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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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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승희는 일제강점기부터 북한에서 활동한 무용가이다. 경성에서 성장하여 일본에서 이시이 바쿠에게 무용을 배우고, 한국 민속 춤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현대 무용을 개발했다.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서 공연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일제강점기 말 일본군 위문 공연 참여로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무용가로 활동하며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나, 1960년대 말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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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승희
본명최민수
로마자 표기Choe Seung-hui
일본어 표기사이 쇼키 (Sai Shōki)
중국어 표기Cui Chengxi
출생일1911년 11월 24일
출생지경기도 경성부 (현재 대한민국)
사망일1969년 8월 8일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승희
최승희
직업
직업무용가, 배우
활동
분야무용
사조신무용
배우자김추련
주요 작품
주요 작품화랑무
장고춤
초립동
춘향애사

2. 생애

최승희는 일제강점기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어 발음인 '사이 쇼키'로도 알려졌다.[1] 창씨개명에도 불구하고 한국 성씨인 최씨를 유지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제국 내 복잡한 문화적 관계를 보여준다.[1]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가 되려 했으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했다.[4][5]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이시이 바쿠에게 춤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시이는 한국인에게 열려 있는 진보적인 인물이었다.[6][11] 1926년, 최승희는 이시이의 제자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9]

이후 최승희는 이시이의 무용단에서 활동하다 독립하여 자신의 무용 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무용을 연구하고 현대화하려 노력했으며,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일본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1937년부터 미국, 유럽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43]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일본 제국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57]

광복 이후, 최승희는 남편 안막을 따라 북한으로 갔다.[60] 김일성의 협조적인 태도에 힘입어 평양에서 무용 학교를 설립하고 북한 정권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받았다.[64][65] 한국 전쟁 중에는 모스크바, 중국 등지에서 공연했다.[69]

최승희는 중국 고전 무용과 중국-조선족 무용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오페라에서 무용 요소를 추출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59] 1951년 베이징에 무용 학교를 개원하여 중국 무용 발전에 기여했다.[74]

그러나 1959년 남편 안막이 체포되고,[81] 1967년 최승희 자신도 숙청당하면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82] 2003년, 1969년에 사망했다는 공식 발표와 함께 "인민 배우"로 칭송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2. 1. 초기 생애 및 무용 입문

최승희는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 또는 강원도 홍천군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준현(본관은 )[94]한학자였으나, 한일 병합으로 토지를 잃은 후 가세가 안정되지 않아 한때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93] 어릴 적 최승희의 가족은 일본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2]

최승희는 학교 성적이 우수하여 초등학교를 월반으로 졸업하고, 경성에 있던 명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후 학비를 면제받았으며, 또한 월반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도쿄의 음악학교나 사범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두 번의 월반으로 입학 규정 연령인 16세에 미치지 못해, 모두 입학 보류가 되었다.[92]

1926년 3월,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공연이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다. 일본 대학의 미학과에 다니던 오빠의 권유로 공연을 관람한 최승희는 깊은 감명을 받고, 그날 밤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 이시이에게 입문의 뜻을 전했다. 부모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며칠 후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가 도쿄의 무사시사카이에 마련한 무용연구소에서 트레이닝을 시작했다.[93]

2. 2. 일본에서의 활동과 국제적 명성

일본 유학 이후 국내에서 근대 무용 공연으로 큰 인기를 얻은 최승희는 《반도의 무희》(1936)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년대 후반에는 칠레 등 해외 순회 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1]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두 번째 한국인 제자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관동 대학살이 일어난 시기였음에도, 이시이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한국인에게 열려 있었다.[11][10]

최승희는 한국으로 돌아와 최승희무용예술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을 모두 받았다.[15][16] 귀국 후, 그녀는 한국인 무용가로서 국제적인 활동의 정치적 의미와 무게 때문에 주목받았다. 잡지와 신문은 그녀의 서양 무용, 해외 공연, 한국에서의 사생활을 보도했다. 한국 언론은 무용가이자 "신여성" 현상의 일부로서 그녀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특히 미혼 여성으로서 언론의 가십 대상이 되었다.[1]

1930년대 문화적 번영 이후, 최승희는 일본 대도시로 이주하여 식민지 전통을 이용해 일본 관객에게 어필하며 예술적 기회를 얻었다. 최승희와 일본 제국 정부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일본과의 그러한 관계는 그녀의 춤 7개만이 전통적인 한국 춤이었기 때문에 공론장에서 그녀를 흥미롭게 만들었다.[1]

