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 게드로이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베라 게드로이츠는 리투아니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활동한 외과 의사이자 시인이다. 스위스 로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복부 외상 환자에게 개복술을 시행하여 높은 성공률을 거두었다. 러시아 최초의 여성 군의관, 황실 의사로 활동하며, 차르스코예 셀로 궁정 병원 수석 주치의를 역임했다. 또한 '세르게이 게드로이츠'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펼쳤으며,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러시아의 성소수자 작가 - 미하일 쿠즈민
미하일 쿠즈민은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 번역가로, 상징주의 영향에서 아크메이즘 운동에 기여했으며, 동성애를 다룬 소설 《날개》와 마지막 시집 《송어는 얼음을 깬다》 등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성적 다양성을 옹호했다. - 러시아의 의사 - 옐레나 본네르
옐레나 본네르는 소련과 러시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반체제 인사로,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아내로서, 프라하의 봄을 계기로 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창립 멤버로 활동하고, 사하로프 사후에도 인권 운동을 지속하며 푸틴 정권 비판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 러시아의 의사 - 알렉산드르 보로딘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러시아의 저명한 작곡가이자 화학자로, 의사이자 교수로서 활동하면서 "일요일 작곡가"로 불릴 만큼 활발한 작곡 활동을 병행했으며, 러시아 5인조의 일원으로서 러시아적인 요소와 독특한 화성 및 서정성이 돋보이는 음악을 작곡하여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 브랸스크주 출신 - 알렉산드르 볼슈노프
알렉산드르 볼슈노프는 러시아의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로,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다수의 메달을 획득하고 크로스컨트리 월드컵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며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 브랸스크주 출신 - 발레리 고핀
베라 게드로이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베라 이그나티예브나 게드로이츠 |
다른 이름 | 베라 게드로이츠 베라 게드로이츠 베라 게드뢰이츠 베라 기에드로이치 뱌에라 이그나티예브나 걔드로이츠 |
필명 | 세르게이 게드로이츠 |
출생일 | 1870년 4월 19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오룔 현 슬로보디셰 |
사망일 | 1932년 3월 |
사망지 |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 |
국적 | 러시아 |
직업 | |
직업 | 의사 시인 |
활동 기간 | 1900년–1932년 |
2. 생애
리투아니아 귀족 가문인 게드로이츠 가문 출신으로, 오룔주 슬로보디셰에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환경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2][3]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던 중, 러시아에서 여성은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스위스 로잔 대학에서 유학했다.[3] 부모의 질병과 여동생의 사망으로 1900년 러시아로 돌아왔다.[2]
러일전쟁 중에는 이동 병원 열차에서 수석 외과 의사로 복무하며 개복술을 시행해 높은 성공률을 보였고, 이는 러시아 의학계의 관행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1] 이 공로로 여러 훈장을 받았다.
1909년 차르스코예 셀로 궁정 병원으로 옮겨 황실 의사로 일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는 키예프로 이주하여 마리아 니로드 백작 부인과 그녀의 두 자녀와 함께 살았다.[2][3] 1921년부터 키예프 의학연구소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932년 암으로 사망하여 키예프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70-1894)
베라 이그나티예브나 게드로이츠는 1870년 4월 19일(구력 4월 7일) 러시아 제국 오룔 현 슬로보디셰(현재 브랸스크주)에서 태어났다.[2] 리투아니아 귀족 게드로이츠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공작 이그나티 이그나티예비치 게드로이츠였다. 어머니 다리야 콘스탄티노브나 미하우는 러시아화된 독일인 가문 출신이었다.[3] 게드로이츠 가문은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러시아로 이주해왔다.게드로이츠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키예프에서 잠시 살았다. 5남매 중 셋째였던 그녀는 특히 어릴 때 사망한 오빠 세르게이를 아꼈으며, 이는 훗날 그녀의 문학적 필명이 되었다. 세르게이의 죽음은 그녀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실리 로자노프가 교사로 있던 브랸스크 여성 김나지움에 다녔으나, 교사들에게 장난을 쳐서 퇴학당했다. 이후 아버지의 친구인 세르게이 말초프의 공장에서 의학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김나지움에 복학하여 1885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표트르 레스가프트의 의학 강좌를 수강하며 혁명 청년 운동에 참여했고, 1892년 민족주의자 서클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슬로보디셰로 추방되었다.
