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비시오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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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야비시오사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1710년 12월 10일에 벌어진 전투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오스트리아를 지지하는 동맹군 간의 격전이었다. 마드리드를 점령한 동맹군은 퇴각 중 브리우에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비야비시오사 평원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맞붙었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결과적으로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카를 6세가 신성 로마 황제가 되면서 스페인을 떠나, 펠리페 5세의 승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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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비시오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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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비야비시오사 전투 |
![]() | |
일부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 |
날짜 | 1710년 12월 11일 |
장소 | 스페인, 과달라하라 주, 비야비시오사 데 타후냐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페인 부르봉 왕조 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네덜란드 공화국 포르투갈 왕국 (1707)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펠리페 5세 방돔 공작 아길라르 백작 발데카냐스 후작 |
교전국 2 지휘관 | 구이도 슈타렘베르크 안토니 데 비야로엘 아탈라이아 백작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20,000명 |
교전국 2 병력 | 14,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사상자 | 2,000 ~ 3,000명 사망 또는 부상 |
교전국 2 사상자 | 5,000 ~ 6,000명 사망 또는 부상, 3,000명 포로 |
2. 전투 이전 상황
171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펠리페 5세와 카를 대공 간의 치열한 왕위 다툼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7월 27일 알메나라 전투와 8월 20일 사라고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카를 대공을 지지하는 동맹군은 마드리드를 재점령했고, 카를은 9월 21일에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러나 동맹군은 병력이 2만 3천 명으로, 알메나라와 사라고사 양쪽 전투, 그리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민병대와의 소규모 교전으로 인해 병력이 감소하여 마드리드 점령 유지가 어려웠다.
펠리페 5세의 할아버지 루이 14세는 방돔 공작을 보내 무너진 스페인 군대를 재건하도록 했다.
12월 10일 아침,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빌라비시오사 평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슈타렘베르크의 군대는 1만 4천 명이었지만, 방돔 공작이 이끄는 군대는 2만 명이었다(펠리페 5세의 군대 등 그날 아침 방돔 공작과 합류한 군대 포함). 방돔 공작은 당시 일반적인 진형인 2열 종대를 펼쳤다.
2. 1. 마드리드 점령과 동맹군의 퇴각
알메나라 전투와 사라고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카를 대공을 지지하는 동맹군은 마드리드를 점령했고, 카를은 9월 21일에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러나 1710년의 마드리드 점령은 1706년의 상황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23,000명의 동맹군은 알메나라와 사라고사에서의 전투, 그리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민병대와의 소규모 교전으로 인해 병력이 감소하여 점령 유지가 어려웠다.[1]마드리드에서 동맹군의 입지가 위험해지자, 11월 9일 마드리드를 떠나 카탈루냐로 퇴각을 시작했다. 발데카냐스 후작이 이끄는 스페인 기병대가 이들을 추격했다.[1] 카를 대공은 2,000명의 기병대와 함께 본군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급히 이동했고, 나머지 군대는 둘로 나뉘어 행군했다. 귀도 폰 슈타렘베르크 장군이 이끄는 12,000명의 주력 부대는 스탠호프 경 휘하의 5,000명의 영국군보다 하루 앞서 행군했다. 영국군은 기습을 받아 1710년 12월 9일 브리우에가 전투에서 패배했고, 영국군은 포로로 잡혔다(결국 항복한 스탠호프 포함).
슈타렘베르크 장군은 영국군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탠호프의 군대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지만, 영국군이 이미 항복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1]
2. 2. 동맹군의 분할과 브리우에가 전투
펠리페 5세의 할아버지 루이 14세가 그에게 빌려준 방돔 공작은 스페인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동맹군은 카탈루냐로 퇴각하면서 구이도 슈타렘베르크가 이끄는 주력 부대와 스태너프 경이 지휘하는 5,000명의 영국군 부대로 분할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스페인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현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방돔 공작이라는 데서 재난을 불러왔다.[1]방돔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이 기회를 틈타 영국군을 기습 공격하여 브리우에가 근처에서 패배시켰다. 영국군 전군은 그들의 용맹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1]
3. 전투의 전개
슈타렘베르크는 스태너프 경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했으나, 이미 영국군이 항복한 후였다. 1710년 12월 10일, 비야비시오사 평원에서 양측 군대가 대치했다.
