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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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힘러는 1900년 독일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종전으로 전투 경험은 없었다. 농업학 학위를 취득한 후, 1920년대 초 유대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다. 1923년 나치당에 가입하여 뮌헨 폭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나치 친위대(SS)에 입대하여 빠르게 성장했다. 1929년 SS 사령관이 된 그는 SS를 독립적인 조직으로 키웠고, 나치 정권 장악 후 권력을 강화하며 독일 경찰을 장악했다. 그는 무장친위대(Waffen-SS)를 창설하고 홀로코스트를 주도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다. 1945년 연합군에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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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힘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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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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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 |
로마자 표기 | Heinrich Luitpold Himmler |
출생일 | 1900년 10월 7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45년 5월 23일 |
사망지 | 뤼네부르크, 독일 |
사망 원인 | 자살 (청산가리 중독)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23년–1945년) |
기타 정당 | 바이에른 인민당 (1919년–1923년) |
배우자 | 마르가레테 보덴 (1928년 7월 결혼) |
자녀 | 구드룬, 헬게, 나네테 |
파트너 | 헤드비히 포타스트 (1939년–1944년) |
친척 | 게프하르트 루트비히 힘러 (형) 에른스트 헤르만 힘러 (남동생) |
교육 | 뮌헨 공과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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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신이교주의 |
정치 경력 | |
직책 | 친위대 라이히스퓌러 |
임기 시작 | 1929년 1월 6일 |
임기 종료 | 1945년 4월 29일 |
이전 | 에르하르트 하이덴 |
이후 | 카를 항케 |
직책 2 | 독일 경찰 총수 |
임기 시작 2 | 1936년 6월 17일 |
임기 종료 2 | 1945년 4월 29일 |
이전 2 | 신설 |
이후 2 | 카를 항케 |
직책 3 | 내무부 장관 |
총리 3 | 아돌프 히틀러 |
임기 시작 3 | 1943년 8월 24일 |
임기 종료 3 | 1945년 4월 29일 |
이전 3 | 빌헬름 프리크 |
이후 3 | 파울 기슬러 |
직책 4 | 국가 행정 전권대사 |
임명 4 | 아돌프 히틀러 |
임기 시작 4 | 1943년 8월 20일 |
임기 종료 4 | 1945년 4월 29일 |
이전 4 | 빌헬름 프리크 |
이후 4 | 폐지 |
추가 직책 | |
직책 5 | 바이슬라 군집단 사령관 |
임기 5 | 1945년 1월~3월 |
직책 6 | 대체 육군 사령관 |
임기 6 | 1944년–1945년 |
직책 7 | 오버라인 군집단 사령관 |
임기 7 | 1944년–1945년 |
직책 8 |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대행 |
임기 8 | 1942년–1943년 |
직책 9 | 독일 민족 강화 국가판무관 |
임기 9 | 1939년–1945년 |
직책 10 | 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원 |
임기 10 | 1933년–1945년 |
직책 11 | 나치당 라이히스라이터 |
임기 11 | 1933년–1945년 |
직책 12 | 대 독일 의회 의원 |
임기 12 | 1933년–1945년 |
직책 13 | 국회 의원 |
임기 13 | 1930년–1933년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나치 독일 |
군대 | 바이에른 왕국군 |
복무 기간 | 1917년–1918년 (육군) 1925년–1945년 (SS) |
최종 계급 | , |
부대 | 제11 바이에른 보병 연대 |
지휘 | 오버라인 군집단 바이슬라 군집단 대체 육군 |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
수상 내역 | |
훈장 | 황금 나치당원 배지 혈맹 훈장 다이아몬드 부착 조종사 겸 관측장 금장 독일 독수리 훈장 욱일대수장 |
2. 어린 시절과 청년기
1919년 뮌헨 기술학교에서 농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농업학 학위를 받았다. 힘러는 학생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패배에 분개한 구 독일군 출신이 구성한 우익계 사병 집단인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다.[4] 1920년 동거하던 매춘부 프리다 바그너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시기 힘러 행적은 분명하지 않은 게 많은데, 이는 그가 나중에 권력자가 되고서 초기 기록을 대부분 말살했기 때문이다.[5]
1921년 초 힘러는 부모의 권유로 양계장을 차렸으나, "피와 대지와 검"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일 농민 계급의 혁신"을 주장하던 과격파에 가담했다. 비록 사업은 실패했지만, 이때 닭을 키우던 경험은 훗날 SS의 인종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힘러는 국기단(Reichkriegsflagge)을 거쳐 1923년 돌격대(Sturmabteilung)에 합류했고, 같은 해 11월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1923년 제국국기단에서 상사가 되었다.
1923년과 1925년 사이 나치당이 금지된 동안, 힘러는 그레고리 슈트라서의 비서로 일했으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해고되었고, 요제프 괴벨스가 그 자리를 이었다. 1924년 말, 히틀러 석방 후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히틀러는 이에 감동하여 힘러를 뮌헨으로 초청했다. 1925년 3월 12일 히틀러를 방문한 힘러는 당원번호 1345의 당원증을 받았다. 이후 힘러는 항상 2인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히틀러의 충복이 되었다.[18]
바트 라이헨할에서 살던 1926년 11월, 힘러는 7살 연상의 이혼녀 마르가레테 보데와 만나 1928년 8월 3일 결혼했다. 1929년 8월 8일 외동딸 구드룬이 태어났으나, 힘러 부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940년 별거했다. 이후 힘러는 비서 헤트비히 포타스트와 동거하며 두 자녀를 두었다.[6]
나치당은 힘러를 프란츠 페퍼 폰 살로몬 돌격대 참모장 부관, 상바이에른 관구지도자(Gauleiter) 대리인 겸 부지도자로 임명했다. 1926년 돌격대 중위(Sturmführer)를 거쳐 1927년 친위대(SS)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SS제국지도자 대리가 되면서 SS의 부사령관이 되었다.[7]
2. 1. 출생과 가족 배경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는 1900년 10월 7일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게프하르트 힘러는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안나 힘러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힘러는 3남 중 둘째였으며, 형 게프하르트 루트비히 힘러와 남동생 에른스트 헤르만 힘러가 있었다.[1]힘러의 이름 '하인리히'는 그의 대부였던 바이에른 왕족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왕자(Prince Heinrich of Bavaria)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힘러의 아버지는 하인리히 왕자의 가정교사였다.[10] 힘러 가문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안이었으며, 매우 보수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9]

아버지 게프하르트(뒷줄 오른쪽), 어머니 안나(뒷줄 왼쪽), 하인리히(앞줄 왼쪽), 대부 하인리히 왕자와 남동생 에른스트 헤르만 힘러(가운데), 형 게프하르트 루트비히 힘러(앞줄 오른쪽)

힘러는 란츠후트의 문법학교에 다녔는데, 아버지가 그 학교의 부교장이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육상 경기에는 약했다.[14] 그는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길렀다. 학교 친구들은 그를 성실하지만 사교성이 부족한 아이로 기억했다.[13]
10세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여기에는 시사, 결투, 종교와 성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이 나타나 있다. 1915년, 란츠후트 사관학교(Landshut Cadet Corps)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왕족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힘러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할 수 있도록 도왔다.[16]
힘러는 대학에 진학할 무렵 이미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였지만, 특별히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학생 시절에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유대인 동아리 회장과도 정중한 관계를 유지했다.[11]
2. 2. 학창 시절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힘러는 1918년 란트슈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관 후보생으로 임명받아 11 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장교로 임관하기 전 전쟁이 끝나 전투 경험 없이 제대했다.[1]
1918년 12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힘러는 제11보병연대 예비대대에서 제대했다. 이후 1919년 4월, 반혁명 의용군인 라우터바흐 의용군(Freikorps Lauterbach)에 가담하여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타도에 참여했으나, 부대가 뮌헨에 도달하기 전에 진압되어 후방 지원 임무에 머물렀다.[2]
같은 해, 아버지 게프하르트의 권유로 뮌헨 북쪽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농장에서 일했으나, 티푸스에 걸려 1년간 요양하며 뮌헨 공과대학교(농학)을 공부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1919년 10월 18일, 뮌헨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농학을 공부하게 되었다.[4]
1919년 뮌헨 기술학교에서 농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농업학 학위를 받았다. 학생 시절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에 분개한 구 독일군 출신 우익 사병 집단이었다.[4]
2. 3. 초기 나치 활동
힘러는 1923년 8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하여 당원 번호 14303을 받았다.[22] 에른스트 룀의 준군사 조직원으로서, 뮌헨 폭동에 가담했는데, 이는 히틀러와 나치당이 뮌헨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실패한 시도였다.[22] 당시 힘러는 룀의 무명의 부하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돌격대의 기수로서 깃발을 든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사진이 남아있다.힘러가 아돌프 히틀러와 처음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뮌헨 폭동 당시 히틀러의 연설을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그가 히틀러를 따르게 된 것은 히틀러가 감옥에서 석방되고 당이 재건된 이후의 일이다.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에도 힘러는 당내 서열에서 하위에 있었기 때문에 체포를 면했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룀이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투옥되었기 때문에 크게 실망했다.
