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1. 개요
막시밀리안 1세는 145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마리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을 계승하고, 로마 왕으로 선출된 후 1493년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정략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고, 군사 개혁과 예술 후원을 통해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최후의 기사'로 불리며, 전쟁과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1519년 사망 후 손자 카를 5세가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
| 칭호 | 신성 로마 황제 |
|---|---|
| 즉위 | 1508년 2월 4일 |
| 대관식/선포식 | 트렌토 |
| 이전 통치자 | 프리드리히 3세 |
| 다음 통치자 | 카를 5세 |
| 칭호 1 | 로마인의 왕/독일 국왕 |
| 즉위 1 | 1486년 2월 16일 – 1519년 1월 12일 |
| 대관식 1 | 1486년 4월 9일 |
| 이전 통치자 1 | 프리드리히 3세 |
| 다음 통치자 1 | 카를 5세 |
| 형태 1 | 공동 통치 |
| 섭정 1 | 프리드리히 3세 (1486–1493) |
| 칭호 2 | 오스트리아 대공 |
| 즉위 2 | 1493년 8월 19일 – 1519년 1월 12일 |
| 이전 통치자 2 | 프리드리히 5세 |
| 다음 통치자 2 | 카를 5세 |
| 칭호 3 | 부르고뉴 공작 (여성의 권리로) |
| 즉위 3 | 1477년 8월 19일 – 1482년 3월 27일 |
| 이전 통치자 3 | 마리 |
| 다음 통치자 3 | 펠리페 4세 |
| 형태 3 | 공동 통치 |
| 섭정 3 | 마리 |
| 출생일 | 1459년 3월 22일 |
| 출생지 | 비너노이슈타트, 인너오스트리아 |
| 사망일 | 1519년 1월 12일 (59세) |
| 사망지 | 벨스, 오버외스터라이히주 |
| 매장지 | 비너노이슈타트, 오스트리아 |
| 배우자 | 마리 드 부르고뉴 (1477년 8월 19일 결혼, 1482년 3월 27일 사망) 안 드 브르타뉴 (1490년 12월 19일 결혼, 1492년 2월 15일 혼인 무효)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1494년 3월 16일 결혼, 1510년 12월 31일 사망) |
| 자녀 | 펠리페 1세 마르가레테 |
| 서자 | 게오르크, 리에주 공방장 레오폴도, 코르도바 주교 |
| 가문 | 합스부르크 |
| 아버지 | 프리드리히 3세 |
| 어머니 | 엘레오노르 데 아비스 |
| 종교 | 가톨릭교회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독일어 | Maximilian I. |
|---|---|
| 별칭 | 막시밀리안 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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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공작 -
루돌프 1세 (보헤미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루돌프 1세는 독일 왕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로, 1306년부터 1307년까지 보헤미아 왕으로 재위했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짧고 혼란스러운 통치를 마쳤으며, 그의 죽음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헤미아 왕위 획득 시도를 좌절시키고 왕국 내 혼란을 야기했다. -
15세기 신성 로마 황제 -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4세로, 그의 치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으며, 특히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를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
15세기 신성 로마 황제 -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는 카를 4세의 아들로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을 역임했으며, 헝가리 왕위 계승, 니코폴리스 전투, 콘스탄츠 공의회, 내정 개혁 시도, 후스 전쟁 등을 겪고 1433년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가 1437년 사망했다. -
16세기 신성 로마 황제 -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1556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526년부터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1521년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을 지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분가를 창시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틀을 마련, 종교 갈등을 조정하여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이끌어냈고 중앙집권화와 가톨릭 부흥을 추진했다. -
16세기 신성 로마 황제 -
막시밀리안 2세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종교적 관용 정책과 예술 장려를 통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갈등 완화를 시도했으나 외교적 한계도 드러냈다.
2. 어린 시절
145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공주 레오노르 데 아비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꿈에서 위험을 경고해준 테베사의 막시밀리안이라는 성인의 이름을 따서 막시밀리안이라 이름지었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고뉴의 섭정이자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며, 1479년 8월에는 긴나르 전투에서 루이 11세의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1482년 부인 마리가 사망했으나 네덜란드 의회가 막시밀리안의 장남 필리프의 섭정 노릇을 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같은 해 12월, 아라스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게 부르고뉴 공작령과 피카르디를 내어주고 플랑드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차지했다. 또한 딸 마르가레테와 샤를(훗날 샤를 8세)의 약혼을 성사시키고, 지참금으로 아르투아, 샤롤레, 프랑슈콩테를 넘겨주었다.
