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아는 프랑스 루아르에셰르주에 위치한 도시로, 루아르 강에 접해 있다. 선사 시대부터 갈로-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에는 블루아 백작가의 중심지였다. 1171년 유대인에 대한 피의 중상 사건이 일어났고, 1588년에는 기즈 공 앙리 1세가 암살된 블루아 성이 위치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왕실 법원이 이곳을 휴양지로 삼았으며, 근대에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이 퐁텐블로로 이전되면서 경제적 중요성을 잃었다. 현재는 자동차, 초콜릿, 의약품 산업이 발달했으며, 블루아 성, 로베르 위댕 마술의 집 등 다양한 문화 유적과 관광 명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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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아는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도시로, 그 기록은 410년 브르타뉴 족장 유오마두스(Uomadusla)의 정복으로 시작된다. 494년 클로비스 1세에게 정복되기 전까지는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 중반에는 바이킹의 침략을 받아 약탈당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중세 시대 블루아는 강력한 블루아 가문의 본거지이자 블루아 백작령의 중심지였으며, 이 가문은 샹파뉴 백작 지위와 나바라 왕국 왕위 계승권까지 확보하며 영향력을 떨쳤다. 1171년에는 기독교 아동 실종 사건을 빌미로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한 유혈 중상 사건이 유럽 최초로 발생하여 약 30~35명의 유대인이 화형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특히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블루아는 프랑스 왕실의 주요 거처가 되며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번영했다. 그러나 종교 전쟁의 여파로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져 1562년과 1568년 양측 군대에 의한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1588년에는 앙리 3세가 블루아 성에서 정적인 기즈 공 앙리 1세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얼마 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이곳에서 사망했다.
발루아 왕가가 파리로 궁정을 옮기고 앙리 4세가 왕립 도서관을 퐁텐블로로 이전하면서 블루아는 점차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잃어갔다. 이후 프랑스 혁명을 거쳐 루아르-셰르 주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19세기에는 철도 개통과 산업 발전을 경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복구와 1959년부터 시작된 도시 개발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개발 과정에서 갈로-로마 시대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2. 1. 선사 시대
2013년부터 프랑스 INRAP(프랑스 예방 고고학 연구소)가 블루아-비엔느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이 발굴을 통해 후기 선사 시대수렵 채집인들의 야영지 흔적이 하나 또는 여러 개 발견되었다. 발견된 어업용 그물은 이들이 어업도 병행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약 8000년 전(기원전 6000년경)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 살았던 이들로, 이후 등장하는 신석기 시대 농경 목축민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4]
2. 2. 고대
2013년부터 프랑스 예방 고고학 연구소(INRAP)가 블루아-비엔느 지역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를 통해, 약 6000년 전 후기 선사시대 수렵 채집인들의 야영지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어업용 그물이 발견되어 이들이 어업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신석기 시대 농경 목축민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4]
갈리아 시대 후기와 갈로-로마 시대에 블루아는 샤르트르와 부르주를 잇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도시였다. 1959년에 시작된 대규모 도시 개발 사업 과정에서 갈리아 시대의 주거지와 갈로-로마 시대의 도시 중심부 유적이 발굴되었다.[5]카르누테스족의 도시 네트워크 안에서 블루아는 2차적인 정착지에 해당했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루아르강 우안, 그리고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좌안(블루아-비엔느)에서 이루어진 발굴 조사는 갈리아 시대와 갈로-로마 시대에 걸쳐 우안에 상당히 발달된 도시가 있었고 좌안에도 거주지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루아르 강은 주요 교통로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항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강 양쪽을 연결했던 옛 다리의 유적은 남아있다.[6]
블루아가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410년이다. 당시 브르타뉴의 족장 유오마두스(Uomadusla)가 게르만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콘술 오도(Odola)를 몰아내고 블루아를 정복했다. 이후 494년 클로비스 1세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블루아는 독립 또는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2. 3. 중세
블루아는 고대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역사 기록에 처음 명확히 언급된 것은 6세기 그레고리우스 투르에 의해서이다. 410년, 브르타뉴 족장 유오마두스가 집정관 오도를 몰아내고 블루아를 정복했으며, 494년 클로비스 1세에게 정복되기 전까지는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에 이르러 블루아 백작령의 중심지가 되면서 "Blesum castru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7] 9세기 중반에는 바이킹의 침입을 여러 차례 겪었는데, 851년에는 하스테인이 이끄는 바이킹에게 약탈당했고, 다른 자료에 따르면 854년과 856년~857년 사이에도 바이킹의 습격을 받았다.
