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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쿨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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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드 쿨롱은 프랑스의 토목 공학자이자 전기학자이다. 그는 쿨롱의 법칙을 확립하고 마찰학 연구에 기여했으며, 지반 공학 분야의 선구자로서 옹벽 설계에도 공헌했다. 쿨롱은 군 복무를 하며 다양한 공학 분야에서 활동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파리 국립 연구소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쿨롱의 이름은 에펠탑에 새겨져 있으며, 쿨롱의 법칙은 전자기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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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쿨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폴리트 르콩트의 초상화 (1894년 복제품)
이름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
로마자 표기Charles-Augustin de Coulomb
출생1736년 6월 14일
출생지앙골레므, 앙구무아, 프랑스 왕국
사망1806년 8월 23일 (70세)
사망지파리, 프랑스 제1제국
국적프랑스
학문 분야
분야물리학
모교메지에르 왕립 공병 학교
업적
주요 업적비틀림 저울

2. 생애

쿨롱은 프랑스 앙굴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받은 후 기술 장교가 되어 마르티니크 섬에서 근무하다 병으로 귀국, 공병단에서 군무와 과학 연구를 병행했다.[19] 1781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사직했다가 파리로 돌아와 파리대학 총장이 되었다.[19] 그는 과학 연구와 성실한 인품으로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19]

샤를빌메지에르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20년 동안 구조, 요새화, 토질역학 등 다양한 공학 분야에서 일했다.[3] 브레스트에 처음 배치되었으나, 1764년 마르티니크로 파견되어 부르봉 요새 건설을 담당했다.[3] 마르티니크에서 3년간 복무하며 얻은 질병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3]

프랑스 귀국 후 부쟁에 배치되었고, 1773년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 응용역학에 관한 첫 번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3] 1779년 일드엑스 근처 목재 요새 건설을 위해 로슈포르로 파견되었고, 그곳 조선소를 실험실 삼아 역학 연구를 지속했다.[3] 같은 해 마찰 법칙에 대한 중요 연구를 발표했고, 20년 후 유체 저항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3] 라로셸, 일드엑스, 셰르부르 등에서 근무하며 전하와 자극 간 힘의 관계를 발견, 쿨롱의 법칙으로 명명되었다.[3]

1781년 파리에 주둔, 1787년 스톤하우스 왕립 해군 병원의 "파빌리온" 설계를 프랑스 정부에 권고했다.[3]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로 사직, 블루아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3] 이후 혁명 정부의 도량형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로 복귀, 프랑스 국립 연구소 창립 멤버가 되었고 1802년 공공 교육 감찰관에 임명되었다.[3] 건강 악화로 4년 뒤 파리에서 사망했다.[3]

2. 1. 유년기 및 교육

쿨롱은 프랑스 앙굴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앙리 쿨롱은 몽펠리에 출신의 왕실 영지 관리관이었고, 어머니 카트린 바제는 양모 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콜레주 마자랭에서 공부했다. 그의 학업은 철학, 언어, 문학을 포함했으며, 수학, 천문학, 화학, 식물학에서도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피에르 샤를 모니에의 수학 수업을 들으면서 수학 및 관련 분야로 진로를 결정했다. 1757년부터 1759년까지 아버지의 고향인 몽펠리에에 머물면서 시 아카데미에서 일했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수학자 오귀스탱 다니지에게서 수학 교육을 받았다. 1759년,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샤를빌메지에르의 육군 사관학교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1760년 메지에르 왕립 공병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1761년 졸업 후 중위 계급으로 프랑스 군대에 공병으로 입대했다.

2. 2. 군 복무 및 공학 경력

쿨롱은 1761년 메지에르 왕립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군대에서 공병 장교로 복무를 시작했다.[3] 이후 20년 동안 구조, 요새화, 토질역학 등 다양한 공학 분야에서 일하며 여러 곳에 배치되었다.[3] 첫 부임지는 브레스트였으나, 1764년 2월 서인도 제도마르티니크로 파견되어 부르봉 요새 건설을 담당했으며, 이 임무는 1772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3] 마르티니크에서 보낸 3년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평생 동안 그 영향을 받았다.[3]

