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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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광은 촉한의 무장으로, 유비의 입촉에 종군하여 익주 평정 후 파군 태수를 지냈다. 221년 파동 태수로 옮겼으며, 이릉 전투에 별독으로 참전했다. 237년 진남장군이 되었고, 이후 우장군과 중향후를 역임했다.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그의 기질이 맹렬하고 변경에서 군사를 맡았으며, 이엄 다음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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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예는 촉한의 관료로서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 활약하며 오나라와의 외교에서 촉한의 입장을 옹호했고, 진군대장군을 역임했으나 촉한 멸망 후 사망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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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 (촉한) | |
---|---|
기본 정보 | |
원어 이름 | 輔匡 |
로마자 표기 | Fu Kuang |
자 | 원필 |
시대 | 삼국 시대 |
국가 | 촉한 |
관직 | |
최종 관직 | 오른쪽 장군, 중향후 |
이전 관직 | 오른쪽 장군 중향후 |
인물 관계 | |
주군 | 유비 유선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사망년도 미상 |
출신지 | 형주 양양군/남군 |
2. 주요 행적
보광은 유비의 입촉에 종군하여 익주가 평정된 후 파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촉한 건국 후인 장무 원년(221년)에는 파동 태수로 자리를 옮겼고,[2] 같은 해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이릉 전투에는 별독[3]으로서 참전하였다. 건흥 15년(237년)에는 진남장군이 되었으며,[4] 이후 우장군과 중향후(中鄕侯)의 지위에 올랐다. 양희는 그의 저서 『계한보신찬』에서 보광에 대해 "기질이 맹렬하며, 변경의 땅에서 군사를 맡았다"고 평가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나 지위는 이엄 다음가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5]
2. 1. 유비의 입촉 종군
유비의 입촉에 종군하였으며, 익주가 평정된 후에는 파군 태수로 임명되었다.촉한 건국 후인 장무 원년(221년)에는 파동 태수로 자리를 옮겼다.[2] 같은 해부터 다음 해까지 이어진 이릉 전투에서는 별독[3]으로서 참전하였다.
건흥 15년(237년)에는 진남장군이 되었고[4], 이후 우장군 및 중향후의 지위에 올랐다.
양희는 그의 저서 『계한보신찬』에서 보광에 대해 "기질이 맹렬하며, 변경의 땅에서 군사를 맡았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나이나 위계는 이엄 다음가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5]
2. 2. 파군 및 파동 태수 시절
유비의 입촉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익주가 평정된 후에는 파군 태수로 임명되었다.촉한 건국 후인 장무 원년(221년)에는 파동 태수로 자리를 옮겼다.[2] 같은 해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이릉 전투에서는 별독[3]으로서 참전하였다.
양희는 그의 저서 『계한보신찬』에서 보광에 대해 "기질은 맹렬하며, 변경의 땅에서 군사를 맡았다"고 평가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나 지위는 이엄 다음가는 수준이었다.[5]
2. 3. 이릉 전투 참전
장무 원년(221년), 파동 태수로 임명되었다.[2] 같은 해부터 다음 해까지 이어진 이릉 전투에서는 별도의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인 별독[3]으로서 참전하였다.2. 4. 진남장군 및 우장군 역임
건흥 15년(237년)에 진남장군으로 임명되었다.[4] 이후 우장군으로 승진하였고, 중향후(中鄕侯)에 봉해졌다.양희가 지은 『계한보신찬』에서는 보광에 대해 "기질은 맹렬하며, 변경의 땅에서 군사를 맡았다"고 평가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나 지위는 이엄 다음가는 수준이었다.[5]
3. 평가
양희는 그의 저서 『계한보신찬』에서 보광을 평가하며 "기질은 맹렬하며, 변경의 땅에서 군사를 맡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의 연령과 위계는 이엄 다음이었다고 전해진다.[5]
참조
[1]
서적
三国志
[2]
서적
完訳 華陽国志
志学社
[3]
서적
正史 三国志 7
ちくま学芸文庫
[4]
서적
完訳 華陽国志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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