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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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가번은 류조지씨 가신의 영지 상속으로 시작되어,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실권을 잡고 성립된 일본의 번이다. 35만 7천 석의 영지를 다스렸으나, 지번과 류조지 분가의 자치령이 있어 실제 번주의 실권은 6만 석 정도였다. 10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 대에 번정 개혁과 서양 기술 도입으로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보신 전쟁에서 막부와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한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가현과 나가사키현으로 분할되었고, 에토 신페이, 오쿠마 시게노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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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조지씨 - 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년 시마바라반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이끄는 류조지 군은 아리마 하루노부, 시마즈 이에히사가 이끄는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의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쓰리노부세 전법에 패배하여 류조지 가문은 쇠퇴하고 시마즈 가문이 규슈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사가번 - 사가성
사가성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류조지 가문과 나베시마 가문의 거점이었으며, 1726년 대화재와 1874년 사가의 난을 겪었으며, 현재는 샤치 문과 쓰즈키 망루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사가번 - 페이튼 호 사건
1808년 영국 해군 페이튼 호가 네덜란드 국기를 달고 나가사키에 침입하여 네덜란드 상관 직원을 납치하고 물자를 강탈한 사건으로, 나가사키 봉행의 할복, 막부의 쇄국 정책 강화, 일본 내 서양 학문 연구 필요성 증대, 나베시마 번의 근대화 가속화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 - 히젠국의 번 - 가라쓰번
가라쓰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임진왜란의 공으로 히젠국 마쓰우라군 일대를 받아 시작되었으나, 시마바라의 난 이후 데라자와 가문의 단절과 함께 여러 가문이 번갈아 통치하며 나가사키항 경호 역할인 나가사키 순찰역을 맡아 번주의 승진에 제약이 있었다. - 히젠국의 번 - 오무라번
오무라번은 오무라 씨가 규슈 히젠국 지역을 다스린 번으로, 오무라 스미타다가 일본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이자 나가사키를 포르투갈인에게 제공하여 남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영지를 인정받아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후 화족이 되었다.
사가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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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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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사가 번 |
다른 이름 | 히젠 번 나베시마 번 |
유형 | 번 |
국가 | 일본 |
상태 | 번 |
정부 형태 | 다이묘 |
수장 직책 | 다이묘 |
초대 수장 | 나베시마 가쓰시게 |
초대 수장 재임 기간 | 1607-1657년 |
마지막 수장 | 나베시마 나오히로 (사가) |
마지막 수장 재임 기간 | 1861-1871년 |
수도 | 사가 성 |
현재 위치 | 사가 현 |
존속 기간 | 에도 시대 |
시작 연도 | 1590년 |
종료 연도 | 1871년 |
문장 | 나베시마 가문의 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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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좌표 | 33°14′44.69″N 130°18′7.65″E |
역사적 사건 | |
주요 사건 | 나베시마 가쓰시게가 초대 번주로 임명되며 번 성립 |
해체 사건 | 폐번치현으로 인해 폐지 |
기타 정보 | |
석고 | 35만 7천 석 |
2. 번의 역사
나베시마씨는 류조지씨의 가신이었지만, 류조지 다카노부의 전사 이후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영지를 상속하여 성립되었다. 번의 성립 후에도 종종 남아있던 류조지 분가들과 대립이 일어났다. 이를 나베시마 소동(鍋島騒動)이라 하며 이 대립 구도에서 나온 이야기가 ‘나베시마의 바케네코 소동’(鍋島の化け猫騒動)이다.