당 활동이 금지되는 동안 힘러는 에리히 루덴도르프, 알브레히트 폰 그레페,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나치당 위장 정당인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NSFB)에 가입했다. 힘러는 나치 좌파로 알려진 슈트라서 밑에서 월급 120라이히스마르크를 받으며 일하게 되었다. 슈트라서는 1924년 5월과 12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고, 힘러는 니더바이에른의 선전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큰 발탁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니더바이에른의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1924년 말 히틀러가 석방되고 1925년 2월 나치당이 재건되자 슈트라서와 함께 나치당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슈트라서가 나치당 니더바이에른-오버팔츠 가우 지도자가 되자 힘러는 그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926년 슈트라서가 나치당 선전 국가 지도자로 임명되자 힘러도 선전 국가 지도자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자신의 보좌관으로는 힘러보다 요제프 괴벨스를 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23]

1925년 8월 8일 친위대(SS)에 입대(대원 번호 168)했다. 1927년에는 제2대 친위대 국가 지도자 에르하르트 하이덴의 대리로 임명되었다.
3. 나치 친위대(SS) 지도자
1929년 1월, SS 사령관 에르하르트 하이덴이 사임하자,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제국 지도자-SS'(Reichsführer-SS) 직을 맡았다.[27] 그는 여전히 선전본부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첫 번째 책임 중 하나는 그해 9월 뉘른베르크 당대회에 참가하는 SS 대원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1년 동안 힘러는 SS의 규모를 약 290명에서 약 3,000명으로 증가시켰다. 1930년까지 힘러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SS를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하게 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SA에 종속되어 있었다.
세계 대공황 기간 동안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나치당은 경제 침체를 이용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립 정부는 경제를 개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유권자들이 나치당을 포함한 극단적인 정치 세력으로 돌아섰다. 히틀러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희생양, 특히 유대인에게 돌리는 것을 포함한 포퓰리즘적 수사법을 사용했다. 1930년 9월, 힘러는 처음으로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37.3%의 득표율과 제국 의회 230석을 획득했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고, 나치당과 독일 국민인민당의 단명한 연정을 이끌었다. 새로운 내각에는 히틀러, 헤르만 괴링, 빌헬름 프릭 등 나치당원 3명만이 포함되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국회의사당이 방화되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힌덴부르크에게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재판 없이 구금을 허용하는 국회의사당 방화 칙령에 서명하게 했다. 1933년 3월 23일 제국 의회가 통과시킨 권한 강화 법은 내각, 사실상 히틀러에게 완전한 입법 권한을 부여했고, 독일은 사실상 독재국가가 되었다. 1934년 8월 1일, 히틀러 내각은 힌덴부르크 사망 시 대통령직을 폐지하고 그 권한을 총리 권한과 합치는 법을 통과시켰다. 힌덴부르크는 다음날 아침 사망했고, 히틀러는 *총통 겸 제국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라는 직함으로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 되었다.
나치당의 권력 장악은 힘러와 SS에게 무제한적인 번영의 기회를 제공했다. 1933년까지 SS는 5만 2천 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엄격한 회원 자격 요건은 모든 회원이 히틀러의 아리아 ''헤렌폴크''("아리아 주인종")이 되도록 보장했다. 지원자들은 노르딕 특징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힘러는 "좋은 옛 품종을 섞고 저하시킨 식물 재배자가 그것을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식물 선택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SS의 건설에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끄러움 없이 제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힘러는 조직적이고 학구적인 지능을 활용하여 다양한 SS 부서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31년 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새로운 Ic 서비스(정보부)의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이는 1932년 ''지도부 안전국(SD)''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나중에 공식적으로 하이드리히를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좋은 업무 관계와 상호 존중을 가지고 있었다. 1933년, 그들은 SS를 SA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기 시작했다. 내무장관 프릭과 함께 그들은 통합된 독일 경찰력을 창출하기를 희망했다. 1933년 3월, 바이에른 총독 프란츠 리터 폰 에프는 힘러를 뮌헨 경찰청장으로 임명했다. 힘러는 정치경찰인 IV부의 사령관으로 하이드리히를 임명했다. 그 후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주마다 정치경찰을 장악했고, 곧 프로이센만이 괴링의 통제를 받았다. 1933년 1월 1일부로 히틀러는 힘러를 SS-''오버그루펜퓌러''로 승진시켰다. 6월 2일, 힘러는 SA와 히틀러 유겐트라는 다른 두 나치 준군사 조직의 수장들과 함께 나치당의 두 번째로 높은 정치 계급인 ''라이히슬라이터''로 임명되었다. 7월 10일, 그는 프로이센 주의회에 임명되었다. 1933년 10월 2일, 그는 한스 프랑크의 독일법학원 창립회의에서 창립 회원이 되었다.
힘러는 SS 인종 및 정착 주무청(RuSHA)을 설립하고, SS-''그루펜퓌러'' 계급으로 다레를 초대 청장으로 임명했다. 이 부서는 인종 정책을 시행하고 SS 회원의 "인종적 순수성"을 감시했다. SS 대원들은 인종적 배경에 대해 신중하게 조사를 받았다. 1931년 12월 31일, 힘러는 "결혼 명령"을 도입했는데, 이는 결혼을 원하는 SS 대원이 양쪽 가족이 1800년까지 아리아 혈통임을 증명하는 가계도를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인종 조사 중 어느 한쪽 가계도에서 비아리아 조상이 발견되면 해당자는 SS에서 제외되었다. 각 남성에게는 그의 유전적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계보 기록인 ''지펜부흐''가 발급되었다. 힘러는 각 SS 결혼에서 최소 4명의 자녀를 낳아 유전적으로 우수한 SS 회원 후보군을 만들기를 기대했지만, 이 프로그램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SS 남성 중 40% 미만이 결혼했고, 각각 약 1명의 자녀만 낳았다.
1933년 3월, 나치가 권력을 잡은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힘러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첫 번째 공식 강제수용소를 설립했다. 히틀러는 그것이 단순한 감옥이나 구금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힘러는 유죄 판결을 받은 전과자이자 열렬한 나치인 테오도르 아이케를 1933년 6월 수용소 운영자로 임명했다. 아이케는 독일 전역의 미래 수용소 모델로 사용된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 특징으로는 외부 세계로부터 피해자들을 격리하는 것, 정교한 점호와 작업 세부 사항,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폭력과 처형, 그리고 경비원을 위한 엄격한 징계 규정이 포함되었다. 수감자와 경비원 모두에게 제복이 지급되었고, 경비원 제복에는 옷깃에 특별한 ''토텐코프'' 휘장이 있었다. 1934년 말까지 힘러는 SS의 후원 아래 수용소를 장악하여 별도의 부서인 ''SS-토텐코프페르반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수용소에 정치적 반대자들이 수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범죄자, 부랑자, 일탈자 등 바람직하지 않은 독일 사회 구성원들도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힘러는 "반볼셰비키 투쟁 조직으로서의 SS"라는 소책자에서 SS가 "하층민의 유대-볼셰비키 혁명"과 싸워야 한다고 썼다. 1937년 12월 히틀러의 칙령은 정권이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사람은 누구든 구금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여기에는 유대인, 집시, 공산주의자, 나치가 ''운터멘쉬''(하등 인간)으로 간주한 다른 문화적, 인종적, 정치적 또는 종교적 소속의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수용소는 사회적 및 인종적 공학의 수단이 되었다.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에는 약 2만 7천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는 6개의 수용소가 있었다. 사망자 수는 많았다.
