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번정 개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번정 개혁은 에도 시대 중후기에 각 번이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행한 개혁들을 의미한다. 참근교대, 쌀값 하락, 자연재해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초기에는 연공 증징 등의 대책을 시행했으나 효과가 미미했다. 이에 따라 번의 행정, 재정, 경제 기구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각 번에서는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주요 개혁 사례로는 구보타 번의 간세이 개혁, 요네자와 번의 재정 재건 노력, 마쓰시로 번의 온다 다미치카의 개혁, 히메지 번의 가와이 미치오미의 개혁, 미토 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개혁, 조슈 번의 무라타 세이후의 개혁, 사쓰마 번의 자쇼 히로사토의 개혁, 히젠 번의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개혁, 쓰 번의 사이토 셋토의 개혁, 비추마쓰야마 번의 야마다 호코쿠의 개혁 등이 있다.

2. 배경

에도 시대 중후기, 각 은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 참근교대와 막부의 이른바 '어전 보조 공사'로 막대한 지출을 강요받았다.
  • 화폐 경제가 사회 전체에 침투하는 한편, 쌀값은 하락하는 경향에 있어, '쌀'을 경제 주체로 운영하는 막번 체제가 이 경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수입이 감소했다.
  • 영지에서 거듭되는 자연 재해와 기근, 에도 번저의 소실에 의한 임시 지출이 발생했다.
  • 평화로운 세상이 이어져 다이묘 이하 가문 전반에 사치스러운 생활 태도가 보급되었다.


이에 대해 초기에는 여러 다이묘가 토지와 작물 조세 관리 강화와 측량의 실시 등의 연공 증징, 대도시의 상인 등으로부터의 차입, 검약령에 의한 재정 지출의 긴축과 신전 개발, 광산 개발, 번의 상인 등에서 어용금 징수 등으로 인한 재정 수입의 강화, 나아가서는 '반지차상' 등이라고 불렸던 가신에게 주는 봉록의 사실상 삭감 등의 대책을 통해 일시적으로 조달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임시방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문과 영내에 불만을 쌓이게 하였고, 인심의 황폐를 가속화시켜, 번정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번의 재무, 행정 및 경제 기구에 전면적인 혁신을 통해 재정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조법 중시'라는 막번 체제의 기본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자칫 번정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안고 있었다.

3. 에도 중기

막부 체제 하의 정치는 유교적 도덕을 기반으로, 선대 이전의 법, 특히 초대 영주나 당주가 정한 영원히 지켜야 할 절대적인 규정인 조법(祖法)을 중시했다. 이러한 조법 개정은 '불효'나 '불충'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에도 중기 이후 재정난이 심각해지면서 이러한 전통에 변화가 생겼다. 재정난의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원인내용
참근교대와 막부의 '어전 보조 공사'막대한 지출 강요
화폐 경제 침투와 쌀값 하락쌀을 경제 주체로 운영하는 막번 체제가 경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수입 감소
자연재해, 기근, 에도 제후 저택 소실임시 지출 발생
다이묘 이하 가문 전반의 사치스러운 생활 태도 보급



이에 대해 처음에는 여러 다이묘가 토지와 작물 조세 관리 강화, 측량 실시 등으로 연간 공물 징수를 늘리고, 대도시 상인 등에게서 채무를 얻거나 검약령을 내려 재정 지출을 긴축했다. 또한 신전 개발, 광산 개발, 번의 상인 등에게서 어용금 징수 등으로 재정 수입을 강화하려 했다. 나아가 '반지차상' 등으로 불렸던 가신에게 주는 녹봉을 사실상 삭감하는 대책을 통해 일시적으로 재정을 조달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임시방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문과 영내에 불만을 쌓이게 하고, 인심을 황폐하게 만들어 번정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이에 번의 재무 행정 및 경제 기구에 전면적인 혁신을 통해 재정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는 '조법 중시'라는 막번 체제의 기본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번정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안고 있었다.

