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테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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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테시폰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현재 이라크 바그다드 남동쪽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변에 있었던 고대 도시이다. 파르티아 시대에 정치,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군사적 목표가 되었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수도로서 크게 확장되었으나, 이슬람 정복 이후 쇠퇴하여 유령 도시가 되었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유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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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테시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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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크테시폰 |
원어 이름 | () |
다른 이름 | Ktēsiphôn Tēsifōn |
로마자 표기 | Tēsifōn (팔라비어) Tisfun (페르시아어) Ktēsiphôn (그리스어) Qṭēspōn (시리아어) |
위치 | 살만파크, 바그다드 주, 이라크 |
지역 | 메소포타미아 |
유형 | 정착지 |
발굴 시기 | 1928–1929년, 1931–1932년, 1960년대–1970년대 |
고고학자 | 오스카 로이터, 안토니오 인베르니치, 조르지오 굴리니 |
상태 | 폐허 |
역사 | |
건설자 | 미트리다테스 1세 |
수도 |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 |
중요 사건 | 로마-파르티아 전쟁 로마-사산 전쟁 크테시폰 공방전 |
건축물 | |
주요 건축물 | 타크 카스라 |
기타 정보 |
2. 명칭
크테시폰의 라틴어 이름 Ctesiphonla은 고대 그리스어 ''Ktēsiphôn'' (Κτησιφῶνgrc)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고유 명사를 기반으로 한 그리스어 지명이지만, ''Tisfōn'' 또는 ''Tisbōn''으로 재구성된 지역 이름이 헬레니즘화된 형태일 수도 있다.[7] 사산조 시대 이란어 텍스트에서는 ''Tyspwn''으로 표기되는데, 이는 마니교 알파벳 파르티아어, 중페르시아어 𐭲𐭩𐭮𐭯𐭥𐭭pal, 그리고 기독교 소그드어(수리아 문자)에서 ''Tīsfōn'', ''Tēsifōn'' 등으로 읽을 수 있다. 현대 페르시아어 형태는 ''Tisfun'' (تیسفونfa)이다.
크테시폰은 현대 도시 바그다드(Baghdad), 이라크(Iraq)에서 남동쪽으로 35km 떨어진 알마다인(Al-Mada'in) 부근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해 있다. 크테시폰은 30km2에 달했는데, 이는 4세기 로마 제국의 면적 13.7km2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12]
크테시폰은 기원전 120년대 후반,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가 셀레우키아 맞은편에 세운 군사 캠프 자리에 건설되었다.[14] 고타르제스 1세 통치 시기에 정치 및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오로데스 2세 통치 시대인 기원전 58년경에는 파르티아의 수도가 되었다.[14] 시간이 지나면서 이 도시는 헬레니즘 시대의 수도였던 셀레우키아를 비롯한 주변 정착촌들과 합쳐져 국제적인 대도시가 되었다.[14]
동방 교회 공의회의 문서에서는 이 도시를 ''Qṭēspōn'' ()[2] 또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의 대도시를 지칭할 때는 때때로 ''Māḥôzē'' ()라고 언급했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일반적으로 ''Ṭaysafūn'' (طيسفونar) 또는 ''Qaṭaysfūn'' (قطيسفونar) 또는 ''al-Mada'in'' (المدائنar, "도시들", 대 크테시폰을 지칭)으로 불린다. 야쿠트 알 하마위에 따르면, 함자를 인용하여 원래 형태는 Ṭūsfūn 또는 Tūsfūn이었고, 이것이 아랍어화되어 Ṭaysafūn이 되었다.[8] 이 도시의 아르메니아어 이름은 ''Tizbon'' (Տիզբ온hy)이었다. 크테시폰은 구약 성경의 에스라서[9]에 카스피아/카스피아(Casfia/Casphia)(카스 민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스피해와 카즈빈과 동족어임)로 처음 언급된다. 또한 탈무드에는 악티스폰(Aktisfon)으로 언급되어 있다.[10] 다른 탈무드 자료에서는 아르다시르 도시 건너편 티그리스 강에 위치한 아키스트폰(Akistfon)으로 기록되어 있다.[11]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있던 셀레우키아와 함께 '''크테시폰-셀레우키아'''라고도 불린다. 크테시폰이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Κτησιφῶνgrc에서 유래한다. ''Ktēsiphôn''은 그리스어화된 발음이며, ''Tosfōn'' 또는 ''Tosbōn''이라는 발음을 복원음으로 보는 설이 있다.[37] 중기 페르시아어(파흘라위어), 마니교 문서, 소그드어로 기록된 기독교 문서에서는 Tyspwn / Tīsfōn으로 기록되었고, 근세 페르시아어에서는 تيسفون fa(''tysfyn'')으로 표기된다. 시리아어에서는 ܩܛܝܣܦܘܢsyr으로 기록되었다. 압바스 왕조 이후의 아랍어 자료에서는 طيسفونar (''Ṭaysafūn'') 또는 قطيسفون ar(''Qaṭaysfūn'')으로 표기되었고, 더 나아가 "도시 ( مدينة Madīnaar)"의 복수형인 "알-마다인" المدائنar al-Madā’in으로도 불렸다.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서는 ''Tizbon'' ()으로 표기되었다. 크테시폰이 등장하는 최초의 자료는 구약성서 『에스라서』 8장 17절이며, Kasfia/Casphia로 표기되었다.