900년 이전까지는 로베르 왕가가 블루아 백작령을 다스렸다. 이후 위그 대공이 프랑크 공작이 되면서, 그의 충실한 봉신이었던 테오발드 1세(약 940년경)에게 백작 칭호를 넘겨주었다.[8] "티발디안"으로 알려진 그의 후손들은 1397년 백작령이 왕실 소유가 될 때까지 블루아 백작 지위를 유지했다. 블루아 가문은 유럽 귀족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가문 구성원이나 후손 중 일부는 프랑스, 잉글랜드, 나바라, 스페인, 포르투갈의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9] 블루아 가문은 샹파뉴 백작 작위도 가졌으며, 같은 가문에서 나바라 왕국의 왕위가 나오기도 했다. 블루아 백작 기 1세의 차남 샤를 드 블루아는 잔 드 팡티에브르와 결혼하여 브르타뉴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오레 전투에서 전사했다.
1171년, 블루아에서는 한 기독교 유아의 실종 사건을 빌미로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피의 죄설이 유럽 최초로 발생했다. 이로 인해 도시의 유대인 약 130명 중 30명에서 35명(다른 기록에는 31명 또는 40명)이 체포되어 1171년 5월 26일 산 채로 화형당했다.[10] 이 사건은 이후 기독교 박해를 주제로 한 시문학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11] 1196년에는 루이 1세가 시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으며, 중세 시대 내내 유지된 공동체 조직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이후 샤티용 왕조의 백작들은 이전보다 블루아에 더 자주 머물렀고, 블루아 성의 가장 오래된 부분(13세기)은 이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블루아는 중세 시대에 샹파뉴 백작령의 중심지였으며, 1314년 프랑스 왕령에 편입되어 프랑스 왕국 내 샹파뉴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12] 1397년, 기 2세는 백작령을 자신의 사촌인 루이 1세(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동생)에게 매각했다. 백년 전쟁 중이던 1429년,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구원을 위한 작전 기지로 블루아를 활용했다. 그녀는 4월 29일 블루아에서 출발하여 오를레앙을 구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1440년, 잉글랜드에서의 오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샤를(루이 1세의 아들)은 블루아 성에 거처를 정했고, 1462년 그의 아들이자 훗날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되는 루이 2세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1498년, 샤를 8세 국왕이 후사 없이 앙부아즈 성에서 사망하자, 당시 오를레앙 공작이었던 루이 2세가 루이 12세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는 블루아를 왕실의 주요 거처로 삼았고, 1499년 샤를 8세의 미망인이었던 브르타뉴의 앤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태어난 딸 프랑스의 클로드는 브르타뉴와 프랑스의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블루아 백작령의 마지막 세습 통치자였던 루이 12세의 치세 동안 블루아는 왕국의 중심 도시로 번영했다. 1504년에서 1505년 사이에는 이탈리아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블루아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 시기 블루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아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을 겪었다. 중세 시대의 성은 화려한 샤토로 개조되었고, 왕국의 귀족들을 위한 저택(호텔 파르티퀼리에)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예로,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플로리몽 2세 로베르테를 위해 지어진 알뤼이 호텔이 있다.
1515년 루이 12세가 사망하고 그의 사위인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19년 블루아 인근에 샹보르 성 건설을 시작했지만, 점차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를 선호하게 되면서 블루아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1539년에는 왕실 가구 대부분이 블루아에서 퐁텐블로로 옮겨졌다.
프랑스 종교 전쟁 시기 블루아는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도시에는 많은 칼뱅주의자(위그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1562년과 1567년에 가톨릭 신자들과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1562년 7월 4일에는 위그노가 점령했던 블루아를 자크 도브 드 생탕드레 원수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가 탈환하며 약탈을 자행하고 여성들을 폭행했다고 전해진다. 반대로 1568년 2월 7일에는 부카르 선장이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도시를 점령하여 약탈하고 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학살했으며, 시가에 불을 지르고 일부 수도사들은 수도원 우물에 던져졌으며 교회들은 파괴되었다.
