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평릉의 변
1. 개요
고평릉의 변은 249년, 위나라의 실권자 조상과 사마의 간에 일어난 정변이다. 조예 사후 조상이 권력을 잡고 사마의를 견제하며 전횡을 일삼자,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은퇴하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조상이 고평릉에 참배하러 간 틈을 타 사마의는 군사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조상과 그의 측근들이 처형되었고, 사마씨 가문은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서진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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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반란 -
제갈탄의 난
제갈탄의 난은 257년 제갈탄이 사마소의 권력 장악에 반발하여 오나라의 지원을 받아 수춘에서 일으킨 반란이었으나, 사마소에게 진압당하며 위나라 내부 혼란을 야기하고 사마씨의 위나라 찬탈에 영향을 주었다. -
조위의 반란 -
관구검·문흠의 난
관구검·문흠의 난은 255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과 문흠이 사마씨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사마씨 타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 난은 사마씨의 권력 강화를 가속화시키고 위나라 멸망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중국의 쿠데타 -
베이징 정변
1924년 펑위샹이 봉천파와 결탁하여 일으킨 베이징 정변은 직예파 수장 차오쿤 축출과 선통제 폐위 등 중국 정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군벌 간 권력 다툼을 심화시켰다. -
중국의 쿠데타 -
정난의 변
정난의 변은 1399년부터 1402년까지 명나라 연왕 주체가 건문제의 삭번 정책에 반발하여 일으킨 내전으로, 주체의 승리로 끝나 건문제 실종 및 주체의 영락제 즉위, 수도 천도, 환관 세력 중용 등 명나라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 배경
238년 위나라의 황제 조예는 병으로 쓰러져 후사를 조방으로 정하고 조우, 조상 등에게 조방을 부탁했다. 그러나 유방과 손자는 조상을 대장군으로, 사마의를 그 보좌역으로 삼도록 조예를 설득했다. 조우는 사마의를 불러들이지 말라고 했으나, 유방과 손자는 조예에게 조서를 쓰게 하여 사마의를 불렀고, 결국 조우, 하후헌, 조조, 진랑은 쫓겨났다.
239년 조예가 죽고 조방이 즉위하자, 조진의 아들 조상이 정권을 잡았다. 조상은 하안 등의 건의로 사마의를 태부(삼공보다 지위는 높지만 정치적 실권은 없고 사실상의 명예직)로 올려 권력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많은 공적을 세워 군사적 실적이 컸고, 군권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사마의는 촉한과의 최전선을 맡고 있었기에 조상이 내정을, 사마의가 군사를 관할하는 형태였다. 초기에는 조상이 사마의를 존경하여 큰 갈등은 없었다.
2.1. 조상 정권의 전횡
239년 조예(曹叡)가 죽고 조방(曹芳)이 즉위하면서, 조상(曹爽)이 정권을 잡았다. 조상은 하안(何晏)의 건의로 사마의(司馬懿)를 태부(太傅)로 삼아 병권을 장악했다. 동생 조희(曹羲)를 중령군(中令軍), 조훈(曹訓)을 무위장군(武威將軍), 조언(曹彦)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각각 어림군 3000명을 거느려 궁에 드나들게 했다. 하안, 등양(鄧颺), 정밀(丁謐)에게는 상서(尙書) 벼슬을, 필궤(畢軌)는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승(李勝)은 하남윤(河南尹)으로 삼아 조상의 세력은 날로 커져갔다.
사마의는 이에 두문불출하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고, 조상은 사냥을 즐기며 동생 조희와 환범(桓範)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247년 6월 또는 7월에는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정치에서 물러나자, 낙양에는 "하(안), 등(양), 정(미)이 황도를 혼란시킨다"는 말이 돌았다.
248년 4월 또는 5월, 궁궐 환관인 장당(張當)은 불법으로 11명의 여성을 황실 후궁에서 빼내 조상에게 바쳤다. 조상과 측근들은 사마의가 병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장당과 함께 황제 조방을 몰아내고 조상을 황위에 올릴 음모를 꾸몄다.