3. 지리
코스로에스의 아치(Taq Kasra)는 한때 크테시폰의 왕궁의 일부였으며, 서기 3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13] 현재 이라크의 살만 팍(Salman Pak) 마을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1세기경 이 지역 일대를 지배했던 파르티아에 의해 건설되었고, 이후 기원전 2세기 중반 그 수도로 정해져 번영하였다. 고대부터 비옥한 토지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으로서, 또 로마 제국과 한나라를 잇는 통상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파르티아 멸망 후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도 수도가 위치하여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계속 남아 있었다.
사막 지대에 많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나, 로마의 수도교 등에서 볼 수 있는 아치를 이루는 기술 등, 마치 동서 교역의 중심지다운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다만, 크테시폰의 주요 건축물 중 명확하게 현존하는 것은 사산조의 궁전인 타크 키스라(탁 키스라) 뿐이다.
4. 역사
스트라보는 파르티아 시대 크테시폰의 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고대에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의 중심지였지만, 현재는 셀레우키아가 중심지이다. 즉,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 근처에 크테시폰이라는 큰 마을이 있다. 파르티아의 왕들은 셀레우키아 사람들이 스키타이족이나 군인들이 주둔하는 압박을 받지 않도록 겨울 거처로 이 마을을 이용하곤 했다. 따라서 파르티아의 힘 덕분에 크테시폰은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가 되었다. 크테시폰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크고,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파르티아인들이 판매할 상품과 파르티아인들이 좋아하는 예술품들도 갖추게 되었다. 파르티아 왕들은 공기가 맑다는 이유로 겨울에는 이곳에서 지냈고, 여름에는 그들의 오랜 명성 때문에 에크바타나와 히르카니아에서 지냈다.[15]
크테시폰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로마 제국의 주요 군사 목표가 되었다. 도시는 역사상 네다섯 번 로마에 함락되었는데, 특히 2세기 동안에만 세 번이나 함락되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116년에 크테시폰을 점령했지만, 그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는 117년에 평화 협정의 일환으로 자발적으로 크테시폰을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로마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164년 파르티아와의 또 다른 전쟁 중에 크테시폰을 점령했지만, 평화가 맺어지자 도시를 버렸다. 197년에는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크테시폰을 약탈하고 주민 수천 명을 노예로 팔았다.
226년, 크테시폰은 사산 왕조의 손에 들어갔고, 사산 왕조는 이곳을 수도로 삼아 이란의 파르티아 왕조를 종식시켰다. 사산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크테시폰은 크게 확장되고 번영하여 대도시로 발전했는데, 아랍어로는 알마단, 아람어로는 마호제(Mahoze)로 알려졌다.[16] 크테시폰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는 동쪽에 있었는데, 이슬람 시대 아랍어 자료에서는 "옛 도시"(مدينة العتيقة|Madīnah al-'Atīqahar)라고 불렸으며, 백색 궁전(قصر الأبيض|qaṣr al-'abyaḍar)이 있었다. 크테시폰 남쪽 지역은 아스반바르(Asbānbar) 또는 아스판바르(Aspānbar)로 알려져 있었는데, 웅장한 궁전, 부, 게임, 마구간, 목욕탕으로 유명했다. 타크 카스라는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16] 서쪽 지역은 베아르다시르(Veh-Ardashir, 중세 페르시아어로 "아르다시르의 좋은 도시"라는 뜻)로 알려져 있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마호자(Mahoza), 기독교인들에게는 코케(Kokhe), 아랍인들에게는 베흐라시르(Behrasir)로 불렸다. 베아르다시르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의 본거지였다. 베아르다시르 남쪽에는 발라샤바드가 있었다. 크테시폰에는 한부샤푸르(Hanbu Shapur), 다르자니단(Darzanidan), 베 존디우-호스로우(Veh Jondiu-Khosrow), 나위나바드(Nawinabad), 카르다카드(Kardakadh) 등 여러 지역이 있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233년에 크테시폰으로 진군했지만, 헤로디아누스가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군대는 아르다시르 1세에게 패배했다.[17] 283년에는 황제 카루스가 내전 중에 크테시폰을 무혈 입성으로 점령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갈레리우스가 크테시폰을 점령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떤 자료에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18] 페르시아의 나르세에게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서부를 대가로 크테시폰을 돌려주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약 325년과 410년에는 크테시폰 또는 강 건너편의 그리스 식민지가 동방 교회 공의회 장소였다.
