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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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준생은 안중근의 차남으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어머니를 따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다 상하이에 정착했다. 1939년 친일 행위로 논란이 되었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 전쟁 중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친일 행적 때문에 비판을 받지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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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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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생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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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안준생 |
출생일 | 1907년 3월 22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황해도 해주 |
사망일 | 1951년 4월 30일 |
사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
본관 | 순흥(順興) |
종교 | 천주교(세례명: 그레고리오) |
가족 관계 | |
부모 | 안중근(부), 김아려(모) |
형제 | 안현생(누나), 안분도(형) |
배우자 | 정옥녀(鄭玉女) |
자녀 | 장녀 안선호 장남 안웅호 차녀 안연호 |
직업 및 경력 | |
직업 | 기업가 |
경력 | 만선시찰단 이사장 |
2. 생애
안준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어머니를 따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다가 상하이 조계에 거주하며 항저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1939년 상하이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중 내선일체 활동의 일환으로 상해 체류 조선인의 '만선시찰단'(満鮮視察団)에 참가하여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9일, 일행은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면담하였다. 10월 15일 박문사(지금의 서울신라호텔 근처)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에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부친 안중근의 추선 공양도 같은 절에서 행하였다. 10월 16일에는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 사죄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제국 정부의 각본대로 연출된 화해극이었으며,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이를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대서특필했다. 안준생은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그에게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특별 관리했다.[2]
이러한 소식을 접한 김구는 안준생이 미나미 총독을 아버지라 불렀다며 '민족반역자(매국노, 韓奸)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장제스에게 부탁했다. 또한, 상하이에서 아편 매매를 저질렀다며 엄중 처벌을 요청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기에 중화민국 당국은 요청을 무시했다.[3]
안준생은 광복 이후에도 잠시 귀국을 망설이다가 1946년 모친 사후 간신히 귀국하였다. 귀국 후 남한에 숨어살다가 한국 전쟁 중 1951년 부산으로 피신해 있을 때 덴마크 국적의 병원선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서울특별시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다.[4] 부인 정옥녀 씨와 1남 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안준생의 아들 안웅호(安雄浩)는 미국에서 중국계 여성과 혼인하였으며 심장병 권위자가 되었다. 안웅호의 아들 토니안 주니어(Tony Ahn Jr.)는 한국어를 못하는 재미한인으로 안중근 의거 104주년 기념하여 한국을 방문하였다.
안준생은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호의 여론도 존재한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와 언론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연합뉴스’는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5]
2. 1. 유년 시절과 방랑
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어머니를 따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다가 상하이 조계에 정착하여 항저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2]2. 2. 친일 행적과 논란
1939년, 상하이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중 '만선시찰단'(満鮮視察団)에 참가하여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면담하였다.[2] 10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2]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와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며 사죄했다.[2] 이러한 안준생의 행적은 당시 언론에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 등으로 대서특필되었다.[2] 김구는 안준생의 친일 행적에 분노하여 장제스에게 안준생을 체포하여 처벌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3]2. 3. 해방 이후의 삶
광복 이후 잠시 귀국을 망설이다 1946년 모친 사후 간신히 귀국하였다.[3] 귀국 후 남한에 숨어 살다 한국 전쟁 중 1951년 부산으로 피신해 있을 때 덴마크 국적의 병원선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서울특별시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4]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부인 | 정옥녀 | 1905년 | 1991년 | |
장녀 | 안선호 | 1930년 | 2003년 | LA 거주 |
장남 | 안웅호 | 1933년 | 2013년 | 미국명 토니안 |
며느리 | 청즈잉(程志英) | 1934년 | 중국계 미국인 | |
손자 | 토니안 주니어 (안도용) | 1964년 | ||
손녀 | 리사 안 | |||
손녀 | 캐런 안 | 1973년 | ||
차녀 | 안연호 | 1938년 | 2011년 | 시애틀 거주 |
4. 안준생에 대한 평가
안준생은 아버지 안중근의 의거 이후 힘든 삶을 살았으며, 이로 인해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일제 강점기 당시 안준생은 생존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선일체를 위한 '만선시찰단'에 참가하고,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에 분향하며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라는 담화를 발표했으며,[2]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하기도 했다.[2] 이러한 행적은 김구에게 '민족반역자(매국노, 韓奸)'라는 비판을 받았고, 장제스에게 체포 및 처벌을 요청받기도 했다.[3]
광복 후, 안준생은 한국에 돌아와 숨어 살다가 한국 전쟁 중 사망했다.[4]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되었고, 손자 토니안 주니어는 재미한인으로 성장했다.[4]
안준생의 친일 행적은 학계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지만, 안중근 의사의 영웅성 때문에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연구자는 드물다.[5]
4. 1. 친일파 비판
안준생은 안중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939년, 안준생은 내선일체를 위한 '만선시찰단'에 참가하여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면담하였다.[2]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에서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2] 게다가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며 사죄했다.[2] 이러한 안준생의 행동은 아버지 안중근의 독립운동 정신을 훼손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로 여겨진다.
당시 언론은 안준생의 이러한 행위를 "조선 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크게 보도했다.[2] 김구는 안준생을 '민족반역자(매국노, 韓奸)'로 규정하고 장제스에게 안준생을 체포하여 처벌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3]
안준생의 친일 행적은 학계에서도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지만, 안중근 의사의 영웅성 때문에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연구자는 드물다.[5]
4. 2. 시대적 상황 고려
안준생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안준생의 친일 행적이 안중근의 독립운동 업적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된다.[5]5. 관련 작품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한국어》(2009년, 이태진, 조동성, 김성민 지음)[1]
- 나는 너다(연극) (2014년)[2]
참조
[1]
문서
이토 히로부미의 서자
[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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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naver.c[...]
시사IN
2010-03-2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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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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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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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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