조상의 지지자 이승은 형주의 자사로 재임명되기 전 사마의를 방문했다. 사마의는 이승의 방문 목적을 알고 쇠약하고 연약한 척했다. 이승은 사마의가 하인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거나 옷을 입을 수 없고, 죽을 먹는 것조차 옷에 묻히는 것을 보고 병이 깊다고 생각했다. 사마의는 일부러 이승의 말을 잘못 알아듣는 척하며, 곧 죽을 것이니 아들들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사는 조상에게 돌아가 사마의가 곧 죽을 것이라 보고했고, 조상은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었다.
244년 (정시 5년), 조상은 큰 공을 세우기 위해 촉한 침공(흥세의 역)을 꾀했지만, 사마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대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해 양자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247년 5월, 사마의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병을 핑계로 은퇴했고, 조상과 하안은 더욱 전횡을 강화하며 국가 전복을 꾀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2.2. 사마의의 은인자중
239년 조예가 죽고 조방이 즉위하자, 조상이 정권을 잡았다. 조상은 하안의 건의로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삼아 병권을 장악하고, 동생들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키웠다.
이에 사마의는 두문불출하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다. 조상은 사냥을 즐기며 측근들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247년 5월, 사마의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병을 핑계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248년 4월 또는 5월, 조상과 그 측근들은 사마의가 병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황제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으나, 여전히 사마의를 경계했다.
조상의 지지자인 이승은 형주 자사로 재임명되기 전 사마의를 방문했다. 사마의는 쇠약하고 연약한 척 연기하여 이승을 속였다. 이승은 조상에게 사마의가 곧 죽을 것이라 보고했고, 조상은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었다.
244년 조상은 촉한 침공을 꾀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촉한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3. 과정
249년, 조상이 조방과 함께 선제 조예의 고평릉으로 세 아우와 심복 하안 등을 거느리고 간 사이,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진군했다.
사마의는 사도 고유에게 대장군직을 맡겨 조상의 진지를, 태복 왕관에게 중령군직을 맡겨 조희의 진지를 점거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예의 부인이던 곽태후를 찾아가 태위 장제와 상서령 사마부를 시켜 상주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때 수문장 엄세가 궁수들을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하려 했으나, 편장 손겸의 설득으로 중지했다. 조상의 수하 사마 노지는 참군 신창과 상의해 누이 신헌영과 함께 황제를 찾아갔고, 환범은 부하 사번을 물리치고 겨우 성을 빠져나갔다.
사마의는 허윤과 진태를 불러 조상에게 병권만 거둔다는 말을 전하게 하고, 전중교위 윤대목에게도 같은 명을 내렸다. 급보를 들은 조상이 망설이는 동안, 환범과 주부 양종은 군사를 일으켜 사마의를 무찌르자는 강경 대책을 주장했지만, 허윤과 진태, 윤대목이 잇따라 명을 전해오자 결국 병권만 넘기기로 결정했다.
조상이 인수를 허윤과 진태에게 넘기자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고, 몇몇 관료들만이 남아 사마의에게 투항했고, 사마의는 그들을 저택에 감금했다.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낸 뒤, 조상과 3형제, 그 가족, 일당을 모두 붙잡아 처형했고 재산은 몰수해 국고에 넣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인 문숙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3.1. 사마의의 쿠데타
249년 조상이 조방과 함께 선제 조예의 고평릉으로 세 아우와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리고 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진군했다.
사마의는 사도 고유에게 대장군직을 맡겨 조상의 진지를, 태복 왕관에게 중령군직을 맡겨 조희의 진지를 점거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예의 부인이던 곽태후를 찾아가 태위 장제와 상서령 사마부를 시켜 상주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에 수문장 엄세가 궁수들을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하려 했으나, 편장 손겸의 설득으로 중지했다. 조상의 수하 사마 노지는 참군 신창과 상의해 누이 신헌영과 함께 황제를 찾아갔고, 환범은 부하 사번을 물리치고 겨우 성을 빠져나갔다.