541년 안티오크 정복 후, 호스로 1세는 포로로 잡은 주민들을 위해 크테시폰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이 새로운 도시를 베-안티오크-호스로우(Veh-Antiok-Xusrō), 즉 "안티오크보다 더 좋은, 코스로우가 건설한 도시"라고 불렀다. 그 지역 주민들은 이 새로운 도시를 "로마인들의 도시"라는 뜻의 루마간(Rumagan)이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알-루미야(al-Rumiyya)라고 불렀다. 호스로는 베 안티오크와 함께 여러 개의 요새 도시를 건설했다.[19]
590년, 미흐란 가문의 일원인 바흐람 초빈은 새로 즉위한 사산 왕조의 통치자 호스로 2세를 이라크에서 몰아내고 그 지역을 정복했다. 1년 후, 호스로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영토를 탈환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알마단의 명성은 다소 감소했는데, 이는 호스로우의 새로운 겨울 거주지인 다스타게르드의 인기 때문이었다. 627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포위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이 그의 평화 조건을 수락하자 철수했다. 628년, 치명적인 전염병이 크테시폰, 알마단 및 사산 왕조 서부 지역을 강타하여 호스로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바드 2세도 사망했다.
629년, 크테시폰은 잠시 미흐라니드(Mihranid)의 위정자 샤르바라즈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곧 호스로 2세의 딸 보란두크트의 지지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크테시폰은 이스파부단 가문의 지휘하에 파흘라브(파르티아) 세력과 피루즈 호스로우의 지휘하에 파르시그(페르시아) 세력이라는 사산 왕조의 두 세력 사이의 끊임없는 전투에 휘말렸다.
630년대 중반, 이슬람 아랍인들은 카디시야 전투에서 사산 제국을 크게 무찔렀다.[21] 이후 아랍인들은 637년 초에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이슬람 군 지휘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발라샤바드를 점령하고 베-안티옥-크스로와 베-아르다시르 주민들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베-안티옥-크스로 주민들은 원하면 떠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이슬람 당국에 복종하고 조공(지즈야)을 바쳐야 했다. 이슬람군이 크테시폰에 도착했을 때, 사산 왕족, 귀족, 군대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 그러나 이슬람군은 일부 군대를 포로로 잡고, 사산 왕조의 국고에서 많은 재물을 빼앗아 군대에 나누어 주었다.[21] 탁 크스라의 궁전은 잠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21]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특히 760년대 압바스 칼리파의 수도 바그다드 건설 이후 도시는 급격히 쇠퇴하여 곧 유령 도시가 되었다. 칼리프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크테시폰 폐허에서 가져갔다. 그는 궁전을 철거하여 벽돌을 재사용하려 했지만, 작업이 너무 방대하여 중단했다.[22] 알 만수르는 또한 알 루미야를 몇 달 동안 압바스 칼리파의 수도로 사용했다.[23]
크테시폰은 ''천일야화''의 도시 이스바니르의 모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1915년 11월, 크테시폰 유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크테시폰 전투가 벌어진 장소였다. 오스만 제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하려던 영국군을 격파하고, 영국군을 포위하여 항복시키기 전까지 약 약 64.37km 후퇴시켰다.
