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강공주 (북송 인종의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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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강공주는 북송 인종의 장녀로,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인종의 사랑을 받았다. 인종은 생모의 가문을 위해 외척인 이위와 정략결혼을 시켰으나, 이위와의 불화로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 공주는 이위와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사건을 겪었으며, 결국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다. 33세에 사망했으며, 신종은 이위의 학대를 비난하고 장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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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 인종의 황녀 - 예국공주
북송 시대 귀비 동씨의 셋째 딸인 예국공주는 생전에는 공주로 봉해지지 못했으나 요절 후 초국공주로 추증되었고, 여러 차례 작위가 더해졌으며, 그녀에 대한 기록은 여러 역사 문헌에 남아있다. - 북송의 공주 - 예국공주
북송 시대 귀비 동씨의 셋째 딸인 예국공주는 생전에는 공주로 봉해지지 못했으나 요절 후 초국공주로 추증되었고, 여러 차례 작위가 더해졌으며, 그녀에 대한 기록은 여러 역사 문헌에 남아있다. - 1070년 사망 - 가헌
가헌은 송나라의 환관이자 수학자로, 파스칼의 삼각형을 묘사하고 제곱근과 세제곱근 추출에 활용했으며, 가감승제법을 개발하여 호너법과 유사한 방법을 구현했다.
복강공주 (북송 인종의 장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복강공주 |
한자 표기 | 福康公主 |
생몰년 | 1038년 - 1070년 |
사망 장소 | 알 수 없음 |
시호 | 장효(庄孝) |
가문 | |
왕조 | 송나라 |
가문 유형 | 씨족 |
아버지 | 송 인종 |
어머니 | 소절귀비 묘씨 |
혼인과 계승 | |
배우자 | 이위(李瑋) |
자녀 | 없음 |
작위 및 칭호 | |
초기 작위 | 공주 |
추가 작위 | 장공주 → 대장공주 |
추증 작위 | 楚国大长公主(초나라 대장공주) → 莊孝明懿大長帝姬(장효명의대장제희) |
기타 | |
추가 정보 | 仁宗第一皇女(인종의 첫 번째 황녀) |
2. 생애
보원 원년 (1038년) 인종의 장녀로 태어나 복강공주(福康公主)에 봉해졌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순효하여 인종이 매우 좋아했으며, 인종이 몸이 불편했을 때는 직접 시중을 들었다.[2]
가우 2년 6월 (1056년) 연국공주(兗國公主)로 진봉되었고,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할 준비를 하였다. 인종은 관례를 깨고 소사(所司)에게 날을 잡아 예책명(礼册命)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관원이 진언하며 반대했으나, 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7월에 연국공주를 정식으로 책봉했고, 8월 무신일에 연국공주가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했다.[3]
가우 5년 (1060년), 공주와 양회길이 밤에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장면을 이위의 생모 양씨가 훔쳐보았다. 공주는 크게 화를 내며 양씨를 때린 후, 밤늦게 집을 나와 황성문을 허가 없이 열고 궁에 들어갔다. 인종은 군신의 압력에 못 이겨 공주를 기국공주(沂國公主)로 강등시키고 궁궐에 들어와 기거하게 했다. 양회길은 냑양으로 보내 황릉을 청소하게 했고, 부마 이위는 지위주로 강등되었다. 공주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여러 번 목숨을 걸고 궁궐을 불태우려 했으며, 송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양회길을 소환해야 했다.
가우 7년, 공주와 부마의 갈등이 조정되지 않아 궁으로 돌아와 살았다. 송 인종은 둘의 이혼을 허락했지만, 그해 11월, 인종은 다시 이위를 부마로 복권하였고, 공주는 기국공주(岐国公主)로 봉호를 바꾸고 명목상으로 두 사람을 재혼시켰다.