1485년 친위 쿠데타로 아들의 섭정권을 얻었으나, 네덜란드 반란군과 계속 내전을 치러야 했다. 같은 해 헝가리의 마티아슈 1세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포함한 영토 대부분을 점령당하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도주하는 굴욕을 겪었다. 1486년 4월 9일 아헨에서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고, 카스티야, 영국, 브르타뉴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반란군을 압박했다.
1490년 안과 결혼하려 했으나 샤를 8세의 브르타뉴 침공으로 무산되었고, 샤를 8세의 약혼녀로 보내진 딸 마르가레테가 돌아왔다. 같은 해, 사촌 지기스문트로부터 티롤을 양도받았다.
이후 헝가리군이 마티야슈 1세의 사망으로 약화되자, 빈을 포함한 오스트리아 영토를 탈환하고자 했다. 1491년 블라디슬라프 2세와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확보했다.
1493년 상리스 조약을 체결하여 부르고뉴 공국과 저지대 지방(베네룩스 3국)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통치를 용인받았다.
2.1. 출생과 가족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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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와 15세기 당시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는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한 직책 중 하나였고, 독일 지역에는 여러 영방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강력한 선제후들에 의해 1440년, 평범한 합스부르크가의 프리드리히가 로마 왕이 된다. 1452년 3월 16일, 로마에서 교황 니콜라우스 5세에 의해 포르투갈 왕 두아르트 1세의 딸이자 15세였던 엘레오노레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3월 19일, 교황의 손에 의해 즉위했다.
해양 국가로서 부유했던 포르투갈에서 시집 온 엘레오노레에게 노이슈타트의 궁정은 음울했고, 프리드리히 3세와의 나이 차이와 미신적이고 과묵한 성격에 실망한다. 장남의 요절을 거쳐, 결혼 7년 후인 1459년 3월 22일, 오랫동안 기다려온 왕자 막시밀리안이 태어났지만, 프리드리히 3세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자의 탄생을 기뻐하며 점쟁이에게 왕자의 미래를 점치게 했는데, 점쟁이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생애에서 이 예언은 거의 현실이 되었다.
2.2.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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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은 1459년 3월 22일 빈의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공주 엘레오노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1452년에 결혼한 프리드리히 3세와 엘레오노레는 나이 차이가 컸고, 엘레오노레는 미신적이고 과묵한 남편에게 실망했다. 막시밀리안은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프리드리히 3세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막시밀리안이 3세였던 1462년 8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에 대항한 삼촌 알브레히트 6세의 반란으로 어머니와 함께 빈의 왕궁에 유폐되었다. 알브레히트 6세는 빈을 지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프리드리히 3세가 다시 빈을 통치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언어 발달이 느려 5세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지만, 어머니는 그가 8세 때 사망했다. 막시밀리안의 사교적이고 밝은 성격과 예술·학문에 대한 관심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고 여겨진다.
2.3. 소년기
1459년 3월 22일 빈의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공주 레오노르 데 아비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꿈에서 위험을 경고해준 테베사의 막시밀리안이라는 성인의 이름을 따서 막시밀리안이라 이름지었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막시밀리안에게 "내 아들아, 네가 네 아버지처럼 될 줄 알았더라면, 널 왕위를 위해 낳은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8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후 남성적인 환경에서 자라며 정치가보다는 전사로서의 면모를 먼저 갖추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기사도 소설, 연대기, 문장학 등에 관심을 가졌고, 카스파르 슐릭이나 피우스 2세(애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 등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다. 승마를 비롯한 모든 무예에 뛰어났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붙여준 스콜라 철학 가정교사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 부르고뉴 공작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샤를 용담공이 전사한 후, 그의 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작령과 프랑슈콩테를 점령하고 피카르디, 아르투아를 침공하는 등 부르고뉴를 압박했다.
1477년 8월 19일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권을 얻었다. 그는 마리에게서 프랑스어를, 궁정 부인에게서 플랑드르어를 배워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며 부르고뉴 통치에 힘썼다. 1479년 기네가트 전투(1479년)에서 막시밀리안은 보병 밀집 방진으로 프랑스 기사단을 격파하고 플랑드르를 지켜냈다.
이후 막시밀리안 1세는 1494년 밀라노 공국의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후일 스포르차 가문이 끊어질 때 합스부르크 왕가가 밀라노 공국을 상속받을 길을 열어 놓았다.
3.1. 부르고뉴 공국과의 결혼
1477년 1월 5일, 샤를 용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자 부르고뉴 공국은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작령과 프랑슈콩테를 점령하고, 피카르디, 아르투아를 침공했다. 1477년 2월 11일에는 대특허장을 승인해야 했다. 고립된 마리는 1477년 3월 26일 막시밀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막시밀리안은 1477년 8월 18일 겐트에 도착하여 마리와 만났고, 다음날 8월 19일 성 바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막시밀리안은 마리에게서 프랑스어를, 궁정 부인에게서 플랑드르어를 배워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했다.
