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라 전투
1. 개요
부하라 전투는 사산 제국과 돌궐의 동맹이 에프탈 제국을 공격하여 에프탈 제국이 멸망하고 여러 소국으로 분열된 사건이다. 사산 제국은 서쪽의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 협정 이후 동쪽의 에프탈 제국에 집중했고, 돌궐의 중앙 아시아 침공을 틈타 동맹을 맺어 양면 공격을 감행했다. 부하라 전투 이후 에프탈 제국은 멸망하고, 차가니안의 파가니쉬가 새로운 에프탈 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이후 사산 제국과 돌궐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동맹 관계는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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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가 참가한 전투 -
바그다드 함락 (15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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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가 참가한 전투 -
찰디란 전투
찰디란 전투는 1514년 8월 23일 찰디란 평원에서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와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가 벌인 전투로,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나 동아나톨리아와 북이라크의 지배권 변화, 사파비 왕조의 수도 이전 등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
에프탈 -
준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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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탈 -
후나족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아대륙 북서부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인 후나족은 흉노, 훈족과의 연관성이 있으며, 인도 아대륙에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나 인도 왕조 연합군에 패배하며 약화되어 구르자라-프라티하라 왕조 형성에 영향을 주고 라지푸트족에 흡수되기도 했다. -
사산 제국 -
마즈다크교
마즈다크교는 6세기 초 마즈다크가 창시한 종교 및 사회 운동으로, 재산 공유와 사회 평등을 추구하며 조로아스터교, 마니교의 영향을 받았고, 사산 왕조와 중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으나, 동시대 기록 부족으로 논란이 있다. -
사산 제국 -
마니교
마니교는 3세기경 마니가 창시한 종교로,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우주관, 금욕주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며 여러 종교 세력의 탄압으로 쇠퇴했으나 그 영향이 중세 유럽과 동아시아까지 미쳤고, 현재는 대부분 소실된 경전의 파편과 번역본만 남아 있다.
2. 배경
484년, 호스로 1세(재위 531년~579년)의 할아버지 페로즈 1세가 헤라트 전투 (484년)에서 에프탈에게 살해당하면서, 에프탈은 호라산의 많은 부분을 사산 제국으로부터 병합했다.
비잔틴 제국과의 안정적인 평화 협정 이후, 호스로 1세는 동쪽의 에프탈에 집중하여 할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했다. 사산 제국은 호스로의 개혁으로 군사력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에프탈을 공격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동맹을 모색했다. 그 해답은 돌궐의 중앙 아시아 침공 형태로 나타났다. 튀르크 민족의 중앙 아시아 이동은 에프탈의 자연스러운 적이자 경쟁자로 만들었다.
에프탈은 군사력을 가졌지만, 여러 전선에서 싸울 조직력이 부족했다.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에 따르면, 에프탈은 발흐, 슈그난, 아몰, 잠, 후탈, 테르메즈, 와슈기르드 군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사산 제국과 돌궐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의 무질서와 분열을 이용해 양면 공격을 시작했고, 돌궐은 옥수스 강 북쪽 지역을, 사산 제국은 강 남쪽 땅을 병합했다.
2.1. 사산 제국의 동방 정책
484년, 호스로 1세의 할아버지인 페로즈 1세는 헤라트 전투 (484년)에서 에프탈에게 살해당했고, 에프탈은 호라산의 많은 부분을 사산 제국으로부터 병합할 수 있었다.
서쪽의 비잔틴 제국과의 안정적인 평화 협정 이후, 호스로 1세는 동쪽의 에프탈에 집중하여 할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할 수 있었다. 호스로의 개혁으로 사산 제국의 군사력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은 단독으로 에프탈을 공격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고 동맹을 모색했다. 그 해답은 돌궐의 중앙 아시아 침공의 형태로 나타났다. 튀르크 민족의 중앙 아시아 이동은 빠르게 그들을 에프탈의 자연스러운 적이자 경쟁자로 만들었다.
에프탈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전선에서 싸울 수 있는 조직력이 부족했다. 사산 제국과 돌궐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의 무질서와 분열을 이용하여 양면 공격을 시작했다. 그 결과 돌궐은 옥수스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사산 제국은 강 남쪽의 땅을 병합했다.
2.2. 돌궐의 등장과 사산-돌궐 동맹
484년, 호스로 1세 아누쉬르반(재위 خسرو یکم انوشیروان페르시아어~خسرو یکم انوشیروان페르시아어)의 할아버지인 페로즈 1세는 헤라트 전투 (484년)에서 에프탈에게 살해당했고, 그들은 호라산의 많은 부분을 사산 제국으로부터 병합할 수 있었다.