사촌 송 영종이 즉위하자, 공주는 월국장공주(越國長公主)로 진봉되었다. 치평 4년 (1067년), 조카 송 신종이 뒤를 잇자, 공주는 초국대장공주(楚國大長公主)로 진봉되었다. 희녕 3년 (1070년) 정월 9일, 복강공주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3]
2. 1. 초기 생애
보원 원년 (1038년) 인종의 장녀로 태어나 복강공주(福康公主)에 봉해졌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질이 순효하여, 인종이 공주를 매우 좋아했고, 인종이 몸이 불편했을 때에는 공주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2] 소절귀비 묘씨가 공주의 어머니였다.[2]송 인종은 자신의 생모인 신비 이씨가 생전에 호사를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그녀의 가문을 돌보기 위해 경력 7년 (1047년) 5월에 외삼촌 이용화의 차남이자 사촌동생인 이위를 복강공주의 부마로 선택하였다. 이위는 복강공주보다 항렬이 높지만, 13세로 공주와 나이가 비슷했다.
2. 2. 이위와의 결혼
보원 원년(1038년), 인종의 장녀로 복강공주에 봉해졌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질이 순효하여, 인종이 공주를 매우 좋아했고, 인종이 몸이 불편했을 때에는 공주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2]아버지 송 인종은 자신의 생모인 신비 이씨가 생전에 호사를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그녀의 가문을 돌보기 위해 경력 7년 (1047년) 5월에 외삼촌 이용화의 차남이자 사촌동생인 이위를 복강공주의 부마로 선택하였다. 이위는 복강공주보다 항렬이 높지만, 13세로 공주와 나이가 비슷했다.
가우 2년 6월 (1056년), 복강공주는 '''연국공주'''로 진봉되었고,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할 준비를 하였다. 인종은 관례를 깨고, 소사(所司)에게 날을 잡아 예책명(礼册命)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관원이 진언하며 반대했으나, 인종이 듣지 않았다. 7월에 연국공주를 정식으로 책봉했다. 8월 무신일, 연국공주가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했다.[3] 결혼 후, 이위는 용모가 추하고 무뚝뚝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주는 남편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복강공주는 부마를 사랑하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고, 공주부 주관급 환관인 양회길 등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공주의 유모 한씨는 공주와 부마를 자주 이간질했다.
2. 3. 결혼 생활의 불행과 갈등
보원 원년 (1038년) 인종의 장녀로 복강공주에 봉해졌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순효하여 인종이 매우 좋아했으며, 인종이 몸이 불편했을 때는 직접 시중을 들었다.[2][1]가우 2년 6월 (1056년) 연국공주(兗國公主)로 진봉되었고,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할 준비를 하였다. 인종은 관례를 깨고 소사(所司)에게 날을 잡아 예책명(礼册命)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관원이 진언하며 반대했으나, 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7월에 연국공주를 정식으로 책봉했고, 8월 무신일에 연국공주가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했다.[3]
결혼 후, 이위는 용모가 추하고 무뚝뚝하여 두 사람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공주는 남편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복강공주는 부마를 사랑하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고, 공주부 주관급 환관인 양회길 등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공주의 유모 한씨는 공주와 부마를 자주 이간질했다.[3]
가우 5년 (1060년), 공주와 양회길이 밤에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장면을 이위의 생모 양씨가 훔쳐보았다. 공주는 크게 화를 내며 양씨를 때린 후, 밤늦게 집을 나와 황성문을 허가 없이 열고 궁에 들어갔다. 내도지 임수충이 부마를 억압해 탁핵을 당했고, 추밀사 송상도 공주의 비위를 맞추며 부마를 박해한 혐의로 파면되었다. 한밤에 궁문이 열린 사태는 심각했고 조정이 떠들썩했으며, 사마광 등 간신들은 잇달아 "제멋대로 억측을 하고 두려움 없이 군부의 명령을 어기고 남편을 멸시했다"라며 상소를 올렸다. 양회길에 대해서는 "자중하지 않고 너무 약하며, 죄악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4]
인종은 군신의 압력에 못 이겨 공주를 기국공주(沂國公主)로 강등시키고 궁궐에 들어와 기거하게 했다. 양회길은 배서경세소반(配西京洒掃班)과 함께 냑양으로 보내 황릉을 청소하게 했고, 부마 이위는 지위주로 강등되었다. 공주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여러 번 목숨을 걸고 궁궐을 불태우려 했으며, 송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양회길을 소환해야 했다. 같은 해 부마는 경성으로 소환되어 복위되었다. 양회길도 궁으로 소환되었지만, 전성(前省)에서 육체 노동만 하게 되었을 뿐, 공주를 모실 수는 없었다.[4]
공주의 생모 현비 묘씨와 친구 유충의는 내신 왕무자를 보내 부마를 감시하고 죄를 찾으려 했지만, 이위는 매우 신중했기 때문에 왕무자는 부마의 과실을 찾을 수 없었다. 왕무자는 두 사람에게 직접 인종에게 청하여 독주로 이위를 죽이라고 하였다. 인종은 현비 묘씨와 유충의 두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황후 조씨 역시 이를 말렸다.[5]
가우 7년, 공주와 부마의 갈등이 조정되지 않아 궁으로 돌아와 살았다. 이위의 형 이장은 "동생아, 하늘의 은혜를 받들기엔 부족하구나"라고 하였다. 송 인종은 둘의 이혼을 허락했다. 사마광은 "장과 위가 질책을 받았으니, 공주도 무죄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진언했다. 결국 송 인종은 부마가 공주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고 공주를 꾸짖어 이씨 집안에 대한 은혜가 쇠퇴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인종은 사람이 부귀하다고 해서 주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해 11월, 인종은 다시 이위를 부마로 복권하였고, 공주는 기국공주(岐国公主)로 봉호를 바꾸고 명목상으로 두 사람을 재혼시켰다.
