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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이티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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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이티쑤언은 베트남 떠이선 왕조 시대의 여성 영웅이다. 빈딘성 출신으로, 무술을 연마하고 강인한 여성으로 알려졌으며, 남편 쩐꽝지에우를 호랑이로부터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떠이선 봉기에 참여하여 전투 코끼리 훈련을 도왔고, 떠이선 오봉서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응우옌 왕조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편과 함께 포로로 잡혔고, 처형되었다. 현재 베트남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많은 도시에서 그녀의 이름을 딴 시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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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이티쑤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 (한국어)부이 티 쑤언
이름 (베트남어)Bùi Thị Xuân
한자裴氏春
로마자 표기Bui Thi Xuan
생애
출생지떠이선현
사망일1802년
사망지미상
활동
소속떠이선군
주군응우옌꽝또안
배우자쩐꽝디에우
최종 계급도독
주요 참전 전투/전쟁미상
기타
빈딘 성 꽝쭝 박물관에 있는 부이 티 쑤언 동상
빈딘 성 꽝쭝 박물관에 있는 부이 티 쑤언 동상

2. 생애

부이티쑤언은 빈딘성 떠이선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술에 능했다고 전해진다.[4][1] 그녀는 남편 쩐꽝디에우와 함께 떠이선 봉기 초기에 참여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전투 코끼리 부대를 훈련시키는 데 기여했다.[4][5][2] 떠이선 왕조의 주요 여성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나,[5] 응우옌 왕조자롱 황제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혔다.[6][3] 결국 남편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그녀는 딸과 함께 코끼리형을 당했다.[6][3] 오늘날 부이티쑤언은 베트남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여러 도시의 거리와 학교에 그녀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6]

2. 1. 초기 생애 및 떠이선 봉기 참여

부이티쑤언은 빈딘성 떠이선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다고 전해지며,[4][1] 강인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훗날 남편이 된 쩐꽝디에우를 호랑이로부터 구했다고 한다.[4]

당시 베트남은 레 왕조(黎朝)가 쇠퇴하고 북쪽은 찐 씨(鄭氏)가, 남쪽은 응우옌 씨(阮氏)가 각각 권력을 잡고 있었다. 남부의 응우옌 씨 정권(광남국)이 시암의 침략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민심을 잃자, 응우옌냑, 응우옌르, 응우옌후에 삼형제가 떠이선 봉기를 일으켰다. 부이티쑤언은 남편 쩐꽝디에우와 함께 이 봉기 초기에 합류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5] 떠이선 군대의 코끼리 부대 훈련을 도왔다.[4][2] 그녀는 떠이선 왕조에서 도독(都督)의 지위에 있었으며, 부이 티 응안, 쩐 티 란, 황 티 쿡, 응우옌 티 용과 함께 Tây Sơn ngũ phụng thư|떠이선 오봉서vie의 한 명으로 꼽혔다.[5]

이후 자롱 황제가 세력을 회복하여 떠이선 왕조의 수도 푸쑤언(현재의 후에)이 함락되자, 부이티쑤언은 마지막 황제 까인틴 황제를 따라 응에안성으로 후퇴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꽝빈성에서 응우옌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1802년 2월 전투에서 패배했다.[6][3]

2. 2. 떠이선 왕조에서의 활약

부이티쑤언은 훗날 남편이 된 쩐꽝디에우를 호랑이로부터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어릴 때부터 무술에 능하고 강인한 인물로 알려졌다.[4][1] 그녀와 쩐꽝디에우는 떠이선 반란 초기에 합류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부이티쑤언은 특히 떠이선 왕조 군대의 코끼리 부대 훈련을 돕고 직접 이끌며 활약했으며,[5][2] 도독(Đô đốcvi)의 지위에 올랐다. 그녀는 부이 티 응안, 쩐 티 란, 황 티 쿡, 응우옌 티 용과 함께 떠이선 오봉서(Tây Sơn ngũ phụng thưvi)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5]

떠이선 왕조의 수도였던 푸쑤언(현재의 후에)이 응우옌 왕조자롱 황제 군대에게 함락되자, 부이티쑤언은 당시 황제 응우옌꽝또안을 호위하여 응에안성으로 후퇴했다. 그곳에서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꽝빈성 쩐닌(Trấn Ninhvi) 지역에서 응우옌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1802년 음력 2월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응에안성에서 남편 쩐꽝디에우와 합류했지만 결국 함께 응우옌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남편 쩐꽝디에우는 참수 혹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로 처형당했으며, 부이티쑤언은 그녀의 딸과 함께 코끼리형으로 처형되었다.[6][3]

2. 3. 떠이선 왕조의 몰락과 최후

광남 응우옌 씨의 후예인 응우옌 푹 아인(후의 자롱 황제)이 세력을 회복하여 떠이선 왕조의 수도 푸쑤언(현재의 후에)을 함락시켰다.[6] 이에 부이티쑤언은 떠이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 응우옌꽝또안을 따라 응에안성으로 후퇴하였다.[6] 그녀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꽝빈성 쩐 닝(Trấn Ninh)에서 응우옌 푹 아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6] 1802년 음력 2월에 패배하고 말았다.[3]

부이티쑤언은 응에안성에서 남편 쩐꽝디에우와 합류했으나, 결국 함께 응우옌 푹 아인의 군대에게 사로잡혔다.[3][6] 남편 쩐꽝디에우는 참수[6] 또는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3]을 당해 처형되었고, 부이티쑤언은 그녀의 딸과 함께 코끼리에게 밟혀 죽는 형벌로 생을 마감했다.[6][3]

현재 부이티쑤언은 베트남의 역사적 영웅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많은 주요 도시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학교와 거리가 있다.[6]

3. 사후

오늘날 부이티쑤언은 베트남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많은 주요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딴 학교와 거리가 있다.

4. 평가

오늘날 베트남에서 부이티쑤언은 역사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많은 주요 도시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학교와 거리가 있다.[6]

참조

[1] 서적 The Oxford Encyclopedia of Women in Worl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Tây Sơn Uprising: Society and Rebellion
[3] 서적 Vietnamese Tradition on Trial, 1920-194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02-03
[4] 서적 The Oxford Encyclopedia of Women in World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Tây Sơn Uprising: Society and Rebellion
[6] 서적 Vietnamese Tradition on Trial, 1920-194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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