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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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엄은 촉한의 장수로, 젊은 시절 유표 휘하에서 문관으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유비가 익주를 공격하자 유비에게 항복하여 비장군에 임명되었고, 이후 건위태수와 흥업장군을 역임하며 촉한의 법률 시스템인 촉과 제정에 참여했다. 제갈량 사후 군량 수송 실패로 실각하여 유배되었고, 제갈량의 죽음에 통탄하며 사망했다. 진수는 이엄을 재능은 있었으나 자만심으로 인해 재앙을 자초한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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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이엄 |
본명 | 이평 |
로마자 표기 | I Eom |
자 | 정방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형주남양군 |
사망 | 234년 |
사망지 | 자통현, 사천 |
자녀 | 이풍 |
직업 | 장군 |
작위 | 도향후 |
관직 정보 | |
섬긴 군주 | 유표 → 유장 → 유비 → 유선 |
보좌한 재상 | 제갈량 |
주요 관직 | |
중앙도호 | 임기 시작: 230년 임기 종료: 231년 9월 또는 10월 군주: 유선 재상: 제갈량 |
표기장군 | 임기 시작: 230년 군주: 유선 재상: 제갈량 |
전장군 | 임기 시작: 226년 임기 종료: 230년 군주: 유선 재상: 제갈량 |
광록훈 | 임기 시작: 226년 임기 종료: 230년 군주: 유선 재상: 제갈량 |
상서령 | 임기 시작: 222년 임기 종료: 223년 군주: 유비 재상: 제갈량 |
부한장군 | 임기 시작: 218년 임기 종료: 222년 |
흥업장군 | 임기 시작: 214년경 임기 종료: 218년 |
건위태수 | 임기 시작: 214년경 임기 종료: 218년 |
2. 초기 행적
유표를 섬겨 여러 현의 장을 역임했다. 조조의 형주 침공 당시 자귀현을 통치하다가 서천(西川, 지금의 중국 쓰촨성(四川省)일대)으로 도망쳐 유장을 섬겨 성도령을 지냈다.[40]
유표를 섬겨 여러 현의 장을 역임했다. 조조가 형주를 침공할 당시 자귀현을 통치하다가 서천(西川, 지금의 중국 쓰촨성(四川省) 일대)으로 도망쳐 유장을 섬겨 성도령을 지냈다.[40]
장무 2년(221년), 유비의 부름을 받고 백제성(영안성)으로 와 상서령이 되었고, 이듬해 제갈량과 함께 유선의 탁고를 받아 중호군이 되어 안팎의 군대를 지휘하여 영안에 머물렀다.[40][39] 건흥 원년(223년)에는 도향후에 봉해졌고, 광록훈이 더해졌으며, 건흥 4년(226년)에는 전장군으로 전임되었다. 이해 봄, 제갈량은 한중으로 나아가면서 이엄에게 후방을 맡겨 강주로 옮기고, 호군 진도를 영안에 남겨 이엄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엄은 강주에 큰 성을 쌓았다.[40][39]
李嚴|이엄중국어은 231년(건흥 9년) 제갈량의 북벌 때 군량 수송에 실패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다 발각되어 실각했다.[40] 당시 제갈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계속된 비로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자 사람을 보내 제갈량에게 회군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제갈량이 돌아오자, 이엄은 회군한 것에 대해 짐짓 놀라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고, 제갈량이 돌아온 것을 문제 삼으려 했다. 제갈량은 이엄이 앞뒤로 보낸 편지를 모두 제출하여 진상을 밝혔고, 이엄은 변명하지 못하고 죄를 청했다. 제갈량은 이엄을 탄핵하는 표를 올렸고, 결국 이엄은 관직에서 물러나 자동으로 유배되었다.[40]
진수는 이엄에 대해 "재능으로 영달하여 존경을 받았지만, 그 행동을 관찰하고 품행을 따져보면, 재앙을 얻은 것은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라고 평가했다.[40]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자, 비관(費觀)과 함께 면죽관을 지켰다. 얼마 뒤, 황충(黃忠)과 50여 합을 대등하게 겨루었으나, 제갈량(諸葛亮)의 계략에 빠져 포위되자 비관과 함께 유비군에 투항했다.[1]
[1]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젊은 시절 이엄은 형주(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에서 주지사 유표 휘하의 문관으로 일했으며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2] 유표는 이엄을 중용하여 여러 현의 령을 역임하게 했다.
건안 13년(208년), 자귀 현령을 맡고 있을 때 조조가 형주를 침공했기 때문에 익주로 피신하여 유장을 섬겼다. 성도 현령에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도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2]
건안 18년(213년), 유장은 이엄을 호군에 임명하여 면죽에서 유비를 막게 했다. 이엄은 군세를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이엄을 비장군에 임명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건위 태수·흥업장군에 임명되었다.[3]
제갈량, 법정, 유파, 이적과 함께 『촉과』의 제정에 힘썼다.[27] 건위군의 공조였던 양홍을 추천했다. 양홍은 제갈량의 발탁을 받아 곧바로 이엄과 동격인 태수가 되었다.
