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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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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상(曹爽)은 조위의 인물로, 명제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얻었으나 사마의의 쿠데타로 몰락했다. 명제 사후 어린 황제 조방을 보좌하는 대장군이 되었고, 측근들을 등용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촉한 정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사마의의 견제를 받았다.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은퇴하자 안심했으나, 사마의의 쿠데타로 하안, 등양 등 측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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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상
한자 표기曹爽
로마자 표기Cáo Shuǎng
소백 (昭伯)
작위무안후 (武安侯)
출생미상
사망일249년 2월 9일
사망 장소낙양, 하남
아버지조진
친척조희 (형제)
조훈 (형제)
조택 (형제)
조연 (형제)
조애 (형제)
하후상의 아내 (고모)
하후현 (사촌)
하후휘 (사촌)
직업군사 장군, 섭정
관직
녹상서사 (錄尚書事)미상 – 249년 2월 5일
군주조방
대장군 (大將軍)239년 1월 19일 – 249년 2월 5일
군주 (대장군)조예 / 조방
선임자 (대장군)조우
무위장군 (武衛將軍)227년 – 239년 1월 19일
군주 (무위장군)조예

2. 사적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작위(소릉후)를 계승했다. 명제가 태자일 시절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고, 명제 즉위 후 거듭 승진하여 무위장군에 이르렀으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명제가 죽을 때 대장군 · 가절월 · 독중외제군사 · 녹상서사로 삼아, 태위 사마의와 함께 어린 새 황제 조방을 도우라는 명제의 유조를 받았다.[8][9][10] 원래 명제는 연왕 조우에게 대장군을 맡기고 영군장군 하후헌 · 둔기교위 조조 · 효기장군 진랑 그리고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손자가 조우 · 진랑 ·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명제는 조우 · 하후헌 · 진랑 · 조조를 면직하고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았으며 또 사마의를 불러들여 조상과 함께 조명을 맡겼다.[8][9][10] 조방이 즉위하고서 시중이 더해졌고, 무안후에 봉해져 식읍 1만 2천 호를 받았으며 검리상전 · 입조불추 · 찬배불명의 특별 대우를 받았다. 명제 시절, 황제는 하안 · 등양 · 정밀 · 이승 · 필궤 등 부화한 친교를 맺는 무리들을 쫓아냈는데, 조상은 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등용하고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11]

등양 등은 천하에 조상의 위명을 떨치게 하려는 목적으로 촉한을 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상은 사마의의 반대를 거부하고 정시 5년(244년)에 낙곡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 원정은 무리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골짜기로 들어간 지 수백 리, 길이 험준하여 더 진격할 수 없었다. 이때에도 조상의 심복들은 계속 싸우자는 의견이었으나, 참군 양위가 강력하게 퇴각을 권하였고, 조상은 싫었으나 결국 퇴각했다.[11] 당시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퇴로가 끊어질 것을 염려했고, 하후현이 이를 전하자 조상은 물러났다. 그러나 촉한의 대장군 비의가 이미 길을 끊어, 조상은 악전고투 끝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12]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 싸움에서 밀려났고 얼마 후 사마의에 의해 그의 심복 하안, 등양, 이승 등과 함께 삼족이 모두 처형당했다(고평릉의 변).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아버지가 죽은 후 소릉후 작위를 계승했다. 명제가 태자일 시절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고,[8] 명제 즉위 후 거듭 승진하여 무위장군에 이르렀으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8] 조예 (명제)의 동궁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 조예가 즉위하자 산기상시가 되었고, 이윽고 무위장군이 되는 등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239년 조예가 병상에 눕자, 조상은 대장군 지위를 하사받고, 사마의와 함께 유자이자 황태자인 조방 (일설에는 조창의 손자)을 보좌하도록 명해졌다.[8][9][10] 원래 명제는 연왕 조우에게 대장군을 맡기고 영군장군 하후헌 · 둔기교위 조조 · 효기장군 진랑 그리고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손자가 조우 · 진랑 ·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8][9][10] 결국 명제는 조우 · 하후헌 · 진랑 · 조조를 면직하고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았으며 또 사마의를 불러들여 조상과 함께 조명을 맡겼다.[8][9][10] 조예가 36세로 붕어하고 조방 (제왕)이 즉위하자, 조상은 시중 지위를 받으며, "검履상전(검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옥좌에 오름)"・"입조불추(조정에 들어갈 때 종종걸음으로 뛰지 않음)"・"알찬불명(황제를 알현할 때 실명을 부르지 않음)"이라는 특권을 받았다.

명제 시절, 황제는 하안 · 등양 · 정밀 · 이승 · 필궤 등 부화한 친교를 맺는 무리들을 쫓아냈는데, 조상은 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등용하고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11] 위나라는 조비 이래로 황족 등 근친자를 정치·군사 양면에서 멀리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먼 친척인 조경 (조등의 종현손)은 이를 우려하여, 일족을 등용하여 번병(국가를 지키는 벽)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조상은 이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다.

