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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입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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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비의 입촉은 211년부터 214년까지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유비는 조조와 장로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를 끌어들이려는 장송의 제안과, 제갈량의 진언에 따라 익주를 점령하려 했다. 유장은 유비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여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으나, 유비는 유장의 요청에 따라 가맹관에 주둔하며 촉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유비는 낙성, 면죽관, 가맹관 전투를 거쳐 성도를 함락시키고 익주를 차지하여 삼국 정립의 기반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유비는 손권과의 형주 영토 분쟁을 겪었으며, 익주를 차지한 후 제갈량 등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촉한의 기틀을 마련했다.

2. 역사적 배경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 남부를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여전히 기반은 불안정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익주 점령은 유비에게 필수적인 과제였다. 당시 익주는 유장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외부 위협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조조는 북방을 장악하고 남진을 꾀하고 있었고, 손권 역시 강동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208년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 강남의 여러 군을 제압하여 세력을 크게 넓혔다.[63] 손권유비에게 익주를 함께 점령할 것을 제안했지만, 유비는 "만약 당신이 촉 땅을 정복하려 한다면, 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깊은 산 속에 은둔하겠습니다. 천하가 제 약속을 들을 수 있으며, 저는 제 말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강력하게 거부했다.[4] 유비의 말에 손권은 익주 점령 계획을 중단했다. 그러나 유비는 사실 익주를 자신이 차지하려 했고, 손권으로부터 의릉현과 남군을 양도받았다.

이러한 삼국 간의 경쟁 구도는 유비에게 익주 점령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2. 1. 익주 내부 상황

211년, 조조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한중 태수 장로가 익주를 손에 넣으려고 20년 넘게 익주를 다스리던 익주 자사 유장을 공격한다. 이에 유장은 부하 장송을 보내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한다.[5]

장송은 유장에게 조조와 장로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를 끌어들일 것을 진언했다. 유장 진영에서는 처음에는 조조와의 제휴를 모색했지만, 형주를 지배하여 세력이 커진 조조에게 사자가 냉대를 받았고, 그 후 조조의 세력이 형주에서 후퇴함에 따라 조조와의 제휴는 무산되었다. 이때 조조에게 냉대를 받은 사자가 장송이었다. 장송은 은밀히 나약한 성격의 유장을 버리고, 유비를 새로운 군주로 맞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63]

유장은 황권유파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를 받아들여 법정과 맹달을 사자로 파견한다. 그러나, 이 두 명도 장송의 동료였고, 유장을 폐위시키려 했다. 법정은 유비에게 익주를 빼앗는 방책을 이야기했고, 이에 따라 유비는 요청이 있었다는 명목으로 황충, 군사로 방통을 동반하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촉으로 들어갔다.[5]

2. 2. 유비의 명분과 초기 전략

劉備|유비중국어는 유장의 요청에 따라 익주에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익주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맹관에 주둔하면서 군사 행동보다는 민심을 얻는 데 주력하며 세력을 확장했다.[63] 이는 왕건이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명분을 중시했던 점과 유사하다. 유비는 익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심을 얻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유장을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3. 익주 점령 과정

211년 조조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한중 태수 장로가 유장을 공격한다. 유장은 장송을 통해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한다. 유비는 방통, 황충, 위연 등과 함께 익주로 향한다.[63]

유비와 유장의 관계는 장송이 장숙에게 발각되어 처형되면서 악화되고, 결국 전쟁이 시작된다. 유비는 익주 정벌의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판단하여 방통, 황충, 위연 등과 함께 익주 평정에 나섰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 악진 등에 맞서게 했다.[64]

212년 조조와 손권이 양주를 두고 전투를 벌이자, 손권은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형주에서는 악진과 관우가 청니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유비는 유장에게서 병력과 군수 물자를 빌리려 했지만, 유장은 요구했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적은 양만 지원했고, 이에 유비와 유장은 사이가 나빠졌다.[64]

유비는 가맹성을 곽준에게 지키게 하고, 황충, 탁응, 위연 등과 함께 성도를 향해 침공을 시작했다. 유장은 장임, 냉포, 유괴, 등현, 오의 등을 파견해 맞섰으나, 유비군은 이들을 격파하고 부성을 점령했다. 면죽의 이엄비관, 오의 등이 유비에게 항복하면서 유비군이 우세해졌다. 황충은 항상 선두에 서서 적의 진지를 함락시키는 등 용맹함을 떨쳤다.[64]