1934년 초,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은 에른스트 룀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우려를 품게 되었다. 룀은 사회주의적이고 대중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정한 혁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당시 300만 명에 달하는 SA가 국가의 유일한 무장 부대가 되어야 하며, 육군은 그의 지휘 아래 SA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룀은 히틀러에게 국방장관 직에 임명해줄 것을 로비했는데, 이 자리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헤르만 괴링은 1933년 프로이센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루돌프 딜스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괴링은 딜스가 SA의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게슈타포를 충분히 냉혹하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우려하여, 1934년 4월 20일 그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같은 날, 히틀러는 힘러를 프로이센을 제외한 모든 독일 경찰의 총수로 임명했다. 이는 법 집행이 주 및 지방의 문제라는 오랜 독일 관행에서 벗어난 급진적인 조치였다. 1934년 4월 22일 힘러에 의해 게슈타포 수장으로 임명된 하이드리히는 SD 수장직도 계속 유지했다.
히틀러는 6월 21일 룀과 SA 지도부를 제거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는 6월 29일 괴링을 베를린으로 보내 힘러와 하이드리히와 만나 작전을 계획하도록 했다. 히틀러는 룀이 체포된 뮌헨에서 지휘를 맡았다. 그는 룀에게 자살하거나 총살당할 선택권을 주었다. 룀이 자살을 거부하자, 그는 두 명의 친위대 장교에 의해 총살당했다.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이른바 긴 칼의 밤이라 알려진 이 사건에서 SA 지도부와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포함한 다른 정적 85명에서 200명이 사망했다. 이렇게 SA가 무력화되면서, 1934년 7월 20일 SS는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지는 독립적인 조직이 되었다. 힘러의 직책인 제국 친위대 지도자(Reichsführer-SS)는 육군의 원수에 해당하는 최고의 공식 SS 계급이 되었다. SA는 스포츠와 훈련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1935년 9월 15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률로 알려진 두 개의 법률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률은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과 유대인 독일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45세 미만의 유대인이 아닌 여성의 유대인 가정 고용을 금지했다. 또한 이 법률은 소위 "비아리아인"에게 독일 시민권의 혜택을 박탈했다. 이 법률들은 제3제국이 처음으로 시행한 인종 기반 조치 중 하나였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SS의 권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당시 나치 독일을 많은 적(실제적이든 상상 속의 적이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SS가 감독하는 국가 경찰력을 구성할 것을 히틀러에게 촉구했다. 내무장관 프릭도 국가 경찰력을 원했지만, 그것은 그가 통제하고 쿠르트 달루게가 경찰청장을 맡는 것을 원했다. 히틀러는 힘러와 하이드리히가 프릭과 협의하도록 맡겼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프릭의 오랜 적 괴링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더 큰 교섭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드리히는 일련의 제안을 작성했고, 힘러는 그를 프릭과 만나도록 보냈다. 화가 난 프리크는 히틀러와 상의했고, 히틀러는 그에게 제안에 동의하라고 말했다. 프리크는 동의했고, 1936년 6월 17일 히틀러는 제국 내 모든 경찰력의 통합을 명령하고 힘러를 독일 경찰청장 겸 내무부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이 역할에서 힘러는 명목상으로 여전히 프릭의 하급자였지만, 실제로는 경찰이 이제 SS의 일부가 되어 프릭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 조치는 힘러에게 독일 전체 형사 부대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부여했다. 그는 또한 독일의 모든 제복을 착용한 법 집행 기관에 대한 권한을 얻었는데, 이 기관들은 새로운 질서경찰로 통합되었고, 달루게 휘하의 SS의 한 부서가 되었다.
그 직후, 힘러는 독일의 모든 형사 수사 기관을 포괄하는 조직인 범죄경찰을 만들었다. 크리포는 게슈타포와 합쳐져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보안경찰이 되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힘러는 보안경찰(게슈타포와 크리포 포함)과 SD를 하나의 우산 아래 모으기 위해 SS 제국 안전 본부를 설립하고, 다시 하이드리히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힘러의 지휘 아래 SS는 자체 군 부대인 SS-자원 부대를 발전시켰고, 이는 나중에 무장 친위대로 발전했다. 명목상 힘러의 권한 아래 있었던 무장 친위대는 완전한 군사화된 지휘 및 작전 구조를 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3개 연대에서 38개 사단 이상으로 성장하여 육군과 함께 복무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육군의 일부가 아니었다.
힘러는 군사적 야망 외에도 SS의 우산 아래 병행 경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 관리자 오스발트 포흘은 1940년 독일 경제 기업을 설립했다. SS 경제 및 행정 본부의 후원 아래 이 지주회사는 주택 회사, 공장 및 출판사를 소유했다. 포흘은 부도덕했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회사를 빠르게 이용했다. 반대로 힘러는 돈과 사업 문제에 있어 정직했다.
1938년 히틀러는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독일과 중국의 동맹을 끝내고 더 현대적인 일본과 협정을 맺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는 합병을 통해 나치 독일에 통합되었고,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인 수데텐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주었다. 히틀러의 전쟁 주요 동기에는 나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게르만 민족을 위한 추가적인 생활권을 확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두 번째 목표는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포함하여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제국이 통제하는 영토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 팔레스타인, 영국 및 다른 국가로 이주했다.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위한 구실이 필요했을 때, 히틀러와 그의 군 수뇌부는 힘러, 하이드리히, 그리고 하인리히 뮐러가 기획하고 실행한 힘러 작전이라는 코드명의 위장 작전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폴란드 군복을 입은 독일군 병사들이 국경에서 충돌을 일으켰고, 이는 독일을 공격한 폴란드의 공격으로 오인되게 했다. 이 사건들은 이후 나치 선전에 이용되어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폴란드에 대한 전쟁이 시작될 무렵, 히틀러는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포함한 폴란드 민간인 학살을 승인했다. 아인자츠그룹(SS 특별부대)은 원래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서 정부 문서와 사무실을 확보하기 위해 하이드리히에 의해 구성되었다. 히틀러의 승인을 받고 힘러와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죽음의 부대로 재편된 아인자츠그룹 부대는 독일 국방군을 따라 폴란드로 진입했고, 1939년 말까지 약 6만 5천 명의 지식인과 민간인을 학살했다. 민병대와 국방군 부대도 이러한 살인에 가담했다. RSHA를 통한 힘러의 명령에 따라, 이 부대들은 또한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을 유대인 격리구와 강제 수용소에 수용하기 위해 체포하는 임무도 맡았다.
그 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침공했고, 해상 사자 작전(영국 침공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 폭격을 시작했다. 1941년 6월 21일, 소련 침공 전날, 힘러는 동방 총 계획의 준비를 의뢰했고, 이 계획은 1942년 5월 히틀러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 계획은 발트 3국, 폴란드, 서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정복하고 천만 명의 독일 시민으로 재정착시키는 것을 요구했다. 현지 주민 약 3100만 명은 더 동쪽으로 추방되거나 굶어 죽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될 것이었다. 이 계획은 독일의 동쪽 국경을 확장했을 것이다. 힘러는 이 계획을 완료하는 데 20년에서 30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힘러는 공개적으로 "이는 존재의 문제이며, 따라서 무자비한 격렬함을 가진 인종 투쟁이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2천만 명에서 3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이 군사 행동과 식량 공급 위기로 사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힘러는 동부의 전쟁이 "무신론적인 볼셰비키 무리"로부터 구유럽의 전통적인 가치를 방어하기 위한 유럽 전체의 성전이라고 선언했다. 베르마흐트와 끊임없이 병력 확보 문제로 고심하던 힘러는 발칸 반도와 동유럽 출신의 게르만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Waffen-SS 부대를 창설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과 서유럽의 게르만 민족으로 간주되는 사람들로부터의 지원병도 매우 중요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도 Waffen-SS 부대에 병력을 제공했다. 서방 국가 중 자원병 수는 네덜란드 2만 5천 명에서 스웨덴과 스위스 각 300명까지 다양했다. 동쪽에서는 리투아니아(5만 명)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왔고, 불가리아(600명)에서 가장 적은 병력이 왔다. 1943년 이후 대부분의 동부 Waffen-SS 부대원들은 징집병이었다. 동부 Waffen-SS 부대의 성과는 전반적으로 저조했다.