능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조상과 그의 형제인 조희(曹羲)와 조순(曹訓)은 위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또한 더 큰 영향력과 지지를 가진 공동 섭정 사마의와 자주 대립했다. 243년, 사마의의 지위는 또 다른 성공적인 작전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위나라의 경쟁국인 동오의 장군 제갈각이 지속적으로 사자를 보내 수춘 (현재 안후이 성 서현 인근)에 침략을 준비하게 하자, 사마의는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오 국경 근처의 서현(舒縣), 노강군(盧江郡)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나라 황제 손권은 즉시 제갈각에게 채상(柴桑), 예장군(豫章郡)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사마의는 싸움 없이 10만 명이 넘는 적을 물리치고 국경을 지켜 수춘을 공격으로부터 구했다는 칭송을 받으며 그의 인기와 영향력이 즉시 커졌다. 조상은 사마의의 승리에 불안감을 느껴 황제 조방을 설득하여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승진시켰다. 겉으로는 사마의의 승진이었지만, 태부의 자리는 군사 문제에 대한 실제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등양 등은 천하에 조상의 위명을 떨치게 하려는 목적으로 촉한을 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상은 사마의의 반대를 거부하고 정시 5년(244년)에 낙곡으로 쳐들어갔다.[11] 그러나 이 원정은 무리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골짜기로 들어간 지 수백 리, 길이 험준하여 더 진격할 수 없었다. 이때에도 조상의 심복들은 계속 싸우자는 의견이었으나, 참군 양위가 강력하게 퇴각을 권하였고, 조상은 싫었으나 결국 퇴각했다.[11] 당시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퇴로가 끊어질 것을 염려했고, 하후현이 이를 전하자 조상은 물러났다. 그러나 촉한의 대장군 비의가 이미 길을 끊어, 조상은 악전고투 끝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12] 조상의 인기와 영향력은 패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사마의는 처음부터 이 작전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더욱 증가했다.

조상이 경계를 늦추도록 속이기 위해 사마의는 247년 5월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병을 핑계로 은퇴했다. 그는 더욱 병들고 늙은 척했다. 같은 해, 조상은 이사, 등양, 정밀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248년 겨울, 조상의 측근인 이사는 위나라 황실 조정에 의해 형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이사가 낙양을 떠나 형주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조상은 그를 보내 사마의를 감시하게 했다. 이사가 사마의가 실제로 병들었고 이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다고 보고하자 조상과 그의 추종자들은 기뻐했다. 이사에 따르면, 사마의는 "형주"를 "병주"로 잘못 들었다고 한다. 조상은 사마의가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 경계를 늦추기 시작했다.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 싸움에서 밀려났고 얼마 후 사마의에 의해 그의 심복 하안, 등양, 이승 등과 함께 삼족이 모두 처형당했다(고평릉의 변).

2. 2. 권력 독점과 실정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작위(소릉후)를 계승했다. 명제가 태자일 시절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고, 명제 즉위 후 거듭 승진하여 무위장군에 이르렀으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명제가 죽을 때 대장군 · 가절월 · 독중외제군사 · 녹상서사로 삼아, 태위 사마의와 함께 어린 새 황제 조방을 도우라는 명제의 유조를 받았다.[8][9][10] 원래 명제는 연왕 조우에게 대장군을 맡기고 영군장군 하후헌 · 둔기교위 조조 · 효기장군 진랑 그리고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손자가 조우 · 진랑 ·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명제는 조우 · 하후헌 · 진랑 · 조조를 면직하고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았으며 또 사마의를 불러들여 조상과 함께 조명을 맡겼다. 조방이 즉위하고서 시중이 더해졌고, 무안후에 봉해져 식읍 1만 2천 호를 받았으며 검리상전 · 입조불추 · 찬배불명의 특별 대우를 받았다.

명제 시절, 황제는 하안, 등양, 정밀, 이승, 필궤 등 부화한 친교를 맺는 무리들을 쫓아냈는데, 조상은 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등용하고 자기 심복으로 삼았다.[11] 처음에는 사마의(司馬懿)를 아버지와 같이 대했지만, 하안 등 측근들의 제안으로 권력을 독점하려 획책하여, 사마의를 태부로 추대하고, 사실상의 명예직으로 밀어냄으로써 그의 권력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사마의의 군사적 실적이 컸고, 그 군권은 그대로였다.