실제로는 실패한 번이 더 많았지만, 구보타 번, 요네자와 번, 마쓰시로 번, 히메지 번, 구마모토 번, 쇼나이 번 등은 개혁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3. 1. 구보타 번

1785년사타케 요시마사가 번주가 되어 개혁을 추진했다. 이 개혁은 '구보타 번의 간세이 개혁'이라고 불린다.[1]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번교 (이후 '메이토쿠칸') 설립
  • 방사림 조성 및 보전
  • 임정 개혁 실시
  • 상품 작물, 춘경칠, 가와쓰라 칠기, 시라이와야키 등의 공예품 생산 장려
  • 경작 지원 등 산업 개발
  • 창입지와 가신 지행지의 농정을 총괄하는 군봉행을 번 내 각 군에 설치[1]

3. 2. 요네자와 번

1767년, 요네자와번에서는 우에스기 요잔(우에스기 하루노리)이 번주가 되어, 절약과 산업 개발 등 번 재정 구조 조정을 실시했다. 번주 재직 중에는 부교를 필두로 다케마타 무네쓰나를 중심으로 시행했지만 실패했고, 은거 후 번정 후견 중에 로주(이후 부교) 노리토 요시마사를 중심으로 한 개혁이 성공한다.

3. 3. 마쓰시로 번

1752년 사나다 유키히로가 마쓰시로 번의 번주가 되면서, 가로인 온다 다미치카에게 번정 쇄신을 명했다. 온다 다미치카는 솔선수범하여 절약하고,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다. 영민에게는 연공 세율을 인하하고, 분할 납입을 인정하는 대신 완납을 요구했다. 또한 번 행정 효율화를 추진하여 부정한 관리와 무능한 공무원을 경질했다.

온다 다미치카의 급사로 재정 개혁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관리의 의식 개혁과 영민의 번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재정이 다시 악화되자, 사나다 유키쓰라는 온다 다미치카의 증손자인 온다 쓰라자네를 중용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번 재정 회복에는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사치 풍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번주 계승 문제와 얽혀 내분이 발생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3. 4. 히메지 번

사카이 다다무네・타다미치・타다자네・다다노리의 4대에 걸쳐 50년 이상을 섬긴 가로(家老) 가와이 미치오미(슨오)가 개혁을 주도했다.

1790년(간세이 2년), 번주 다다무네의 급사(急死)와 반대파의 반격으로 가와이 미치오미는 한때 실각했지만, 1808년(분카 5년)에 다다미치로부터 여러 방면의 사정을 맡아 다시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의창(義倉)의 일종인 고레이창을 번 내 각지에 건설하여 저리(低利) 대출과 기근(飢饉) 대책에 힘써 영민(領民)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또한 상품 작물 재배, 신전(新田)・염전(塩田) 개발, 상업 진흥을 장려했다.

특히 특산품인 목면을 오사카 상인을 거치지 않고 에도에서 직접 전매(專賣)하고 번찰의 일종인 "목면 수표"로 결제하는 제도를 구축했다. 그 외에도 피혁(皮革)과 석재(石材)를 에도에서 전매하여 이익을 올리고, 73만 냥의 빚을 완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더불어 번교(藩校)와 별도로 사숙(私塾)・닌쥬산코에서 차세대 인재 육성을 도모했다.

3. 5. 구마모토 번

구마모토 번 번주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가 호리 가쓰나(堀勝名)를 등용하여 개혁을 단행했다.(보력(宝暦) 개혁)[1]

3. 6. 쇼나이 번

안영 4년(1775년), 사카이 다다노리(酒井忠徳)의 명으로 혼마 미쓰오카(本間光丘)가 번의 재정 개혁에 참여했다. 미쓰오카는 크게 분주하게 활동했으며, 질투하는 자도 있었기에 한 번은 사임했지만, 번주의 명에 따라 다시금 이에 임하여 공적이 크게 올라갔다.[1]

4. 덴포의 번정 개혁

덴포 연간(1830년 ~ 1844년)에 여러 번에서 번정 개혁이 추진되었다.