4. 1. 파르티아 시대
미트리다테스 1세가 셀레우키아 맞은편에 세운 군사 캠프 자리에 기원전 120년대 후반 크테시폰이 건설되었다.[14] 고타르제스 1세 통치 시대에 크테시폰은 정치 및 상업 중심지로서 최고조에 달했다. 오로데스 2세 통치 시대인 기원전 58년경에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14] 점차 이 도시는 옛 헬레니즘 시대 수도인 셀레우키아와 인근 정착지들과 합쳐져서 국제적인 대도시를 형성했다.[14]
스트라보는 크테시폰의 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 고대에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의 중심지였지만, 현재는 셀레우키아가 중심지이다. 즉,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 근처에 크테시폰이라는 큰 마을이 있다. 파르티아의 왕들은 셀레우키아 사람들이 스키타이족이나 군인들이 주둔하는 압박을 받지 않도록 겨울 거처로 이 마을을 이용하곤 했다. 따라서 파르티아의 힘 덕분에 크테시폰은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가 되었다. 크테시폰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크고,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건물들이 세워졌으며, 파르티아인들이 판매할 상품과 파르티아인들이 좋아하는 예술품들도 갖추게 되었다. 파르티아 왕들은 공기가 맑다는 이유로 겨울에는 이곳에서 지냈고, 여름에는 그들의 오랜 명성 때문에 에크바타나와 히르카니아에서 지냈다.[15]
크테시폰은 중요성 때문에 동부 전쟁에서 로마 제국 지도자들의 주요 군사 목표가 되었다. 이 도시는 역사상 네다섯 번 로마에 함락되었는데, 2세기 동안만 세 번 함락되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116년에 크테시폰을 점령했지만, 그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는 평화 협정의 일환으로 117년에 크테시폰을 자발적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로마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또 다른 파르티아 전쟁 중 164년에 크테시폰을 점령했지만, 평화가 맺어지자 이 도시를 버렸다. 197년에는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크테시폰을 약탈하고 주민 수천 명을 노예로 팔았다.
4. 2. 사산 왕조 시대
226년에 크테시폰은 사산 왕조의 손에 들어갔고, 사산 왕조는 크테시폰을 수도로 삼아 이란의 파르티아 왕조를 종식시켰다. 사산 왕조 통치 기간 동안 크테시폰은 크게 확장되고 번영하여 대도시로 발전했는데, 아랍어로는 알마단, 아람어로는 마호제(Mahoze)로 알려졌다.[16]
크테시폰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는 동쪽에 있었는데, 이슬람 아랍어 자료에서는 "옛 도시"(مدينة العتيقةar ''Madīnah al-'Atīqah'')라고 불렸으며, 백색 궁전(قصر الأبيضar)이 있었다. 크테시폰 남쪽 지역은 아스반바르(Asbānbar) 또는 아스판바르(Aspānbar)로 알려져 있었는데, 웅장한 궁전, 부유함, 게임, 마구간, 목욕탕으로 유명했다. 타크 카스라는 이 지역에 있었다.[16]
서쪽 지역은 베아르다시르(Veh-Ardashir, 중페르시아어로 "아르다시르의 좋은 도시"라는 뜻)로 알려져 있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마호자(Mahoza), 기독교인들에게는 코케(Kokhe), 아랍인들에게는 베흐라시르(Behrasir)로 불렸다. 베아르다시르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의 본거지였다. 베아르다시르 남쪽에는 발라샤바드가 있었다. 크테시폰에는 한부샤푸르(Hanbu Shapur), 다르자니단(Darzanidan), 베 존디우-호스로우(Veh Jondiu-Khosrow), 나위나바드(Nawinabad), 카르다카드(Kardakadh) 등 여러 지역이 있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233년에 크테시폰으로 진군했지만, 헤로디아누스가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군대는 아르다시르 1세에게 패배했다.[17] 283년에 황제 카루스는 내전 중에 크테시폰을 무혈 입성으로 점령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갈레리우스가 크테시폰을 점령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떤 자료에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며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18] 페르시아의 나르세에게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서부를 대가로 크테시폰을 돌려주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약 325년과 410년에 크테시폰 또는 강 건너편의 그리스 식민지는 동방 교회의 공의회 장소였다.
