스는 타렌툼으로 돌아가 전쟁을 포기했다. 그는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지리적 이점을 갖지 못하고, 제1차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피로스는 로마군과의 더 이상의 전투를 피하고 보병 8,000명과 기병 500명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에페이로스로 귀국했다.[10]

피로스 귀국 후 로마는 마그나 그라에키아로 공세를 가하여, 기원전 272년에 피로스와 용병 계약을 맺었던 타렌툼(그리스어 명칭은 타라스, 현: 타란토)을 항복시키고, 기원전 270년에는 마그나 그라에키아에서 최후까지 독립을 유지했던 레기움(그리스어 명칭은 레기온, 현: 레조 디 칼라브리아)을 함락시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달성했다.

로마군은 전장에서 피로스에게 완전히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던 피로스와 그가 지휘하는 군대에 전투마다 큰 손해를 강요하여(cf. 피로스의 승리), 소모전으로 몰아넣은 결과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 세계에 로마의 강대함을 확립시켰다.

또한, 베네벤툼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3세 이래의 강력한 부대였던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에 대해, 유연성과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는 로마 군단의 우월성을 예견하게 했다.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는 더 나아가 전투를 반복하게 되지만, 피로스 이상으로 로마를 괴롭힌 헬레니즘 제국 출신 사령관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4. 2. 로마의 성장과 헬레니즘 세계와의 관계

로마군은 전장에서 피로스에게 완전히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던 피로스와 그가 지휘하는 군대에 전투마다 큰 손해를 강요하여(cf. 피로스의 승리) 소모전으로 몰아넣은 결과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 세계에 로마의 강대함을 확립시켰다.[1]

베네벤툼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3세 이래로 강력한 부대였던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에 대해, 유연성과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하는 로마 군단의 우월성을 예견하게 했다.[1]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는 더 나아가 전투를 반복하게 되지만, 피로스 이상으로 로마를 괴롭힌 헬레니즘 제국 출신 사령관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1]

4. 3. 지명 변경

기원전 268년, 로마인들은 도시와 그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했다.[10] 그들은 불길한 징조와 연관 지었던 '말레벤툼(Maleventum)'이라는 이름을 '베네벤툼(Beneventum)'으로 변경했는데, '말레벤툼'은 라틴어로 "나쁘게 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베네벤툼'은 "환영하다"라는 뜻으로 로마인들에게 더 행운을 가져다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1]

참조

[1] 서적 Cambridge Ancient History
[2] 서적 Parallel Lives, The life of Pyrrhus
[3] 서적 Library of History
[4] 서적 Roman History
[5] 서적 Parallel Lives, The life of Pyrrhus
[6] 서적 Roman antiquities
[7] 서적 Parallel Lives, The life of Pyrrhus
[8] 서적 Roman antiquities
[9] 서적 Roman History
[10] 서적 Periochae
[11] 서적 Natural History
[12] 서적 Cities of the Classical World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2011
[13] 웹사이트 Mygration Story: Italian Roots and Winds of Change http://unu.edu/publi[...] United Nations University 2016-07-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