1941년 말, 히틀러는 하이드리히를 새로 설립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의 부보호령으로 임명했다. 하이드리히는 체코인을 인종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로 추방했다. 증가하는 저항 세력의 구성원들은 총살당했고,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임명은 힘러와 하이드리히의 협력을 강화했고, 힘러는 SS가 국가를 통제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히틀러와 직접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리히의 힘러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했다.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힘러는 소련 침공 계획에 앞서 아인자츠그룹을 재건했다. 1941년 3월, 히틀러는 군 지휘관들에게 소련 제국을 분쇄하고 볼셰비키 지식인과 지도부를 파괴할 의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특별 지시인 "지령 제21호(바르바로사 작전)에 관한 특수 영역 지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군의 작전 지역 내에서, 국가 지도자 SS 대장은 정치 행정을 준비하기 위해 총통의 명령에 따라 특별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임무는 두 개의 상반되는 정치 체제의 다가오는 최종 투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임무의 틀 안에서 국가 지도자 SS 대장은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책임 하에 행동한다." 따라서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에서 발생했던 것과 같은 내부 마찰을 방지하려고 했다. 당시 여러 독일군 장군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 아인자츠그룹 지도자들을 기소하려고 시도했었다.
소련으로 진격하는 군대를 따라 아인자츠그룹은 유대인과 나치 국가에 의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히틀러는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받았다. 또한, 1941년에서 1942년 8개월 동안 280만 명의 소련군 포로가 기아, 학대 또는 처형으로 사망했다. 전쟁 기간 동안 최대 50만 명의 소련군 포로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거나 처형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총살당하거나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1941년 초, 힘러의 명령에 따라 수감자들이 강제 노역을 하는 10개의 강제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독일 전역과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유대인 격리구에 수용되었다. 1941년 12월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면서 소련의 예상치 못한 빠른 패배가 실현되지 않자 히틀러와 다른 나치 관리들은 동쪽으로의 대규모 추방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추방 대신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3. 1. 친위대 입대와 초기 경력
힘러는 1925년에 SS에 입대했고, 1927년에 SS제국지도자의 대리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이 임무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1927년과 1929년 사이에는 SS제국지도자 대리인 임무에 헌신했다. SS 지휘관 에어하르트 하이덴이 사임한 후, 1929년 1월에 힘러는 새로운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었다. 힘러가 SS를 이끌기 시작할 당시, 총 대원수는 고작 280명에 불과했고, 형식적으로는 상급 조직인 SA 중에서 매우 미약한 조직이었다. 힘러 자신도 SA상급지도자(SA-Oberführer)로 칭했다. 그러나 1929년 이후에는 자신을 "SS제국지도자"(Reichsführer-SSde)라고만 언급하며, 에른스트 룀과 SA를 경쟁자로 간주하여 간섭에서 독립하려는 의사를 나타냈다.[27]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세계 대공황은 독일 사회에 실업자를 양산했고, 이는 나치당과 그 산하 조직 참여 희망자를 급증시켰다. 친위대에도 입대 희망자가 급증했다.[27] 힘러는 친위대를 당내 경찰 조직으로 확장하여 1929년 12월에는 1,000명, 1930년 12월에는 2,700명, 1932년 4월에는 25,000명, 1932년 12월에는 52,000명으로 꾸준히 대원 수를 늘렸다.[27]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힘러의 SS는 대원 수가 52,000명으로 늘어났고, 모든 대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아리안 지배 인종"임을 확인하는 엄격한 자격을 요구받았다.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 혈통 증명서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아무나 대원으로 받아들이던 SA와 차별화를 꾀하며, SA집단지도자 힘러는 SS를 SA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려 노력했다. 1933년 가을, 그는 검은색 SS 제복을 도입하여 SA의 갈색 셔츠를 대체했다. 이는 SS가 더 이상 SA의 하부 조직이 아닌 동급의 독립 조직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SS는 SA의 하부 조직이었고, 힘러도 수백 명의 SA 간부 중 하나였다. 얼마 후, 힘러는 SS상급집단지도자 겸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어 SA 부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
1930년 11월 7일, 히틀러는 명령을 통해 공식적으로 친위대를 당내 경찰 조직으로 규정하고, 친위대는 돌격대의 지휘를 따를 필요가 없다고 명시했다 (단, 1934년 긴 칼의 밤까지는 형식적으로 돌격대의 하부 조직이었다).[29]
힘러는 당내 경찰 임무 수행을 위해 친위대 내 정보부 설립을 구상했고, 운영을 맡길 인재를 찾았다. 1931년 6월, 친위대 상급대좌 프리드리히 카를 폰 에버슈타인 남작의 추천으로 전 해군 장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면접하고 친위대원으로 채용했다. IC과를 설치하고, 이듬해 1932년 7월에 SD(나치)|SD]]로 개편하여 하이드리히를 장관에 임명했다.[28]

「피와 흙」이데올로기를 확립한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역사 속 위대한 제국이나 문화는 대부분 북방인종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들이 멸망한 것은 북방인종의 순혈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힘러는 1929년 4월, 친위대 조직 규정 초안을 히틀러와 당시 돌격대 최고 지도자였던 프란츠 폰 잘로몬에게 제출하고, 인종 문제를 친위대 입대 조건에 포함시켰다.[30] 1931년 12월 31일, 힘러는 「SS는 특별히 선발된 독일적 북방 인종의 집단이다」라고 정의하고, 다레를 장관으로 하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 본부(RuSHA)를 신설하여 친위대원들에게 RuSHA의 조사와 허가 없이는 결혼을 금지했다.[31] 힘러는 "키 5피트 8인치(약 173센티미터) 이상이면 내가 바라는 혈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32년 1월 25일, 힘러는 당 본부 건물인 갈색 저택 경비를 맡고, 「공산주의자와 경찰의 방해로부터 당 활동을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32년 7월 7일, 친위대의 독자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친위대 제복을 개정했다. 이때 유명한 친위대의 「검은 제복」이 정해졌다.[27] 검은 제복의 디자인 모델은 프로이센 왕국 시대의 것이다.[32]
3. 2. SS의 확장과 권력 강화
1929년 10월 24일 뉴욕의 월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실업자가 쇄도하면서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과 그 준군사조직인 친위대(SS)에 입대 희망자가 급증했다.[27] 히믈러는 당내 경찰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친위대 내에 정보부를 설립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책임자로 임명했다.[28] 1931년 4월 초 발터 슈텐네스의 재반란 진압에 쿠르트 달뤼게가 활약하면서 친위대는 히틀러에게 높이 평가받았고, 당내 경찰로서 돌격대로부터의 독립성을 강화했다.[29]히믈러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 본부(RuSHA)를 신설하여 친위대원들에게 RuSHA의 조사와 허가 없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31] 그는 "게르만 인종을 순수 배양할 것이다"라고 연설하며, 친위대를 엘리트 집단으로 만들고자 했다.[30] 1932년 7월 7일, 친위대의 독자성을 강화하기 위해 친위대의 제복을 검은색으로 개정했다.[27] 이 검은 제복은 프로이센 왕국 시대의 제복을 모델로 한 것이다.[32]
1933년 나치스의 정권 장악 이후, 히믈러는 뮌헨 경찰청장을 거쳐[34] 1933년 4월 1일에는 바이에른 주 정치경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33] 그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설치하고, 정치적 적대자들을 ""시켰다. 1934년 1월까지 프로이센 주와 샤움부르크-리페 자유주를 제외한 각 주의 정치 경찰은 히믈러에게 맡겨졌다.

