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캐번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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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캐번디시는 1731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영국의 과학자이다. 데번셔 공작 가문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지 않았지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수소의 원소적 특성을 규명하고, 물의 합성에 기여했으며,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는 캐번디시 실험으로 만유인력 상수를 계산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옴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전기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사후 그의 연구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에 의해 재조명되어 그의 과학적 선구안이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캐번디시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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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캐번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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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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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가경자 |
이름 | 헨리 캐번디시 |
원어 이름 | Henry Cavendish |
출생일 | 1731년 10월 10일 |
출생지 | 니스, 사르데냐 왕국 |
사망일 | 1810년 2월 24일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
국적 | 잉글랜드 |
학문 분야 | 화학, 물리학 |
소속 기관 | 왕립 연구소 |
모교 | 피터하우스, 케임브리지 대학교 |
알려진 업적 | 수소 발견 지구 밀도 측정 (캐번디시의 실험) |
수상 | 코플리 메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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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접미사 | FRS |
2. 생애
헨리는 유력 귀족 가문인 데번셔 공작가(캐번디시가) 출신으로, 1731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제2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삼남 찰스 캐번디시 경과 제1대 켄트 공작 헨리 그레이의 딸 앤 그레이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44] 1742년부터 런던 근교의 해크니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174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피터하우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위를 받지 않고 1753년에 그만두었다.[44] 약 40세가 되기 전까지 아버지에게서 적당한 용돈을 받으며 검소하게 생활했으나,[44] 아버지가 죽은 후 캐번디시가 물려받은 재산은 그를 당대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조르주 퀴비에와 장바티스트 비오에 따르면,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기 전에도 인도에서 재산을 모은 백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비오에 따르면 그 금액은 연간 30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한다.[44][45]
그는 주로 런던의 클래펌 커먼에서 살았으나, 블룸스버리에도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도서관은 소호의 딘 거리에 있었다.[49]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빌려갈 수도 있었으나, 그의 깐깐한 성격 탓에 반드시 서적 대출 장부를 작성해야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헨리 캐번디시는 몬태규 광장과 가우어 가의 모퉁이에 있는 저택으로 이사했다.[48] 또한 자료를 보관하기 위한 별채, 그리고 교외의 클래펌에 별장을 소유했다.[49] 별채는 도서관으로 일반에게도 공개했다. 또한 클래펌의 별장은 실험실과 작업실로 사용했다.[50]
캐번디시는 1760년부터 왕립 학회의 회원이였지만, 목요일마다 학회의 회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학회와 그다지 접촉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을 싫어했으며, 친척들과도 잘 교류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상속인인 조지 캐번디시와도 1년에 잠깐 동안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왕립 학회 회합에는 매주 빠짐없이 참석했고, 50년 동안 회원이였으며, 27년 동안 학회의 평의원을 역임했다.
캐번디시는 집안의 하인들과도 접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가 테이블에 저녁식사 메뉴를 적은 쪽지를 올려놓으면 그것을 보고 저녁을 준비할 정도였으며, 특히 하녀들과 마주치는 것을 싫어해서 그와 마주친 하녀는 해고시킬 정도였다. 그는 키가 컸고 마른 편이었으며 유행이 지난 이상한 옷을 입고 다녔고, 그의 재단사가 오는 날쯤이 되면 그의 모습은 거의 초라해 보일 수준이었다. 말을 약간 더듬기도 하였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는 여성 사용인에게 저녁 식사를 주문할 때도, 메뉴(기본적으로 양고기만 먹었다[57])를 노트에 적어 홀의 테이블 위에 올려 알리고, 직접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이 때문에 올리버 색스와 같은 현대의 작가들은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다.[32] 그의 유일한 사회적 출구는 매주 모임 전에 회원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왕립 학회 클럽이었다. 캐번디시는 이 모임을 거의 빠지지 않았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깊이 존경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줍음 때문에 대화가 어려웠다. 그는 불가지론자로 여겨졌다. 그의 전기 작가인 조지 윌슨은 "캐번디시의 종교에 관해서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언급했다.[34][35]
그는 반사회적이고 은밀한 행동 때문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종종 피했고, 그의 발견의 많은 부분이 동료 과학자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그가 죽은 지 오래 후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캐번디시의 논문을 살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로가 돌아간 관찰과 결과를 발견했다.