전투는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양측은 모두 23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3개의 포열에 배치되어 동시에 포격을 시작하여 서로에게 피해를 입혔다.[9][6]
발데카냐스 후작(펠리페 5세와 함께 참전)이 이끄는 스페인군 우익 기병대는 폰 프랑켄베르크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 좌익(독일 보병, 포르투갈과 스페인 기병대)에 공격을 개시했다.[6] 동맹군 좌익은 궤주했고, 영국과 네덜란드군도 스페인군에게 패배하여 대포를 노획당했다.[6][8]
동맹군 좌익이 무너지자 카를 대공의 보병은 전진하여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중앙부의 보병을 밀어냈다. 토이 후작(Toyes)은 중앙부의 패배와 군대 분열을 막으려 했지만, 대부분 포르투갈군의 포로가 되었다.[6]
아길라르 백작은 슈타렘베르크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 우익(최정예 척탄병과 기병)에 자신의 기병을 투입했다. 동맹군은 이 돌격을 막을 수 없었다.[6][8] 동맹군 중앙부는 스페인 출신 빌라로엘 장군(Villarroeles)의 증원으로 구원받았다.[6] 슈타렘베르크는 군대를 재집결시켜 아길라르 백작의 기병을 격퇴하고, 스페인군 좌익에 기병 돌격을 감행하여 대포를 노획한 후 중앙부를 향해 군대를 전진시켰다.[6]
스페인군 중앙부와 좌익이 철수를 시작하는 한편, 우익 기병은 동맹군 좌익을 추격했다.[8] 아길라르 백작은 용기병으로 동맹군 우익을 공격했고, 독일과 포르투갈 보병은 1차 돌격을 막았지만, 결국 아길라르의 기병에 의해 무너졌다.[6][8] 발데카냐스의 기병도 동맹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마호니 장(Mahonyes)과 아메자가 원수(Amezagaes)의 군세도 우익에서 돌격했다. 그러나 슈타렘베르크는 기병 돌격을 3번이나 감행했다.[6] 아메자가는 전투에서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슈타렘베르크의 군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기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근처 숲으로 철수했고, 동맹군 전체도 밤을 틈타 철수했다.[6]
3. 1. 양측 군대의 배치
비야비시오사 전투에서 방돔 공작이 이끄는 약 2만 명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구이도 폰 슈타렘베르크가 이끄는 약 1만 4천 명의 합스부르크 동맹군이 맞붙었다. 펠리페 5세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측에 참전했다. 양측 군대는 전통적인 2열 횡대 대형으로 배치되었으며, 양측 모두 23문의 대포를 3개의 포열에 배치하여 전투에 투입했다.[9]3. 1. 1.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루이 조제프 방돔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1]
우익 | 중앙 | 좌익 | 포병 |
---|---|---|---|
3. 1. 2. 합스부르크 동맹군
전투는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양군은 23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9], 3개의 포열에 배치되었다. 양군의 포격은 동시에 시작되었고, 양군 모두 피해를 입었다[6][9]. 폰 프랑켄베르크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 좌익은 독일 보병 및 포르투갈과 스페인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6]. 이들은 스페인 기병대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궤주했다[6]. 좌익을 구원하러 파견된 영국과 네덜란드군도 스페인군에게 패배하여 대포를 노획당했다[6][8].구이도 폰 슈타렘베르크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 우익은 최정예 척탄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6]. 동맹군은 스페인군의 돌격을 막을 수 없었으나[6][8], 중앙부에서의 증원으로 구원받았다[6]. 슈타렘베르크는 군대를 재집결시켜 스페인군 좌익에 기병 돌격을 감행하여 대포를 노획하고, 중앙부를 향해 군대를 전진시켰다[6].
아길라르 백작은 용기병으로 동맹군 우익을 공격했고, 독일과 포르투갈 보병은 1차 돌격을 막았지만, 결국 아길라르의 기병에 의해 무너졌다[6][8]. 그러나 슈타렘베르크는 동요하지 않고, 기병 돌격을 3번이나 감행했다[6]. 슈타렘베르크의 군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기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근처 숲으로 철수했고, 동맹군 전체도 밤을 틈타 철수했다[6].