헤르만 괴링은 히믈러에게 게슈타포 지휘권을 넘겼고, 히믈러는 루돌프 딜스를 해임하고[35]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후임 게슈타포 국장으로 임명했다.
3. 3. 돌격대(SA)와의 갈등과 긴 칼의 밤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힘러의 SS는 대원 수가 52,000명으로 늘어났다. SS는 모든 대원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아리안 지배 인종"임을 확인하는 엄격한 자격을 요구했다.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 혈통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러한 차별화를 통해 SA집단지도자였던 힘러는 SS를 SA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1933년 가을, 힘러는 검은색 SS 제복을 도입하여 SA의 갈색 셔츠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는 SS가 더 이상 SA의 하부 조직이 아니라 동급의 독립 조직임을 상징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여전히 SS는 공식적으로 SA의 하부 조직이었고, 힘러는 수백 명의 SA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얼마 후, 힘러는 SS상급집단지도자 겸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어 SA 부사령관과 동격으로 올라섰다.[27]1931년 에른스트 룀이 돌격대의 지휘권을 인수하면서 힘러는 형식적으로 룀의 부하가 되었다. 양적 팽창을 우선시한 룀과 달리, 힘러는 질적 팽창을 통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기에 둘의 대립은 점점 심해졌다. 이는 힘러가 경찰 기관을 장악하려는 동기가 되었다. 힘러는 SS를 경찰 간부에 임명하여 국가 기관인 경찰을 자신의 개인 기관으로 만들고자 했다. 1933년 3월, 뮌헨 경시총감에 취임한 힘러는 한 달 후 바이에른 주의 전 경찰을 장악했고, 이어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뤼벡, 튀링겐, 헤센,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경찰을 장악했다. 1934년 초에는 브레멘, 올덴부르크, 작센의 경찰을 장악하며 세력을 넓혔다. 남은 것은 프로이센뿐이었는데, 이곳은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있던 곳이었다.
힘러와 헤르만 괴링은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SA와 돌격대가 독일군 및 독일에서 나치 지배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는 점에 동의했다. 힘러는 SA로부터 확실하게 독립하고 싶어했다. 룀은 강한 사회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아직 "진짜" 혁명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들은 룀이 SA를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했다. 두 사람은 룀을 제거하기로 합의했고, 괴링은 힘러의 게슈타포 이관 요구를 수용했다. 히틀러가 힘러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괴링 자신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관련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입지가 약화되었고, 경찰보다는 독일 공군 창설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룀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동의 적이었다. 1934년 4월 20일, 괴링은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프로이센 경찰을 넘겨주었다.
힘러와 괴링의 설득으로 히틀러는 룀의 쿠데타 가능성을 우려하여 룀을 제거하는 데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게슈타포는 룀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동태를 보고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S보안방첩부는 증거를 조작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룀 처형을 힘러와 괴링에게 맡겼고,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다루게, 발터 쉐렌베르크에게 1934년 6월 30일 "긴 장검의 밤"으로 알려진 룀과 다른 주요 SA 간부들의 처형을 지시했다. 사건 다음 날, 힘러의 SS제국지도자 직함은 SS의 정식 계급이 되었고, 한 달 후인 7월 30일에 SS는 SA에서 분리되어 나치당 내의 독립 조직이 되었다.[36][37][38]
4. 독일 경찰 장악과 권력 강화
1929년 SS제국지도자에 임명된 힘러는 나치당 내에서 SS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7년과 1929년 사이에는 SS제국지도자 대리인 임무에 헌신했다. SS 지휘관 에어하르트 하이덴이 사임한 후, 1929년 1월에 새로운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었다. 힘러가 SS를 이끌기 시작할 당시 총 대원수는 280명에 불과했고, 상급 조직인 돌격대(SA) 내에서 미약한 조직이었다. 힘러 자신도 SA상급지도자(SA-Oberführer)로 불렸으나, 1929년 이후에는 "SS제국지도자"(Reichsführer-SSde)라고만 칭하며 에른스트 룀과 SA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1933년 나치당 집권 이후 SS 대원 수를 52,000명으로 늘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아리안 지배 인종" 개념에 따라 엄격한 자격 요건을 요구했다.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 혈통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힘러는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SA)와 경쟁 관계에 있었고, SA의 양적 팽창과 달리 질적 팽창을 통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다. 1933년 가을에는 검은색 SS 제복을 도입하여 SA의 갈색 셔츠와 차별화했다. 이는 SS가 SA의 하부 조직이 아닌 독립 조직임을 상징했다. 얼마 후, 힘러는 SS상급집단지도자 겸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어 SA 부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
힘러는 에른스트 룀과의 대립이 심화되자 경찰 기관 장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1933년 3월 뮌헨 경시총감에 취임한 후, 바이에른 주 경찰을 장악하고,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뤼벡, 튀링겐, 헤센, 바덴, 뷔르템베르크, 브레멘, 올덴부르크, 작센 등 독일 각지의 경찰을 차례로 장악했다.
힘러는 헤르만 괴링과 협력하여 에른스트 룀과 SA를 제거하고자 했다. 1934년 4월 20일, 괴링은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프로이센 경찰을 넘겨주었다. 이후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등과 함께 1934년 6월 30일 긴 장검의 밤을 일으켜 룀과 SA 간부들을 처형했다. 다음 날, SS제국지도자 직함은 SS의 계급이 되었고, 7월 30일 SS는 SA로부터 분리되어 나치당 내 독립 조직이 되었다.
4. 1. 게슈타포 장악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힘러의 SS는 대원 수가 52,000명으로 늘어났다. 모든 대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아리안 지배 인종"임을 확인하는 엄격한 자격을 요구받았다.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 혈통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4] 이렇게 SS는 아무나 대원으로 받아들이던 SA와 차별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SA집단지도자였던 힘러는 SS를 SA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1933년 가을에 검은색 SS 제복을 도입하여 SA의 갈색 셔츠와 차별화했다. 이는 SS가 더 이상 SA의 하부 조직이 아닌 동급의 독립 조직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얼마 후, 힘러는 SS상급집단지도자 겸 SS제국지도자로 임명되어 SA 부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1931년 에른스트 룀이 돌격대의 지휘권을 인수하면서 힘러는 형식적으로는 룀의 부하가 되었다. 양적 팽창을 우선시한 룀에 비해 철저히 질적 팽창을 통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던 힘러는 룀과 점점 대립이 심해졌고, 이것은 힘러가 경찰 기관을 장악하려는 동기가 되었다. 힘러는 SS를 경찰 간부에 임명하여 국가 기관인 경찰을 자신의 개인 기관화하고자 했다. 1933년 3월, 뮌헨 경시총감에 취임한 힘러는 한 달 후에는 바이에른 주의 전 경찰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어 차례로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뤼벡, 튀링겐, 헤센,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경찰을 장악했다. 1934년 초에는 브레멘, 올덴부르크, 작센의 경찰을 장악했다. 남은 것은 헤르만 괴링이 내무장관으로 있던 프로이센뿐이었다.
힘러와 헤르만 괴링은 SA와 돌격대 사령관 에른스트 룀이 독일군 및 독일에서 나치 지배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에 서로 동의했다. 힘러는 돌격대로부터 확실하게 독립하고 싶어했다. 룀은 강한 사회주의 관점을 갖고 있었고,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긴 했지만 아직 "진짜" 혁명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들은 룀이 SA를 이용하여 쿠데타를 의도하고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룀을 제거하기로 합의했고, 게슈타포를 넘기라는 힘러의 요구를 괴링이 받아들였다. 히틀러가 힘러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괴링 자신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관련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경찰보다 독일 공군 창설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룀은 두 사람의 공동의 적이었다. 1934년 4월 20일, 괴링은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프로이센 경찰을 넘겨주었다.
힘러와 괴링의 설득으로 히틀러는 룀이 쿠데타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룀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게슈타포는 룀을 끊임없이 감시하여 동태를 보고했으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SS보안방첩부는 증거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히틀러는 룀 처형을 힘러와 괴링에게 맡겼고,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다루게, 발터 쉐렌베르크에게 "긴 장검의 밤"으로 알려질 1934년 6월 30일에 룀과 다른 주요 SA 간부들의 처형을 지시했다. 사건 다음날 힘러의 SS제국지도자 직함은 SS의 계급이 되었고, 한달 후인 7월 30일에 SS는 SA와 분리되어 나치당 내의 독립 조직이 되었다.