그러나 유장군의 장임유순은 낙성에서 철저히 항전했고, 유비군은 방통을 잃는 등 고전하며 1년 이상 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광한현을 지키던 황권은 종전까지 광한현을 지켜냈고, 곽준은 가맹성에서 1년에 걸쳐 유장군을 막아냈다.[64]

한편, 유비는 형주에 있던 제갈량을 소환하고, 장비조운 등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동군을 항복시키고 파군에 들어갔다. 장비엄안을 사로잡아 항복시키고, 조운은 강양, 건위를 평정했다. 제갈량덕양을 평정하고, 성도로 향했다. 제갈량, 장비, 유봉 등의 군세는 유장군과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67]

여름 무렵 유비는 낙성을 공략한 후, 제갈량, 장비 등과 합류하여 성도를 포위했다. 마초까지 유비에게 귀순하자, 유장은 결국 214년 여름 5월, 유비에게 항복하고 익주를 넘겨주었다.[68]

3. 1. 부수관 전투 (211년)

211년, 유장은 유비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군량을 보내달라는 유비의 요청을 형식적으로만 응하고 오히려 군사 1만 명을 보내 부수관의 수비를 강화했다. 이에 유비는 분노하여 방통에게 부수관 공략을 명하고 서천 정벌에 나섰다.[15][16]

방통은 형주로 돌아간다는 핑계로 부수관의 장수들을 성 밖에 끌어내 생포하고, 유봉관평을 시켜 유장의 명을 받아 유비를 암살하려 했던 백수도독 양회고패를 처형했다. (이는 유비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삼국지연의》의 허구이다.) 이로써 아군과 적군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부수관을 쉽게 함락했다.

한편, 유비의 귀환 의도를 의심한 장송은 유비와 법정에게 편지를 보내려 했지만, 장송의 형이자 광한 태수인 장숙에게 발각되어 장송 등의 계획은 유장에게 알려졌고, 장송은 처형되었다. 그러자 유비는 방통의 계략을 사용하여 백수관을 지키던 유장의 무장인 양회와 고패를 참살하고 백수관을 점령했다.

3. 2. 낙성 전투 (213년 ~ 214년)

211년 조조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한중 태수 장로익주를 공격한다. 이에 유장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권한다. 유비는 방통, 황충, 위연 등과 함께 익주로 향한다.[19]

유장은 유비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군량을 보내달라는 유비의 요청에 형식적으로만 응하고, 군사 1만 명을 보내 부수관의 수비를 강화한다. 이에 분노한 유비는 방통에게 부수관 공략을 명하고 서천 정벌에 나선다. 방통의 계책으로 부수관을 쉽게 점령한 유비군은 익주의 요충지 낙성을 공격한다. 유장은 유괴, 냉포, 등현, 장임 등과 5만 명의 군사를 보내 낙성을 지키게 한다. 유비는 황충과 위연에게 영채를 공격하게 하지만, 위연은 등현에게 패배할 뻔했으나 황충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유장은 아들 유순오의 등에게 지원군을 보낸다.

한편, 유비는 맹달의 추천으로 곽준을 등용하고, 냉포는 유비군을 수공으로 공격하려다 팽양의 밀고로 실패하고 위연에게 죽는다. 제갈량은 불길한 천문을 보고 방통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방통은 이를 무시하고 낙봉파에서 장임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다.[36]

유비는 제갈량에게 구원을 청하고,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장비와 함께 출병한다. 장비는 엄안을 항복시키고, 유비는 장비의 도움으로 낙성 공격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제갈량조운까지 합류하자 유비군은 다시 공격 준비를 한다. 제갈량은 장임을 사로잡고, 유비군은 낙성을 함락시킨다.[34]

정사에는 214년 봄, 제갈량, 장비, 조운이 서천에 도착했을 때 장임은 이미 유비와 방통에게 사로잡혀 죽은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방통이 직접 군세를 이끌고 낙성을 공격하다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36]