1478년 5월, 루이 11세가 에노를 침공하며 전쟁이 시작되었고, 막시밀리안은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 1478년 6월 22일에는 장남 필리페가 태어나 막시밀리안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1479년 8월 7일 기네가트 전투(1479년)에서 막시밀리안은 보병 밀집 방진으로 프랑스 기사단을 격파하고 플랑드르를 지켰다. 이는 란츠크네히트의 시작으로 여겨지지만, 용어 정착은 1480년대 중반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샤를 용담공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부르고뉴 공국 통치에 성공했다.
3.2. 부르고뉴 계승 전쟁
1473년 9월 30일, 트리어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샤를 대담공이 회담을 갖고, 대프랑스 정책과 오스만 토벌에 대해 논의하였다. 샤를 대담공은 막시밀리안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부르고뉴의 경제력을 무기로 두 사람의 혼담과 자신의 로마 왕 선출을 동시에 성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과 제국 제후들의 반발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기에, 프리드리히 3세는 신중하게 행동하여 11월 24일 몰래 모젤 강을 따라 코블렌츠로 도망쳤다.
격분한 샤를 대담공은 부르고뉴 전쟁에서 제국에 보복하였으나,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1476년 4월에 로마 왕 선출 요청을 철회하고 마리와 막시밀리안의 약혼만을 다시 제안하였다. 혼담은 무난하게 성사되었고, 막시밀리안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였고, 마리 또한 감사장과 반지를 선물하였다. 이러한 교류를 약혼반지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다.
1477년 1월 5일, 샤를 용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자 부르고뉴 공국 내는 대혼란에 빠졌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작령·프랑슈-콩테를 접수하고, 네덜란드에 가까운 피카르디, 아르투아를 점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리는 막시밀리안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1477년 8월 18일 심야, 막시밀리안은 겐트에 도착하여 마리와 만났다. 두 사람은 그날 밤에 동침했고, 이튿날 새벽, 성 바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막시밀리안은 마리에게서 프랑스어를, 궁정 부인에게서 플랑드르어를 배워, 곧 각 언어를 모국어처럼 이해하고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1478년 5월, 루이 11세는 휴전을 깨고 에노(독: 헨네가우)에 침공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6월 22일에는 장남 필리페가 태어났다.
1479년 8월 7일, 기네가테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막시밀리안은 보병의 밀집 방진을 취하고, 루이 11세의 프랑스 기사단을 격파하여 플랑드르 영토를 확보했지만, 이것이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 왕가의 악연의 시작이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란츠크네히트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스위스식 무장과 전진의 전개 훈련을 실시한 용병을 모집했다.
막시밀리안은 샤를 용담공 전사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공국의 통치에 성공했다.
4. 로마 왕
1486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1490년, 오스트리아 일대를 휩쓸던 헝가리군이 마티야슈 1세의 사망으로 약화되자, 빈을 포함한 빼앗긴 오스트리아 일대를 탈환하고자 했다. 1491년 헝가리 왕위 요구자로 헝가리 국왕을 겸하게 된 보헤미아 왕국의 울라슬로 2세와 대립했고,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울라슬로 2세 사후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끔 했다.
5. 신성 로마 황제
1493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서거하면서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다. 황제 즉위를 위해 로마로 가려 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반대로 트리엔트에서 즉위해야 했다. 이는 로마에서 교황에게 직접 제관을 받지 않고 즉위한 최초의 사례로, 가톨릭을 뒷받침하던 황제의 권위가 로마와 교황으로부터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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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진출을 도모하던 중,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야심으로 인해 이탈리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495년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제후들에게 전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마인츠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제후들은 제국과 황제 권력의 분리를 요구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이에 저항했지만 결국 타협하여 영구적인 란트프리덴 공포, 제국 최고 법원 설치, 제국 통치원 설치, 제국 의회 정비 등의 내정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가 아닌 영방 국가들의 연합 형태로 나아가게 되었다.
1512년에는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독일어권과 그 주변 지역에 한정되며, 세계 제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포기했음을 명확히 했다.
5.1. 단독 통치와 권력 강화
1494년 밀라노 공국의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훗날 스포르차 가문이 단절될 경우 합스부르크 왕가가 밀라노 공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495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제안으로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아라곤 왕국과 신성 동맹을 체결하고,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제국 강화를 꾀하였다. 제국의회에서는 제국대법원과 세제를 개혁하고 항구적인 공공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란트 평화령을 발령했지만, 군사 제도와 행정 제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제후들은 중앙 권력 강화를 용인하지 않았고, 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되었다.