1936년, 힘러는 모든 정복 경찰을 새로운 질서경찰(Ordnungspolizei)로 통합하면서 더 많은 권한을 획득했다. 주요 간부는 힘러가 독일 경찰 수장의 직책을 수여받으면서 SS에서 차출되었다. 그렇지만 힘러는 정복 경찰 전체에 대하여 운영 통제권을 가질 수는 없었다. 전체 경찰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내무장관에 있었고, 힘러가 가진 실제 권한은 내무장관에게 사전에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1943년에 가서야 힘러가 내무장관에 임명되면서 모든 행정 권한을 완전히 인수받았다. 독일의 정치 경찰에 대한 권력은 1934년에 힘러가 장악했고, 강제수용소뿐만 아니라 괴링으로부터 게슈타포도 인수받았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대중들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일자, 그런 비판을 잠재워야 할 게슈타포의 능력에 실망하기 시작한 당 기관들은 소위 " Politische Staffeln"이라 불린 정치 사찰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들은 실무 분야에서 명목상으로는 유일하게 게슈타포만 가졌어야 할 권한을 침해했다. 1936년 협정으로 힘러는 형사경찰(Kriminalpolizeide, KIRPO)로 알려진 비정치적 문제를 담당하는 경찰 장관이 되었고, 그는 이 권한을 이용하여 KRIPO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지휘하는 보안경찰(Sicherheitspolizeide, SIPO)과 합쳐서 독일 전체의 경찰권을 획득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통합은 실질적으로는 사문화되어 KRIPO는 여전히 민간인 분야를 담당하는 별개 조직으로 남아 있었고, 나중에 당 조직들이 세운 민간 행정 기구들에 병합되었다. 그렇지만, 제국 본토로 병합되지 않은 점령지에서는 KRIPO까지 통합된 조직이 대개 효과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더불어, 힘러는 제국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de, RSHA)를 조직했다. 이 조직에는 게슈타포, KRIPO와 SS보안방첩부가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각 관할 지역에서 KRIPO에 대해 RSHA에 지역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하여 전 KRIPO를 통제하고자 새로운 RSHA 체계를 사용하려던 1940년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4. 2. 전 독일 경찰 총감 임명
1936년 6월 17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힘러를 '''전 독일 경찰 총감'''(Chef der Deutschen Polizei)에 임명했다.[40][41][42] 이로써 힘러는 독일 내 모든 경찰력을 장악하게 되었다.힘러는 경찰 조직을 통합·재편성하여 일반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질서경찰을 발족시키고, 친위대 대장 쿠르트 달뤼게를 장관으로 임명했다.[43] 한편 정치경찰인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은 보안경찰로 통합하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장관으로 임명했다.[43]

1937년 11월 13일에는 "친위대 및 경찰 고위 지도자"(Höherer SS und Polizeiführer, 약칭 HSSPF) 직책을 신설하여 독일 각 지역에 배치했다. 이 직책은 힘러의 친위대 전국 지도자와 전 독일 경찰 총감 지위를 해당 지역에서 대행하는 자였다.[44]
1939년 9월 27일에는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있던 SD와 보안경찰을 통합하여 국가안전본부(RSHA)를 친위대 내에 설치했다.
이러한 경찰 권력 장악 과정에서, 친위대는 국내외 다양한 정치 사건에 개입했다.
- 독일 육군 원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과 육군 상급대장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 총사령관을 스캔들로 실각
- 소련 육군 원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적군 수뇌부의 숙청을 모의
-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 암살에 관여했고, 오스트리아 나치의 쿠데타 계획을 지원했으나 실패
4. 3. 제국보안본부(RSHA) 설립
1936년 6월 17일자 총통령 명령에 따라, 힘러는 '''전 독일 경찰 총감'''(Chef der Deutschen Polizei)에 임명되었다.[40][41][42] 이를 계기로 경찰 조직을 통합·재편성하여 일반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질서경찰을 발족시키고, 친위대 대장을 장관으로 임명했다.[43] 한편 정치경찰인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은 보안경찰로 통합하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장관으로 임명했다.[43]1939년 9월 27일에는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있던 SD와 보안경찰을 통합하여 국가안전본부(RSHA)를 친위대 내에 설치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1929년,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준군사조직인 친위대(SS) 제3대 친위대 전국 지도자(RFSS)에 취임하여 당내 경찰 업무를 담당했다. 나치스 정권 장악 후 1934년 프로이센 자유주 비밀 국가 경찰 게슈타포[4] 부장관, 1936년에는 친위대 전국 지도자 겸 전 독일 경찰 총감에 임명되어 국내 경찰 기구를 장악했다. 정권 말기인 1943년 히틀러 내각내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사회 다윈주의와 아리아인 학설의 영향을 받은 나치 인종 이데올로기는 아리아 인종, 특히 북구 인종을 우월하게 여겼고, 유대인[5], 로마[6], 슬라브인[7]은 열등하다고 보았다. 히믈러 역시 이러한 인종관을 공유하며 수정의 밤 사건 이후 유대인 국외 추방에 관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히믈러의 권력은 독일 점령지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친위대 특별 행동대는 폴란드 지식인 소탕 작전을 전개했고, 친위대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총독부 영으로 추방했다.
1939년 8월, 히틀러는 히믈러에게 폴란드 침공 구실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1939년 8월 31일, SD는 글라이비츠 사건을 조작, 독일-폴란드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다.
1942년 6월 4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후, 히믈러는 국가안전본부장관직을 잠시 겸임하다 1943년 1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1943년 8월 20일, 히믈러는 빌헬름 프리크를 대신하여 내무장관에 취임, 독일 경찰의 지배자가 되었다.
5. 1. 무장친위대(Waffen-SS) 창설과 확장
힘러는 SS를 정규군 수준의 군사 조직으로 키우고자 했다. 히틀러는 국방군과 SS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하며 SS가 무장 전투 부대를 편성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사단 편성은 허가하지 않고 병력 수도 국방군의 10%로 제한했다. 그러나 무장친위대는 독소전쟁 직전에 사단 편제가 이루어졌고, 1942년부터는 군단 편성도 허용되는 등 확장을 거듭했다.1933년 3월 17일, 힘러는 히틀러 경호를 위한 "SS사령부 경비대 베를린"(SS-Stabswache Berlin)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라이프슈탄달테 SS 아돌프 히틀러” (LAH, LSSAH)로 개칭되었고, 무장친위대(Waffen-SS)의 최정예 사단이 되었다.[50][51] 그러나 이 부대의 지휘관인 요제프 디트리히는 부대를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지는, 힘러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만들려고 했고, 이로 인해 힘러와 디트리히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이에 자극받은 힘러는 SS의 군대를 원했고, "정치 예비대"(Politische Bereitschaft)를 창설하여 여러 친위대 상급 지역에 배치했다.[52][53] 긴 칼의 밤 사건 이후, 친위대는 국군의 군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히틀러는 친위대 내에 군대를 두는 것을 모색했다.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친위대가 3개 연대의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승인했고, 히틀러는 1934년 9월 24일 무장 친위대 부대를 3개 연대와 1개 통신대로 두는 것을 통달했다. 이에 따라 친위대 특무부대가 설치되었다.[54]
1934년 10월, 바이에른주 Bad Tölz|바트 퇼츠de에 친위대 사관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듬해 브라운슈바이크에도 설립되었다.[55] 파울 하우저는 특무부대의 군사 훈련에 큰 역할을 했다. 1936년 10월 1일, 힘러는 파울 하우저를 장으로 하는 친위대 특무부대 총감부를 창설했다.[55]

1939년 5월, 히틀러는 친위대 특무부대의 사단 편성을 허가했지만, 포병연대 설립은 폴란드 침공까지 완료되지 못했다. 폴란드 전쟁 후, 히틀러는 다시 사단 승격을 인정했고, 1940년 4월 22일 친위대 특무부대는 무장친위대(Waffen-SS)로 개칭되었다. 무장친위대는 급속히 확장되어 38개 사단 9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무장친위대의 병력 모집은 친위대 대장고틀롭 베르거가 주도했다. 베르거는 히틀러 유겐트와 독일계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모집했고, 이후 비독일계 외국인도 받아들였다. 소련과의 전투를 "반공십자군"에 비유하여 무장 SS에 유인했다. 무장친위대에는 인도인 부대와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 중심의 사단(제13SS무장산악사단)도 존재했다.