1576년과 1588년, 앙리 3세 국왕은 바리케이드의 날 봉기 이후 피신하여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소집했다. 1588년 삼부회 기간 중, 앙리 3세는 블루아 성에서 자신의 정적인 기즈 공작 앙리 1세를 암살했다(12월 23일). 다음 날에는 기즈 공작의 동생이자 랭스 대주교였던 기즈 추기경 루이 2세 역시 같은 장소에서 암살당했다. 이 사건 직후 국왕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블루아 성에서 사망했다.
16세기 동안 프랑스 왕실은 블루아를 종종 휴양지로 이용했지만, 발루아 왕가가 파리를 주요 거점으로 삼고 앙리 4세가 왕립 도서관을 퐁텐블로로 옮기면서 블루아는 점차 정치 및 경제적 중요성을 잃어갔다.
2. 4. 르네상스 시대
1498년, 샤를 8세가 후사 없이 앙부아즈 성에서 사망하자, 당시 블루아 공작이었던 루이 12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며 왕실 거처를 블루아로 옮겼다.[1] 그는 1499년 샤를 8세의 미망인 브르타뉴의 앤과 결혼했으며, 이들의 딸 프랑스의 클로드의 탄생은 브르타뉴와 프랑스의 통합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 블루아 백작령의 마지막 세습 군주였던 루이 12세는 자연스럽게 블루아를 왕국의 정치적 중심지로 삼았다.[1] 이 시기 이탈리아 전쟁을 잠시 멈추게 한 블루아 조약이 1504년과 1505년에 걸쳐 체결되었다.[1]
루이 12세의 통치 아래 블루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아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을 겪었다. 중세 시대의 성은 화려한 블루아 성으로 변모했으며, 왕국의 귀족들을 위한 저택인 ''오텔 파르티퀼리에''가 다수 건설되었다.[1] 대표적인 예로,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재무대신을 지낸 플로리몽 2세 로베르테를 위해 지어진 ''알뤼이 호텔''은 이탈리아 궁전을 모델로 삼았다.[1]
1515년 루이 12세가 사망하고 그의 사위인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 프랑수아 1세는 1519년 블루아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 샹보르 성 건설을 시작했지만[1] (실제 공사는 그의 사망 1년 전까지 진행되었다[1]), 점차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성을 선호하게 되면서 블루아는 점차 왕실의 중심지에서 멀어졌다.[1] 1539년경에는 블루아 성에 있던 왕실 가구 대부분이 퐁텐블로로 옮겨졌다.[1]
16세기 후반 프랑스 종교 전쟁은 블루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블루아에는 칼뱅주의 신자들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1562년과 1568년 가톨릭과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1] 1562년 7월 4일에는 생탕드레 원수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가 블루아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2], 1568년 2월 7일에는 위그노 지도자 부카르(Boucard)가 이끄는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도시를 점령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살해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등 보복을 가했다.[1][2] 일부 수도사들은 소속 수도원의 우물에 던져지기도 했다.[2]
이러한 혼란 속에서 앙리 3세는 1576년과 1588년 두 차례에 걸쳐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소집했다.[1] 특히 1588년에는 파리에서 바리케이드의 날 봉기가 일어나자 블루아로 피신한 상태였다.[1] 같은 해 12월 23일, 앙리 3세는 블루아 성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기즈 공작 앙리 1세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1][2] 다음 날에는 기즈 공작의 동생이자 랭스 대주교였던 기즈 추기경 루이 2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1] 이 사건 직후 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블루아 성에서 사망했다.[1][2]
16세기 동안 프랑스 왕실은 종종 블루아를 휴양지로 이용하기도 했으나,[1] 발루아 왕가가 파리로 완전히 옮겨가면서 블루아는 왕실 거주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경제적 활력도 잃게 되었다.[1][2] 앙리 4세는 왕립 도서관을 블루아에서 퐁텐블로로 이전시켰는데, 이는 훗날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fra)의 모태가 되었다.[1][2]
2. 5. 근대
왕궁이 파리로 옮겨간 후, 블루아는 왕실 거주지로서의 지위와 함께 경제적 활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 앙리 4세는 왕립 도서관을 퐁텐블로로 이전했는데, 이 도서관은 훗날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비블리오테크 나시오날 드 프랑스프랑스어)의 기초가 되었다.