3. 2. 1. 연의와 정사의 차이

삼국지연의에서는 낙성 전투가 과장되게 묘사되었으나, 정사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방통의 죽음과 관련된 '낙봉파' 전설은 허구이다.[64]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받아 명대 이후부터 사람들이 사천성 덕양현 나강진 부근 험요한 지점에 낙봉파라는 허구 지명을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서천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가짜 관광지로 존속하고 있다.[64]

중국 정사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 의하면 장임은 오히려 방통보다도 약 1년 먼저 죽었다.[64]

백마관 관광지에 포함된 낙봉파와 마찬가지로 가맹관(소화고성) 앞에 있는 장비마초의 싸움터, 관색호삼랑의 묘 역시 가짜이며 중국 삼국시대 당시에 실존하지 않았던 유적들이다.[64]

제갈량, 장비, 조운유비와 합류하는 과정에서 익주 주변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낙성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즉, 낙성과 면죽까지 익주 내부의 요충지 대부분은 유비와 방통이 자력으로 함락시킨 것이다. 제갈량이 구원차 낙성 앞에 주둔한 유비군과 합류하여 장임을 사로잡고 낙성을 함락시킨 사실 모두 원대 잡극인 삼국지평화 이후부터 제갈량의 공적을 과대포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이다. 실제 유비 본대와 제갈량 등의 호응군이 합류한 지점은 성도 인근이다. 이 무렵 마초, 마대가 몰래 유비에게 귀순했다.[64]

3. 3. 파군 전투 (214년)

제갈량장비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파군을 공략하게 했다. 당시 파군 태수 엄안은 익주의 노장이었다. 장비는 엄안을 지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성 밖으로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장비는 계책을 써서 밤에 몰래 군사를 후퇴시키고 엄안을 끌어내 사로잡았다. 장비는 사로잡힌 엄안을 설득하여 투항하게 하고 곧장 낙성으로 간다.[64] 유장의 무장인 파군 태수 조착은 이를 거부했지만, 장비는 이를 격파했다. 조착의 부장 엄안은 장비와 싸우다 생포되었다. 엄안이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장비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빈객으로 후하게 대우했다.[65]

3. 4. 면죽관 전투 (214년)

유비성도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면죽관을 함락시킬 준비를 했다. 한편 유장은 성도로 도주한 아들 유순에게서 낙성이 함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유장은 처남 비관과 부하 이엄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면죽관을 지키게 했다. 익주 태수 동화는 부하 황권을 보내 한중 태수 장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장로는 마초마대에게 군사 2만 명을 주어 서촉으로 보냈다.[64]

비관유비군이 오자 부하 이엄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싸우라 명했으나,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황충에게 군사를 모두 잃고 항복했다. 비관도 항복한 이엄에게 설득되어 결국 면죽관의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면죽관은 함락되었다.[64]

3. 5. 가맹관 전투 (214년)

馬超|마초중국어장로와의 불화로 유비에게 투항했다.[33] 한중 태수 장로는 마초에게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가맹관에서 유비의 부하 맹달과 곽준을 공격하게 했다. 유비는 조운위연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가맹관으로 보냈고, 유비와 장비도 뒤따라갔다.

가맹관 근처에서 위연마초의 사촌 마대와 승부를 겨뤘지만 무승부로 끝났다. 다음 날 장비마대를 물리치고 마초와 승부를 겨뤘으나, 100합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제갈량이 도착해 장로의 참모 양송에게 뇌물을 써서 장로마초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마초는 한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장로는 동생 장위를 시켜 중요한 길목을 막아 마초의 입성을 거부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마초는 유비에게 항복했던 유장의 부하 이회에게 설득되어 양백을 죽이고 유비에게 투항했다.[33]

3. 6. 성도 함락 (214년)

211년 조조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한중 태수 장로는 위험을 느꼈다. 장로는 익주를 손에 넣고자 20년 넘게 익주를 다스리던 익주 자사 유장을 공격했다. 이에 유장은 부하 장송을 보내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권했다. 장송은 유비를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을 세웠다.[63]

유장은 유비를 받아들이는 데 찬성했지만, 신하 왕루는 자살까지 하면서 반대했다. 유비는 방통, 황충, 위연 등 부하 장수와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향했고, 유장은 성도에서 360리 떨어진 부성에서 유비를 맞이했다.

