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
1. 개요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병인박해 당시 삼촌의 옥살이를 목격한 후 자선과 구휼 사업에 힘썼으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외세 침탈에 맞섰다. 1907년에는 대구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여 1,300만 환의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서상돈은 경북국채보상도총회 총무장으로 활동하며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은 와해되었다.
| 이름 | 서상돈 |
|---|---|
| 원래 이름 | 서상돈 (徐相敦)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850년 10월 17일 |
|---|---|
| 출생지 | 조선 경상북도 김천시 마잠 |
| 사망일 | 1913년 6월 30일 |
| 사망지 | 일본 제국령 조선 경상북도 |
| 본관 | 대구 서씨 |
| 국적 | 조선 일본 제국령 조선 |
| 종교 | 천주교 |
| 부 | 서철순 |
|---|---|
| 모 | 김아가다 |
| 배우자 | 수안 김씨 |
| 자녀 | 서병옥 서병조 서병주 서병민 |
| 형제 | 서상정(동생) |
| 친인척 | 서광수(고조할아버지) 김후상(외할아버지) 서인순(큰아버지) 서익순(삼촌) 서태순(삼촌) 서유형(친척) 박순용(손자) |
| 직책 | 前 대한제국 탁지부 세무시찰관 광문사 부사장 대구국채담보회 재무위원 경북국채보상도총회 총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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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독립운동가, 언론인, 보부상, 자선가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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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로마 가톨릭교도 -
이상재
이상재는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독립협회, YMCA, 조선일보,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끌고 청년 교육과 계몽에 헌신한 월남 이색의 후손이다. -
일제강점기의 로마 가톨릭교도 -
안준생
안준생은 안중근의 차남으로,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을 보이다 해방 후 한국전쟁 중 사망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으며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
한국의 기업인 -
김갑순
김갑순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하며 관노 출신으로 군수를 역임, 재산을 축적하고 친일 행위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석방,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
한국의 기업인 -
조수호
조수호는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의 3남으로, 대한항공 입사 후 2003년부터 한진해운 회장을 역임하며 해운 산업 발전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
1851년 출생 -
더럼 스티븐스
더럼 스티븐스는 미국의 외교관으로,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일본 외무성에서 일했으며, 대한제국 외부 고문으로 친일 행보를 보이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에게 피격되어 사망, 한국 역사에서 비판받는 인물이다. -
1851년 출생 -
프란츠 폰 리스트
프란츠 폰 리스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형법학자이자 국제법 학자로, 목적형주의를 주창하며 형벌의 목적을 범죄 예방 및 재활, 사회적 보호로 설정하여 20세기 형벌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개선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한 극단적인 처벌 주장은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2. 업적
병인박해 때 대구감영 옥에 갇힌 삼촌 서인순의 참상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거상이 된 후에도 쌀밥을 먹지 않고, 봄가을 곡식 창고를 열어 어려운 이웃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등 자선과 구휼 사업에 앞장섰다.
2.1. 독립협회 활동
서상돈은 외세의 국권 침탈에 맞서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4기 민중 투쟁기에 만민공동회에서 재무부 과장 및 부장급 일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2.2. 국채보상운동 주도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 이후, 일본의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는 차관 공세를 통해 대한제국의 재정을 일본에 예속시키려 했다. 이에 서상돈은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적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2천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 환을 모을 수 있다"는 취지문을 발표하고, 800원의 거금을 의연하여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대구에서의 구국운동 기사가 게재되고, 다음 날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대구의 여성들은 전국 최초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은패물을 의연하는 등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서상돈은 경북국채보상도총회를 결성하고 총무장으로 실무를 지휘하며, 대한매일신보에 광고를 내는 등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해외 한인들에게까지 전파되며 거족적인 민족 운동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