1584년 류조지 다카노부는 시마바라 반도에서 시마즈씨, 아리마씨 연합군과 싸운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했다.[10] 그의 아들인 류조지 마사이에의 보좌역으로 실권을 잡은 것은 중신이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다. 1590년에는 마사이에를 폐하고 그의 아들 류조지 다카후사를 옹립했고, 나오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후견인으로 인정받았다.[10] 이후 나베시마 가문은 주가를 압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나오시게가 대장으로 참전했다.[10]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공략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안도받았다.[10]
1607년 에도에서 다카후사가 급사했다. 다카후사 사후 한 달 후에는 히젠에 은거하고 있던 아버지 마사이에 도 급사했다. 나오시게는 다카후사의 아들 하쿠안을 출가시키는 등 류조지 본가를 사실상 단절시키고, 자신의 장남 나베시마 가쓰시게에게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계승시켜 사가번 35만 7천 석을 손에 넣었다.[10] 1608년 4월 4일부로 나오시게·가쓰시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청문을 제출하고 나베시마 가문에 의한 영토 지배가 확립되었다.[10]
1613년 막부로부터 가쓰시게에게 영지 안도의 명이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가는 가쓰시게의 적자 나베시마 다다나오 이후 역대 번주에게 마쓰다이라 성과 쇼군 실명 일자를 수여했다.[11]
사가 번은 35만 7천 석의 대영지였지만, 3개의 지번(하스노이케, 오기, 가시마)과 나베시마 4서류가(시라이시, 가와쿠보, 무라타[19], 구보타), 류조지 4분가(다쿠, 다케오, 이사하야, 스고)의 각 자치령이 있었기 때문에, 번주의 실질적인 석고는 6만 석 정도였다.[13] 류조지가의 지배체제를 계승했기 때문에 류조지가의 영지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막부에 대한 공사비 지출 등을 이유로 가신의 영지 30%를 반환시키는 '삼부상지'(三部上地)를 두 차례(게이초 16년(1611년), 겐나 7년(1621년))나 실시해 직할지를 확대하고 있다.[14] 1차에는 전가신[20], 2차에는 류조지 4가가 대상으로, 지번에 할당하거나 류조지 4가에 양자를 보내는 등 점차 번을 전체적으로 나베시마화하였다.
나베시마 가문은 도쿠가와 시대 내내 35만 7천 곡의 고쿠다카를 할당받았다. 도쿠가와 쇼군은 나베시마 가문에 "마쓰다이라" 성을 의례적으로 사용할 권한과 쇼군의 이름에서 한 자를 가쓰시게의 장남인 나베시마 다다나오를 시작으로 역대 다이묘에게 하사했다. 영주령의 위치는 조선에 가깝고 쇼군의 수도인 에도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무역 연결로 인해 상당한 외국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은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도자기 생산과 기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유럽으로 수출되는 중요한 상품이었던 이마리 도자기로 유명해졌다.
류조지 가문의 잔당은 때때로 나타나 나베시마 가문의 권력 장악을 위협했다. 류조지 가문의 일원들이 영주령의 업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류조지 가문이 독립적인 영주령으로서의 지위 회복을 얻으려는 시도는 쇼군에 의해 거부되었다. 초기에는, 나베시마 가의 일족인 나베시마 쇼잔, 나베시마 가의 외척 가문인 이시이 가의 나베시마 시게무리 등이 번정을 주도했지만, 후에 다쿠, 이사하야, 다케오, 스고의 류조지 4가가 번정의 실권을 장악해 간다. 이것은 번정을 류조지 4가에 담당시키는 한편, 재정 면의 책임도 지게 하려고 한 “가쓰시게의 참으로 교묘한 통치책”의 결과라는 것이다.[15] 간에이 11년(1634년), 고부사의 유자인 하쿠안이 막부에 류조지 가 재흥을 호소하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소송을 일으켰지만, 사가 번의 대세는 나베시마 가의 지배를 지지하고 있었고, 막부도 하쿠안의 소송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는 상당한 기리시탄 인구가 있었는데, 유명한 시마바라의 난(1637~1638)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2대 번주인 나베시마 미쓰시게를 섬겼던 야마모토 조초의 구술을 저술한 "무사도란 죽는 것임을 알았다"로 유명한 『하가쿠레』는, 후의 사가 번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사가 번은 나가사키에 가까웠기 때문에, 1631년 쇼군은 나가사키를 경비할 군대를 번이 매년 순환하여 제공하도록 명령했고, 후쿠오카번과 교대했다. 그 대가로 영주령은 산킨코타이 의무가 감소되었는데, 에도에 출석해야 하는 기간이 일반적인 2년 대신 2년 중 약 3개월로 줄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상당한 비용이었고, 때때로 영주령은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무라이의 수를 줄임으로써 손실을 줄이려고 했다. 간에이 18년에 에도 막부로부터 산킨코타이의 에도 재부 기간을 통상 2년 중 1년에서 2년 중 약 3개월로 면제받는 대신, 후쿠오카 번과 1년 교대로 텐료인 나가사키 항의 경비를 명령받았고, 그 부담은 대대로 번 재정에 무겁게 짓눌렸다. 1808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피턴 사건이 발생하여 영국 프리깃이 나가사키를 침략하여 네덜란드 무역 거점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가 번은 허가 없이 경비 인원을 감축했기 때문에(의무 인원인 1000명이 아닌 100명의 사가 사무라이만이 상황 대처에 나섰다) 쇼군은 영국 함선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사가 번의 의무 불이행에 대해 심하게 질책했다. 분카 5년(1808년),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영국의 프리깃함이 나가사키에 침입하여 네덜란드 상관의 인도를 요구하는 페이턴호 사건이 발생했지만, 사가 번은 무단으로 경비 인원을 줄였기 때문에 필요한 대책을 취할 수 없었고, 그 부주의를 막부로부터 질책받았다. 또한 1828년에는 지볼트 태풍으로 거의 1만 명이 사망하고 영주령의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면서 영주령 주변 상황은 악화되었다.