1810년 런던에서 사망하였으며 사망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장 바티스트 비오에 의해 "모든 학자들 중 가장 부자이고 부자들 중 가장 박식한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사망 당시 잉글랜드 은행의 최대 예금주였다. 1810년 2월 24일, 병상에 있던 헨리 캐번디시는 하인을 불러, 자신이 곧 죽을 것이니 죽은 후에 조지 캐번디시 경에게 그 사실을 전하라고 말한 뒤 물러가게 했다.[51]
1874년 세워진 캐번디시 연구소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여졌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캐번디시의 먼 친척인 윌리엄 캐번디시, 데본셔 제7대 공작에 의해 기증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헨리 캐번디시는 1731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데번셔 공작가(캐번디시가) 출신으로, 노르만족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혈통을 지녔으며, 여러 영국 귀족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2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삼남 찰스 캐번디시 경이고, 어머니는 제1대 켄트 공작 헨리 그레이의 딸 앤 그레이였다. 찰스 캐번디시 경은 정치인이자 과학자로,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헨리의 어머니는 그가 두 살이 되기 전 둘째 아들을 낳고 3개월 만에 사망하여, 찰스 캐번디시 경이 홀로 두 아들을 키웠다.헨리 캐번디시는 11세에 런던 근교의 사립학교인 뉴컴 학교에 입학했다. 18세인 174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터하우스 대학에 입학했으나, 물리학과 수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받지 않고 1753년에 자퇴했다. 자퇴 이유는 학위 수여식의 종교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졸업 후 헨리는 런던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개집을 갖춘 자신의 실험실을 마련했다. 1760년부터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되어 꼼꼼하게 회의에 참석했으며, 1766년 이후 왕립 학회에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왕립 학회 철학회보에 게재할 논문을 선정하는 논문 위원회, 금성 통과 (1769), 산의 중력 인력 (1774), 콘스탄틴 핍스의 북극과 북서 항로 탐험 (1773)을 위한 과학적 지침 위원회 등 다양한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773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대영 박물관의 선출된 이사가 되었고, 영국 왕립 연구소가 설립된 직후에는 이사(1800)로 활동하며 험프리 데이비의 화학 실험을 돕기도 했다.
2. 2. 과학에의 헌신
헨리 캐번디시는 1731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데번셔 공작가(캐번디시가) 출신의 아버지 찰스 캐번디시 경과 어머니 앤 그레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1742년부터 런던 근교의 해크니에서 학교를 다녔고, 174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피터하우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753년 학위를 받지 않고 그만두었다.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기 전까지 검소한 생활을 했다.[44] 그러나 아버지 사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생활에 어려움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44] 조르주 퀴비에와 장바티스트 비오에 따르면,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기 전에도 인도에서 재산을 모은 백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한다.[44][45]
캐번디시는 1760년부터 왕립 학회의 회원이었다. 그는 주로 런던의 클래펌 커먼에서 살았으나, 블룸스버리에도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도서관은 소호의 딘 거리에 있었다. 캐번디시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을 싫어했으며, 하인들과도 접촉하는 것을 피했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으며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다녔고, 말을 약간 더듬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인해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1810년 런던에서 사망하였으며, 더비의 교회 내에 있는 캐번디시 일족의 묘지에 안장되었다.[52] 사망 당시 그는 영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유산으로는 상당한 액수의 예금, 공채와 더불어 매년 상당한 수입이 보장된 재원과 운하가 있었다.[53] 이러한 재산은 동생 프레데릭 캐번디시가 상속받았다.[54] 1874년 세워진 캐번디시 연구소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2. 3. 은둔 생활과 유산
헨리는 유력 귀족 가문인 데번셔 공작가(캐번디시가) 출신으로, 1731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났다.[44] 1742년부터 런던 근교의 해크니에서 학교를 다녔고, 174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피터하우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위를 받지 않고 1753년에 그만두었다.[44] 약 40세가 되기 전까지 아버지에게서 적당한 용돈을 받으며 검소하게 생활했으나,[44] 아버지가 죽은 후 캐번디시가 물려받은 재산은 그를 당대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조르주 퀴비에와 장바티스트 비오에 따르면,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하기 전에도 인도에서 재산을 모은 백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비오에 따르면 그 금액은 연간 30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한다.[44][45]그는 주로 런던의 클래펌 커먼에서 살았으나, 블룸스버리에도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도서관은 소호의 딘 거리에 있었다.[49]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빌려갈 수도 있었으나, 그의 깐깐한 성격 탓에 반드시 서적 대출 장부를 작성해야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헨리 캐번디시는 몬태규 광장과 가우어 가의 모퉁이에 있는 저택으로 이사했다.[48] 또한 자료를 보관하기 위한 별채, 그리고 교외의 클래펌에 별장을 소유했다.[49] 별채는 도서관으로 일반에게도 공개했다. 또한 클래펌의 별장은 실험실과 작업실로 사용했다.[50]
캐번디시는 1760년부터 왕립 학회의 회원이었지만, 목요일마다 학회의 회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학회와 그다지 접촉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을 싫어했으며, 친척들과도 잘 교류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상속인인 조지 캐번디시와도 1년에 잠깐 동안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왕립 학회 회합에는 매주 빠짐없이 참석했고, 50년 동안 회원이였으며, 27년 동안 학회의 평의원을 역임했다.