2. 4. 갈등의 심화와 이혼, 그리고 재결합
1038년 (보원 원년), 인종의 장녀로 복강공주(福康公主)에 봉해졌다. 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질이 순효하여, 인종이 매우 좋아했고, 인종이 몸이 불편했을 때에는 직접 시중을 들었다.[2]아버지 인종은 생모인 신비 이씨가 생전에 호사를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경력 7년 (1047년) 5월에 외삼촌 이용화의 차남이자 사촌동생인 이위를 복강공주의 부마로 선택하였다. 이위는 복강공주보다 항렬이 높지만, 13세로 공주와 나이가 비슷했다.
1056년 (가우 2년) 6월, 복강공주는 '''연국공주(兗國公主)'''로 진봉되었고,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할 준비를 하였다. 인종은 관례를 깨고, 소사(所司)에게 날을 잡아 예책명(礼册命)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관원이 진언하며 반대했으나, 인종이 듣지 않았다. 7월에 연국공주를 정식으로 책봉했다. 8월 무신일, 연국공주가 이위에게 정식으로 하가했다.[3] 결혼 후, 이위는 용모가 추하고 무뚝뚝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주는 남편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복강공주는 부마를 사랑하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고, 공주부 주관급 환관인 양회길 등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공주의 유모 한씨는 공주와 부마를 자주 이간질했다.
1060년 (가우 5년), 공주와 양회길은 밤에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장면을 이위의 생모 양씨가 훔쳐보았고, 공주는 크게 화를 내며 양씨를 때린 후, 밤늦게 집을 나와 황성문을 허가 없이 열고 궁에 들어갔다. 내도지 임수충이 부마를 억압해 탁핵을 당했고, 추밀사 송상도 공주의 비위를 맞추며 부마를 박해한 혐의로 파면되었다. 한밤에 궁문이 열린 사태가 심각하고, 조정이 떠들썩하며, 사마광 등 간신들이 잇달아 "제멋대로 억측을 하고 두려움 없이 군부의 명령을 어기고 남편을 멸시했다"라며 상소를 올렸다. 양회길에 대해서는 "자중하지 않고 너무 약하고, 죄악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엄중히 처벌해야한다"고 했다. 인종은 군신의 압력에 못이겨, 공주를 '''기국공주(沂國公主)'''로 강등시키고, 궁궐에 들어와 기거하게 했다. 양회길은 배서경세소반(配西京洒掃班)과 함께 냑양으로 보내 황릉을 청소하게 했다.[4] 부마 이위는 지위주로 강등되었다. 공주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여러 번 목숨을 걸고 궁궐을 불태우려 했고, 송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양회길을 소환해야했다. 같은 해 부마는 경성으로 소환되어 복위되었다. 양회길도 궁으로 소환되었지만, 전성(前省)에서 육체 노동만 하게 되었을 뿐, 공주를 모실 수는 없었다. 공주의 생모 현비 묘씨와 친구 유충의는 내신 왕무자를 보내 부마를 감시하고 죄를 찾으려 했지만, 이위는 매우 신중했기 때문에, 왕무자는 부마의 과실을 찾을 수 없었다. 왕무자는 두 사람에게 직접 인종에게 청하여 독주로 이위를 죽이라고 하였다. 인동은 현비 묘씨와 유충의 두 사람의 부탁을 둘어주지 않았고, 황후 조씨 역시 말렸다.[5]
1062년 (가우 7년), 공주와 부마의 갈등이 조정되지 않아 궁으로 돌아와 살았다. 이위의 형 이장은 "동생아, 하늘의 은혜를 받들기엔 부족하구나"라고 하였다. 송 인종은 둘의 이혼을 허락했다. 사마광은 "장과 위가 질책을 받았으니, 공주도 무죄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진언했다. 결국 인종은 부마가 공주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고, 공주를 꾸짖어 이씨 집안에 대한 은혜가 쇠퇴하지 않는다고 했고, 인종은 사람이 부귀하다고 해서 주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 해 11월, 인종은 다시 이위를 부마로 복권하였고, 공주는 '''기국공주(岐国公主)'''로 봉호를 바꾸고, 명목상으로는 두 사람을 재혼시켰다.