10대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마사(간소) 이후, 번정 개혁과 서양 기술의 흡수에 힘썼다. 특히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실시하여, 역관을 5분의 2로 감축하고, 농민의 보호 육성, 도자기, 차, 석탄 등의 산업 육성·교역에 힘써, 번 재정은 윤택해졌다.
나베시마 나오마사(간소)는 영지 행정 개혁과 서양 기술 도입에 힘썼다. 특히 관리 수를 5분의 2로 줄이고 농민 보호와 육성에 힘쓰는 등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영지 재정을 개선했다. 또한 제철, 증기 기관, 포병 등 서양 기술 연구 기관인 정련방을 설립하여 영지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사가는 1849년 일본 최초의 제철소를 가동했고, 3년 후에는 최초로 재련로를 사용했다. 1852년에는 츠키지 반사로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1853년 러시아의 예브피미 푸탸틴(Yevfimy Putyatin) 제독이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일본인들에게 최초로 증기 기관차 시연을 선보였다. 이시구로 칸지(Ishiguro Hirotsugu), 나카무라 키스케(Nakamura Kisuke), 타나카 히사시게(Tanaka Hisashige) 등은 증기 기관차와 증기선 제작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막부가 대선 건조의 금을 완화하자, 사가는 일본 최초의 증기선인 릉풍환(Ryōfūmaru)을 진수시켰다. 1855년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가 설립되자 학생들을 파견했다. 1866년까지 영국 암스트롱 휘트워스(Armstrong Whitworth) 대포를 거의 자력으로 완성하여 배치했다. 시나가와(Shinagawa)의 방어 포대에도 사가산 대포가 공급되었다.
사가번은 분큐 3년(1862년) 군정 개혁을 통해 양식 총포대 편성을 지향했다.[16] 게이오 원년(1865년)에는 나가사키 경비 편중에서 벗어나 전 대조를 증강하고, 직신·배신의 구별을 없애고 전 가신단에 화술 연마와 총진법 채용을 명령했다.[16] 해군 체제도 통합하여 실전적으로 개편했다.[16]
사가번은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1867))에 출품하는 등 일본 유수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자랑했지만, 중앙 정국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7년 말, 토사, 사쓰마, 장주와 연합하여 막부에 대항했다. 보신 전쟁(Boshin War)에서 사가는 호쿠리쿠 고속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선봉대를 맡았고, 우에노 전투(Battle of Ueno) 등에서 막부와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에토 신페이(Etō Shinpei), 오쿠마 시게노부(Ōkuma Shigenobu), 오키 타카토(Ōki Takatō), 사노 츠네타미(Sano Tsunetami) 등 사가 출신 인물들이 메이지 정부에 등용되었다. 1871년 봉건 영지가 폐지되면서 사가 번 영토는 사가와 나가사키현(Nagasaki Prefecture)으로 나뉘었다. 조선 침략에 대한 논쟁과 지위 및 봉급 상실에 대해 메이지 정부에 환멸을 느낀 전직 사무라이들은 1874년 사가의 난(Saga Rebellion)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2. 1. 번의 성립
1584년 류조지 다카노부는 시마바라 반도에서 시마즈씨, 아리마씨 연합군과 싸운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했다.[10] 그의 아들인 류조지 마사이에의 보좌역으로 실권을 잡은 것은 중신이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였다. 1590년에는 마사이에를 폐하고 그의 아들 류조지 다카후사를 옹립했고, 나오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후견인으로 인정받았다.[10] 이후 나베시마 가문은 주가를 압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나오시게가 대장으로 참전했다.[10]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공략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안도받았다.[10]1607년 에도에서 다카후사가 급사했다. 다카후사 사후 한 달 후에는 히젠에 은거하고 있던 아버지 마사이에 도 급사했다. 나오시게는 다카후사의 아들 하쿠안을 출가시키는 등 류조지 본가를 사실상 단절시키고, 자신의 장남 나베시마 가쓰시게에게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계승시켜 사가번 35만 7천 석을 손에 넣었다.[10] 1608년 4월 4일부로 나오시게·가쓰시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청문을 제출하고 나베시마 가문에 의한 영토 지배가 확립되었다.[10]