캐번디시는 집안의 하인들과도 접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가 테이블에 저녁식사 메뉴를 적은 쪽지를 올려놓으면 그것을 보고 저녁을 준비할 정도였으며, 특히 하녀들과 마주치는 것을 싫어해서 그와 마주친 하녀는 해고시킬 정도였다. 그는 키가 컸고 마른 편이었으며 유행이 지난 이상한 옷을 입고 다녔고, 그의 재단사가 오는 날쯤이 되면 그의 모습은 거의 초라해 보일 수준이었다. 말을 약간 더듬기도 하였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는 여성 사용인에게 저녁 식사를 주문할 때도, 메뉴(기본적으로 양고기만 먹었다[57])를 노트에 적어 홀의 테이블 위에 올려 알리고, 직접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이 때문에 올리버 색스와 같은 현대의 작가들은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다.[32] 그의 유일한 사회적 출구는 매주 모임 전에 회원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왕립 학회 클럽이었다. 캐번디시는 이 모임을 거의 빠지지 않았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깊이 존경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줍음 때문에 대화가 어려웠다. 그는 불가지론자로 여겨졌다. 그의 전기 작가인 조지 윌슨은 "캐번디시의 종교에 관해서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언급했다.[34][35]
그는 반사회적이고 은밀한 행동 때문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종종 피했고, 그의 발견의 많은 부분이 동료 과학자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그가 죽은 지 오래 후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캐번디시의 논문을 살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로가 돌아간 관찰과 결과를 발견했다.
1810년 런던에서 사망하였으며 사망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장 바티스트 비오에 의해 "모든 학자들 중 가장 부자이고 부자들 중 가장 박식한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사망 당시 잉글랜드 은행의 최대 예금주였다. 1810년 2월 24일, 병상에 있던 헨리 캐번디시는 하인을 불러, 자신이 곧 죽을 것이니 죽은 후에 조지 캐번디시 경에게 그 사실을 전하라고 말한 뒤 물러가게 했다.[51]
1874년 세워진 캐번디시 연구소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여졌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캐번디시의 먼 친척인 윌리엄 캐번디시, 데본셔 제7대 공작에 의해 기증되었다.
3. 과학적 업적
캐번디시는 과학적으로 상당히 넓은 범위를 다루었으며 그의 연구는 엄청난 엄밀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 스스로 출판한 논문은 그의 연구에 대한 불완전한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마저도 대부분 그의 사후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의 성과를 알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에 비해서 그의 명성은 높아 1803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의 8명의 국외 회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777년부터 1779년까지, 증기압을 다양한 온도 조건에서 측정했다. 이 실험은 1805년에 돌턴에 의해서도 행해졌으며, 1830년대까지 돌턴의 측정값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72]。그러나 돌턴은 고온에서는 측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측정 결과는 캐번디시의 것이 더 정확했다[73]
또한 1779년부터 1780년에, 몇 가지 기체의 열팽창률을 측정했다. 그 결과, 팽창률은 기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온도가 화씨 1도 상승할 때마다 부피가 370분의 1만큼 팽창하는 것을 나타냈다. 이는 샤를의 법칙이며, 1787년에 샤를에 의해 발견되었고,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에 의해 1802년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캐번디시는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발견한 셈이 된다.
== 화학 연구 ==
캐번디시는 비소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1766년부터 왕립 학회와 기체의 성질에 대해 연구 결과를 교류했다. 그는 1766년 발표한 논문에서 수소를 독립된 원소로 보고 '가연성 공기'라고 불렀으며, 이산화 탄소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이들 기체의 공기에 대한 비중, 여러 액체에 대한 용해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이산화 탄소는 공기에 부피비로 1/9 정도 포함되어 있으며, 연소를 일으키지 않고, 발효 또는 부패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체가 대리석에서 얻을 수 있는 이산화 탄소와 성질이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 1767년 발표한 논문에서는 런던에서 펌프로 퍼낸 물을 분석하여 물에 존재하는 석회질 성분이 이산화 탄소를 녹인 물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캐번디시는 찰스 블래그던과의 협력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는데, 책을 출판하거나 논문을 발표하는 대신 많은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5] 역학, 광학, 자기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지만, 출판된 작품은 많지 않다.[5] 그는 조지프 프리스틀리, 조지프 블랙, 대니얼 러더퍼드와 함께 18세기와 19세기의 공기 화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5]
캐번디시는 특정 산이 특정 금속에 작용하여 "가연성 공기" (수소)가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5] 로버트 보일 등이 이전에 수소 기체를 제조했지만, 캐번디시는 수소의 원소적 특성을 인정한 공로를 인정받는다.[5] 1777년, 캐번디시는 포유류가 내뿜는 공기가 "고정 공기"(이산화 탄소)로 변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6] 또한, 알칼리를 산에 용해시켜 이산화탄소를 생성하고, 물에서의 용해도와 비중을 측정했다.[6] 1778년 논문에서는 호흡 가능한 공기가 산성을 구성한다고 결론지었고, 이 논문으로 왕립 학회의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다.[6]
1783년, 캐번디시는 유디오미터를 이용한 기체 측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6][7][8] 그는 자신의 발명품인 새로운 유디오미터를 사용하여 기체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했다.[6][7][8] 이후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하여, 수소를 "탈플로지스톤화된" 공기(산소)에서 태워 순수한 물을 생성하는 것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6][7][8] 그는 수소 연소가 공기에서 물을 응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결론지었다.[6]
1784년과 1785년에 발표된 논문은 물과 질산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캐번디시는 2부피의 수소를 5부피의 공기 존재 하에 불태워 공기의 약 1/5 정도가 사라지고 이슬이 결정되는 것을 발견, 이슬이 물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수소와 산소 혼합물에 전기를 통해 물과 질산을 발생시켰고, 질산 발생은 산소에 포함된 불순물인 질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785년 논문에서 공기 중에 전기를 흘려보내 질소가 산소와 반응하여 질산을 생성하는 것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공기 중의 모든 질소가 반응하는지 실험하여 약 1/120 정도의 기체가 남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는 후에 비활성 기체인 아르곤으로 밝혀졌다.