3. 2. 전투 과정
전투는 오후에 시작되어 자정까지 이어졌다. 양측 군대는 모두 23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으며,[4] 3개의 포대로 배치되었다. 포격이 동시에 시작되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다.[1][4] 발데카냐스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우익 기병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발데카냐스는 폰 프랑켄베르크 장군 휘하의 독일 보병, 포르투갈 및 스페인 기병대로 구성된 동맹군 좌익에 기병대를 보냈다.[1] 독일 보병과 포르투갈 기병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돌격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동맹군 좌익은 궤멸되었다.[1] 스페인군은 좌익을 지원하러 온 잉글로-네덜란드 군을 격파하고 대포를 노획했다.[1][3]동맹군 좌익이 패배하자, 카를 대공의 보병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중앙으로 진격하여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보병대를 밀어냈다. 토이 후작은 중앙의 손실을 막고 군대의 분열을 피하려 했지만, 그의 병사들 대부분은 포르투갈군에게 포로로 잡혔다.[1]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중앙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아길라 백작은 슈타렘베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동맹군 최정예 척탄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동맹군 우익에 자신의 기병을 투입했다. 동맹군은 아길라 백작의 기병대를 막을 수 없었다.[1][3] 동맹군 우익은 스페인 장군 비야로엘의 지원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1] 슈타렘베르크는 병력을 재정비하여 아길라 백작의 기병대를 격퇴하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좌익으로 돌격했다. 좌익 포병을 탈환한 후, 슈타렘베르크는 군대를 중앙으로 진격시켰다.[1]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중앙과 좌익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우익 기병대는 동맹군 좌익을 추격했다.[3] 아길라 백작은 용기병을 이끌고 동맹군 우익을 공격했다. 아탈라야 백작 휘하의 독일 및 포르투갈 기병대는 첫 돌격에 저항했지만, 아길라의 기병대는 동맹군 우익을 붕괴시켰다.[1][3] 발데카냐스의 기병대 또한 동맹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마호니 중장과 야전 원수 아메자가의 군대가 우익에서 돌격했다. 슈타렘베르크는 이에 맞서 세 차례의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1] 전투 중 아메자가는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슈타렘베르크의 군대는 프랑스-스페인 기병대를 피해 인근 숲으로 퇴각했고, 동맹군은 밤을 틈타 철수를 시작했다.[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방돔의 승리로 황제군 장군들은 계속 물러났고, 스페인 기병대와 민병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동맹군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6,000~7,000명으로 줄어있었다.[1]
2010년에는 전투 3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10]
4.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미친 영향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과 펠리페 5세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사상자 수, 동맹군이 포기한 무기, 전투의 전략적 영향으로 볼 때 펠리페 5세의 승리가 분명했다.[1] 방돔의 승리로 황제군 장군들은 계속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스페인 기병대와 민병대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했다. 동맹군은 1711년 1월 6일 바르셀로나에 입성했을 때 6,000~7,000명으로 줄어있었다.[1] 요제프 1세가 사망하자, 카를 대공은 1711년 4월에 스페인을 떠나 신성 로마 황제에 즉위했고, 펠리페 5세는 마침내 스페인 왕위를 확보했다.[7]5. 전투 이후 상황
슈타렘베르크는 스페인 기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바르셀로나로 퇴각했고, 그의 군대는 6,000~7,000명으로 줄어들었다.[1][3][6] 1711년 4월,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이 형 요제프 1세의 사망으로 신성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면서,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확고히 했다.[7]
2010년에는 전투 3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10]
6. 평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되는 비야비시오사 전투에서는 양측 지휘관의 전략과 전술, 특히 방돔 공작의 기병 운용과 슈타렘베르크의 분투가 주목할 만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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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Annals of the Wars of the Eighteenth Century: Compiled from the Most Authentic Histories of the Period
https://books.google[...]
J. Murray
2013-04-24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웹사이트
Tricentenary celebration in 2010
http://www.brihuega-[...]
2017-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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