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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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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새한국당은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종찬이 창당한 정당이다. 이종찬은 김영삼과의 경선 패배 후 탈당하여 김현욱, 박철언 등과 함께 새한국당을 창당했으며, 박병하를 상임고문으로 임명했다. 1992년 대선에서 이종찬은 후보로 나섰으나 지지율 부진으로 정주영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다. 이후 통일국민당과의 통합이 무산되고, 1995년 민주당과 합당하여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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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국당
기본 정보
정당 이름신한국당
한글 정당 이름새한국당
한자 정당 이름새韓國黨
히라가나 정당 이름しんかんこくとう
가타카나 정당 이름セハングクタン

2. 역사와 내력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이종찬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함께 탈당하여 그해 10월 새한국당을 창당했다. 박병하를 새한국당 상임고문 겸 최고위원 직위에 임명하였다.

14대 대선 후보로 이종찬을 추대했으나, 지지율 부진으로 인해 박철언, 김용환 등의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병하 상임고문 겸 최고위원도 퇴임 및 탈당하였으며, 결국 이종찬 자신도 12월 13일 국민당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1][2]

이후 재보궐선거에서 1석도 얻지 못하는 부진 속에 1995년 3월 이기택이 이끄는 민주당과 합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 창당 배경

민주자유당 내 민정계의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이종찬민주계 출신 김영삼과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였다. 이에 이종찬은 자신을 지지하는 김현욱, 박철언, 이영일, 장경우 등과 함께 1992년 10월에 새한국당을 창당했다.[1][2]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내에서는 구 민정당 계열의 이종찬과 구 민주당 계열로 야당 실력자였던 김영삼이 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5월 19일 당 대회에서 치러진 대의원 투표에서 김영삼이 6할 이상의 지지를 얻어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종찬은 8월 17일 민자당 탈당을 선언하고, 9월 23일 "신정치국민연합" 결성 대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신당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 10월 20일 신당 추진 협의회를 열어 신당의 명칭을 "신한국당"(가칭)으로 결정하고, 10월 23일 "신한국당" 창당 준비 위원회, 11월 17일 창당 대회를 개최하여 이종찬을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자로 선출했다.

2. 2. 창당 과정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金泳三)에게 패배한 이종찬은 민자당을 탈당했다. 1992년 9월 23일, 이종찬 등은 '신정치국민연합' 결성 대회를 개최하며 신당 창당 작업을 본격화했다.[1][2] 10월 20일, 신당 추진 협의회는 신당 명칭을 '신한국당'(가칭)으로 결정했다. 10월 23일, '신한국당' 창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 17일 창당 대회를 개최하여 이종찬을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2. 3. 대선 과정과 결과

1992년 12월에 시행된 14대 대선에서 새한국당은 이종찬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김영삼(민주자유당), 김대중(민주당), 정주영(국민당)의 경쟁 구도 속에서 지지율이 오르지 않았다.[1][2] 결국 이종찬은 1992년 12월 13일 국민당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했다.[1][2]

2. 4. 해체 과정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서 이종찬 후보는 지지율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2월 13일 국민당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1][2] 국민당은 새한국당과의 통합을 합의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후보가 패배하면서 통합은 무산되었다. 이후 새한국당은 1995년 3월 이기택이 이끄는 민주당과 합당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주요 관련 인물

새한국당에는 청죽회 출신 김현욱, 박철언, 이영일, 장경우하나회 12기 출신 박병하 前 개신교 목사 등이 참여했다.[1][2] 이 외에도 김용환, 한영수, 이한동, 한병채 등이 새한국당과 관련되었다.[1][2]

3. 1. 이종찬

1992년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金泳三)에게 패배한 이종찬은 자신을 지지하는 김현욱, 박철언, 이영일, 장경우 등과 함께 새한국당을 창당했다.[1][2] 1992년 12월 14대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지지율 부진으로 12월 13일 통일국민당 정주영(鄭周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3. 2. 박병하

하나회 12기 출신 예비역 육군 대령 박병하는 새한국당 상임고문 겸 최고위원을 역임했다.[1][2]

3. 3. 기타 관련 인물

새한국당에는 청죽회 출신 김현욱, 박철언, 이영일, 장경우하나회 12기 출신 박병하 前 개신교 목사(상임고문 겸 최고위원) 등이 참여했다.[1][2] 이 외에도 김용환, 한영수, 이한동, 한병채 등이 새한국당과 관련되었으며, 이들은 새정치국민연합, 하나로국민연합, 무당파국민연합 등 다양한 계파 출신이었다.[1][2]

참조

[1] 뉴스 성공한 탈당 없었다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7-03-09
[2] 뉴스 대선앞둔 정당들의 분열史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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