사마의는 허윤과 진태를 불러 조상에게 병권만 거둔다는 말을 전하게 하고, 전중교위 윤대목에게도 같은 명을 내렸다. 급보를 들은 조상이 망설이는 동안, 환범과 주부 양종은 군사를 일으켜 사마의를 무찌르자는 강경 대책을 주장했지만, 허윤과 진태, 윤대목이 잇따라 명을 전해오자 결국 병권만 넘기기로 결정했다.
조상이 인수를 허윤과 진태에게 넘기자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고, 몇몇 관료들만이 남아 사마의에게 투항했다. 사마의는 그들을 저택에 감금했다.
한편,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낸 뒤, 조상의 측근 여섯 사람을 옥에 가두고 조상은 물론 3형제와 그 가족, 일당을 모두 붙잡아 처형했다. 재산은 몰수해 국고에 넣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인 문숙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사마의는 태위 장제의 건의로 노지와 신창을 복직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조상의 측근 6사람도 모두 옥사하거나 처형당했다.
이후 사마의는 조방에 의해 승상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지면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 이로써 조씨 정권이 멸망하고 사마씨 정권이 세워졌다.
3.2. 조상의 저항과 실패
249년 조상이 조방과 함께 선제 조예의 고평릉으로 세 아우와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리고 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진군했다.
사마의는 사도 고유에게 대장군직을 맡겨 조상의 진지를, 태복 왕관에게 중령군직을 맡겨 조희의 진지를 점거하게 했다. 자신은 조예의 부인이던 곽태후를 찾아가 태위 장제와 상서령 사마부를 시켜 상주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에 수문장 엄세가 궁수들을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하려 했으나 편장 손겸의 설득으로 중지했다. 조상의 수하 사마 노지는 참군 신창과 상의해 누이 신헌영과 함께 황제를 찾아갔고, 환범은 부하 사번을 물리치고 겨우 성을 빠져나갔다.
사마의는 허윤과 진태를 불러 조상에게 병권만 거둔다는 말을 전하게 하고 전중교위 윤대목에게도 같은 명을 내렸다. 급보를 들은 조상이 망설이는 동안 환범과 주부 양종은 군사를 일으켜 사마의를 무찌르자는 강경 대책을 주장했지만, 허윤과 진태, 윤대목이 잇따라 명을 전해오자 결국 병권만 넘기기로 결정했다.
조상이 인수를 허윤과 진태에게 넘기자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몇몇 관료들만이 남아 사마의에게 투항했고, 사마의는 그들을 저택에 감금했다.
한편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낸 뒤 조상의 측근 여섯 사람을 옥에 가두고 조상은 물론 3형제와 그 가족, 일당을 모두 붙잡아 처형했고 재산은 몰수해 국고에 넣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인 문숙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3.3. 조상 일파의 처형
249년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이를 근거로 조상과 그의 측근들을 옥에 가두고, 조상 3형제와 그 가족 및 일당을 모두 붙잡아 처형했다. 이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고에 들어갔다. 조상의 종제인 문숙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하안, 정비, 등양, 벽귀, 이승은 가족, 친척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사마의는 태위 장제가 조진의 공로를 고려해야 한다고 건의했음에도, 조상 일파를 처형했다. 다만, 조상의 부하인 노지와 양종은 조상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 사마의에게 감명을 주어 사면받고 석방되었다.
환범은 낙양에서 도망쳐 조상에게 합류하려 했으나, 사번에게 "태부(사마의)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4. 결과
249년 2월 9일, 낙양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조상과 그의 측근들을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 조상의 부하였던 노지와 양종은 조상이 사마의에게 항복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지만, 사마의는 이들의 충심을 높이 사 오히려 죄를 묻지 않고 풀어주었다.