243년, 사마의의 지위는 동오의 장군 제갈각의 침략 준비를 격퇴한 성공적인 작전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조상은 사마의의 승리에 불안감을 느껴 황제 조방을 설득하여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승진시켰다. 겉으로는 사마의의 승진이었지만, 태부의 자리는 군사 문제에 대한 실제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한편 조상의 측근들은 명성은 있지만 실적이 부족했다. 그래서 큰 공을 세우려 244년 (정시 5년)에 촉한 정벌을 시도하지만(흥세의 역), 험한 지형에 막혀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이 지체되고, 촉의 왕평의 완강한 저항도 있어서 처참하게 실패했다.[11] 당시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퇴로가 끊어질 것을 염려했고, 하후현이 이를 전하자 조상은 물러났다. 그러나 촉한의 대장군 비의가 이미 길을 끊어, 조상은 악전고투 끝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12] 또한 보급에 ·족을 동원했지만, 수송 등의 사고로 인한 희생자가 적지 않게 발생하여, 그들의 불만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246년(정시 7년)에 오(吳)의 손권주연이 이끄는 군을 파견하여 저중에 쳐들어오자, 조상은 중앙 조정의 대군 지휘를 스스로 맡아, 이를 맞아 싸웠다(두 번째 저중 전투). 조상의 대패로 희생자도 수만 명 이상이 되었고, 주연에게 크게 패하여 패주했다. 그러나 주연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저중을 넘어 위군을 추격하여 수천여 명을 참수하여, 위군은 대패를 당했다. 그 후, 하안 등이 정치를 농단했기 때문에, 위(魏)의 정치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사마의는 이 상황을 우려하여, 또한 보신을 위해 "자신은 고령이다"라는 이유로, 병을 칭하며 은둔해 버렸다. 248년 겨울, 조상의 측근인 이사는 위나라 황실 조정에 의해 형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이사가 낙양을 떠나 형주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조상은 그를 보내 사마의를 감시하게 했다. 이사가 사마의가 실제로 병들었고 이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다고 보고하자 조상과 그의 추종자들은 기뻐했다. 이사에 따르면, 사마의는 "형주"를 "병주"로 잘못 들었다고 한다. 조상은 사마의가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 경계를 늦추기 시작했다.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 싸움에서 밀려났고 얼마 후 사마의에 의해 그의 심복 하안, 등양, 이승 등과 함께 삼족이 모두 처형당했다(고평릉의 변).

2. 3. 고평릉의 변과 몰락

조상은 아버지가 죽은 후 소릉후 작위를 계승했다.[8][9][10] 명제가 태자일 시절부터 친했으며, 명제 즉위 후 무위장군으로 승진하여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명제가 죽을 때 조상은 대장군 · 가절월 · 독중외제군사 · 녹상서사로 임명되어 태위 사마의와 함께 어린 황제 조방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8][9][10] 원래 명제는 연왕 조우에게 대장군을 맡기려 했으나, 유방손자가 조우 등을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하여, 결국 조상이 대장군이 되고 사마의와 함께 조명을 받게 되었다.[8][9][10]

조방 즉위 후, 조상은 시중이 더해지고 무안후에 봉해져 식읍 1만 2천 호를 받았으며, 검리상전 · 입조불추 · 찬배불명의 특별 대우를 받았다. 명제 시절 쫓겨났던 하안, 등양, 정밀, 이승, 필궤 등을 다시 불러들여 등용하고 심복으로 삼았다.[11] 등양 등은 조상의 위명을 떨치기 위해 촉한을 칠 것을 권했고, 조상은 사마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시 5년(244년) 낙곡으로 쳐들어갔으나,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무리한 원정이었다. 조상은 참군 양위의 강력한 퇴각 권유로 퇴각했으나,[11] 촉한의 대장군 비의가 이미 길을 끊어, 악전고투 끝에 큰 피해를 입고 겨우 빠져나왔다.[12]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 싸움에서 밀려났다. 조상은 사마의에게 항복하였으나, 사마의는 약속을 어기고 조상과 그의 가족을 체포하여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고평릉의 변).[6] 환관 장당의 "조상(조위) 등이 3월에 모반을 계획했다"는 자백을 근거로, 위(조위)의 황실 분가[7] 출신인 조상(조위) 일족을 경계한 사마의 부자에 의해 하안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한 혐의로 투옥되어, 즉시 삼족을 멸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239년 조예가 죽을 때 사마의와 함께 자신의 아들이자 다음 황제인 조방을 보좌하도록 부탁받았다. 하지만 심복 하안의 진언으로 사마의로부터 실권을 빼앗아 권력을 휘둘렀고 사마의의 노쇠를 가장한 연기에 속아 안심하고 번번이 사냥을 개최했다.

그러나 249년 황제 조방과 함께 사냥을 나와 있던 와중에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을 빼앗겼고 부하 환범조방을 끼고 사마의를 토벌하도록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결국 사마의에게 일파 모두 붙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가계

6. 각주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
[2] 서적 Chronicles of the Three Kingdoms
[3] 서적 Sanguozhi vol. 43
[4] 서적 Sanguozhi vol. 9
[5] 서적 世語 魏志』曹真伝付曹爽伝
[6] 서적
[7] 서적 魏志』曹真伝付曹爽伝
[8] 서적 삼국지 권3 명제기 http://zh.wikisource[...]
[9] 서적 한진춘추 http://zh.wikisource[...]
[10] 서적 삼국지 권14 정곽동유장유전 http://zh.wikisource[...]
[11] 서적 제하후조전 http://zh.wikisource[...] 위의 책
[12] 서적 한진춘추 http://zh.wikisource[...]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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