  • '''미토 번''':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특산물 전매제, 농지 검지, 번교 고도칸 설립, 후지타 토코 등 인재 등용을 통해 번 재정 재건과 인재 육성을 꾀했다. 미토학을 확산시켜 막말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흑선에 대비하여 나카미나토 반사로를 축조하고 서양식 대포를 제조, 네덜란드식 병학 도입과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 '''조슈 번''': 무라타 세이후는 전매제를 완화하고 상인에게 운상을 부과했다. 시모노세키를 통과하는 화물에 자금을 대여하는 고시니카타라는 금융업으로 이익을 얻고, 하급 번사를 등용하여 군비를 증강했다.
  • '''사쓰마 번''': 가로(家老) 자쇼 히로사토는 500만 냥의 빚을 250년에 걸쳐 상환하는 강경책으로 부채를 탕감했다.[2] 아마미 제도의 설탕 전매제, 류큐 왕국과의 무역(밀무역)으로 재정을 재건했다.
  • '''히젠 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도자기, 석탄 전매제, 균전제를 통한 본백성 체제 재건, 일본 최초 반사로와 대포 제조소 설립으로 군비를 증강했다.[1]
  • '''쓰 번''': 주자학자 사이토 셋토는 번교 유조관을 설립하고, 아편 전쟁 이후 해외 사정을 연구했다. 화한양절충(和漢洋折衷)을 주장하며 양학소를 설치, 종두를 실시하고 양식 군제를 도입했다.

4. 1. 미토 번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주도하여 개혁을 실행했다. 이른 시기부터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막정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산물의 전매제를 실시하고, 영내 농지의 검지를 실시하여 농촌 부흥을 꾀하고, 번 재정의 재건을 목표로 했다. 한편, 번교 고도칸을 설립하고, 후지타 토코 등을 등용하여 적극적인 인재 육성을 실시했다. 재정적으로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이로 인해 미토학이 비약적으로 확산되어 막말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흑선의 공격에 대비하여 미토 번 내에 나카미나토 반사로의 축조와 조업을 번사들에게 명령하고, 서양식 대포를 제조하고 네덜란드식 병학 도입과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4. 2. 조슈 번

모리 다카치카에게 발탁된 무라타 세이후가 중심이 되어 개혁을 실행했다. 번에 의한 전매제를 완화하고, 그 대신 상인들에게 운상을 부과하여 번에 납부하게 했다. 또한, 시라이시 쇼이치로나 나카노 한자에몬 등에게 시모노세키를 통과하는 여러 나라의 화물에 자금을 대여하는 고시니카타라고 불리는 번에 의한 금융업을 시작하게 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그 외에도 다른 번과 마찬가지로 하급 번사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군비를 증강·근대화도 실시하고 있다.

4. 3. 사쓰마 번

가로(家老)인 자쇼 히로사토가 개혁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번이 호상(豪商)에게서 빌린 500만 냥의 빚을 250년에 걸쳐 상환하는 강경책을 실시하여, 사실상 번의 부채를 탕감했다.[2] 또한 아마미 제도에서 나는 설탕을 전매하고, 류큐 왕국과의 무역(밀무역)을 통해 재정을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상인과 지도자가 처벌받기도 했지만, 이는 막부가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4. 4. 히젠 번

히젠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개혁을 추진했다.[1] 도자기, 석탄을 전매화하고, 균전제를 채택하여 본백성 체제를 재건했다.[1] 또한 일본 최초로 반사로와 대포 제조소를 설립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다.[1]

4. 5. 쓰 번

쓰번에서는 주자학자 사이토 셋토가 중심이 되어 개혁을 실행했다. 번교 유조관을 설립하고, 아편 전쟁 후에는 해외 사정에 대해서도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일관된 주자학자였지만, 서양의 문물 중 우수한 것은 이를 인정하여, 화한양절충(和漢洋折衷)을 통해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조관에 양학소를 설치하여 번의(藩醫)들과 함께 종두를 실시하고, 양식 군제를 도입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5. 막말의 번정 개혁

(막말의 번정 개혁 섹션은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5. 1. 비추마쓰야마 번

비추마쓰야마 번에서는 농민 출신의 양명학자 야마다 호코쿠를 섭정으로 맞아 개혁을 주도하게 했다. 호코쿠는 파탄 직전의 번 재정 실정을 밝히는 동시에, 종이 조각이나 다름없는 번찰을 회수하고 전매제를 도입했다. 다만 호코쿠는 번 재정 재건보다는 영민에게 특산품을 활용한 산업을 일으켜 풍요롭게 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아 힘썼다. 그 결과 산업 진흥과 더불어 영민의 생활이 개선되어 번에 납입되는 세수가 안정되게 되었고, 번 재정도 급속히 개선되었다. 또한, 농병제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병제를 채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佐竹義和(さたけ・よしまさ)】 https://kotobank.jp/[...]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金森正也) 2013-06-13
[2] 간행물 大坂商人大根屋文書 東京都江戸東京博物館 都市歴史研究室편집, 公益財団法人東京都歴史文化財団 20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