2. 2. 스위스 유학 시절 (1894-1900)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게드로이츠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친구 니콜라이 벨로제로프와 결혼했다.[2] 게드로이츠는 공개적으로 레즈비언이었지만, 벨로제로프와는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받고, 자주 만나고, 함께 여행했다. 전기 작가 타티아나 호흐로바는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애정이 있었다고 평가한다.[2] 두 사람은 1894년 9월 5일에 결혼했지만, 이를 숨기기 위해 별거 생활을 했다. 벨로제로프는 군 경력으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갔고, 게드로이츠는 새 이름을 사용한 여권을 얻어 스위스로 갔다.[3]
게드로이츠는 로잔 대학교에 입학하여 세자르 루 교수의 진료소에서 외과 의사 훈련을 받았으며 1898년에 졸업했다.[3] 거의 완벽한 점수로 의학 및 외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2] 졸업 후 처음에는 치료 클리닉에서 인턴으로 일했지만, 곧 루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과학 연구를 수행하면서 루의 수석 조교가 되었고, 루는 그녀에게 사강사 자리를 제안했다.[3] 게드로이츠는 모든 수술의 미묘한 점과 환자를 돕는 최선의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수술에 빠져들고" 있다고 쓸 정도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게드로이츠는 한 여성과 열렬한 레즈비언 관계를 시작했지만,[2] 아버지로부터 간절한 편지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여동생 알렉산드라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어머니가 신경 쇠약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돌아와 자신을 도와달라고 촉구하며, 새로 건설될 10병상 공장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2]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게드로이츠는 1900년에 마지못해 슬로보디셰로 돌아갔다.[2]
2. 3. 러시아 귀국 및 의료 활동 (1900-1909)
1900년, 베라 게드로이츠는 부모님의 병환과 여동생의 사망으로 인해 러시아로 돌아왔다.[2] 칼루가 주 지즈드린스키 구에 있는 말초프 시멘트 공장의 의사로 일하며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을 치료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절단, 탈장 수술, 골절 치료 등 다양한 수술 경험을 쌓으며 외과 의사로서 크게 성장했다.[3] 그녀의 개복술(開腹術, laparotomy)은 러일전쟁 중에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다.게드로이츠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의학 저널에 과학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 논문들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17편의 과학 논문을 발표했는데, 탈장 및 산업 부상 외에도 산부인과, 갑상선, 그리고 그녀가 환자에게서 본 다양한 종양에 대한 수술도 다루었다. 그녀의 수술 경험에는 복부 및 흉부 외상, 절단, 자궁외 임신, 안면 및 힘줄 재건, 장 절제술, 자궁 절제술, 개두술, 골절 고정 등이 포함되었다.
1903년, 게드로이츠는 부모님의 건강 악화, 과로, 연인과의 관계 악화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류디노프스카야 병원은 원래 류디노프스카야 광산 공장과 관련이 있었지만, 인근 지역 사회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과 병원으로 전환되었다. 게드로이츠는 스위스에서 받은 교육과 전장 경험을 바탕으로 병원을 현대 유럽 기준에 맞게 끌어올렸다. 그녀는 시설을 확장하고 백색 가운, 실, 장갑 등 새로운 수술 도구를 갖추었다. D'Arsonval 및 Tesla 고주파 전류 기기 및 엑스레이 기계와 같은 장치를 구했고, 마취에 클로로포름 대신 에테르를 사용하는 것을 장려했으며, 환자와 침대 시트를 위한 특별한 의류를 선택했는데, 이 모든 것이 당시에는 혁신적인 조치였다. 또한 병리학 및 해부학 아카이브를 설립했고, 진단 개선을 위해 모스크바 루비안카 광장에 있는 필립 마코비츠 블루멘탈의 화학 및 세균학 연구소와 협력 협약을 맺었다.