1496년 장남 필리프를 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시켜 트라스타마라 왕가가 단절될 경우 카스티야와 아라곤 영토 및 식민지에 대한 계승권을 확보했다. 1497년 막시밀리안 1세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하는 마인츠 대주교이자 선제후인 베르트홀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제국 궁정 재판소를 설치했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499년 스위스 연방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젤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사실상 스위스의 독립을 승인했다. 150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박탈당하고, 7인의 선제후 전원을 포함한 제후 21명으로 구성된 제국 통치 평의회에 권력이 귀속되었다.
1504년 란츠후트 계승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제국 내 위신을 회복하고, 푸거 가 등 남부 독일 금융 가문들과 신용 협정을 맺어 국내외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 1506년 헝가리에 군사 원정을 일으켜 헝가리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권을 강화했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의 동의로 '로마 황제 선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같은 해 베네치아를 분할하려는 캉브레 동맹에 참여했으나, 1509년 아냐넬로 전투에 참전하지 못해 오명을 썼다. 1511년 프랑스와의 동맹을 끊고 교황, 아라곤, 영국과 신성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1513년 잉글랜드의 원조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스퍼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1499년 상실한 밀라노와 롬바르디 지방을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515년 프랑스군을 상대로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밀라노 탈환에 실패하여 브뤼셀 조약으로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의 영유권을 인정해야 했다.
1516년 카스티야 섭정을 겸하고 있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서거하자, 손자 카를이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 전체를 상속받아 카를로스 1세로 즉위했다.
5.2. 결혼 정책
막시밀리안 1세는 '다른 집안은 전쟁을 하게 두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너는 결혼하라'는 말처럼, 정략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 본인의 결혼: 부르고뉴 자치령과 네덜란드를 획득했다.
* 자녀들의 이중 결혼:
* 아들 필리프와 딸 마르가리트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후아나와 후안과 각각 결혼시켰다.
* 마르가리트의 남편 후안 등이 요절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했다.
* 필리프는 요절했지만, 그의 아들 카를은 스페인 왕(카를로스 1세)과 신성 로마 황제(카를 5세)를 겸임하며 합스부르크 가문 번영의 기반을 다졌다.
*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 손주들의 이중 결혼([[비엔나 이중 결혼]]):
* 손자 페르디난트와 손녀 마리아를 헝가리 왕국·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가문 자녀들과 결혼시켰다.
* 마리아의 남편 랍쇼 2세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 1515년 비엔나 제1차 회의의 결의에 따라 랍쇼의 누이 안나와 결혼한 페르디난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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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죽음
1519년 1월 12일, 막시밀리안 1세는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벨스에서 사망했다. 여러 역사가들은 그의 사인으로 암(아마도 위암 또는 대장암), 폐렴, 매독, 담석, 뇌졸중 등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시신 처리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남겼는데, 참회의 일환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빨을 뽑고, 시신을 채찍질하고 석회와 재로 덮은 후 아마포에 싸서 공개적으로 전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이자 고해사제인 그레고어 라이슈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막시밀리안의 손에 묵주를 놓고 시체 근처에 다른 성물들을 놓았다. 막시밀리안은 비너 노이슈타트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관은 마리아 테레지아 통치 시기에 개보수 과정에서 열렸고, 이후 시신은 바로크 양식의 석관에 다시 안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46년 8월 6일 성당 잔해 속에서 발견되었으며, 1950년에 다시 의식적으로 매장되었다.
황제의 자리는 그의 손자인 카를 5세에게 계승되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립 미남은 1506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6. 유산
막시밀리안 1세는 전쟁과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시켰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외부였던 헝가리에 대한 동진 정책과 부르고뉴 영토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대립은 제국 내 그의 지위를 강화하고 제국 개혁에 대한 압력을 높였다.
그는 중앙 집권화와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1495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영구적인 란트프리덴 공포, 제국 최고 법원, 제국 통치원 설치, 제국 의회 정비 등의 내정 개혁을 통해 제국을 영방 국가 연합으로 변화시켰다. 1512년에는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제국의 영토가 독일어권 및 그 주변에 한정됨을 명확히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문화 예술의 후원자로 르네상스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를 후원하고, 빈 궁정 예배당 소년 성가대를 창설하여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을 만들었다. 또한, 플루티드 아머 개발에 영향을 주어 막시밀리안 갑옷(Maximillian armour)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군사 제도 개혁에도 힘써 란츠크네히트 부대를 창설했다. 1490년에는 야네트 폰 타크시스에게 역참망 설치를 명령하여 근대 우편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플랑드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각 민족의 문화를 존중했다.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1918년까지 존속하며 유럽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