프랑스로 돌아온 후 쿨롱은 부쟁으로 파견되었다.[3] 그는 응용역학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시작하여 1773년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 그의 첫 번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3] 1779년에는 마르크 르네, 몽탈랑베르 후작와 협력하여 일드엑스 근처에 전적으로 목재로 만들어진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로슈포르로 파견되었다.[3] 로슈포르에 있는 동안 쿨롱은 특히 로슈포르의 조선소를 실험실로 사용하여 역학 연구를 계속했다.[3] 1779년에는 마찰 법칙에 대한 중요한 연구(프랑스어: Théorie des machines simples, en ayant regard au frottement de leurs parties et à la roideur des cordages)를 발표했고, 20년 후에는 유체 저항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3]

대위 계급으로 프랑스로 돌아온 후 라로셸, 일드엑스, 셰르부르에서 근무했다.[3] 그는 전하(electric charge) 사이의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고, 이어서 자극(magnetic poles) 사이에도 같은 관계가 성립함을 발견했다. 나중에 이러한 관계는 그의 이름을 따서 쿨롱의 법칙으로 명명되었다.[3]

1781년 파리에 주둔했고,[3] 1787년 자크르네 테농과 함께 스톤하우스 왕립 해군 병원을 방문하여 혁신적인 "파빌리온" 설계에 감명을 받고 프랑스 정부에 이를 권고했다.[3]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수도 관리관(intendant des eaux et fontaines)직을 사임하고 블루아에 소유한 작은 영지로 은퇴했다.[3]

2. 3. 과학 연구 활동

쿨롱은 역학전자기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1779년에는 마찰력 법칙에 관한 논문인 「부품 간의 마찰과 로프의 장력을 고려한 단순한 기계에 관한 이론」(Théorie des machines simples, en ayant égard au frottement de leurs parties et à la roideur des cordages)을 발표했다.[3] 이 논문은 아몽통-쿨롱의 마찰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1784년에는 「금속선의 비틀림과 탄성에 관한 이론적 및 실험적 연구」(Recherches théoriques et expérimentales sur la force de torsion et sur l'élasticité des fils de metal)[4]를 발표하여 비틀림 저울에 대한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쿨롱은 이 실험을 통해 "같은 금속의 선에 대해 토크의 모멘트는 비틀림 각도, 지름의 4제곱, 그리고 선의 길이의 역수에 비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쿨롱의 비틀림 저울


쿨롱은 자신이 발명한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했고, 이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1785년에 전기와 자기에 관한 세 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5][6][7]

  • "Premier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전기와 자기에 관한 제1논문):[15] 금속선의 비틀림 반발력을 이용한 전기 저울(비틀림 저울)의 구성 및 사용 방법을 설명하고, 같은 종류의 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법칙을 실험적으로 결정했다. 쿨롱은 "같은 종류의 전기로 대전된 두 공이 서로에게 미치는 반발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밝혔다.
  • "Second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전기와 자기에 관한 제2논문):[16] 자기 유체와 전기 유체가 반발 또는 인력에 의해 어떤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극성을 가진 구 사이의 인력은 구의 전하량의 곱에 비례하고 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밝혔다.
  • "Trois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전기와 자기에 관한 제3논문):[17] 습도가 낮은 공기와 접촉하거나 다소 절연체인 지지대에서 고립된 물체가 특정 시간 동안 손실하는 전기량에 대해 설명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네 편의 보고서를 더 발표했다.[8][9][10][11]

  • "Quatrième Mémoire":[8] 전기 유체의 두 가지 주요 특성을 증명했다. 첫째, 전기 유체는 화학적 친화력이나 선택적 인력에 따라 어떤 물체에도 퍼지지 않고 접촉하는 여러 물체 사이에 분포한다. 둘째, 전도성 물체에서 유체는 안정 상태에 도달하면 물체의 표면에 퍼지고 내부로는 침투하지 않는다.
  • "Cinquième Mémoire":[9] 전기 유체가 접촉하는 전도성 물체 사이에 어떻게 분포하고 이 유체가 이 물체의 표면의 여러 부분에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관하여 설명했다.
  • "Sixième Mémoire":[10] 여러 도체 사이의 전기 유체 분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이러한 물체 표면의 여러 지점에서의 전기 밀도를 결정했다.
  • "Septième Mémoire":[11] 자기에 관해 논했다.