그러나 유비와 유장의 친선 관계는 잠시였고,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송이 형 장숙에게 유비를 돕는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자 유비와 유장은 전쟁을 시작했다.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 등 형주에서 기반을 잡을 때 얻은 인물들 위주로 익주 평정에 나선 것은, 형주가 항상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핵심 인물들을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익주 정벌의 중요성에 비해 난이도는 높지 않다고 여겨 후세대 양성 의도를 겸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유비가 서천으로 떠난 이후 조조가 다시 형주를 노렸고, 악진의 선공으로 청니대치가 발발하였다. 처음에는 관우, 장비, 제갈량, 조운 등이 악진과 대립하였으나, 이후 유비의 익주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장비, 제갈량, 조운이 각자 군사를 이끌고 익주로 떠났다. 홀로 형주를 지키게 된 관우는 모든 전선에서 악진과 문빙 등에게 패하였지만, 악전고투를 펼치며 형주를 지켜냈다.

마초는 모든 군사를 이끌고 성도성 바로 앞까지 진격해 유장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익주 태수 동화황권, 유파가 반대했지만, 촉군 태수 허정이 항복하고 초주에게 설득되어 결국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하고 익주를 넘겨주었다.[68]

여름 무렵 유비는 낙성을 공략한 후, 제갈량, 장비 등과 합류하여 성도를 포위했다. 이때, 촉군 태수 허정이 유장을 버리고 성을 탈출하여 항복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붙잡혔다. 유장은 사태가 위급했기에 허정을 처벌하지 않았다.

유장은 성도성 안에 3만 명의 병사와 1년치 군량을 비축하고 있어 항전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가 이회를 장로에게 의탁하고 있던 마초에게 파견하여 귀순을 설득했고, 마초는 장로에게서 도망쳐 유비에게 귀순했다. 당시 마초는 장로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휘하의 양백 등과도 대립하고 있었다. 맹장으로 유명했던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했다는 소식에 유장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관민 대부분은 유비와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고, 정도처럼 초토화 작전을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법정은 정도의 작전을 유장이 채택하지 못할 것이라고 유비를 안심시키고, 스스로는 편지를 보내 유장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214년 여름 5월, 유비가 간옹을 항복 권고 사자로 보내자, 유장은 "더 이상 백성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항복하고 개성했다.

4. 결과 및 영향

마초가 성도성 앞까지 진격하자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었다. 손권은 익주를 얻은 유비에게 형주 할양을 요구했다. 유비는 양주를 얻은 후에 형주를 재분할하겠다고 답했지만, 215년, 손권은 여몽에게 명하여 장사, 영릉, 계양 삼군을 빼앗아 일촉즉발의 사태가 되었다. 그러나 노숙관우의 협의(단도부회) 결과, 형주를 분할하여 유비가 남군, 무릉, 영릉을, 손권이 강하, 장사, 계양을 영유하는 것으로 화해했다.[2]

이 동안, 조조는 한중의 장로를 공격(양평관 전투)하여, 장로와 한중 주변의 여러 호족들을 항복시키고, 한중에 하후연을 두어 유비의 익주 지배를 견제했다.[2]

이후, 유비는 한중으로 침공하여,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을 참수하고 조조의 침공을 격퇴시키자 익주 지배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한중왕을 자칭하며 촉한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형주에서의 손권과의 대립은 217년 노숙의 죽음을 기점으로 심각해졌고, 같은 해에 형주는 함락될 것이다.[2]

4. 1. 유비의 익주 통치

마초가 성도성 바로 앞까지 진격하자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었다.[17] 유비는 유장을 형주 남군의 공안으로 보내고 스스로 익주목이 되었다.[18] 엄안을 전장군, 동화를 장군중랑장, 법정을 촉군 태수, 허정을 좌장군장사, 방의를 영중사마, 유파를 좌장군, 황권을 우장군으로 삼았다.[18]