1613년 막부로부터 가쓰시게에게 영지 안도의 명이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가는 가쓰시게의 적자 나베시마 다다나오 이후 역대 번주에게 마쓰다이라 성과 쇼군 실명 일자를 수여했다.[11]
2. 2. 에도 시대의 사가 번
사가 번은 35만 7천 석의 대영지였지만, 3개의 지번(하스노이케, 오기, 가시마)과 나베시마 4서류가(시라이시, 가와쿠보, 무라타[19], 구보타), 류조지 4분가(다쿠, 다케오, 이사하야, 스고)의 각 자치령이 있었기 때문에, 번주의 실질적인 석고는 6만 석 정도였다.[13] 류조지가의 지배체제를 계승했기 때문에 류조지가의 영지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막부에 대한 공사비 지출 등을 이유로 가신의 영지 30%를 반환시키는 '삼부상지'(三部上地)를 두 차례(게이초 16년(1611년), 겐나 7년(1621년))나 실시해 직할지를 확대하고 있다.[14] 1차에는 전가신[20], 2차에는 류조지 4가가 대상으로, 지번에 할당하거나 류조지 4가에 양자를 보내는 등 점차 번을 전체적으로 나베시마화하였다.나베시마 가문은 도쿠가와 시대 내내 35만 7천 곡의 고쿠다카를 할당받았다. 도쿠가와 쇼군은 나베시마 가문에 "마쓰다이라" 성을 의례적으로 사용할 권한과 쇼군의 이름에서 한 자를 가쓰시게의 장남인 나베시마 다다나오를 시작으로 역대 다이묘에게 하사했다. 영주령의 위치는 조선에 가깝고 쇼군의 수도인 에도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무역 연결로 인해 상당한 외국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은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도자기 생산과 기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유럽으로 수출되는 중요한 상품이었던 이마리 도자기로 유명해졌다.
류조지 가문의 잔당은 때때로 나타나 나베시마 가문의 권력 장악을 위협했다. 류조지 가문의 일원들이 영주령의 업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류조지 가문이 독립적인 영주령으로서의 지위 회복을 얻으려는 시도는 쇼군에 의해 거부되었다. 초기에는, 나베시마 가의 일족인 나베시마 쇼잔, 나베시마 가의 외척 가문인 이시이 가의 나베시마 시게무리 등이 번정을 주도했지만, 후에 다쿠, 이사하야, 다케오, 스고의 류조지 4가가 번정의 실권을 장악해 간다. 이것은 번정을 류조지 4가에 담당시키는 한편, 재정 면의 책임도 지게 하려고 한 “가쓰시게의 참으로 교묘한 통치책”의 결과라는 것이다.[15] 간에이 11년(1634년), 고부사의 유자인 하쿠안이 막부에 류조지 가 재흥을 호소하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소송을 일으켰지만, 사가 번의 대세는 나베시마 가의 지배를 지지하고 있었고, 막부도 하쿠안의 소송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는 상당한 기리시탄 인구가 있었는데, 유명한 시마바라의 난(1637~1638)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2대 번주인 나베시마 미쓰시게를 섬겼던 야마모토 조초의 구술을 저술한 "무사도란 죽는 것임을 알았다"로 유명한 『하가쿠레』는, 후의 사가 번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사가 번은 나가사키에 가까웠기 때문에, 1631년 쇼군은 나가사키를 경비할 군대를 번이 매년 순환하여 제공하도록 명령했고, 후쿠오카번과 교대했다. 그 대가로 영주령은 산킨코타이 의무가 감소되었는데, 에도에 출석해야 하는 기간이 일반적인 2년 대신 2년 중 약 3개월로 줄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상당한 비용이었고, 때때로 영주령은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무라이의 수를 줄임으로써 손실을 줄이려고 했다. 간에이 18년에 에도 막부로부터 산킨코타이의 에도 재부 기간을 통상 2년 중 1년에서 2년 중 약 3개월로 면제받는 대신, 후쿠오카 번과 1년 교대로 텐료인 나가사키 항의 경비를 명령받았고, 그 부담은 대대로 번 재정에 무겁게 짓눌렸다. 1808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피턴 사건이 발생하여 영국 프리깃이 나가사키를 침략하여 네덜란드 무역 거점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가 번은 허가 없이 경비 인원을 감축했기 때문에(의무 인원인 1000명이 아닌 100명의 사가 사무라이만이 상황 대처에 나섰다) 쇼군은 영국 함선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사가 번의 의무 불이행에 대해 심하게 질책했다. 분카 5년(1808년),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영국의 프리깃함이 나가사키에 침입하여 네덜란드 상관의 인도를 요구하는 페이턴호 사건이 발생했지만, 사가 번은 무단으로 경비 인원을 줄였기 때문에 필요한 대책을 취할 수 없었고, 그 부주의를 막부로부터 질책받았다. 또한 1828년에는 지볼트 태풍으로 거의 1만 명이 사망하고 영주령의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면서 영주령 주변 상황은 악화되었다.
