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1. 개요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벨라루스 출신의 군인으로, 러시아 내전 참전 후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점령 하에 있던 로코트 자치국의 수장이 되어 친독 민병대를 조직, 파르티잔 토벌에 나섰다. 이후 무장친위대에 편입되어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참여,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약탈한 재산을 사적으로 소유하려 한 혐의로 1944년 8월 처형되었다.
| 이름 | 브로니슬라프 블라디슬라보비치 카민스키 |
|---|---|
| 출생일 | 1899년 6월 16일 |
| 사망일 | 1944년 8월 28일 (향년 45세)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비테프스크 현 |
| 사망 장소 | 나치 독일 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 리츠만슈타트 |
| 별칭 | 브랸스크 숲의 군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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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노동자 농민 적군 반공 자경 조직 → 러시아 국민 해방군 → 무장친위대 |
|---|---|
| 복무 기간 | 1918년 - 1921년 1941년 - 1944년 |
| 최종 계급 | 친위대 여단지도자 |
| 지휘 | 무장 돌격 여단 RONA |
| 참전 |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바르샤바 봉기 (처형) |
| 수훈 | 철십자 훈장 1급 |
| 직책 | 로코트 자치국 오버-뷔르거마이스터 (Ober-Burgomeister) |
|---|---|
| 임기 시작 | 1942년 1월 8일 |
| 임기 종료 | 1943년 8월 26일 |
| 이전 |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 |
| 이후 | 직위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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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나치 부역자 -
안드레이 블라소프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로 전향하여 러시아 해방군을 조직, 소련에 대항한 소련 군인으로, 종전 후 반역죄로 처형되어 그의 행적은 러시아 역사에서 논쟁적인 주제이다. -
벨라루스의 나치 부역자 -
프란치샤크 쿠샬
프란치샤크 쿠샬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벨라루스 민족 운동에 참여했으며, 벨라루스 보조 경찰 훈련 학교 교장과 벨라루스 국토 방위군 사령관을 역임한 벨라루스인이다. -
바르샤바 봉기 진압군 -
오스카르 디를레방거
오스카르 디를레방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장친위대에서 잔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독일 군인으로, 디를레방거 여단을 지휘하며 폴란드와 벨라루스 등지에서 악명을 떨치고 바르샤바 봉기 진압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
바르샤바 봉기 진압군 -
에리히 폰 뎀 바흐
에리히 폰 뎀 바흐는 독일의 친위대 장성이자 경찰 대장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격대 토벌 작전과 바르샤바 봉기 진압을 지휘하며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나치당 가입 후 친위대에서 빠르게 승진했으며, 동부 전선 민간인 학살 주도 및 바르샤바 봉기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고, 종전 후 체포되어 전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사망했다.
2. 어린 시절
러시아 제국 비텝스크현(오늘날 벨라루스 폴로츠크 일대)에서 폴란드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하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붉은 군대에 복무했다. 제대 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화학 공장에서 일했다. 1935년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1937년 대숙청 기간 중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정책을 비판하고 독일인 및 폴란드인과 협력한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941년 석방되어 브랸스크에 정착하여 지역 양조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3. 로코트 자치국
1941년 독일군의 소련 침공으로 브랸스크가 점령되자, 카민스키는 친구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와 함께 독일군 행정부에 협력하여 민정과 지역 경찰 설립을 제안했다. 보스코보이니크는 로코트 군의 수장으로, 카민스키는 그 부관으로 임명되어 지역 민병대를 통솔했다. 하인츠 구데리안과 협력하여 1만 명 규모의 무장 민병대를 구성, 러시아 파르티잔 토벌에 나섰다.
1942년 1월 8일 보스코보이니크가 전투 중 사망하자, 카민스키가 뒤를 이어 로코트 자치국의 수장이자 민병대 지휘관이 되었다. 카민스키는 민병대를 러시아 국민해방군(RONA)으로 개칭하고, 그 규모를 수만 명으로 확대했다. 1942년 3월, 카민스키는 오룔의 독일 제2 기갑군 대표에게 자신의 부대가 "게릴라와 적극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소련 파르티잔에 대한 선전 활동도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 루돌프 슈미트 상급대장은 카민스키를 로코트를 중심으로 하는 육군 후방 지역 532의 소령으로 임명했다. 1942년 7월 19일, 귄터 폰 클루게 원수의 승인을 받은 후, 카민스키는 폰 펠트하임 소령과 뤼브삼 대령의 감독하에 자치와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았다. 카민스키는 로코트 공화국의 수석 시장이자 지역 민병대 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지방 정부를 운영하고 자체 법원, 감옥 및 신문을 설립했다. 사적 기업이 장려되었고 집단 농업은 폐지되었다.
로코트 자치국에서는 사기업이 장려되고 집단 농장이 폐지되었으며, 반공주의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이 이주해왔다.