병원에서의 활동 외에도 게드로이츠는 수많은 가정을 방문했으며, 5년 동안 125,363명의 환자를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1908년 외과 의사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시의회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2. 4. 러일 전쟁 참전 (1904-1905)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베라 게드로이츠는 러시아 적십자를 통해 자원하여 전선으로 갔다.[1] 그녀는 이동 병원 열차에서 수석 외과 의사로 복무하였다.[1]당시 러시아 군의관들은 복부 부상 병사에게는 예후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게드로이츠는 복부 부상 치료에 개복술을 시행했고, 이는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그녀의 성공적인 치료 사례는 러시아 의학계의 관행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1]
무크덴 전투에서 게드로이츠는 뛰어난 용기와 헌신을 보여 다음 훈장들을 받았다:
2. 5. 차르스코예 셀로 궁정 병원 (1909-1917)
1905년 러일 전쟁에서 복부 수술의 성공으로 명성을 얻은 후, 1909년 게드로이츠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초청으로 차르스코예 셀로 궁정 병원의 수석 외과 의사로 임명되었다.[2] 그곳에서 황실 주치의로 일하며, 간호사로 일한 황후와 그녀의 딸 올가, 타티야나에게 외과 수술을 가르쳤다.[3]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그녀는 '세르게이 게드로이츠'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며 시인 협회에 가입했다. 이 시기 그녀는 외과 교과서인 ''자매와 의사를 위한 외과 대화''를 저술했다.[3]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게드로이츠는 궁정 병원을 정비하고 직원을 훈련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녀는 또한 황실 가족 구성원들에게 간호 기술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게드로이츠는 간호사였던 마리아 니로드 백작 부인(1879년~1965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후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2][3]
2. 6. 러시아 혁명과 키예프 시절 (1917-1932)
1917년 2월 혁명 이후, 게드로이츠는 다른 친척들처럼 차르스코예 셀로로 피난하지 않았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부상을 당한 그녀가 수도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간호사인 마리아 니로트 백작부인(Мария Дмитриевна Нирод, 1879년~1965년)과 가까워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2] 미망인이었던 니로트 백작부인과 그녀의 두 자녀와 함께 게드로이츠는 키예프의 크루글로 대학가(Круглоуниверситетская улица) 7번지의 아파트에 정착했는데,[2] 이들과 가족처럼 살면서 "사실혼" 관계와 같이 지냈다.[3]1921년 키예프 의학연구소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23년 교수, 1930년 학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암으로 사망했으며, 키예프에 묻혔다.
3. 문학 활동
1909년, 시인으로 입문한 지 20년이 되던 해 차르스코예 셀로의 시인협회에 가입해 '세르게이 게드로이츠'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2]
4. 유산
베라 게드로이츠는 20세기 초 확립된 의료 절차에 도전했으며, 복부 상처 치료에 성공하여 국제 군사 의료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전장에서 복부 상처 치료에 개복술을 적용한 선구자로 기억된다.
게드로이츠는 러시아 최초의 여성 외과 의사 중 한 명이자, 최초의 여성 외과 교수, 최초의 여성 군의관, 그리고 최초의 여성 황궁 의사였다.
브랸스크주 포키노의 병원은 게드로이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푸시킨의 옛 차르스코예 셀로 궁전 병원 앞에 그녀를 기리는 기념패가 헌정되었다.
5. 주요 저작
라즈므니크 이바노프-라즈므니크의 기록 보관소에서 게드로이츠의 자전적 소설 모음집인 ''Жизнь''(삶)에서 ''작은 코트'', ''폴란드인''(폴란드계 사람), ''분리'', ''샤먼''의 네 권이 출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미출판된 ''토네이도'' 역시 이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게드로이츠가 이리나 아브디예바에게 남긴 유품 보관소에는 미완성 시 ''Великий Андрогин (старец Досифсй или Дарья)''(위대한 안드로진 (장로 도시프 또는 다리야))과 산문 ''Куски людей''(사람의 조각들), 1914년 학교 공책, 두 개의 일기가 있었다.[2]
5. 1. 의학 논문 및 저서 (일부)
- 19 случаев радикальной операции бедренной грыжи по способу проф. Ру (Лозанна)|1902년|교수 루의 방법(로잔)에 따른 대퇴 헤르니아 근본 수술 19건ru[1]
- Отчет по больнице Мальцевского портландцементного завода Калужской губ., Жиздринского уезда за 1901 г.|1903년 12월|1901년 칼루가 현, 지즈드린스키 구의 말체프 포틀랜드 시멘트 공장 병원 보고서ru[2]
- Отчет о деятельности подвижного дворянского отряда|1905년 7월 27일|이동 귀족 분대의 보고서ru[3]
- Новый способ резекции коленного сустава|1906년|무릎 관절 절제의 새로운 방법ru
- Отдаленные результаты операций паховых грыж по способу проф. Ру на основании 268 операций: Дис.|1912년|268건의 수술을 바탕으로 한 루 방법에 따른 서혜부 헤르니아 수술의 장기적인 결과: 논문ru
- Беседы о хирургии для сестер и врачей|1914년|자매와 의사를 위한 외과에 대한 대화ru
5. 2. 문학 작품
참조
[1]
문서
Княжна 칭호는 영어의 Princess에 해당된다. 그녀의 성씨는 알파벳으로 Gedroitz 또는 ''Gedroyts'', ''Gedroitz'', ''Gedroits'', ''Giedroyć'' 등으로 표기된다.
[2]
서적
Цвет жизни белой
Брянское СРП ВОГ
2011
[3]
간행물
Новое о Сергее Гедройц
Феникс
199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