오의, 비관, 팽양, 탁응, 이엄, 오란, 뇌동, 이회, 장익, 진복, 초주, 여의, 곽준, 등지, 양홍, 주군, 비의, 비시, 맹달 등 항복한 문무관원 60명을 모두 발탁해 기용했다.[19] 제갈량을 군사, 관우를 탕구장군 한수정후, 장비를 정로장군 신정후, 조운을 진원장군, 황충을 정서장군, 위연을 양무장군, 마초를 평서장군으로 봉했다.[19] 그밖에 손건, 간옹, 미축, 미방, 유봉, 오반, 관평, 주창, 요화, 마량, 마속, 장완, 이적 등의 신하와 형주와 양양 지역의 모든 일반 문무관원들까지 벼슬을 올려주고 상을 내렸다.[19] 관우에게는 황금 500근, 은 1000근, 전 5000만과 서촉에서 나는 비단 1000필을 보냈다.[19]

이리하여 유비는 익주를 완전히 평정하고 제갈량을 시켜 법과 제도를 정비하게 하였다.[19] 유비는 유장의 신변과 재산을 보장하고 진위장군의 인수를 수여한 후 공안으로 보냈으며, 군사중랑장 제갈량을 군사 장군으로, 익주군태수 동화를 장군중랑장으로 임명하여 함께 좌장군부의 정무를 대행하게 했다.[20] 마초를 평서장군으로, 법정을 촉군태수·양무장군으로, 황충을 토로장군으로, 미축을 안한장군으로, 간옹을 소덕장군으로, 손건을 병충장군으로, 이지를 종사중랑으로 임명하여 공에 보답했다.[20] 유장의 옛 신하들도 초빙하여 황권을 편장군으로, 허정을 좌장군장사로, 방희를 사마로, 이엄을 건위태수로, 비관을 파군태수로, 유파를 서조연으로, 팽양을 익주 치중종사로 임명하여 진용을 충실하게 했다.[20] 제갈량, 법정, 장비, 관우 등에게는 익주 평정의 공로로 금은전견을 하사했다.[20]

4. 2. 삼국 정립

三國鼎立|삼국정립중국어유비익주를 점령하면서 위, , 오 삼국이 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은 후, 마초를 평서장군에, 황충을 정서장군에 임명하는 등 문무관원 60명을 발탁하여 기용하고, 제갈량을 군사로 삼아 법과 제도를 정비하게 하였다.[1]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의 할양을 요구했고, 215년 여몽에게 명하여 장사, 영릉, 계양 삼군을 빼앗아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노숙관우의 협의(단도부회) 결과, 형주를 분할하여 유비가 남군, 무릉군, 영릉군을, 손권이 강하군, 장사군, 계양군을 영유하는 것으로 화해했다.[2]

이후 유비는 한중으로 침공하여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을 참수하고 조조의 침공을 격퇴하여 익주 지배를 확고히 하고 한중왕을 자칭하며 촉한의 기초를 다졌다.[2]

4. 3. 손권과의 갈등

孫權|손권중국어유비익주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유비는 양주를 얻은 후에 형주를 다시 나누겠다고 답했지만, 215년, 손권은 여몽에게 명하여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빼앗아,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노숙관우의 협의(단도부회) 결과, 형주를 분할하여 유비가 남군, 무릉, 영릉을, 손권이 강하, 장사, 계양을 차지하는 것으로 화해했다.[1]

5. 역사적 의의

유비의 익주 점령은 후한 말 혼란기에 새로운 세력 구도를 형성하고, 삼국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고구려후삼국 통일 전쟁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과 비견될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은 전략적 요충지 확보, 민심 확보, 인재 등용, 그리고 정치적 동맹과 배신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비는 방통, 황충, 위연 등 그가 기반을 잡았을 때 얻은 인물들 위주로 익주 평정에 나섰다. 이는 당시 형주가 항상 호시탐탐 노려지는 지역이라는 특성을 감안해 핵심 인물들을 남긴 것과 익주 정벌의 중요성에 비해 난이도는 높지 않다고 여겨 후세대 양성 의도를 겸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유비가 서천으로 떠난 이후 조조가 다시 형주를 노렸고, 악진의 선공으로 인해 청니대치가 발발하였다. 처음에는 관우, 장비, 제갈량, 조운 등이 청니대치를 통해 악진과 대립하였으나 이후 유비의 익주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장비, 제갈량, 조운이 대치 도중 각자 군사를 이끌고 익주로 떠났다.[4]

6. 대중문화 속 익주 점령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전략 게임에서 유비익주 점령은 중요한 시나리오로 다루어진다.