쿨롱은 인력과 척력 법칙을 설명했지만, 전기와 자기 사이의 관계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인력과 척력이 서로 다른 종류의 유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국헨리 캐번디시도 쿨롱의 법칙을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생전에 발표하지 않아 쿨롱이 발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쿨롱은 마찰학 분야에도 기여하여, 기욤 아몽통과 함께 아몽통-쿨롱의 마찰 법칙으로 알려진 발견을 했다.[12] 그는 던컨 도슨에 의해 "마찰학의 23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13]

2. 4. 쿨롱 법칙의 발견

쿨롱은 자신이 발명한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전하 분포를 띤 두 개의 작은 구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과 척력을 측정하여 쿨롱 법칙을 확립했다. 또한 자기에 대해서도 유사한 법칙이 성립함을 밝혔다.[3] 1785년, 그는 전자기와 관련된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Premier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전기와 자기에 관한 제1논문)[15]: 비틀림 저울의 비틀림 각도가 외력에 비례한다는 성질을 이용하여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같은 전하를 가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관한 법칙을 실험적으로 결정했다.
  • ''Second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전기와 자기에 관한 제2논문)[16]: 자기 유체와 전기 유체의 작용 법칙에 따라 반발력이 발생하는지 인력이 발생하는지를 결정했다.
  • ''Trois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전기와 자기에 관한 제3논문)[17]: 습도가 낮은 공기 또는 대전량이 많거나 적은 지지체에 닿음으로써 고립된 물체가 일정 시간 후에 잃는 전기량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이후에도 4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전기 유체의 두 가지 기본적인 성질 등을 제시하였다. 영국헨리 캐번디시쿨롱 법칙을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생전에 그 발견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자의 영예는 쿨롱에게 돌아갔다.[3]

쿨롱은 전하 사이나 자극 사이에 발생하는 인력과 반발력에 대한 법칙을 논했지만, 전기와 자기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전기와 자기는 각각 다른 종류의 유체에 의해 인력이나 반발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3]

2. 5. 프랑스 혁명 이후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쿨롱은 수도 관리관 직을 사임하고 블루아의 작은 영지로 은퇴했다.[3]

혁명 정부의 새로운 도량형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로 소환되었다. 그는 프랑스 국립 연구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고, 1802년 공공 교육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 쿨롱의 건강은 이미 매우 허약했고, 4년 후 파리에서 사망했다.[3]

3. 연구 업적

쿨롱(Charles-Augustin de Coulomb)은 역학전자기학 분야에서 여러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1784년, 쿨롱은 금속선의 비틀림과 탄성에 관한 이론적 및 실험적 연구를 발표하여,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4] 1785년에는 전기와 자기에 관한 세 편의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네 편의 보고서를 더 발표했다. 이 보고서들을 통해 쿨롱은 전하와 자극 사이의 인력과 척력 법칙(쿨롱 법칙)을 설명하고, 전하 분포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쿨롱은 전하와 자극 사이의 인력과 척력 법칙을 설명했지만, 전기와 자기 사이의 전자기학적 관계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인력과 척력이 서로 다른 종류의 유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국헨리 캐번디시도 쿨롱의 법칙을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생전에 그 발견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쿨롱이 발견자로 인정받았다.

쿨롱은 마찰학 분야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12] 기욤 아몽통과 쿨롱의 발견은 아몽통-쿨롱의 마찰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세기에 수행된 가장 종합적인 마찰 연구를 완료했으며, 던컨 도슨에 의해 "마찰학의 23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13]

3. 1. 쿨롱 법칙

1785년, 쿨롱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 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5][6][7]

  • 전기와 자기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 (Premier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5] 쿨롱은 금속선의 비틀림 반발력이 비틀림 각도에 비례하는 특성을 기반으로 전기 저울(비틀림 저울)을 구성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또한, 같은 종류의 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법칙을 실험적으로 결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전기와 자기에 관한 두 번째 보고서 (Second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6] 쿨롱은 자기 유체와 전기 유체 모두가 반발 또는 끌어당김에 의해 어떤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극성을 가진 구 사이의 인력은 구의 전하량의 곱에 비례하고 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명시했다.