1766년 논문에서, 캐번디시는 아연, 철, 주석에 황산 또는 염산을 가하면 가연성 기체 (수소)가 발생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플로지스톤설을 지지하여 이 기체가 금속에서 발생한 플로지스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기체의 성질을 조사하여, 일반적인 공기에 비해 11분의 1의 질량밖에 가지지 않는다고 발표했다(현재 측정에서는 약 14.4:1).[62]
1781년,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수소와 공기를 전기 불꽃으로 폭발시키면 용기 안이 젖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63] 캐번디시는 추시를 계속하여, 이 반응으로 물이 생성되며, 반응 시 부피가 5분의 1만큼 감소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1784년에 발표했다.[63]
이 반응은 수소와 산소로부터 물이 합성되었다는 것, 즉 물은 단독 원소가 아닌 화합물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플로지스톤설의 입장에서,
:수소
:산소
이라고 생각하고, 이 둘이 반응하여 물이 생성되었다고 해석했다.[64]
또한 수소와 질소(당시에는 플로지스톤 공기)를 전기 불꽃으로 반응시키면, 질산이 생성된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리고 공기 중의 질소를 이 방법으로 모두 반응시키고, 또한 산소도 제거하면, 나중에는 아무것과도 반응하지 않는 소량의 기체가 남는다고 기록했다.[65] 이 기체는 1세기 이상 뒤인 1894년, 존 윌리엄 스트럿과 윌리엄 램지에 의해 재확인되었고, 라이너스 폴링에 의해 아르곤이라고 명명되었다.[66]
캐번디시는 1785년에 지구 대기의 조사를 통해 "일반 공기는 4개의 플로지스톤화된 공기 [질소]와 혼합된 1개의 탈플로지스톤화된 공기 [산소]로 구성된다"고 결론지었다.[11][12] 1890년대에 윌리엄 램지와 레이리 경는 아르곤이 캐번디시의 잔류물의 원인임을 밝혀냈다.[9][10]
캐번디시는 플로지스톤설을 믿었지만, 조지프 프리스틀리처럼 끝까지 고집하지는 않았다. 1787년, 그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반플로지스톤 이론으로 전환했지만, 새로운 이론의 명칭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열을 물질의 운동의 결과로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으며, 1783년 수은의 어는 온도에 대한 논문에서 잠열 개념을 사용했다.
== 전기 연구 ==
헨리 캐번디시의 전기 실험은 런던 자택 실험실에서 아버지 찰스 캐번디시 경과 함께 시작되었다.[26] 1783년 찰스 캐번디시 경이 사망하면서 헨리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캐번디시의 전기 이론은 수학적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정량적 실험을 기반으로 했다. 그는 동료 티모시 레인과 함께 인공 전기 가오리를 만들어 전기 충격의 원천이 전력임을 증명했다.[26] 1771년에는 압력을 가하는 광범위한 전기를 기반으로 전기 이론의 초기 버전을 발표했다. 그는 전기력의 세기가 거리에 반비례하면 대전된 구체의 바깥 표면에 더 많은 전기가 놓일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캐번디시는 왕립 학회에 전기 관련 논문을 작성했지만,[27][28] 그의 전기 실험 대부분은 1세기 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에 의해 수집되어 1879년에 출판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30] 캐번디시의 전기 논문은 ''런던 왕립 학회 철학 논문집''에서 재인쇄되었으며, 그의 전기 원고 대부분은 ''명예로운 헨리 캐번디시, F.R.S.의 과학 논문''(1921)에 수록되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11년판에 따르면, 캐번디시의 발견에는 전기적 위치(그는 이를 "전기화 정도"라고 불렀다)의 개념, 초기 전기 용량 단위(지름 1인치인 구체의 용량), 평판 콘덴서의 전기 용량 공식,[29] 재료의 유전 상수 개념, 전기적 위치와 전류 간의 관계 (현재 옴의 법칙이라고 함) (1781), 병렬 회로에서 전류 분할 법칙 (현재 찰스 휘트스톤의 것으로 여겨짐), 그리고 전기력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법칙 (현재 쿨롱의 법칙이라고 함)이 포함되어 있다.[30]
캐번디시는 전하를 띠지 않은 금속 구체를 전하를 띤 금속 구체로 감싸고 두 구체 사이를 전도성 물질로 연결하여 전기 흐름을 관찰하고 측정했다. 그 결과, 전기력은 두 구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함을 확인했다.[74] 이는 1785년에 샤를 드 쿨롱이 다른 방법으로 발견했으며, 현재는 쿨롱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캐번디시는 이 실험에서 역제곱 법칙으로부터의 오차를 50분의 1로 측정했지만, 당시 전위계의 감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톰슨형 사분원 전위계를 사용하여 동일한 실험을 수행한 결과, 정밀도를 21600분의 1까지 높여 캐번디시 실험 방법의 타당성이 입증되었다.[75]