환범은 낙양에서 도망쳐 조상에게 합류하려다 창평문을 지키던 사번에게 "태부(사마의)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말하며 함께 갈 것을 권했다. 사번은 환범을 따라갔지만, 결국 포기하고 사마의에게 투항했다. 사마의는 환범을 거짓 고발 죄로 처벌했다.
사마의는 조상 본인과 그 일족을 연금 상태로 감시하다가, 정변 4일 후 조상, 하안, 정비, 등양, 벽귀, 이승 등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처형했다. 장제가 조진의 공을 고려해 간청했지만, 사마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4.1. 권력 장악과 위나라의 멸망
249년 2월 9일, 낙양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조상과 그의 측근인 정비, 등양, 하안, 벽귀, 이승, 환범을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 이들은 환관 장당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강제가 조진의 공로를 들어 조상 형제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사마의는 거절했다. 조상의 부하 노지와 양종은 조상이 사마의에게 항복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사마의는 이들을 용서하고 석방했다.
환범은 낙양에서 도망쳐 조상에게 합류하려다 창평문을 지키던 사번에게 "태부(사마의)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말하며 함께 갈 것을 권했다. 사번은 환범을 따라갔지만, 결국 포기하고 사마의에게 투항했다. 사마의는 환범을 거짓 고발 죄로 처벌했다.
249년 3월, 조방은 사마의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늘리고 특권을 부여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거절했다. 250년 1월 또는 2월, 조방이 구석을 하사했을 때도 사마의는 받지 않았다. 250년 2월 또는 3월, 조방은 낙양에 사마 가문을 위한 사당을 짓고, 사마의의 개인 인원을 늘리고, 아들 사마융과 사마륜을 향후로 봉했다.
251년, 왕릉과 령호우는 사마의를 몰아내고 조방 대신 조표를 옹립하려는 수춘의 난을 일으켰다. 사마의는 왕릉을 진압하고 항복을 받아냈으나, 왕릉은 낙양으로 호송되던 중 자결했다. 사마의는 조표를 포함한 왕릉의 공모자들을 처형했다.
251년 9월 7일 사마의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위나라의 권력을 이어받아 정적을 제거했다. 사마 가문의 힘이 강해지면서 조씨 가문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266년 2월,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은 조환에게 선양받아 서진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4.2. 역사적 평가와 의의
고평릉의 변 이후, 사마의는 조상과 그 일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249년 3월, 조방이 사마의를 승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거절했다. 250년 1월 또는 2월에는 조방이 구석을 하사하려 했으나, 이 역시 받지 않았다. 같은 해 2월 또는 3월, 조방은 낙양에 사마 가문을 위한 사당을 짓고 사마의 가문의 인원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251년, 왕릉과 령호우가 사마의를 몰아내려 수춘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왕릉은 자결했다. 사마의는 왕릉의 공모자들을 처형했다.
같은 해 9월 7일 사마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권력을 이어받아 위나라 조정을 통제했다. 사마 가문의 힘이 강해지면서 조씨 가문의 영향력은 약해졌고, 결국 266년 2월,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조환으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아 서진을 건국했다.
사마의는 조상과 그 일족을 감시하고, 정변 4일 후 조상 등이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처형했다. 장제가 조진의 공을 고려해 간청했지만, 사마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상의 일당인 하안, 정멱, 등양, 필궤, 이승, 환범 등도 처형되었다.
조상의 측근 중 노지와 양종은 사마의에게 항복하지 말고 황제를 옹위하여 저항할 것을 권했으나, 조상이 항복한 후 체포되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들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죄를 묻지 않았다.
249년 2월, 조방은 사마의에게 승상 직책과 함께 구석의 예를 더하고, 조정에서 배례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했다. 사마의는 승상 자리를 사퇴했지만, 그의 권력은 황제를 능가하게 되었다. 사마의 사후에도 권력은 아들들에게 계승되었으나, 사마씨 일족의 전횡은 반발을 초래하여 여러 차례 반란(수춘 삼반)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