1606년, 필리프 드 베튀느는 루아르 강 좌안에 위치한 '비엔느-레-블루아' 마을의 소유권을 블루아 시에 넘겨주었고, 이 지역은 이후 블루아-비엔느로 알려지게 되었다. 1617년부터 1619년까지 마리 드 메디시스는 아들인 루이 13세 국왕에 의해 궁정에서 추방되어 블루아 성에 머물렀다. 1622년에는 반종교개혁의 흐름 속에서 예수회가 블루아에 설립되었으며, 오늘날 블루아 생뱅상 성당으로 알려진 생루이 예배당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1634년, 루이 13세는 그의 동생이자 블루아 백작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을 이곳으로 추방했다. 가스통 공작은 블루아에 애착을 가지게 되어 1657년 블루아-비엔느에 병원을 설립하고 오텔되외의 재건을 지원하는 등 도시 발전에 기여했으며, 1660년 사망할 때까지 블루아에 머물렀다.
루이 14세 치하에서 블루아는 독립적인 주교구로 승격되었다. 1697년 임명된 첫 주교 다비드 니콜라 드 베르티에르는 폭풍으로 파괴된 생솔렌 대성당을 재건하여 자신의 주교좌 성당으로 삼았다. 이 재건 사업은 블루아 출신이었던 콜베르의 부인의 지원에 힘입어 1700년에 완료되었고, 새롭게 지어진 건물은 블루아 대성당이 되어 성 루이에게 봉헌되었다. 루이 14세의 공식 건축가였던 자크 가브리엘은 대성당 옆에 주교궁을 건설했으며, 1703년부터 약 50년에 걸쳐 계단식 정원인 주교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 정원은 프랑스 혁명 이후인 1791년, 첫 입헌 주교였던 앙리 그레고아르(그레고아르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1716년 2월 6일 밤, 중세 시대에 지어진 다리가 루아르 강의 범람으로 무너졌다. 이듬해 새로운 다리 건설이 시작되어 1724년에 자크-가브리엘 다리가 완공되었다. 이와 함께 강둑 정비 사업이 이루어져 제방이 통합되고 일부 수로가 매립되었다.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이 사망한 후, 블루아 성은 루이 14세에 의해 내부 물품들이 약탈당하고 방치되었다. 심지어 루이 16세는 1788년에 성의 철거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왕립-콩투아 연대가 성 내부에 주둔하게 되면서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1790년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기존의 오를레앙 주가 해체되었고, 블루아를 중심 도시로 하는 새로운 루아르-셰르 주가 신설되었다.
1814년에는 나폴레옹 1세의 아내이자 파르마 공작 부인 마리 루이즈가 블루아에 잠시 피신하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 블루아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1846년 파리-투르 철도가 개통되면서 블루아역이 설치되었고, 이는 기존의 루아르 강 수운업에 영향을 미쳐 점차 쇠퇴하게 만들었다. 한편, 1848년 블루아 출신의 빅토르-오귀스트 풀랭이 풀랭 초콜릿 회사를 설립하면서 도시는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50년부터 1870년까지 시장을 역임한 외젠 리팔은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의 파리 도시 개조 사업에 영향을 받아 블루아의 도시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편했다. 그는 대성당과 현청 등이 위치한 상류 지역과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하류 지역을 분리하는 대로를 건설했으며, 도시 서쪽에는 다니엘 뒤피스 대로 건설을 추진했다. 또한 1862년에서 1865년 사이에는 건축가 쥘 드 라 모랑디에르의 감독 하에 자크-가브리엘 다리와 블루아-비엔느의 윌슨 애비뉴를 잇는 축에 드니-파팽 계단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블루아는 1846년, 1856년(역대 최악의 홍수), 1866년에 루아르 강의 대규모 홍수를 겪으며 생장 지구와 블루아-비엔느 중심부 등 저지대가 침수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871년 12월 13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프로이센 군대가 블루아를 점령했다. 이후 조르주 드 빌부아-마레유 중위, 조제프 푸르세 장군, 베르트랑 드 샤브롱 장군 등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도시는 탈환되었으며,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비엔느의 윌슨 애비뉴에 세워졌다.
1939년에는 노트르담 드 라 트리니테 바실리카의 건설이 완료되었다.