3.1. 파르티잔 토벌 및 전쟁범죄
카민스키가 이끌던 민병대는 파르티잔 토벌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약탈, 강간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파르티잔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붉은 군대 파르티잔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친독일파 주민들을 모아 자경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초기 수천 명에서 1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1942년 1월 8일,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가 파르티잔에 의해 살해되자, 카민스키는 그의 후임으로 자경 조직의 지도자 및 마을 대표가 되었다. 그는 조직에 '러시아 국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하고, 구성원을 약 2만 명까지 늘렸다.
독일군 연락 요원은 러시아 국민해방군 본부 밖에 설치된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를 본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할 무렵, 소련 정부의 사면 제안으로 인해 다수의 탈주자가 발생하여 조직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으나, 카민스키는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이를 막았다.
1944년 4월 11일부터 카민스키 여단은 폰 고트베르크의 SS전투집단에 배속되어 보안 작전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도적떼"를 수만 명 학살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에게 혐의를 씌워 살해하거나 강제 추방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4. 벨라루스에서의 활동
독일의 시타델 작전이 실패하고 소련이 반격하자, 카민스키는 1943년 8월 여단원과 그 가족들을 이끌고 벨라루스 비텝스크의 레펠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 지역은 파르티잔 활동 지역으로, 카민스키 여단은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후퇴 중 탈영병이 급증하여 여단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카민스키는 제2연대 사령관 타라소프를 본보기로 처형하는 등 강경 대응했다. 그럼에도 탈영은 계속되어 1943년 10월 초에는 여단 병력의 3분의 2를 잃었다.
독일군이 벨라루스로 후퇴하면서 현지 경찰, 소련군 포로, 석방된 죄수 등이 여단에 합류하여 무장친위대에 편입되었다. 1944년 1월 27일, 하인리히 힘러는 카민스키에게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1944년 2월 15일, 카민스키는 여단을 벨라루스 서부 자틀라바로 이동시켰다. 이 시기 카민스키 여단은 벨라루스 경찰력을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4월 11일부터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의 SS전투집단에 배속되어 보안 작전에 참여했다. 이들은 "도적떼" 소탕을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5. 무장친위대 편입
1944년 6월, 카민스키 여단은 공식적으로 무장친위대에 흡수되어 무장돌격여단 러시아 국민해방군으로 개칭되었고, 카민스키는 여단지도자 계급을 받았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여단의 반파르티잔 활동은 중단되었고, 여단원들은 노이하머(Neuhammer, 현 폴란드 시비엥토슈프)의 SS 훈련캠프에 집결하였다. 카민스키 여단은 제29무장척탄병사단으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다.
6. 바르샤바 봉기
1944년 8월, 카민스키 여단은 바르샤바 봉기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오호타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 강간, 약탈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오호타 학살) 카민스키는 자신이 하인리히 힘러 SS 총사령관의 직속 명령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진압 작전 지휘관인 에리히 폰 뎀 바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 1일에 시작되었다. 8월 4일, 카민스키 여단은 오스카 디를레방어 부대 등과 함께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SS-그루펜퓌러가 지휘하는 진압 부대에 소속되어 투입되었다. 카민스키는 부하들에게 약탈을 허용했고, RONA는 전투보다 약탈에 집중했다. 오호타 학살에서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은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그 대부분은 카민스키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였다.
7. 최후
1944년 8월, 하인리히 힘러는 카민스키와 그의 여단 지도부를 군사 재판을 거쳐 리츠만슈타트(우치)에서 처형했다. 이들은 '제국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이는 훔친 재산이 힘러에게 전달되어야 했지만 카민스키와 그의 부하들이 재산을 자신들을 위해 보관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카민스키와 함께 여단 참모장인 무장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일리야 샤비킨, 운전기사, 여단 군의관 F.N. 자보라, 통역관 G. 사도프스키도 처형되었다.
여단 병사들에게는 카민스키가 폴란드 파르티잔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거짓 설명이 주어졌다. 병사들이 이 설명을 믿지 않자, 게슈타포는 카민스키의 차를 가져다가 도랑에 밀어 넣고 기관총으로 쏘고, 거위 피를 뿌려 증거로 삼았다. 사기가 저하된 부대는 곧 도시에서 철수하여 파르티잔 활동과는 거리가 먼 북쪽에 주둔하게 되었다.
카민스키의 죽음과 부대의 신뢰성 상실로 인해, 카민스키 여단을 사단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그의 부대는 친위대 여단지도자이자 경찰 소장인 크리스토프 딤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친위대 본부는 카민스키의 죽음을 폴란드인 파르티잔 부대의 습격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8. 훈장
| 훈장 | 수여 일자 | 기타 |
|---|---|---|
| 철십자 훈장 2급 | 1944년 1월 27일 | |
| 철십자 훈장 1급 | 1944년 1월 27일 | |
| 동부 전선 작전 훈장 | ||
| 게릴라 소탕 훈장 | 1944년 7월 31일 | |
| 동방 민족의 용기를 기리는 공로 훈장 2급 | 1944년 | |
| 동방 민족의 용기를 기리는 공로 훈장 1급 | 1944년 | |
| 전상장 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