1776년, 전기뱀장어에 관한 논문에서 전기 전도도의 물질별 차이를 측정했다. 캐번디시는 1781년에 옴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유리관 안에 소금 용액을 넣고 전선을 꽂은 뒤, 라이덴 병으로 발생시킨 전기를 자신의 몸을 통해 유리관 내 소금 용액으로 통과시키는 실험을 했다. 소금 용액 속을 통과하는 거리가 길수록 저항이 커지고 전류가 작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캐번디시는 여러 개의 유리관으로 실험을 반복하여 옴의 법칙에 도달했다. 게오르크 옴이 이 법칙을 발표한 것은 1827년이므로, 캐번디시의 발견은 옴보다 46년 앞섰다.[76] 그는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충격의 크기로 전류의 크기를 추정했으며 (당시에는 검류계는 발명되지 않았다), 용액별 저항 차이를 수치로 발표했다. 맥스웰은 나중에 검류계를 사용하여 행한 실험 결과가 캐번디시의 결과와 다르지 않음에 놀라워했다.[77]
== 지구의 밀도 측정 (캐번디시 실험) ==
1789년 캐번디시는 지구의 밀도 측정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는 친구인 지진학자 존 미첼이 고안한 비틀림 저울장치를 사용하였으며, 이 실험은 캐번디시 실험이라고도 한다.[13][33][14]
캐번디시가 지구의 무게를 재기 위해 사용한 장치는 본래 존 미첼이 제작하였으나,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하여 캐번디시에게 전달되었다. 실험 장치는 비틀림 저울로 구성되었으며, 2인치, 1.61파운드 납 구슬 한 쌍이 비틀림 저울의 팔에 매달려 있었고, 두 개의 훨씬 더 큰 고정된 납 공(350파운드)이 있었다. 캐번디시는 둘 사이의 중력 인력의 힘을 측정하려고 했다.[33] 그는 미첼의 장치가 온도 차이와 유도된 기류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외부 제어 장치와 관측용 망원경이 있는 별도의 방에 장치를 격리함으로써 수정을 가했다.[15]
이 장비를 사용하여 캐번디시는 비틀림 저울의 진동 주기로부터 공들 사이의 인력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사용하여 지구의 밀도를 계산했다. 캐번디시는 지구의 평균 밀도가 물의 밀도보다 5.48배 더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존 헨리 포인팅은 나중에 데이터가 5.448의 값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언급했으며,[16] 실제로 그것은 캐번디시가 논문에 포함한 29개의 결정 값의 평균값이다.[17] 발표된 숫자의 오류는 그의 단순한 산술 실수 때문이었다.[18] 캐번디시의 실험에서 특별했던 점은 모든 오류의 원인과 실험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놀랍도록 작은 인력(납 구슬 무게의 5천만 분의 1)을 정밀하게 측정했다는 점이다. 캐번디시가 얻은 지구 밀도에 대한 결과는 현재 받아들여지는 값의 1% 이내이다.
캐번디시의 연구는 다른 사람들이 만유인력 상수(''G'')와 지구의 질량에 대한 정확한 값을 얻도록 이끌었다. 그의 결과를 바탕으로, G의 값은 6.754 × 10−11N-m2/kg2로 계산할 수 있으며,[19] 이는 현대 값인 6.67428 × 10−11N-m2/kg2과 유사하다.[20]
이 상수가 처음으로 이 이름을 얻은 것은 캐번디시 실험 후 거의 100년이 지난 1873년이었다.[25] 캐번디시의 결과는 또한 지구의 질량을 제공한다. 1797년부터 1798년에 걸쳐, 이른바 "캐번디시의 실험"을 수행하여 지구의 비중을 측정하고, 그 결과를 1798년에 발표했다. 후대의 과학자들은 이 실험의 결과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부터 만유인력 상수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번디시 자신은 만유인력 상수를 산출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실험은 "지구의 밀도를 측정한" 것보다 "만유인력 상수를 측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3. 1. 화학 연구
캐번디시는 비소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1766년부터 왕립 학회와 기체의 성질에 대해 연구 결과를 교류했다. 그는 1766년 발표한 논문에서 수소를 독립된 원소로 보고 '가연성 공기'라고 불렀으며, 이산화 탄소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이들 기체의 공기에 대한 비중, 여러 액체에 대한 용해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이산화 탄소는 공기에 부피비로 1/9 정도 포함되어 있으며, 연소를 일으키지 않고, 발효 또는 부패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체가 대리석에서 얻을 수 있는 이산화 탄소와 성질이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 1767년 발표한 논문에서는 런던에서 펌프로 퍼낸 물을 분석하여 물에 존재하는 석회질 성분이 이산화 탄소를 녹인 물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캐번디시는 찰스 블래그던과의 협력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는데, 책을 출판하거나 논문을 발표하는 대신 많은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5] 역학, 광학, 자기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지만, 출판된 작품은 많지 않다.[5] 그는 조지프 프리스틀리, 조지프 블랙, 대니얼 러더퍼드와 함께 18세기와 19세기의 공기 화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5]