5. 2. 유대인 학살과 홀로코스트
1941년 이후, SS해골단(SS-Totenkopfverbande)은 점령지 폴란드에서 절멸 수용소 관리를 위임받았다. SS는 자체 정보기관인 SS보안방첩부(Sicherheitsdienst, SD)를 통해 유대인 등을 독단으로 체포, 구금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33년 3월 22일 다하우 근처에 최초의 수용소인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만든 히믈러는, 홀로코스트의 주 설계자 중 한 사람이다.[4] 그는 신비주의적 요소와 수백만 대량 학살과 집단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인종주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관한 광신적인 믿음을 이용했다.1943년 10월 4일, 히믈러는 폴란드의 도시인 포즈난에서 친위대원들과의 비밀 회합 중 유대인들의 절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연설했다.
개전 전부터 전쟁 초기까지 히믈러 이하 친위대는 유대인의 해외 추방을 실시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7일 히믈러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 (Reichskommissar für die Festigung des deutschen Volkstums) 에 임명되었다.[5] 그는 이 권한을 바탕으로 친위대 본부의 하나로서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 위원 본부”(RKFDV)를 설치하고, 친위대 대장 울리히 그라이페르트를 본부장에 임명하여 아리아인의 지배 민족 사상에 근거, 유럽 유대인의 동방으로의 식민·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후, 국가 안전 본부는 점령하 폴란드와 소련 점령 지역에 아인자츠그루펜(특별 행동 부대)을 파견하여 유대인을 포함한 반체제 폴란드 주민을 총살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친위대가 유대인의 절멸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다. 히믈러도 1940년 5월에 “유대인 근절의 볼셰비키적 방법은 신념으로서 비게르만적이며,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6] 유대인 절멸 정책(홀로코스트)의 결정은 히믈러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결의한 것은 1941년 여름이었다고 한다.[7] 하지만,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실제로 홀로코스트를 계획한 것은 히믈러와 친위대였다.
1941년 8월, 히믈러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소장 루돌프 페르디난트 헤스를 베를린에 불러들여,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절멸시킬 것을 고하고, 아우슈비츠를 절멸 수용소로 개축할 것을 명령했다. 헤스는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을 설치했다.[8] 더욱이, 폴란드에 유대인의 살해만을 목적으로 한 벨제크 강제 수용소, 소비보르 강제 수용소,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의 3대 절멸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유대인은 유럽 각지에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폴란드 동부의 절멸 수용소에 모아져, 가스실 등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공식적으로 유대인 절멸이 국가 정책으로 정해진 것은, 1942년 1월 20일, 국가 안전 본부장관 하이드리히가 베를린의 반제 호반에서 관계 부처의 차관급을 모아서 실시한 반제 회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히믈러나 친위대는 무차별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친위대 경제 관리 본부장관이며, 강제 수용소 운영의 책임자인 오스발트 폴은, 강제 수용소로 이송한 유대인의 군수 산업에 대한 노예 노동력으로서의 사용을 목표하고 있었다. 노동할 수 있는 자는 절멸 정책의 사실상의 대상 외로서, 가혹한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총력전 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강제 수용소의 노예 노동력은 나치에게 있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히믈러는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 사망률을 낮추는 것을 일관해서 명령했고, 친위대 경제 관리 본부도 그에 노력하고 있었다.[9]
한편 “노동 불능” 유대인은, 나치에게 있어 전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나빴던 독일의 식량 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골칫거리였다. 그 때문에 즉시 절멸 대상으로 되었다. 전시 중에 실시된 유대인 절멸 정책이란 기본적으로 “노동 불능”이라고 인정된 유대인의 절멸 정책이었다.[10] 히믈러와 폴의 명령을 받고,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에서도 “노동 불능자”(=가스실 보내기)와 강제 노동시키는 자의 선별이 실시되고 있었다.
히믈러는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 명령에 대해, 통상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명령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11],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완수할 작정이었다. 따라서, 노동에 종사시키는 자도 언젠가는 살해할 작정이었다. 1942년 가을, 히믈러가 법무 장관 오토 게오르크 틸락과의 회담에서 “노동을 매개한 절멸”이라는 말을 한 것은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12]
히믈러는 부하들이 자행하는 잔혹한 처형을 시찰할 때 불쾌감을 느꼈다는 증언이 여러 건 있다.
- 1941년 8월, 히믈러는 민스크에서 아르투르 뇌베(친위대 중장)가 지휘하는 아인자츠그루펜 B대의 총살을 시찰하고, 그에게 100명을 자신의 눈앞에서 총살하도록 명령했지만, 여성도 다수 섞여 있었고, 그것을 본 그는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13]
- 강제수용소 시찰 중 히믈러는 유대인의 가스실 처형 모습을 엿보기 구멍으로 보았지만, 그는 불쾌감을 느껴 가스실 뒤편으로 가서 구토했다고 한다.[14]
5. 3. 전쟁 중의 역할과 몰락
1941년 소련 침공에 앞서, 힘러는 SS에게 유대-볼쉐비즘 세력에 맞서는 절멸전쟁을 준비시켰다. 힘러는 나치 독일과 중세 시대를 동일시하며 소련 침공을 십자군 전쟁에 비유했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볼세비키 야만인"으로부터 유럽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범유럽 십자군을 표방하며 비독일계 지원병들을 모았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에스파냐와 침공 후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유럽 각지에서 지원병을 모집했다.[44]1942년 힘러의 오른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체코 특수요원에게 암살당한 후, 힘러는 보복으로 리디체 마을의 성인 남성 전체를 학살하라고 명령했다.[45]
1943년 힘러는 독일 내무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권력 강화 시도는 마르틴 보르만에 의해 좌절되었다. 또한, 힘러는 무장친위대 병력 충원을 위해 경찰관들을 무장친위대로 전속시키는 편법을 사용해 육군 및 무장친위대와 갈등을 빚었다.[46]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국방군 첩보부(Abwehr)를 해체하고 SD를 제3제국의 유일한 첩보기관으로 만들어 힘러의 권력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보충군(Ersatzheer)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을 해임하고 힘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음모 사건 수사 과정에서 SS 장교들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힘러는 보르만에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47]
1944년 말, 힘러는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1945년 초 붉은군대의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저지에 실패하여 고트하르트 하인리히로 교체되었다.[48]
1945년 봄, 힘러는 독일의 패배를 예상하고 영국 및 미국과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스텐과 발터 쉘렌베르크를 통해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 접촉했다. 힘러는 서방 연합국에 항복하고 소련과 맞서 싸우는 구상을 했으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49]
한편, 히믈러의 비밀 협상을 알게 된 히틀러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했다.[50] 히틀러 사후, 힘러는 카를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잠시 참여했으나 곧 해임되었다.[51]
힘러는 망명자 신분으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자신을 고발 대상에서 제외해줄 것을 요구하며 독일의 항복을 제의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를 거부하고 힘러를 주요 전쟁범죄자로 규정했다.[52]