2. 6. 현대
19세기 블루아는 새로운 발전을 맞이했다. 1846년 파리-투르 철도가 개통되면서 블루아역이 들어섰다. 철도 개통으로 강을 이용한 수송과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라 크뢰지유 항구는 활동을 재편해야 했다. 1848년에는 블루아 출신 빅토르-오귀스트 풀랭이 성공적인 초콜릿 브랜드를 창업하면서 도시의 산업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1850년에서 1870년 사이에는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과 친분이 있던 시장 외젠 리팔 주도로 파리와 유사하게 도시 구조가 재설계되었다. 그는 현대적인 상류 지역(대성당, 현청, 곡물시장 소재)과 중세 하류 지역을 분리하는 대로를 건설했다. 또한 블루아 서쪽에 '다니엘 뒤피스 대로' 건설을 추진했다. 1862년에서 1865년 사이에는 쥘 드 라 모랑디에르의 감독 아래 자크-가브리엘 다리와 블루아-비엔느의 윌슨 애비뉴 축에 드니-파팽 계단이 건설되었다.
한편, 하류 지역은 1846년, 1856년(최악의 홍수), 1866년에 루아르강의 큰 홍수를 겪었다. 이로 인해 생장, 블루아-비엔느 중심 지역, 라 부이유 여울 등이 침수되었다.
1871년 12월 13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프로이센 군대가 블루아를 점령했다. 이후 조르주 드 빌부아-마레유 중위, 조제프 푸르세 장군, 베르트랑 드 샤브롱 장군 등이 도시를 탈환했다.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비엔느의 윌슨 애비뉴에 세워졌다.
1939년에는 블루아 바실리카 건설이 완료되었다. 같은 해 1월 29일부터 2월 8일까지 스페인 내전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을 피해 3,100명 이상의 스페인 난민들이 루아르셰르주로 피난 왔다. 1940년 6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블루아 중심부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자크-가브리엘 다리의 10번째 아치를 파괴했다. 독일군은 6월 16일 구 시청을 폭격해 시장 에밀 로랑이 사망했고, 이틀 뒤인 6월 18일, 샤를 드 골의 저항 호소가 있었던 날 블루아를 점령했다.
1944년 6월부터 8월 사이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블루아와 로모랑탱-랑테네 사이의 철도 교량 등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블루아에서는 총 230명이 사망하고 1,522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1944년 8월 16일, 독일군은 블루아-비엔느로 후퇴하면서 자크-가브리엘 다리의 중앙 아치 세 개를 파괴했다. 9월 1일 독일군은 항복했다. 파괴된 다리는 재건되어 1948년 12월에 다시 개통되었다.
1959년 마르셀 뷔러 시장은 샤를 드 골 대통령을 맞이하여, 파리 등 다른 프랑스 도시의 '교외(banlieue)' 모델을 따라 도시 북쪽에 '우선 도시화 지역(ZUP, Zone à urbaniser en priorité)' 건설을 시작했다. 이 시기 도시 계획 공사 과정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갈로-로마 시대 도시 중심부와 독립 갈리아 시절 주거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1986년부터 블루아는 프랑스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고 홍보하는 프로그램인 프랑스 미술 및 역사 도시에 속해 있다.
7. 1. 주요 명소
블루아 성 (남쪽에서 본 모습)
블루아 성 (내부에서 본 모습)
로베르 위댕 마술의 집
구 풀랭 초콜릿 공장
2018년의 드니 파팽 계단
주교정원에서 본 블루아 대성당, 시청, 장미원
자크 가브리엘 다리 (뒤편에 대성당이 보임), 루아르 강 위
생니콜라 블루아 교회
블루아의 주요 명소는 다음과 같다.
블루아 성(Château de Blois프랑스어):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르네상스 양식의 성으로,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루이 12세가 거주했으며,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프랑스 국왕의 측근이었던 블루아 백작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성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정원이 있다.