캐번디시는 특정 산이 특정 금속에 작용하여 "가연성 공기" (수소)가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다.[5] 로버트 보일 등이 이전에 수소 기체를 제조했지만, 캐번디시는 수소의 원소적 특성을 인정한 공로를 인정받는다.[5] 1777년, 캐번디시는 포유류가 내뿜는 공기가 "고정 공기"(이산화 탄소)로 변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6] 또한, 알칼리를 산에 용해시켜 이산화탄소를 생성하고, 물에서의 용해도와 비중을 측정했다.[6] 1778년 논문에서는 호흡 가능한 공기가 산성을 구성한다고 결론지었고, 이 논문으로 왕립 학회의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다.[6]
1783년, 캐번디시는 유디오미터를 이용한 기체 측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6][7][8] 그는 자신의 발명품인 새로운 유디오미터를 사용하여 기체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했다.[6][7][8] 이후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하여, 수소를 "탈플로지스톤화된" 공기(산소)에서 태워 순수한 물을 생성하는 것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6][7][8] 그는 수소 연소가 공기에서 물을 응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결론지었다.[6]
1784년과 1785년에 발표된 논문은 물과 질산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캐번디시는 2부피의 수소를 5부피의 공기 존재 하에 불태워 공기의 약 1/5 정도가 사라지고 이슬이 결정되는 것을 발견, 이슬이 물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수소와 산소 혼합물에 전기를 통해 물과 질산을 발생시켰고, 질산 발생은 산소에 포함된 불순물인 질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785년 논문에서 공기 중에 전기를 흘려보내 질소가 산소와 반응하여 질산을 생성하는 것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공기 중의 모든 질소가 반응하는지 실험하여 약 1/120 정도의 기체가 남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는 후에 비활성 기체인 아르곤으로 밝혀졌다.
1766년 논문에서, 캐번디시는 아연, 철, 주석에 황산 또는 염산을 가하면 가연성 기체 (수소)가 발생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플로지스톤설을 지지하여 이 기체가 금속에서 발생한 플로지스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기체의 성질을 조사하여, 일반적인 공기에 비해 11분의 1의 질량밖에 가지지 않는다고 발표했다(현재 측정에서는 약 14.4:1).[62]
1781년,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수소와 공기를 전기 불꽃으로 폭발시키면 용기 안이 젖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63] 캐번디시는 추시를 계속하여, 이 반응으로 물이 생성되며, 반응 시 부피가 5분의 1만큼 감소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1784년에 발표했다.[63]
이 반응은 수소와 산소로부터 물이 합성되었다는 것, 즉 물은 단독 원소가 아닌 화합물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플로지스톤설의 입장에서,
이라고 생각하고, 이 둘이 반응하여 물이 생성되었다고 해석했다.[64]
또한 수소와 질소(당시에는 플로지스톤 공기)를 전기 불꽃으로 반응시키면, 질산이 생성된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리고 공기 중의 질소를 이 방법으로 모두 반응시키고, 또한 산소도 제거하면, 나중에는 아무것과도 반응하지 않는 소량의 기체가 남는다고 기록했다.[65] 이 기체는 1세기 이상 뒤인 1894년, 존 윌리엄 스트럿과 윌리엄 램지에 의해 재확인되었고, 라이너스 폴링에 의해 아르곤이라고 명명되었다.[66]
캐번디시는 1785년에 지구 대기의 조사를 통해 "일반 공기는 4개의 플로지스톤화된 공기 [질소]와 혼합된 1개의 탈플로지스톤화된 공기 [산소]로 구성된다"고 결론지었다.[11][12] 1890년대에 윌리엄 램지와 레이리 경는 아르곤이 캐번디시의 잔류물의 원인임을 밝혀냈다.[9][10]
캐번디시는 플로지스톤설을 믿었지만, 조지프 프리스틀리처럼 끝까지 고집하지는 않았다. 1787년, 그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반플로지스톤 이론으로 전환했지만, 새로운 이론의 명칭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열을 물질의 운동의 결과로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으며, 1783년 수은의 어는 온도에 대한 논문에서 잠열 개념을 사용했다.