541년 안티오크 정복 후, 호스로 1세는 포로로 잡은 주민들을 위해 크테시폰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이 새로운 도시를 베-안티오크-호스로우(Veh-Antiok-Xusrō), 즉 "안티오크보다 더 좋은, 코스로우가 건설한 도시"라고 불렀다. 그 지역 주민들은 이 새로운 도시를 "로마인들의 도시"라는 뜻의 루마간(Rumagan)이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알-루미야(al-Rumiyya)라고 불렀다. 호스로는 베 안티오크와 함께 여러 개의 요새 도시를 건설했다.[19]
590년, 미흐란 가문의 일원인 바흐람 초빈은 새로 즉위한 사산 왕조의 통치자 호스로 2세를 이라크에서 몰아내고 그 지역을 정복했다. 1년 후, 호스로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영토를 탈환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알마단의 명성이 다소 감소했는데, 이는 호스로우의 새로운 겨울 거주지인 다스타게르드의 인기 때문이었다. 627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포위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이 그의 평화 조건을 수락하자 철수했다. 628년, 치명적인 전염병이 크테시폰, 알마단 및 사산 왕조 서부 지역을 강타하여 호스로우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바드 2세도 사망했다.
629년, 크테시폰은 잠시 미흐라니드(Mihranid)의 위정자 샤르바라즈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곧 호스로 2세의 딸 보란두크트의 지지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크테시폰은 이스파부단 가문의 지휘하에 파흘라브(파르티아) 세력과 피루즈 호스로우의 지휘하에 파르시그(페르시아) 세력이라는 사산 왕조의 두 세력 사이의 끊임없는 전투에 휘말렸다.
6세기~7세기 사산 왕조 전성기에 맞춰 크테시폰도 번영을 맞이했다. 구시가지의 백궁, 남쪽의 타크 키스라(Tak-i Kisra)를 비롯한 아스반바르(Asvabanbar), 셀레우키아의 베 아르다시르(Ve Ardashir) 지역을 중심으로 다문화가 공존하며 풍부한 문화가 발전했다. 또한 사산 왕조는 이란의 계승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중세 페르시아 문학이 번성했고, 크테시폰이 그 중심이 되었다.
크테시폰은 원래 셈족이 많았고, 기독교, 유대교, 만다교, 영지주의 등이 유행했으며, 사산 왕조가 믿는 조로아스터교는 소수였다. 특히 기독교는 적대적인 로마 제국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사산 왕조는 동정적이었다. 아르다시르 1세의 후계자인 샤푸르 1세는 유대교 지도자와 신흥 종교(마니교)의 교주 마니를 궁정에 초청하는 등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채택했다. 마니교 본부도 크테시폰에 있었지만, 조로아스터교 사제 카르티르의 박해가 시작되자 3세기 말에 바빌론으로 이동했다. 반면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대우에 따라 상황이 변했다. 처음에는 관용 정책으로 이 도시에 대주교가 임명되었지만, 4세기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면서 국내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 대주교 중에서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 야즈데르드 1세 시대에 화합이 모색되었고, 이곳에서 공의회가 열리고 국내 6대 교회가 정비되기도 했지만, 야즈데르드 1세의 의문사로 화합은 끝나고 박해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크테시폰 대주교가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받은 네스토리우스파로 넘어가자 사산 왕조의 태도는 완화되었고, 박해는 중단되고 동방 총대주교로 승격되어 이후 동방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4. 3. 이슬람 정복 이후
630년대 중반, 이슬람 아랍인들은 카디시야 전투에서 사산 제국을 크게 무찔렀다.[21] 이후 아랍인들은 637년 초에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이슬람 군 지휘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발라샤바드를 점령하고 베-안티옥-크스로와 베-아르다시르 주민들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베-안티옥-크스로 주민들은 원하면 떠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이슬람 당국에 복종하고 조공(지즈야)을 바쳐야 했다. 이슬람군이 크테시폰에 도착했을 때, 사산 왕족, 귀족, 군대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 그러나 이슬람군은 일부 군대를 포로로 잡고, 사산 왕조의 국고에서 많은 재물을 빼앗아 군대에 나누어 주었다.[21] 탁 크스라의 궁전은 잠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21]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특히 760년대 압바스 칼리파의 수도 바그다드 건설 이후 도시는 급격히 쇠퇴하여 곧 유령 도시가 되었다. 칼리프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크테시폰 폐허에서 가져갔다. 그는 궁전을 철거하여 벽돌을 재사용하려 했지만, 작업이 너무 방대하여 중단했다.[22] 알 만수르는 또한 알 루미야를 몇 달 동안 압바스 칼리파의 수도로 사용했다.[23]
크테시폰은 ''천일야화''의 도시 이스바니르의 모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복 이후에도 크테시폰의 인구는 줄지 않았지만,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잃었다. 정복군 일부는 도시에 취업했지만, 아랍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762년 아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으면서 그 쇠퇴는 결정적이 되었다. 도시는 급속히 쇠퇴하여 결국에는 유령 도시가 되었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도시 Isbanir영어는 크테시폰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139화, 667-79야).