생소뵈르 정원(Parterre Saint-Sauveur프랑스어)
백합 정원(Jardin des Lices프랑스어)
왕의 요새(Bastion du Roi프랑스어)
빅토르 위고 광장(Square Victor Hugo프랑스어)
로베르 위댕 마술의 집(La Maison de la Magie Robert-Houdin프랑스어): 블루아 성 바로 앞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마술을 주제로 한다. 마술사 로베르 위댕을 기리는 곳이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마술 소장품 전시와 상설 공연 예술 공간을 함께 갖춘 공공 박물관이다.[16][17][18][19]
루이 12세 광장(Place Louis XII프랑스어): 블루아 성 바로 아래, 루아르 강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장이다. 1944년 폭격 이후 조성되었으며, 현지 상점과 레스토랑이 있다. 광장 중앙에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16세기 분수인 루이 12세 분수(Fontaine Louis XII프랑스어)가 있다. 이 분수는 도시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분수 중 하나이다. 다른 주요 분수들은 다음과 같다.[20]
생니콜라 블루아 교회(Église Saint-Nicolas de Blois프랑스어): 원래 생 로메르 수도원(Abbaye Saint-Laumer프랑스어)이 있던 자리이다. 924년경 수도승들에게 토지가 주어졌고 13세기에 교회가 지어졌다. 백년전쟁 중 요새화되었으나 프랑스 종교 전쟁 때 파괴되었다. 18세기 초 재건되었고, 프랑스 혁명 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인 호텔 뒤외(Hôtel-Dieu프랑스어)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부 건물은 생니콜라 블루아 교회가 되었고, 추가된 건물은 도시의 호텔 뒤외로 남았다. 현재는 일부 공공 서비스 시설로 사용되며 재개발이 논의 중이다.
구 풀랭 초콜릿 공장: 19세기 후반 블루아 출신 사업가 빅토르-오귀스트 풀랭이 블루아역 옆에 세운 Chocolat Poulain프랑스어 공장이다. 공장은 1980년대에 이전했고, 현재 건물은 주택과 국립 응용과학원(INSA Centre Val de Loire)으로 사용되고 있다.
드니 파팽 계단(Escalier Denis-Papin프랑스어): 블루아의 가파른 지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계단 중 하나이다. 도시와 루아르 강 계곡의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며, 매년 독창적인 장식으로 꾸며진다.[24] 계단 옆 분수는 1940년 폭격으로 파괴된 구 시청 자리를 기념한다.
블루아 대성당(Cathédrale Saint-Louis de Blois프랑스어) 및 주교 정원(Jardins de l'Évêché프랑스어): 1697년 블루아가 독립 교구가 되면서 1700년에 완공된 대성당이다. 초대 주교들이 옆에 넓은 정원을 조성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청이 파괴된 후, 주교의 거처는 현재의 블루아 시청이 되었다. 정원은 도시 공원으로 개방되어 시내와 루아르 강, 블루아-비엔느 지역의 전망을 제공한다. 공원 중앙에는 미국 후원자 J. 샌포드 살투스가 기증한 잔 다르크 동상이 있다. 정원 내 장미원은 매년 5월 15일부터 9월 30일까지 개방된다.
호텔 파르티퀼리에(Hôtel particulier프랑스어): 1498년 루이 12세가 즉위한 후, 많은 귀족들이 블루아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블루아 성 근처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은 저택들을 지었다. 대표적인 호텔 파르티퀼리에는 다음과 같으며, 대부분 역사 유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목조골조 건물: 귀족 저택 외에도 많은 시민들이 도시 곳곳에 목조골조 건물을 지었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으며, 이들 역시 역사 유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루아의 루프 숙소'' (Logis du Loup프랑스어)
''루아의 곡예사 집'' (Maison des Acrobates프랑스어)
7. 2. 박물관
블루아 성 바로 앞에는 마술사 로베르 위댕의 이름을 딴 '로베르 위댕 마술의 집'(La Maison de la Magie Robert-Houdin프랑스어)이 있다. 이곳은 마술을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운영된다.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마술 관련 소장품과 상설 공연 예술 공간을 함께 갖춘 공공 박물관이며, 로베르 위댕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16][17][18][19]
또한 블루아에는 만화 예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메종 드 라 BD'(Maison de la BD프랑스어, 만화의 집)라는 박물관이 있다.[21] 1980년대부터 이곳에서는 매년 11월 말에 "BD 부움"(BD Boum프랑스어)[22]이라는 만화 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는 "프랑스 최고의 무료 만화 축제"로 알려져 있다.[23]
7. 3. 전통 가옥
1498년 루이 12세가 프랑스 국왕이 된 이후, 블루아는 왕실 거주지가 되면서 전국에서 많은 귀족들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블루아 성에서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루이 12세는 이탈리아에서의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통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양식을 프랑스에 들여왔고, 이는 블루아의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지어진 귀족들의 저택은 이른바 '호텔 파르티퀼리에'(Hôtel particulier프랑스어)라 불리며, 다음과 같은 건물들이 대표적이다.