2. 5. 죽음
희녕 3년 (1070년) 정월 9일, 복강공주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3]공주가 사망하였을 때, 조카 신종은 직접 공주의 집에 가서 술을 뿌려 제사를 지냈다. 신종은 대신들을 불러들였는데, 이위는 크게 울며 송 인종을 저버리고 공주를 학대했다고 주장했다. 이위는 의식과 의료 방면에서 공주를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공주의 옷과 금자에는 이미 서캐가 있고, 숯을 직접 채취하여 불을 피워야 했다고 주장하며, 그로 인해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한다.[5] 송 신종은 이위를 진주로 좌천시켰고, 공주가 아버지 송 인종에게 효도했기 때문에 장효(庄孝)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진국(秦國)으로 추봉했다.[4] 송 휘종 시기에는 주국, 진국, 정화 연간에 정효명의대장제희(庄孝明懿大長帝姬)로 개봉되었다.
3. 미디어에서의 묘사
제목 | 캐릭터 이름 | 연기한 배우 |
---|---|---|
청평악 | 조휘유(赵徽柔) | 런민, 허쓰톈(何思甜), 런페이얼(任飞儿), 정위이(张毓宜), 쑤이커(苏伊可) |
텔레비전 드라마 《청평악》에서 복강공주는 조회유(赵徽柔)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다섯 명의 배우가 연기했다.[1]
- 성인: 런민
- 청소년: 허쓰톈(何思甜)
- 아동기: 런페이얼(任飞儿)
- 어린이: 정위이(张毓宜)
- 유아: 쑤이커(苏伊可)
참조
[1]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Taylor & Francis
[2]
서적
解读宋陵
https://books.google[...]
Beijing Book Co. Inc.
2013-09-01
[3]
서적
驸马传
https://books.google[...]
河南人民出版社
1994
[4]
서적
Illustrated Guide to 50 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s
https://books.google[...]
Shanghai Press
2021-11-15
[5]
문서
『続資治通鑑長編』仁宗体天法道極功全徳神文聖武睿哲明孝皇帝嘉祐七年(遼清寧八年):二月癸卯,詔兗国公主入内、安州観察使、駙馬都尉李瑋知衛州。瑋所生母楊氏帰其兄璋、公主乳母韓氏出居外、公主宅句当内臣梁懐吉帰前省、諸色祗應人皆散遣之。懐吉等既坐責、公主恚懟、欲自盡、或縦火欲焚第、以邀帝必召懐吉等還。帝不得已、亦為召之。諫官楊畋、司馬光、龔鼎臣等皆諫、帝弗聽。然公主意終悪瑋、不肯復入中閤、状若狂易、欲自盡数矣。苗賢妃與兪充儀謀、使内臣王務滋管句駙馬宅、以伺瑋過。瑋素謹、務滋不得其過、乃告苗、兪曰:「但得上旨,務滋請以巵酒了之。」苗、兪白帝。帝不答。頃之、帝與皇后同坐、兪又白之。皇后曰:「陛下念章懿太后、故瑋得尚主、今奈何欲為此?」都知任守忠在旁曰:「皇后之言是也。」務滋謀訖不行、尋有是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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