3. 2. 전기 연구
헨리 캐번디시의 전기 실험은 런던 자택 실험실에서 아버지 찰스 캐번디시 경과 함께 시작되었다.[26] 1783년 찰스 캐번디시 경이 사망하면서 헨리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캐번디시의 전기 이론은 수학적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정량적 실험을 기반으로 했다. 그는 동료 티모시 레인과 함께 인공 전기 가오리를 만들어 전기 충격의 원천이 전력임을 증명했다.[26] 1771년에는 압력을 가하는 광범위한 전기를 기반으로 전기 이론의 초기 버전을 발표했다. 그는 전기력의 세기가 거리에 반비례하면 대전된 구체의 바깥 표면에 더 많은 전기가 놓일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실험적으로 확인했다.캐번디시는 왕립 학회에 전기 관련 논문을 작성했지만,[27][28] 그의 전기 실험 대부분은 1세기 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에 의해 수집되어 1879년에 출판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30] 캐번디시의 전기 논문은 ''런던 왕립 학회 철학 논문집''에서 재인쇄되었으며, 그의 전기 원고 대부분은 ''명예로운 헨리 캐번디시, F.R.S.의 과학 논문''(1921)에 수록되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11년판에 따르면, 캐번디시의 발견에는 전기적 위치(그는 이를 "전기화 정도"라고 불렀다)의 개념, 초기 전기 용량 단위(지름 1인치인 구체의 용량), 평판 콘덴서의 전기 용량 공식,[29] 재료의 유전 상수 개념, 전기적 위치와 전류 간의 관계 (현재 옴의 법칙이라고 함) (1781), 병렬 회로에서 전류 분할 법칙 (현재 찰스 휘트스톤의 것으로 여겨짐), 그리고 전기력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법칙 (현재 쿨롱의 법칙이라고 함)이 포함되어 있다.[30]
캐번디시는 전하를 띠지 않은 금속 구체를 전하를 띤 금속 구체로 감싸고 두 구체 사이를 전도성 물질로 연결하여 전기 흐름을 관찰하고 측정했다. 그 결과, 전기력은 두 구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함을 확인했다.[74] 이는 1785년에 샤를 드 쿨롱이 다른 방법으로 발견했으며, 현재는 쿨롱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캐번디시는 이 실험에서 역제곱 법칙으로부터의 오차를 50분의 1로 측정했지만, 당시 전위계의 감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톰슨형 사분원 전위계를 사용하여 동일한 실험을 수행한 결과, 정밀도를 21600분의 1까지 높여 캐번디시 실험 방법의 타당성이 입증되었다.[75]
1776년, 전기뱀장어에 관한 논문에서 전기 전도도의 물질별 차이를 측정했다. 캐번디시는 1781년에 옴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유리관 안에 소금 용액을 넣고 전선을 꽂은 뒤, 라이덴 병으로 발생시킨 전기를 자신의 몸을 통해 유리관 내 소금 용액으로 통과시키는 실험을 했다. 소금 용액 속을 통과하는 거리가 길수록 저항이 커지고 전류가 작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캐번디시는 여러 개의 유리관으로 실험을 반복하여 옴의 법칙에 도달했다. 게오르크 옴이 이 법칙을 발표한 것은 1827년이므로, 캐번디시의 발견은 옴보다 46년 앞섰다.[76] 그는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충격의 크기로 전류의 크기를 추정했으며 (당시에는 검류계는 발명되지 않았다), 용액별 저항 차이를 수치로 발표했다. 맥스웰은 나중에 검류계를 사용하여 행한 실험 결과가 캐번디시의 결과와 다르지 않음에 놀라워했다.[77]
3. 3. 지구의 밀도 측정 (캐번디시 실험)
1789년 캐번디시는 지구의 밀도 측정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는 친구인 지진학자 존 미첼이 고안한 비틀림 저울장치를 사용하였으며, 이 실험은 캐번디시 실험이라고도 한다.[13][33][14]캐번디시가 지구의 무게를 재기 위해 사용한 장치는 본래 존 미첼이 제작하였으나,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하여 캐번디시에게 전달되었다. 실험 장치는 비틀림 저울로 구성되었으며, 2인치, 1.61파운드 납 구슬 한 쌍이 비틀림 저울의 팔에 매달려 있었고, 두 개의 훨씬 더 큰 고정된 납 공(350파운드)이 있었다. 캐번디시는 둘 사이의 중력 인력의 힘을 측정하려고 했다.[33] 그는 미첼의 장치가 온도 차이와 유도된 기류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외부 제어 장치와 관측용 망원경이 있는 별도의 방에 장치를 격리함으로써 수정을 가했다.[15]
이 장비를 사용하여 캐번디시는 비틀림 저울의 진동 주기로부터 공들 사이의 인력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사용하여 지구의 밀도를 계산했다. 캐번디시는 지구의 평균 밀도가 물의 밀도보다 5.48배 더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존 헨리 포인팅은 나중에 데이터가 5.448의 값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언급했으며,[16] 실제로 그것은 캐번디시가 논문에 포함한 29개의 결정 값의 평균값이다.[17] 발표된 숫자의 오류는 그의 단순한 산술 실수 때문이었다.[18] 캐번디시의 실험에서 특별했던 점은 모든 오류의 원인과 실험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놀랍도록 작은 인력(납 구슬 무게의 5천만 분의 1)을 정밀하게 측정했다는 점이다. 캐번디시가 얻은 지구 밀도에 대한 결과는 현재 받아들여지는 값의 1% 이내이다.