또한, 많은 시민들은 도시 전역에 걸쳐 목조골조 건물을 지었으며, 다음과 같은 예시가 있다.
''루아의 루프 숙소''
''루아의 곡예사 집''
위에 언급된 건물들은 대부분 역사 유적(Monument historique프랑스어)으로 등재되어 있다.
7. 4. 블루아-비엔느 (Blois-Vienne)
Blois-Vienne|블루아-비엔느프랑스어 또는 간단히 Vienne|비엔느프랑스어는 루아르강의 왼쪽 강둑에 위치한 블루아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1606년까지 블루아와는 별개의 지역이었으며, 강의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19세기 중반 루아르강의 대홍수(1846년, 1856년, 1866년) 당시, 특히 1856년 최악의 홍수 때 블루아-비엔느의 중심 지역은 강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
블루아의 중심부와 비엔느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다리는 18세기 초에 건설된 자크 가브리엘 다리이다. 이 다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8월, 독일군이 블루아-비엔느 지역으로 후퇴하면서 중앙 아치 세 개를 파괴했으나, 전쟁 후 재건되어 1948년 12월에 다시 개통되었다. 다리와 연결되는 비엔느의 윌슨 애비뉴에는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도시 탈환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엔느 지역에는 주변을 둘러싼 제방과 폐쇄된 다른 다리들의 흔적도 남아있다. 과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라 크뢰실 항구는 현재 라 루아르 아 벨로라는 이름의 루아르강 자전거 도로 바로 옆에 위치한 도시 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25] 제방 너머에는 라 부이유 공원이 재정비되고 있는데, 이 공원은 실제 홍수가 발생했을 때 강물을 분산시키는 분수로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도시 남쪽으로 더 가면 뤼시 숲(Forêt de Russy)이 자리하고 있어, 과거 이 지역을 뒤덮었던 울창한 숲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7. 5. 종교 건축물
924년경 생 로메르(St. Lomerfra) 공동체의 수도승들은 중세 성 아래, 도시 성벽 밖 루아르 강변에 토지를 받았다. 13세기에 교회가 세워졌고, 백년전쟁의 영향으로 요새화되었다. 생 로메르 수도원은 프랑스 종교 전쟁 동안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18세기 초에 재건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세력에 의해 많은 성직자 및 왕실 관련 기념물이 파괴되었고,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병원인 호텔 뒤외(Hôtel-Dieu)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이후 원래의 생 로메르 수도원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추가되면서 생니콜라 교회가 되었고, 추가된 건물은 도시의 호텔 뒤외로 남게 되었다. 이 구역은 점차 버려졌다가 일부 공공 서비스 시설로 다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재개발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블루아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종교 건축물이 있다.
'''블루아 대성당''': 루이 9세와 루이 12세에게 봉헌되었으며, 1564년부터 1700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생뱅상 드 블루아 교회''': 빈센트 드 폴 성인에게 봉헌되었으며, 1625년부터 1660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생니콜라 드 블루아 교회''': 미라의 성 니콜라오 주교에게 봉헌되었으며, 12세기에 건축되었다.
'''블루아-비엔느 교회''': 툴루즈의 사투르니누스 성인에게 봉헌되었으며, 1500년경부터 1528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노트르담 드 라 트리니테 대성당''':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으며, 1932년부터 1939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8. 교통
A10 고속도로는 블루아를 파리, 오를레앙, 투르와 연결한다. 블루아역에서는 파리, 오를레앙, 투르, 낭트 그리고 여러 지역 목적지로 가는 직통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블루아는 프랑스 왕가와 깊은 인연을 맺은 도시로, 루이 12세와 같은 국왕이나 안 드 브르타뉴, 클로드 드 프랑스와 같은 왕비들이 거주하거나 생을 마감한 곳이다. 또한 현대 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로베르 우당 역시 블루아 출신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많은 인물들이 블루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에티엔 고데(Étienne Gaudet, 1891–1963): 네베르 출신 판화가이자 화가로, 블루아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베르나르 로르주(Bernard Lorjou, 1908–1986): 화가이다.
클로드 드리(Claudine Doury, 1959년생): 사진작가이다.
