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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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도는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위나라 말에 관직에 나아가 서진 시대에 이부상서, 태자소부, 사도를 역임한 인물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으며, 혜강 등과 교류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했다. 사마씨 정권에 협력하여 조씨 일족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혜강의 아들 혜소를 천거하기도 했다. 79세에 사도가 되었으며, 사망 후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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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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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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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산도 (山濤) |
자 | 거원 (巨源) |
출생 | 205년 |
출생지 | 위지현, 허난 성 |
사망 | 283년 3월 3일 (향년 78세) |
가족 | |
자녀 | 산개 산춘 산윤 산모 산건 |
2. 생애
산도는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후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혜강, 완적 등과 교류하였다.
40세가 넘어 관직에 나아가 사마씨를 섬겼다. 혜강은 산도가 사마씨를 섬기는 것을 질책하며 절교서를 보냈으나, 혜강이 처형될 때 아들의 장래를 산도에게 부탁한 것으로 보아 둘의 우정은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6]
조상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은거하였으나,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이 처형된 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서진 시대에는 이부상서, 태자소부를 역임하였고, 79세에 사도가 되었다. 같은 해에 사망하여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위나라 시기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후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위나라 말에 선조랑(選曹朗)을 지냈으며, 이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승진하자 자신의 후임으로 같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혜강을 추천하였으나, 혜강은 산도가 사마씨(司馬氏)를 섬기는 것을 질책하면서 절교서[8]를 보냈다.조상이 병권을 장악할 당시에 은거하였으나,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이 처형된 이후에 다시 관직에 출사하였다. 사마소가 종회의 모반을 진압하기 위해 낙양(洛陽)을 떠나게 되자, 산도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임명하여 업의 관할과 업에 연금된 조씨 일족의 감시를 맡았다. 산도의 부친 산요의 고모가 장왕(張汪)에게 시집갔으며, 둘 사이에 낳은 딸인 장춘화가 사마의의 정실부인이 되어 사마씨와의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3]
244년경, 산도는 40세에 조위 관료가 되었다. 몇몇 작은 직책을 거쳐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었다.[4]
247년경 어느 날 밤, 산도는 석감()과 함께 있었다.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산도는 갑자기 석감을 발로 차며 "이런 때에 어찌 이리 깊이 잠들었는가? 사마의의 대행동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외쳤다. 석감은 "조상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법도 그를 따릅니다. 무엇이 걱정되는가?"라고 대답했다. 산도는 "아! 석 공은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하였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고평릉의 변이 일어났고, 산도는 다시 은둔했다.[5]
262년경, 산도의 친구 혜강이 처형될 예정이었다. 처형 전, 혜강은 아들 혜소에게 "거연(巨源)이 곁에 있으니, 너는 고아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2. 2. 서진 시기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위나라 말 선조랑(選曹朗)을 지냈으며, 이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승진하였다. 사마의의 쿠데타 이후 다시 관직에 출사하였다. 사마소가 종회의 모반을 진압하기 위해 낙양을 떠나자, 산도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임명하여 업의 관할과 업에 연금된 조씨 일족의 감시를 맡았다. 산도의 부친 산요의 고모가 장왕(張汪)에게 시집갔으며, 둘 사이에 낳은 딸 장춘화가 사마의의 정실부인이 되어 사마씨와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8]서진 대에 이부상서,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역임하였고, 79세 때 사도(司徒)가 되었다. 종회에게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 혜강의 아들 혜소를 천거하였다. 제갈경을 동궁사인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사망하여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가계
산도(Shan Tao)의 아버지 산요(Shan Yao)는 작은 관리였다.[2] 장춘화의 어머니는 산도의 종고모였다.[3]
4. 평가
산도는 죽림칠현의 일원으로서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은둔과 청빈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현실 정치에도 참여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혜강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우정과 의리는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으나,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혜강, 완적 등과 교류하며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40세가 넘어 관직에 나아가 사마씨 정권에 협력하였는데, 이 때문에 혜강에게 "여산거원절교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혜강이 처형될 때 아들의 장래를 부탁받은 것으로 보아, 둘의 우정은 변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조
[1]
서적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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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Jin Shu
[2]
서적
Jin Shu
[3]
서적
Jin Shu
[4]
서적
Jin Shu
[5]
서적
Jin Shu
[6]
서적
Jin Shu
[7]
서적
진서(晉書)
[8]
문서
여거원절교서(與巨源絶交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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