6. 1. 삼국지연의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익주 점령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방통의 죽음, 장비마초의 대결 등 극적인 장면들이 추가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18]

211년 조조동관 전투에서 마초를 무찌르자, 한중 태수 장로가 유장을 공격한다. 유장은 장송을 보내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를 다스리라고 한다. 유장은 유비를 받아들이는 데 찬성하지만, 신하 왕루는 자살까지 하면서 반대한다. 유비는 방통, 황충, 위연 등과 함께 익주로 향하고, 유장은 부성에서 유비를 맞이한다.[18]

유비와 유장의 관계가 악화되고 장송이 처형되자, 둘은 전쟁을 시작한다. 유비는 방통에게 부수관 공략을 명하고, 방통은 계책을 써서 양회고패를 처형하고 부수관을 함락시킨다. 이후 유비군은 낙성을 공격하고, 유장은 유괴, 냉포, 등현, 장임을 보내 낙성을 지키게 한다.[18]

위연황충보다 먼저 영채를 공격하다 등현에게 죽을 뻔하지만, 황충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유장은 유순, 오의, 오란, 뇌동에게 지원군을 보낸다. 한편, 냉포는 강물로 유비군을 쓸어버리려 하지만, 팽양에 의해 발각되어 위연에게 죽는다.[18]

제갈량이 불길한 천문을 읽고 방통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방통은 이를 무시하고 낙봉파에서 장임의 기습 공격을 받고 전사한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구원을 청하고, 제갈량은 장비와 함께 출병한다. 장비는 엄안을 항복시키고, 유비는 장비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18]

제갈량장임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유비군은 낙성을 함락시킨다. 제갈량, 장비, 조운은 익주 주변 지역을 평정하고 유비와 합류한다. 유비는 면죽관을 함락시킬 준비를 하고, 유장은 비관이엄에게 면죽관을 지키게 한다. 이엄은 황충에게 항복하고, 비관도 항복하여 면죽관은 함락된다.[18]

장로마초에게 군사를 주어 서촉으로 보내고, 마초는 가맹관을 공격한다. 장비마초와 승부를 겨루지만, 승부가 나지 않는다. 제갈량양송에게 뇌물을 써서 장로마초의 사이를 갈라놓고,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한다.[18]

마초는 성도성 바로 앞까지 진격해 유장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유장은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고, 제갈량을 군사로 삼고, 관우, 장비, 조운, 황충, 위연, 마초 등에게 벼슬을 내린다. 유비는 익주를 완전히 평정하고, 제갈량에게 법과 제도를 정비하게 한다.[18]

6. 2. 게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전략 게임에서 익주 점령은 중요한 시나리오로 다루어진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2
[2] 서적 Sanguozhi vol. 32
[3] 서적 Sanguozhi vol. 31
[4] 서적 Sanguozhi vol. 32
[5] 서적 Sanguozhi vol. 32
[6] 서적 Sanguozhi vol. 32
[7] 서적 Sanguozhi vol. 31
[8] 서적 Sanguozhi vol. 32
[9] 서적 Sanguozhi vol. 39 Lingling Xianxian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vol. 31
[11] 서적 Sanguozhi v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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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Sanguozhi vol.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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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Sanguozhi vol. 32
[18] 서적 Sanguozhi vol. 32 Fu Zi annotation in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vol. 37
[20] 서적 Sanguozhi vol. 32
[21] 서적 Sanguozhi vol. 40
[22] 서적 Sanguozhi vol. 37
[23] 서적 Sanguozhi vol. 32
[24] 서적 Sanguozhi vol.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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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Sanguozhi vol.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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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적 Sanguozhi vol. 45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29] 서적 Sanguozhi vol. 32
[30] 서적 Sanguozhi vol.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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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Huayang Guo Zhi vol.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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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서적 Sanguozhi vol. 40
[42] 서적 Sanguozhi vol. 36
[43] 서적 Sanguozhi 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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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서적 Sanguozhi vol. 38
[55] 서적 Sanguozhi vol. 31
[56] 서적 Sanguozhi v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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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서적 Sanguozhi vol.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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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적 三国志
[64] 서적 三国志
[65] 서적 三国志
[66] 서적 華陽國志
[67] 서적 三国志
[68]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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