1945년 3월, 히믈러는 독자적인 평화 협상을 고려했다.[53] 펠릭스 케르스텐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의 협상에서 중개 역할을 했다.[54] 같은 해 3월, 히믈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의 남동 방어선(''Südostwall'') 축성 공사 현장에서 유대인들을 마우트하우젠으로 이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잠재적인 평화 협상을 위한 인질을 원했다.[55]
히믈러와 히틀러는 1945년 4월 20일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만났고, 히믈러는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4월 21일, 히믈러는 노르베르트 마주르를 만나 유대인 강제 수용소 수감자 석방에 대해 논의했다.[56] 이 협상의 결과, 흰 버스 작전을 통해 약 2만 명이 석방되었다.[57]
4월 23일, 히믈러는 뤼베크의 스웨덴 영사관에서 베르나도테와 직접 만났다. 그는 자신을 독일의 임시 지도자라고 주장하며 히틀러가 앞으로 며칠 안에 사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이 남아있는 베어마흐트와 함께 소련과 싸울 것이라고 기대하며, 히믈러는 베르나도테에게 독일이 소련이 아닌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나도테는 히믈러에게 제안서를 문서로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고, 히믈러는 그렇게 했다.[58]
4월 28일 저녁, BBC는 히믈러의 서방 연합군과의 협상 시도에 대한 로이터 뉴스 보도를 방송했다. 히틀러는 이 배신에 격분하여 벙커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히믈러의 비밀 협상이 그가 알고 있는 최악의 배신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히믈러의 체포를 명령했고, 헤르만 페겔라인은 군사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59]
히틀러는 유언에서 히믈러와 괴링을 모두 반역자로 선언하고, 히믈러의 모든 당과 국가 직책을 박탈하고 나치당에서 추방했다.[60] 히틀러는 카를 되니츠 대제독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힘러는 플렌스부르크에서 되니츠를 만나 부사령관직을 제안했다. 그는 SS가 전쟁 후 질서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이 되니츠의 임시 정부에서 ''라이히스퓌러-SS''로서 직책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되니츠는 히믈러의 구애를 거듭 거절했고[61] 독일 항복 문서 이틀 전인 5월 6일에 편지를 작성하여 히믈러를 모든 직책에서 공식적으로 해임했다.[62]
6. 체포와 죽음
힘러는 옛 동료들에게 버림받고 연합군에게 추격당하면서 잠적을 시도했다. 그는 하인리히 히칭거라는 이름으로 위조된 급여 명세서를 소지하고, 1945년 5월 11일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1] 그들은 노이하우스까지 이동한 후 해산했다. 5월 21일, 힘러와 두 명의 보좌관은 브렘레르뵈르데의 검문소에서 전 소련 포로 출신 병사들에게 억류되었다.[1] 이후 며칠 동안 여러 수용소를 거쳐 5월 23일 뤼네부르크 근처의 영국 민간 심문소로 이송되었다.[1]
영국군 당국자들은 힘러의 신분증에서 영국 군사 정보부가 도주하는 SS 대원들이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도장을 발견하고 의심했다.[2] 근무 중이던 토마스 셀베스터 대위는 일상적인 심문을 시작했고, 힘러는 자신의 신분을 인정했다. 셀베스터는 힘러를 수색한 후 뤼네부르크에 있는 영국 제2군 본부로 이송했다.[3]
영국 제2군 본부에서 의사가 힘러를 진찰했다. 의사가 힘러의 입 안을 검사하려 하자, 힘러는 입을 벌리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숨겨둔 시안화칼륨 알약을 깨물고 바닥에 쓰러졌다.[3] 독을 제거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15분 만에 사망했다.[3][4]
얼마 후 힘러의 시신은 뤼네부르크 근처의 무덤 없는 묘지(unmarked grave)에 매장되었으며, 묘소의 위치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5]
7. 유산과 평가
히믈러는 어린 시절부터 신비주의와 오컬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러한 관심을 자신의 인종주의적 철학과 결합하여 고대부터 아리아인과 북유럽 인종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했다.[1] 그는 SS를 튜턴 기사단과 같은 "명령"으로 여기고 1939년 비엔나 튜턴 기사단 교회를 SS가 장악하게 했다.[1] 그는 인도주의를 거부하고 기독교적 결혼 개념에 도전하는 새로운 도덕 규범으로 기독교를 대체하는 과정을 시작했다.[1] 1935년 히믈러가 설립한 연구 단체인 아넨에르베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고대 기원을 증명하기 위해 전 세계를 뒤졌다.[2][3]
나치 독일, 특히 SS의 모든 휘장과 제복은 디자인에 상징주의를 사용했다. SS의 양식화된 번개 모양 로고는 1932년에 선택되었다. 이 로고는 1906년 구이도 폰 리스트가 만든 18개의 아르마넨 룬 중 두 개의 룬이다. 고대 소윌로 룬은 원래 태양을 상징했지만, 리스트의 상징 체계에서는 "지그"(승리)로 이름이 바뀌었다.[4] 히믈러는 SS의 엘리트주의와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여러 관습을 수정했다. 세례식 대신 SS 명명식을, 결혼식을 변경하고, 기독교 의식 외에 별도의 SS 장례식을 거행하고, SS 중심의 하지와 동지 축하 행사를 제정했다.[5][6] 수백 년 동안 독일 군부대가 사용해 온 "토텐코프"(해골) 기호는 율리우스 슈렉에 의해 SS를 위해 선택되었다.[7] 히믈러는 해골 반지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는데, 이 반지는 결코 팔리지 않고 소유자 사망 시 그에게 반환되어야 했다. 그는 해골 기호를 대의에 대한 연대와 죽음에 이르는 헌신으로 해석했다.[8]
피터 롱게리히(Peter Longerich)는 히믈러가 SS의 후원 아래 점점 더 증가하는 권력과 책임을 일관된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능력 덕분에 제3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고 지적한다.[9] 역사가 볼프강 자우어(Wolfgang Sauer)는 "그가 꼼꼼하고 독단적이며 지루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믈러는 히틀러 휘하에서 실질적인 권력으로 두 번째 자리에 올랐다. 그의 강점은 남다른 기민함, 타는 듯한 야망, 그리고 히틀러에 대한 비굴한 충성심의 결합에 있었다."라고 말한다.[10] 2008년, 독일 뉴스 매거진 슈피겔(Der Spiegel)은 히믈러를 역사상 가장 잔혹한 대량 학살자 중 한 명이자 홀로코스트의 설계자로 묘사했다.[11]
역사가 존 톨랜드는 하이드리히의 부하였던 군터 시럽(Günter Syrup)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이드리히는 히믈러의 사진을 보여주며 "윗부분은 선생님이지만, 아랫부분은 사디스트입니다."라고 말했다.[12] 역사가 에이드리언 윌(Adrian Weale)은 히믈러와 SS가 질문이나 윤리적 고려 없이 히틀러의 정책을 따랐다고 논평한다. 히믈러는 히틀러와 나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고 SS를 새로운 독일인들의 기사도적인 튜턴 기사단으로 여겼다. 히믈러는 명령이 광범위한 지침으로 주어지고 권한이 적절한 수준으로 위임되어 시기적절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Auftragstaktikde("임무 지휘") 교리를 채택했다. 윌은 SS 이데올로기가 그들에게 교리적 틀을 제공했고, 임무 지휘 전술은 하급 장교들에게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자체적으로 행동할 여지를 주었다고 말한다.[13]
독일 외 국가에서도 독재자의 개인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정치경찰을 일임받은 정치가는 적지 않았으며, 이러한 인물은 종종 "히믈러"로 묘사되곤 한다. 예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라브렌티 베리아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캉 생 등은 "안경 쓴 작은 남자"라는 특징까지 히믈러와 매우 닮았다. 요시프 스탈린은 얄타 회담 자리에서 미영 수뇌부에 베리아를 "우리의 히믈러입니다"라고 농담 반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영화 『히틀러 최후의 12일』에서는 울리히 뇌텐이 연기하고 있다. 초췌해진 히틀러를 암암리에 비난하며 부관에게 "이제 와서 금욕적인 채식주의자에게 기대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라고 혹평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로는 그 자신도 채식주의자였다. 실제 출연은 영화 초반부에 불과하며, 뇌텐도 짧은 촬영과 대사 소화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언급했지만, 그 이후 장면에서도 독극물 캡슐이나 부관 페이게라인의 처형 등 총통 지하벙커의 붕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뇌텐은 후년에 나치에 대해 취재한 또 다른 영화 『나의 제자 히틀러』에서도 히믈러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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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보관소
独国外務大臣男爵「フォン、ノイラート」外三十三名叙勲ノ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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