1915년 11월, 크테시폰 유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크테시폰 전투 전장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바그다드를 탈환하려던 영국군 부대를 격파하고 40마일 후퇴시켜 항복시켰다.
4. 4. 근대
1915년 11월, 크테시폰 유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크테시폰 전투가 벌어진 장소였다. 오스만 제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하려던 영국군을 격파하고, 영국군을 포위하여 항복시키기 전까지 약 약 64.37km 후퇴시켰다.
5. 종교
크테시폰에는 셈족이 많았고, 기독교, 유대교, 만다교, 영지주의 등이 유행했으며, 사산 왕조가 믿는 조로아스터교는 소수였다.[24] 이러한 상황은 사산 왕조 멸망까지 바뀌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는 적대적인 로마 제국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사산 왕조는 동정적이었다. 아르다시르 1세의 후계자인 샤푸르 1세는 유대교 지도자와 신흥 종교(후에 마니교라 불림)의 교주 마니를 궁정으로 초청하는 등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채택했다.[24] 이 때문에 마니교 본부도 크테시폰에 있었지만, 조로아스터교 사제 카르티르의 박해가 시작되자 3세기 말에 바빌론으로 이동했다.[24]
반면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대우에 큰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관용 정책으로 이 도시에 대주교가 임명되었지만, 4세기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면서 국내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어(339-379) 대주교 중에서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 시대가 되자 상황이 바뀌어 화합이 모색되었고, 이곳에서 공의회가 열리고 국내 6대 교회가 정비되기도 했지만, 야즈데게르드 1세의 의문사로 화합은 끝나고 박해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크테시폰 대주교가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받은 네스토리우스파로 넘어가자 사산 왕조의 태도는 완화되었고, 박해는 중단되고 동방 총대주교로 승격되어 이후 동방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24]
사산 왕조 시대 크테시폰의 인구는 아람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등으로 구성된 혼합 인구였다. 이 대도시에서는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가 공존했다. 497년, 최초의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 마르 바바이 1세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에 그의 주교좌를 설치하고, 메르브를 중심으로 동쪽 선교를 감독하였다. 인구에는 이원론적 종교인 마니교도들도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도 크테시폰에 "바빌론 총대주교구"를 설치하고 계속 언급되었다.[24] 아랍군이 크테시폰을 함락시킨 후 많은 인구가 크테시폰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일부 페르시아인들은 남아 있었고, 이들 중 몇몇 중요 인물이 알리에게 선물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알리는 이를 거절했다.[24] 9세기에는 살아남은 마니교도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로 도망쳐 그곳에 총대주교구를 설치했다.[24]
6. 고고학
1928년에서 1929년 사이에 독일 오리엔트 학회(Deutsche Orient-Gesellschaft)의 오스카 로이터(Oscar Reuther)가 이끈 탐험대는 크테시폰 유적지 서쪽의 카스르 빈트 알-카디(Qasr bint al-Qadi)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25][26][27][28] 1931년에서 1932년 겨울에는 독일 국립 박물관(Staatliche Museen zu Berlin)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의 합동 탐험대가 마아리드(Ma'aridh), 텔 드헤브(Tell Dheheb), 타키 키스라(Taq-i Kisra), 셀만 파크(Selman Pak), 움 에즈 자티르(Umm ez-Za'tir) 지역을 중심으로 에른스트 퀴넬(Ernst Kühnel)의 지휘 아래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29]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는 토리노 대학교(University of Turin)의 안토니오 인베르니치(Antonio Invernizzi)와 조르조 굴리니(Giorgio Gullini)가 이끄는 이탈리아 팀이 티그리스 강 건너편 유적지에서 베 아르다시르(Veh Ardashir)로 확인된 지역에서 작업을 수행했다. 작업은 주로 코스로 2세(Khosrow II) 궁전의 복원에 집중되었다.[30][31][32][33][34][35] 2013년 이라크 정부는 관광 명소로서 타키 키스라(Taq Kasra)의 복원을 계약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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