10대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마사(간소) 이후, 번정 개혁과 서양 기술의 흡수에 힘썼다. 특히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실시하여, 역관을 5분의 2로 감축하고, 농민의 보호 육성, 도자기, 차, 석탄 등의 산업 육성·교역에 힘써, 번 재정은 윤택해졌다.
2. 3. 막말·유신기의 사가 번
나베시마 나오마사(간소)는 영지 행정 개혁과 서양 기술 도입에 힘썼다. 특히 관리 수를 5분의 2로 줄이고 농민 보호와 육성에 힘쓰는 등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영지 재정을 개선했다. 또한 제철, 증기 기관, 포병 등 서양 기술 연구 기관인 정련방을 설립하여 영지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사가는 1849년 일본 최초의 제철소를 가동했고, 3년 후에는 최초로 재련로를 사용했다. 1852년에는 츠키지 반사로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1853년 러시아의 예브피미 푸탸틴(Yevfimy Putyatin) 제독이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일본인들에게 최초로 증기 기관차 시연을 선보였다. 이시구로 칸지(Ishiguro Hirotsugu), 나카무라 키스케(Nakamura Kisuke), 타나카 히사시게(Tanaka Hisashige) 등은 증기 기관차와 증기선 제작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막부가 대선 건조의 금을 완화하자, 사가는 일본 최초의 증기선인 릉풍환(Ryōfūmaru)을 진수시켰다. 1855년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가 설립되자 학생들을 파견했다. 1866년까지 영국 암스트롱 휘트워스(Armstrong Whitworth) 대포를 거의 자력으로 완성하여 배치했다. 시나가와(Shinagawa)의 방어 포대에도 사가산 대포가 공급되었다.
사가번은 분큐 3년(1862년) 군정 개혁을 통해 양식 총포대 편성을 지향했다.[16] 게이오 원년(1865년)에는 나가사키 경비 편중에서 벗어나 전 대조를 증강하고, 직신·배신의 구별을 없애고 전 가신단에 화술 연마와 총진법 채용을 명령했다.[16] 해군 체제도 통합하여 실전적으로 개편했다.[16]
사가번은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1867))에 출품하는 등 일본 유수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자랑했지만, 중앙 정국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7년 말, 토사, 사쓰마, 장주와 연합하여 막부에 대항했다. 보신 전쟁(Boshin War)에서 사가는 호쿠리쿠 고속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선봉대를 맡았고, 우에노 전투(Battle of Ueno) 등에서 막부와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에토 신페이(Etō Shinpei), 오쿠마 시게노부(Ōkuma Shigenobu), 오키 타카토(Ōki Takatō), 사노 츠네타미(Sano Tsunetami) 등 사가 출신 인물들이 메이지 정부에 등용되었다. 1871년 봉건 영지가 폐지되면서 사가 번 영토는 사가와 나가사키현(Nagasaki Prefecture)으로 나뉘었다. 조선 침략에 대한 논쟁과 지위 및 봉급 상실에 대해 메이지 정부에 환멸을 느낀 전직 사무라이들은 1874년 사가의 난(Saga Rebellion)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3. 역대 번주
류조지 다카후사/龍造寺高房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