건안 23년(218년), 자귀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진·고승 등의 군세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자중현까지 도달했다. 이엄은 5천 명의 병사로 반란군을 격파하고, 마진·고승 등을 참했다. 월수군의 고정이 반란을 일으켜 신도현을 포위했으므로, 이엄은 성을 구원하여 반란군을 흩어지게 했다. 이 공적으로 보한장군이 되었다.
3. 유비 시절
건안 18년(213년),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자, 유장의 명령으로 호군이 되어 부에서 패배하고 면죽으로 물러난 유괴, 장임, 냉포 등을 지휘하여 유비를 저지하러 출진했으나, 비관 등 무리를 이끌고 도리어 유비에게 투항했다. 유비에게서 비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유장이 항복한 후에는 건위태수·흥업장군이 되었다.[40] 제갈량, 법정, 유파, 이적과 함께 촉과(蜀科)를 제정했다.[37]
건안 23년(218년), 유비가 한중에 쳐들어갔을 때 마승과 고진 등이 모반을 일으켜 자귀현을 공격하자, 징병을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적은 병력만으로 마승과 고진 등을 참수하고 반란을 평정했다. 또 월수의 만족 왕 고정의 침략도 격퇴했다. 이 공적으로 보한장군이 더해졌다.[40] 건안 24년(219년),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하는 표문에 “흥업장군 신 이엄”으로 연명했다.[38]
젊은 시절 이엄은 형주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에서 주지사 유표 휘하의 문관으로 일했으며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208년 북방 군벌 조조가 형주를 장악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개시하자, 이엄은 형주를 탈출한 난민 중 한 명이 되어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 일대)로 들어갔고, 익주는 유장의 지배 하에 있었다.[2]
유장은 이엄을 성도의 현령으로 임명했고, 이엄은 다시 한번 새로운 직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군벌 유비가 익주를 침공했을 때, 이엄은 초기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후 군대 통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엄은 익주의 수도인 성도 앞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면죽에서 침략군을 격퇴해야 했지만, 유비가 도착했을 때 부하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적절한 시기에 항복한 공로로 이엄은 잡장군으로 임명되었다.[3]
유비가 익주를 정복한 후, 이엄은 새로운 정권의 공고화를 위해 건위군 태수(太守)와 흥업장군(興業將軍)에 임명되었다. 비록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엄은 제갈량, 법정, 이적 그리고 유파와 함께 ''촉과''(蜀科; 촉 지역의 법전)를 구성하도록 초대받았다. (''촉과''는 이후 촉한의 법률 시스템에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4] 이엄은 군 태수로서 자신의 재능을 계속 증명했다. 여러 주요 토목 공사가 그의 지휘 하에 시작되고 수행되었다. 천사산에 터널이 뚫렸고, 강을 따라 도로가 정비되었으며, 관할 구역 내의 기반 시설이 장식되고 재건되었다. 이엄의 통치 아래 주민들은 만족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과의 좋지 않은 관료 관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엄의 공식 수석 보좌관인 양홍은 이엄의 재건 사업 중 하나인 태수 관저 이전에 반대했다. 이엄은 양홍의 제안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양홍은 이엄의 계획에 여러 번 반대하다가 사임했다.[5] 이엄 휘하의 정동장군 왕충은 상관과의 심각한 불화 이후 위로 투항한 것으로 알려졌다.[6]
218년, 유비가 한중군을 두고 조조와 다투는 동안, 산적 지도자 마진(馬秦)과 고승(高勝)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자중현을 장악하고 수만 명을 모아 세력을 키웠다. 이동 가능한 병력의 대다수가 한중 전선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엄은 건위군에서 5,000명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성과 백성들에게 안정과 질서를 되찾아주었다.[7] 또한, 소(叟) 부족의 지도자 고정[8] 역시 이 기회를 틈타 신도현(新道縣)을 공격했지만, 이엄은 능숙하게 부대를 이끌고 현을 방어하여 고정의 공격을 격퇴했다. 그의 공로로 이엄은 보한장군(輔漢將軍)으로 승진했다.[9]
장무 2년(222년),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를 공격했지만, 이릉 전투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으로 도망쳤다.[28] 유비는 이엄을 백제성으로 불러들여 상서령에 임명했다. 건흥 원년(223년), 유비의 임종에 즈음하여 이엄은 제갈량과 함께 침상 곁으로 불려, 태자 유선을 보좌하도록 유언을 받았다. 이엄은 중도호가 되어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고, 영안에 머물며 진무에 힘쓰는 임무를 받았다.