서쪽의 비잔틴 제국과의 안정적인 평화 협정 이후, 호스로 1세는 동쪽의 에프탈에 집중하여 할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할 수 있었다. 호스로의 개혁으로 사산 제국의 군사력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제국은 단독으로 에프탈을 공격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고 동맹을 모색했다. 그들의 해답은 돌궐의 중앙 아시아 침공의 형태로 나타났다. 튀르크 민족의 중앙 아시아 이동은 빠르게 그들을 에프탈의 자연스러운 적이자 경쟁자로 만들었다.
에프탈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전선에서 싸울 수 있는 조직력이 부족했다.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에 따르면, 에프탈은 발흐, 슈그난, 아몰, 잠, 후탈, 테르메즈 및 와슈기르드의 군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사산 제국과 돌궐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의 무질서와 분열을 이용하여 양면 공격을 시작했다. 그 결과 돌궐은 옥수스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사산 제국은 강 남쪽의 땅을 병합했다.
3. 전투의 결과
에프탈 제국은 부하라 전투의 결과로 멸망하여 여러 소규모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차가니안 지역은 파가니쉬가 통치하게 되었다. 가드파르와 그의 잔존 세력은 사산 제국으로 망명했다. 돌궐 카간 신지부는 에프탈 귀족들과 합의하여 파가니쉬를 새로운 에프탈 왕으로 추대했다.
이는 호스로 1세에게 불만을 야기했는데, 그는 돌궐과 에프탈의 협력이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호스로 1세는 히르카니아에 위치한 사산-돌궐 국경 지대로 진격하여 신지부의 사절단을 만나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 조약에는 파가니쉬가 크테시폰의 사산 궁정에서 호스로 1세에게 에프탈 왕으로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결과적으로 파가니쉬와 차가니안 왕국은 사산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으며, 옥수스 강이 양측의 동쪽 경계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돌궐과 사산 제국 간의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양측 모두 실크로드와 동서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568년, 돌궐은 비잔틴 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제안하고 사산 제국에 대한 협공을 제의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3.1. 에프탈 제국의 멸망과 분열
부하라 전투 이후, 에프탈 제국은 멸망하여 차가니안의 파가니쉬가 통치하는 왕국과 같은 여러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가드파르와 그의 남은 부하들은 사산 제국 영토로 남쪽으로 도망쳐 피신했다. 한편, 돌궐 카간 신지부는 에프탈 귀족들과 합의하여 파가니쉬를 새로운 에프탈 왕으로 임명했다.
이는 호스로 1세의 불만을 샀는데, 그는 돌궐과 에프탈의 협력이 동쪽에서 자신의 통치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히르카니아의 사산-돌궐 국경으로 진격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신지부의 돌궐 사절단을 만나 선물을 받았다. 호스로는 자신의 권위와 군사력을 주장하며 돌궐인들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에는 파가니쉬를 크테시폰의 사산 궁정으로 보내 호스로의 에프탈 왕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조약이 포함되었다. 파가니쉬와 그의 차가니안 왕국은 사산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옥수스 강을 사산과 돌궐의 동쪽 경계로 정했다. 그러나 돌궐과 사산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그 후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돌궐과 사산 모두 실크로드와 서방과 극동 간의 무역을 지배하고 싶어했다. 568년, 돌궐 대사가 비잔틴 제국으로 보내져 동맹과 사산 제국에 대한 양면 공격을 제안했지만,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3.2. 사산-돌궐 동맹의 균열과 갈등
부하라 전투 이후, 에프탈 제국은 멸망하여 차가니안의 파가니쉬가 통치하는 왕국과 같은 여러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가드파르와 그의 남은 부하들은 사산 제국 영토로 남쪽으로 도망쳐 피신했다. 한편, 돌궐 카간 신지부는 에프탈 귀족들과 합의하여 파가니쉬를 새로운 에프탈 왕으로 임명했다.
이는 호스로 1세의 불만을 샀는데, 그는 돌궐과 에프탈의 협력이 동쪽에서 자신의 통치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히르카니아의 사산-돌궐 국경으로 진격했고, 그곳에서 신지부의 돌궐 사절단을 만나 선물을 받았다. 호스로는 자신의 권위와 군사력을 주장하며 돌궐인들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에는 파가니쉬를 크테시폰의 사산 궁정으로 보내 호스로의 에프탈 왕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조약이 포함되었다. 파가니쉬와 그의 차가니안 왕국은 사산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옥수스 강을 사산과 돌궐의 동쪽 경계로 정했다. 그러나 돌궐과 사산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그 후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양측 모두 실크로드와 서방과 극동 간의 무역을 지배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568년, 돌궐 대사가 비잔틴 제국으로 보내져 동맹과 사산 제국에 대한 양면 공격을 제안했지만,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