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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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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리스 조약은 1493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이다. 이 조약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17주 사이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고, 분쟁 지역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르투아와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지만, 프랑스는 두 지역에 대한 법적 권리와 전초 기지를 유지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는 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황제 간의 평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지위, 부르고뉴 백국, 아르투아, 샤롤레, 네베르 등의 영토 반환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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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스 조약
조약 정보
조약 이름상리스 조약
다른 이름몽생장 조약 (Traité de Mons-en-Laonnais)
바소네 조약 (Traité de Basonne)
유형평화 조약
위치상리스
서명일1493년 5월 23일
교전 세력
교전 1합스부르크 가문
교전 2프랑스
교전 3느베르 백작 장 2세
조약 조건
조건 1샤를 8세는 아르투아, 부르고뉴, 프랑슈콩테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양도하다.
조건 2샤를 8세는 루슬롱과 세르다뉴를 유지하다.

2. 배경

용담공 샤를이 1477년 낭시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전사하자,[4]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왕자령이었던[5] 부르고뉴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의 딸 부귀공 마리는 막시밀리안 대공과 1477년 8월에 혼인한 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상속지를 지키려 했다.[6]

이 분쟁은 1479년 프랑스가 긴가트 전투에서 패배하며 마리와 막시밀리안에게 유리하게 끝났다.[6] 그럼에도 마리가 1482년에 사망하자 양국은 다시 아라스 조약을 맺었다. 막시밀리안은 아라스가 포함된 아르투아 백작령과 부르고뉴를 프랑스에 넘겨야만 했고, 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와 루이 11세의 아들 샤를 8세의 약혼에 따른 지참금으로 부르고뉴의 일부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6]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8세가 브리타뉴의 상속녀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면서 기존의 약혼자인 마르게리타와는 파혼하였다. 안 드 브르타뉴는 본래 막시밀리안 1세와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양측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마르게리타는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3. 조약 체결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침공을 준비하면서 1493년에 주변 국가들과 상호 중립을 위한 평화 조약을 맺었다. 막시밀리안 1세와도 상리스 조약을 체결하여 일부 부르고뉴 영지를 돌려주었다.[3]

상리스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모든 적대 행위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분쟁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도되었고 아르투아와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두 지역 모두에서 강력한 법적 권리와 전초 기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1] 디종을 수도로 하는 부르고뉴 공국(돌을 수도로 하는 프랑슈콩테와 혼동하지 말 것)은 1482년에 프랑스에 양도되어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3. 1. 주요 내용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침공 준비를 위해 1493년에 주변 국가들과 상호 중립을 위한 평화 조약을 맺었다. 막시밀리안 1세와도 상리스 조약을 맺어 일부 부르고뉴 영지를 돌려주었다.[3] 상리스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17주 사이의 적대 행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추가적으로 분쟁 지역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겼고 아르투아와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두 지역에 여전히 강력한 법적 권리와 전초 기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7] 부르고뉴 공국(디종을 수도로 하며, 을 수도로 하는 부르고뉴 백작령과 혼동을 유의해야함)은 1482년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상리스 조약은 48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번호내용
1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황제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2–3, 13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1480–1530)의 지위.
4프랑스 샤를 8세와 오스트리아의 필리프 간의 우호 약속.
5–9부르고뉴 백국("부르고뉴"), 아르투아, 샤롤레 ("샤롤로이스") 및 네베르 ("seigneurie de Noiers")는 신성 로마 황제에게 반환되지만, 에댕, 에르쉬르라리스 ("에르") 및 베튄 ("베튀네")의 도시와 성은 프랑스 왕과 그의 원수들이 소유한다.
10플랑드르, 아르투아 및 콩플랑의 가문은 신성 로마 황제에게 반환되어 인도된다.
11프랑스 왕은 마코네 ("마코네"), 오세루아 및 바르쉬르센의 백국을 누릴 것이다.
18이 평화 조약은 캉브레 주교, 캉브레 백국 백작, 그 성직자, 마을 및 성의 동의와 합의하에 체결되었다.


4. 조약 체결 후

Traité de Senlis프랑스어의 조항에 따라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모든 적대 행위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더욱이 분쟁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도되었고 아르투아와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두 지역 모두에서 강력한 법적 권리와 전초 기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1] 1482년에 프랑스에 양도된 부르고뉴 공국(수도 디종, 수도가 돌인 프랑슈콩테와 혼동하지 말 것)은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상리스 조약에는 48개의 조항이 있었으며, 이를 "항목"이라고 불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번호내용
1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황제 사이에 평화가 맺어졌다.
2–3, 13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1480–1530)의 지위.
4프랑스 샤를 8세와 오스트리아의 필리프 간의 우호 약속.
5–9부르고뉴 백국("부르고뉴"), 아르투아, 샤롤레 ("샤롤로이스") 및 네베르 ("seigneurie de Noiers")는 신성 로마 황제에게 반환되지만, 에댕, 에르쉬르라리스 ("에르") 및 베튄 ("베튀네")의 도시와 성은 프랑스 왕과 그의 원수들이 소유한다.
10플랑드르, 아르투아 및 콩플랑의 가문은 신성 로마 황제에게 반환되어 인도된다.
11프랑스 왕은 마코네 ("마코네"), 오세루아 및 바르쉬르센의 백국을 누릴 것이다.
18이 평화 조약은 캉브레 주교, 캉브레 백국 백작, 그 성직자, 마을 및 성의 동의와 합의하에 체결되었다.


참조

[1] 서적 Potter
[2] 지식백과 샤를 8세 [Charles VIII] - 이탈리아 원정의 시작
[3]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4]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5]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6]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7] 서적 Po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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