4. 후주의 탁고 대신
유비 임종 직전, 이엄에게 제갈량과 함께 유선을 돌볼 공동 섭정이 되어 줄 것을 특별히 요청했으며, 이엄을 중도호(中都護)로 임명하여 모든 군사 문제를 처리하게 했다. 황실 경비병과 정규 군대 모두 그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촉과 동맹국 오의 국경 근처에 있는 영안현(永安縣; 현재의 충칭시 펑제현)의 방어를 맡았다.[11]
건흥 8년(230년), 표기장군이 되었다. 위나라의 조진이 촉한을 침공하자 제갈량의 명령으로 2만 명을 한중으로 보냈는데, 이엄은 이때 개부의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었고 제갈량은 이엄의 아들 이풍을 강주도독독군으로 삼아 회유했다.[40] 제갈량은 이듬해 다시 출병하고자 하여, 이엄을 중호군으로서 승상부의 일을 맡겼다. 이즈음 이엄은 이평(李平)으로 개명했다.[40]
이 무렵, 이엄은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왕을 칭하고 구석을 받도록 권했다. 이는 제갈량에게 찬탈을 부추긴 행위로 볼 수 있지만, 제갈량은 답장에서 "위를 멸망시키고, 당신들과 함께 승진의 은혜를 받게 된다면, 그때는 아홉 개의 은상뿐만 아니라 열 개라도 받겠습니다"라고, 이엄의 제안을 거절했다(『제갈량집』).
건흥 4년(226년), 전장군으로 승진했다.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 한중으로 진영을 옮겼으므로, 뒤를 이엄에게 맡기기 위해 강주에 주둔시켰다. 영안에는 진도가 배치되어 이엄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건흥 8년(230년), 표기장군이 되었다. 그해 가을 8월, 조진이 한수로 향하려고 하자, 제갈량의 명에 따라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중에 주둔했다. 아들 이풍은 강주 도독 독군에 임명되어 아버지의 직무를 대행했다. 제갈량은 조진을 격퇴한 후에도, 다음 해의 북벌을 위해 이엄을 한중에 남겨두고, 중도호의 관직으로 모든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 이때 "'''이평'''"으로 개명했다.
5. 실각, 죽음
234년(건흥 12년) 제갈량이 원정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엄은 복직할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통탄하며 울다가 병으로 사망했다.[40] 이엄은 제갈량이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등용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제갈량 사후 그 자리를 대신하는 관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갈량의 사망 소식에 이엄은 큰 고통과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22][23]
이엄이 면직된 후, 제갈량은 아들 이풍을 계속 기용하여 장완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도록 격려했다. 이엄 사후, 이풍은 주제태수(朱提太守)에 올랐다.[24][25]
6. 평가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이엄이 유명을 받아 후세 정치에 참여했으나, 의견을 진술하거나 협조하지 않고 도리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여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임무와 공적을 모두 잃었다고 엄하게 평가했다.
이엄 탄핵 상표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35]직위 이름 작위 중군사·차기장군 유염 도향후 사지절·전군사·정서대장군·양주자사 위연 남정후 전장군 원진 도정후 좌장군·형주자사 오의 고양향후 독전부·우장군 고상 현향후 독후부·후장군 오반 안락정후 수군장군·승상장사 양의 독좌부·중감군·양무장군 등지 행전감군·정남장군 유파 행중호군·편장군 비의 행전호군·편장군 허윤 한성정후 행좌호군·독신중랑장 정함 행우호군·편장군 유민 행호군·정남장군 강유 당양정후 행중전군·토로장군 상관옹 행중참군·소무중랑장 호제 행참군·건의장군 염안 행참군·편장군 찬습 행참군·비장군 두의 행참군·무략중랑장 두기 행참군·수융도위 성발 영종사중랑·무략중랑장 번기
이들은 이엄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으며, 이엄을 능가하는 지위의 인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엄이 무관으로서 수석이었고 승상인 제갈량 다음의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요립은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제갈량 다음이라고 자부하며 자신의 지위에 불만을 품고 제갈량에게 경의 지위를 요구했으나, 제갈량은 이엄조차 그 지위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36] 이는 이엄이 촉한 내에서 고위에 있어야 할 유능한 인물로 널리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7. 삼국지연의
제갈량은 이엄을 “오나라의 육손(陸遜)과 호각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했다.[1] 『삼국지연의』에서는 성도로 쳐들어오는 유비군과 대치하며 황충과의 일기토에서 대등한 실력을 보였지만, 제갈량의 계략에 사로잡히고 유비의 설득으로 항복한다.[1]
참조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간행물
Study on Nanzhao's Origin
2011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기타
Chen Zhen's original phrase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Collected works of Zhuge Liang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22]
서적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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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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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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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8 蜀書八 許糜孫簡伊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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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陽國志/卷七 劉後主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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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9 蜀書九 董劉馬陳董呂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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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기타
三国志』巻四十、李厳伝、注引『公文上尚書』
[36]
서적
『諸葛亮集』
[37]
서적
삼국지 권38 허미손간이진전
[38]
서적
삼국지 권32 선주전
[39]
서적
삼국지 권33 선주전
[40]
서적
삼국지 권40 유팽요이유위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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