장-루이 아고베(Jean-Louis Agobet, 1968년생): 작곡가이다.
크리스티앙 주이(Christian Jui, 1973년생): 시인이다.
니로(Niro, 1987년생): 오를레앙 출생 래퍼로, 블루아에서 자랐고 현재도 블루아에 거주한다.
힐드가르드 페스노(Hildegarde Fesneau, 1995년생): 바이올리니스트이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블루아는 시계 제작 및 금세공업 분야의 많은 장인들의 고향이었다.[27] 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쥘리앵 쿠드레(Julien Coudray)''': 타르디(Tardy)에 따르면 블루아 최초의 시계 제작자 중 한 명으로,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 국왕을 위해 일했다. 블루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퀴페르(Cuper) 가족''':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미셸 퀴페르(Michel Cuper)가 만든 시계 두 점과 P. 퀴페르가 만든 시계 두 점이 소장되어 있다. 도시에는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벨랑제(Bellanger) 가족''': 마르탱(Martin)은 첫 번째 아내와 사이에 1594년과 1597년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그중 한 명은 이삭(Isaac)이었다)을 두었고, 수잔느(Suzanne)와 사이에 피에르(Pierre, 1603년생), 장(Jean, 1641년 결혼, 1678년 사망), 테오필(Théophile) 등 적어도 세 명의 아들을 더 두었다.
'''기욤 쿨드루아(Guillaume Couldroit)''': 런던 대영박물관에 그의 탁상시계가 소장되어 있다.[28]
'''자크 드 라 가르드(Jacques de la Garde)''': 대영박물관에 그의 자명시계가 소장되어 있으며,[29] 프랑스 에쿠앙(Écouen)에 있는 에쿠앙 성(Château d'Écouen)/국립 르네상스 박물관(Musée national de la Renaissance)에는 그의 탁상시계가 있다.[30]
'''샤를 페라(Charles Perras)''': 대영박물관[31]과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그의 시계 두 점이 소장되어 있다.[32]
'''뒤뒤익(Duduict) 형제'''
'''블레즈 푸셰(Blaise Foucher)''': 뒤뒤익의 제자로, 대영박물관에 그의 시계 케이스 하나가 소장되어 있다.[33]
'''보티에(Vautier) 가족''': 대영박물관에는 루이(Louis)의 시계 케이스 여러 개가 소장되어 있다.[34]
'''그리벨랭(Gribelin) 가족''': 시몬(Simon)은 국왕의 시계 제작자이자 조각가였으며, 그의 아들 아브라함(Abraham, 1589–1671)이 그의 뒤를 이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는 아브라함이 만든 시계가 소장되어 있다.[35]
'''지라르(Girard) 가족''': 마르크(Marc)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블루아에 정착했고, 그의 아들 테오도르(Théodore)와 손자 마르크 2세(Marc II)는 모두 시계 제작자였다.
'''크리스토프 모를리에르(Christophe Morlière)''' (1604년 오를레앙 출생 – 1643년): 블루아로 이주했다. 1632년에는 로렌의 마르그리트(Marguerite of Lorraine)가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Gaston, Duke of Orléans)이자 블루아 백작과 결혼할 때 시계를 주문받았다.
'''피에르 브리송(Pierre Brisson)'''
'''폴 비에(Paul Viet)''': 대영박물관에 그의 그림이 그려진 시계 케이스가 있다.[36]
'''장 봉브뤼익(Jean Bonbruict)''': 대영박물관에 그의 은제 마차 시계가 있다.[37]
'''니콜라 르맹드르(Nicolas Lemaindre)''':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 왕비의 시계 제작자이자 시종이었다. 대영박물관[38], 루브르 박물관[39],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40]에도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피에르 랑드레(Pierre Landré)''': 그의 시계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41]
'''샤르티에(Chartier) 가족''': 피에르(Pierre)의 아들인 T. 샤르티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원통형 탁상시계를 전시했다.[42]
'''프랑수아 로리에(François Laurier)'''
런던 출신의 시계 제작자 '''헨리 매시(Henry Massy)'''는 블루아 출생 니콜라스 매시(Nicolas Massy)의 아들이다.
'''로베르 보케르(Robert Vauquer)''': 현재 루브르 박물관[43]에 두 점, 볼티모어 월터스 미술관(Walters Art Museum)[44]에 한 점의 시계가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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