캐번디시의 연구는 다른 사람들이 만유인력 상수(''G'')와 지구의 질량에 대한 정확한 값을 얻도록 이끌었다. 그의 결과를 바탕으로, G의 값은 6.754 × 10−11N-m2/kg2로 계산할 수 있으며,[19] 이는 현대 값인 6.67428 × 10−11N-m2/kg2과 유사하다.[20]
이 상수가 처음으로 이 이름을 얻은 것은 캐번디시 실험 후 거의 100년이 지난 1873년이었다.[25] 캐번디시의 결과는 또한 지구의 질량을 제공한다. 1797년부터 1798년에 걸쳐, 이른바 "캐번디시의 실험"을 수행하여 지구의 비중을 측정하고, 그 결과를 1798년에 발표했다. 후대의 과학자들은 이 실험의 결과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부터 만유인력 상수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번디시 자신은 만유인력 상수를 산출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실험은 "지구의 밀도를 측정한" 것보다 "만유인력 상수를 측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4. 사후 재조명과 영향
캐번디시는 과학적으로 상당히 넓은 범위를 다루었으며 그의 연구는 엄청난 엄밀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 스스로 출판한 논문은 그의 연구에 대한 불완전한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마저도 대부분 그의 사후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의 성과를 알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에 비해서 그의 명성은 높아 1803년에는 프랑스 학술원의 8명의 국외 회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헨리 캐번디시는 생전에 왕립 학회지인 『필로소피컬 트랜잭션스』에 18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미발표 원고 중에는 훌륭한 실험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이 논문들 중 일부는 1839년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장인 하코트가 벌링턴 백작 (당시. 1858년에 제7대 데본셔 공작이 됨)이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읽고, 화학과 열에 관한 논문의 일부를 "영국 과학 진흥 협회 보고"에서 발표하면서 처음 공개되었다.[67]
이후 캐번디시의 유고는 벌링턴 백작으로부터 윌리엄 스노우 해리스 경에게 전달되었다. 해리스는 유고 중 전기 연구에 관한 내용이 캐번디시가 동시대 혹은 후세 과학자들의 발견을 앞섰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윌리엄 톰슨도 해리스를 통해 유고를 읽고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완전한 형태의 출판을 희망했다.[68]
1867년 해리스가 사망하고 원고는 일부만 출판된 채 대부분 데본셔 공작에게 돌아갔다.[69] 1870년 데본셔 공작은 자신의 재산으로 케임브리지에 실험 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에게 연구소 교수직을 의뢰했다. 맥스웰은 이를 수락하고 1871년 부임, 1874년 연구소 건물이 준공되자 초대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는 캐번디시 연구소로 명명되었으며, 이때 데본셔 공작은 맥스웰에게 캐번디시의 원고를 넘겨주었다.[70]
맥스웰은 원고를 정리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1879년 『헨리 캐번디시 전기학 논문집』으로 간행했다. 캐번디시 사후 69년 만에 출판된 이 책을 통해 그의 전기 관련 연구 내용이 처음으로 밝혀졌고, 그 선진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71]
4. 1. 유고의 발견과 출판
헨리 캐번디시는 생전에 왕립 학회지인 『필로소피컬 트랜잭션스』에 18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미발표 원고 중에는 훌륭한 실험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이 논문들 중 일부는 1839년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장인 하코트가 벌링턴 백작 (당시. 1858년에 제7대 데본셔 공작이 됨)이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읽고, 화학과 열에 관한 논문의 일부를 "영국 과학 진흥 협회 보고"에서 발표하면서 처음 공개되었다.[67]이후 캐번디시의 유고는 벌링턴 백작으로부터 윌리엄 스노우 해리스 경에게 전달되었다. 해리스는 유고 중 전기 연구에 관한 내용이 캐번디시가 동시대 혹은 후세 과학자들의 발견을 앞섰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윌리엄 톰슨도 해리스를 통해 유고를 읽고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완전한 형태의 출판을 희망했다.[68]
1867년 해리스가 사망하고 원고는 일부만 출판된 채 대부분 데본셔 공작에게 돌아갔다.[69] 1870년 데본셔 공작은 자신의 재산으로 케임브리지에 실험 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에게 연구소 교수직을 의뢰했다. 맥스웰은 이를 수락하고 1871년 부임, 1874년 연구소 건물이 준공되자 초대 소장이 되었다. 이 연구소는 캐번디시 연구소로 명명되었으며, 이때 데본셔 공작은 맥스웰에게 캐번디시의 원고를 넘겨주었다.[70]
맥스웰은 원고를 정리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1879년 『헨리 캐번디시 전기학 논문집』으로 간행했다. 캐번디시 사후 69년 만에 출판된 이 책을 통해 그의 전기 관련 연구 내용이 처음으로 밝혀졌고, 그 선진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71]
1921년에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편집하고 조지프 라모어가 수정한 과학 논문집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 사이언티픽 페이퍼스/Scientific Papers영어, Vol. 1
- 사이언티픽 페이퍼스/Scientific Papers영어, Vol. 2
4. 2. 캐번디시 연구소
5. 비판적 시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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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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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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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e, Timothy (1734–1807), apothecary and natural philosopher
https://www.oxford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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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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