  • 전기와 자기에 관한 세 번째 보고서 (Trois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7] 습도가 낮은 공기와 접촉하거나 다소 절연체인 지지대에서 고립된 물체가 특정 시간 동안 손실하는 전기량에 관하여 설명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네 편의 보고서가 더 출판되었다.[8][9][10][11]

  • 네 번째 보고서 (Quatrième Mémoire):[8] 전기 유체의 두 가지 주요 특성을 증명했다. 첫째, 이 유체는 화학적 친화력이나 선택적 인력에 따라 어떤 물체에도 퍼지지 않지만 접촉하는 여러 물체 사이에 분포하며, 둘째, 전도성 물체에서 유체는 안정 상태에 도달하면 물체의 표면에 퍼지고 내부로는 침투하지 않는다. (1786)
  • 다섯 번째 보고서 (Cinquième Mémoire):[9] 전기 유체가 접촉하는 전도성 물체 사이에 어떻게 분포하고 이 유체가 이 물체의 표면의 여러 부분에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관하여 설명했다. (1787)
  • 여섯 번째 보고서 (Sixième Mémoire):[10] 여러 도체 사이의 전기 유체 분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이러한 물체 표면의 여러 지점에서의 전기 밀도를 결정했다. (1788)
  • 일곱 번째 보고서 (Septième Mémoire):[11] 자기에 관하여 설명했다. (1789)


쿨롱은 전하와 자극 사이의 인력과 척력 법칙을 설명했지만, 두 현상 사이의 전자기학적 관계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인력과 척력이 서로 다른 종류의 유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국헨리 캐번디시도 쿨롱의 법칙을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생전에 그 발견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자의 영예는 쿨롱에게 돌아갔다.

3. 2. 마찰 법칙

쿨롱은 마찰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12] 1779년 쿨롱은 마찰력 법칙에 관한 논문인 "부품 간의 마찰과 로프의 장력을 고려한 단순한 기계에 관한 이론"(Théorie des machines simples, en ayant égard au frottement de leurs parties et à la roideur des cordages)을 출판했는데, 이는 기욤 아몽통의 발견과 함께 아몽통-쿨롱의 마찰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13] 그는 18세기에 수행된 가장 종합적인 마찰 연구를 완료했으며, 던컨 도슨에 의해 "마찰학의 23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13]

3. 3. 기타 연구

1784년, 쿨롱은 회고록 ''Recherches théoriques et expérimentales sur la force de torsion et sur l'élasticité des fils de metal''[4] (금속선의 비틀림력과 탄성에 대한 이론적 및 실험적 연구)를 발표했다. 이 회고록에는 금속선에 대한 비틀림력에 대한 쿨롱의 실험 결과가 담겨 있었으며, 특히 비틀림 저울 내에서 실험하였다. 그의 일반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같은 금속의 선에 대해 토크의 모멘트는 비틀림 각도, 지름의 4제곱, 그리고 선의 길이의 역수에 비례한다.프랑스어

쿨롱은 마찰학 분야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12] 기욤 아몽통과 쿨롱의 발견은 아몽통-쿨롱의 마찰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세기에 수행된 가장 종합적인 마찰 연구를 완료했으며, 던컨 도슨에 의해 "마찰학의 23인"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13]

1779년에는 마찰력 법칙에 관한 논문인 「부품 간의 마찰과 로프의 장력을 고려한 단순한 기계에 관한 이론」(Théorie des machines simples, en ayant égard au frottement de leurs parties et à la roideur des cordages)을 출판했다. 이는 쿨롱의 마찰 법칙, 또는 아몽통-쿨롱의 마찰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1784년에는 「금속선의 비틀림과 탄성에 관한 이론적 및 실험적 연구」(Recherches théoriques et expérimentales sur la force de torsion et sur l'élasticité des fils de metal)[14]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몇 가지 다른 형태의 비틀림 저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국헨리 캐번디시(1731년 ~ 1810년)도 쿨롱의 법칙을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생전에 그 발견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자의 영예는 쿨롱에게 돌아갔다.

참조

[1] 웹사이트 Coulomb http://www.dictionar[...]
[2] 문서 The "International Coulomb"
[3] 백과사전 Coulomb, Charles Augustin
[4] 서적 Recherches théoriques et expérimentales sur la force de torsion et sur l'élasticité des fils de metal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4
[5] 서적 Premier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5
[6] 서적 Second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5
[7] 서적 Trois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5
[8] 서적 Quatr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6
[9] 서적 Cinqu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7
[10] 서적 Six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8
[11] 서적 Septième mémoire sur l’électricité et le magnétisme https://books.google[...]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9
[12] 논문 The research works of Coulomb and Amontons and generalized laws of friction 2015-06-30
[13] 논문 Men of Tribology: Leonardo da Vinci (1452–1519) https://asmedigitalc[...] 1977-10-01
[14] 서적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4
[15] 서적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5
[16] 서적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5
[17] 서적 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85
[18] 웹사이트 Coulomb http://www.dictionar[...]
[19] 백과사전 쿨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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