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금성
1. 개요
석금성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배우, 가수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기생 생활을 하다가 이서구에게 발탁되어 토월회에 입단하여 배우로 데뷔했다. 1925년 연극 《추풍감별곡》으로 데뷔하여 토월회의 간판 배우로 성장했으나, 그해 서산군의 부호와 결혼하며 은퇴했다. 이후 배우로 복귀하여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연극 《아리랑고개》에서 봉이 역으로 주목받았다. 1932년 태양극장을 창립하고 신민요 음반을 발매하는 등 가수 활동을 병행하며 최승일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80대까지 연기를 이어갔으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으로 간 자녀들과 재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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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가수 -
이봉룡
이봉룡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활동하며 '낙화유수' 등의 히트곡을 작곡한 한국의 작곡가로,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한 친일 논란이 있으며 한국 전쟁 중 부인 실종 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작곡 활동을 이어갔다. -
일제강점기의 가수 -
윤심덕
윤심덕은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이자 배우로, 극작가 김우진과의 비극적인 동반 자살과 함께 발매된 '사의 찬미'로 유명하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연극 배우 -
현철 (1891년)
현철은 일제강점기에 연극, 영화, 야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연극 관련 저술과 번역 활동을 하고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여 배우를 양성하는 등 한국 연극계 발전에 기여했으며, 광복 후 서울시 문화위원회 연극분과위원장을 지냈다. -
일제강점기의 연극 배우 -
문예봉
문예봉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1907년 출생 -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 독일 시대 히틀러 유겐트의 국가 지도자였던 독일 정치인으로, 나치즘에 심취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합법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시키고 빈의 가우라이터 겸 제국총독으로 활동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07년 출생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내용 없음)
2.1. 초기 생애와 배우 데뷔
한성부 출신으로, 어린 시절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생이 되었다. 관객으로 극장에 갔다가 극작가 이서구에게 발탁되어 토월회에 입단하면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작은 1925년에 공연된 《추풍감별곡》이다.
2.2. 토월회 간판 배우와 첫 번째 결혼
한성부 출신으로, 어릴 때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기생이 되었다. 관객으로 극장에 갔다가 극작가 이서구에게 발탁되어 토월회에 입단하면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데뷔작은 1925년에 공연된 《추풍감별곡》이다.
여배우가 희소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곧 토월회의 간판급 배우로 성장하였으나, 데뷔하던 해 연말에 충청남도 서산군의 부호 이충진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3년 여만에 파탄을 맞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2.3. 복귀와 두 번째 결혼
첫 결혼 생활이 3년 여만에 파탄을 맞으면서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복귀 후에는 영화에도 출연하고 토월회 재기 공연에 참여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크게 흥행한 토월회의 연극 《아리랑고개》에서 봉이 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토월회가 해체된 후에는 미나도좌 신극부에 합류했으며, 신흥극장 창립에도 가담하였다. 이 시기에 좌파적 경향의 문예운동가이자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2.4. 가수 활동과 육아 전념
1932년 토월회의 후신인 태양극장이 창립되자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석금성은 연극 활동 외에도 신민요나 촌극 음반을 내며 가수 활동을 병행했다. 영화에도 간간이 출연했으나, 딸 최로사 등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힘쓰면서 이전과 같은 활발한 배우 활동은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한때 "조선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불렸던 석금성에게 주어지는 배역도 점차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어 갔다.
2.5. 남편의 월북과 분단
1948년 남편 최승일이 사남매를 데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석금성은 당시 시부모를 모셔야 했기에 이들과 함께 가지 못했고, 이 사건은 그녀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석금성은 다시 영화계와 텔레비전 드라마계에서 개성 있는 조연으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80대 고령까지 연기를 계속하여 한국 연극계의 산 증인으로 불렸다.
한편, 북으로 간 맏딸 최로사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막내아들 최호섭은 고모 최승희를 따라 무용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남한에 전해지기도 했다. 석금성은 재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북조선의 자녀들과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1995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2.6. 분단 이후의 활동과 말년
1948년 남편 최승일이 사남매를 데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을 때, 석금성은 시부모를 모셔야 했기에 따라가지 못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한국 전쟁 이후부터 다시 영화계와 텔레비전 드라마계에서 개성이 강한 조연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80대가 될 때까지 연기를 계속하여 한국 연예계의 산 증인으로 불렸다.
북으로 간 자녀 중 맏딸 최로사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막내아들 최호섭은 고모인 무용가 최승희를 따라 무용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석금성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북에 있는 자녀들과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1995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