최승희는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 이시이 밑에서 계속 공부하며 재능 있는 무용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한국 민속 춤에서 영감을 얻은 자신만의 현대 무용을 개발했는데, 이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하찮은 작품으로 여겨졌다. 이시이와 안막이 그녀에게 한국 민속 춤을 배우라고 제안했다.[25]

일본 극장 단체는 최승희를 지원했고, 그녀의 이미지를 식민지 여성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여성성과 아시아 전통을 사용하여 제국의 감수성과 우월성을 창출했다. 최승희의 경력 궤적과 그녀가 공연한 다양한 공간은 의도된 관객의 욕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여러 개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최승희의 이미지 묘사는 전시 중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의 급속한 확산과 일치했으며, 최승희의 명성을 정치적 이익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녀의 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엄청나게 인기 있는 문화 현상이 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1]

최승희는 모델로 활동하며 번 돈을 공연 자금으로 사용했고, 뮤지컬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다.[30][31]

1940년 한국 서울의 조선호텔 (현재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커피를 마시는 최승희


최승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고, 장 콕토파블로 피카소와 서신을 교환했다. 그녀는 성악가로도 활동하며 태평 레코드와 기린 레코드(만주국)에서 녹음을 했으며, 1936년 콜롬비아 레코드 일본에서 앨범 ''이탈리아의 정원''을 발매했다.

여러 나라와 서방 세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여러 일본 평론가들이 최승희의 작품에 대해 글을 썼다. 평론가들은 최승희의 작품을 찬양했는데, 그녀가 오족협화를 외치는 만주국의 국시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 평론가 미쓰요시 나쓰야도 1943년 상하이에서 열린 최승희의 독주회 성공을 칭찬했다. 그는 그것을 일본의 통치 아래 대동아를 형성하려는 아시아인들의 훌륭한 대표라고 묘사했다. 최승희는 일본인 무용가로 공연했지만, 그녀가 한국을 동정하고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믿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중에 제국 아래서 춤을 추는 것에 동화되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1]

최승희는 일제강점기 한국인 여성 무용가로서 국외에서 공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비록 일본은 일본 제국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을 표현하는 춤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말이다.[3]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군 당국은 이시이 바쿠에게 일본군 위안을 위한 무용 공연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이시이와 그의 무용수들은 도쿄의 이시이 무용 학교 무용수들과 함께 타이완, 중국, 베트남을 순회하게 되었다. 이 순회 공연 덕분에 이시이의 제자들은 제2차 중일 전쟁 (1937–1945) 기간 동안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에 춤은 단순한 예술 공연이 아니었다. 최승희의 공연은 언어와 방언으로 제한된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녀의 공연은 일본 제국 전역에 걸쳐 선전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최승희의 무용 경력은 주로 전쟁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녀는 16세부터 30대 중반까지 춤을 췄다. 이 때문에 그녀의 무용 경력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그녀가 받은 대우에 영향을 미쳤다. 비평가들은 최승희의 작품이 선전을 위해 사용된 점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비한국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우려했다.[35] 이러한 논쟁은 그녀의 작품이 다른 사회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녀는 일본 무용단 소속 한국인 무용가라는 정체성 때문에 다른 무용수들과 달랐다.[1]

1938년 1월 11일, 최승희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36] 최승희의 공연은 샌프란시스코 (1월 22일), 로스앤젤레스 (2월 2일 - 이벨 극장), 뉴욕 (2월 19일)에서 열렸다.[38][39][40] 관객들의 반응과 평가는 좋았다.[41] 1938년 11월 초,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존 스타인벡, 모리스 드코브라, 찰리 채플린과 같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길드 극장 (현재 어거스트 윌슨 극장)을 찾았다.[43] 미국에서 공연할 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탓에, 한국 독립 운동의 한국인들로부터 일본 협력자로 비판을 받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녀를 한국 독립을 위해 일하는 인물로 간주했다. 그녀의 미국 공연에서 친독립 기념품이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그녀의 일행은 1938년 12월 17일 미국을 떠났고, 12월 24일 프랑스 르아브르에 도착했다.[44] 공연은 파리 (1939년 1월 31일), 브뤼셀 (2월 6일), (2월 26일), 마르세유 (3월 1일)에서 열렸다.[45] 그들은 3월 중순에 스위스에서, 3월 말에 이탈리아에서 공연했다.[46] 4월 1일부터 남부 독일의 작은 도시들에서 공연을 시작했다.[46] 4월 중순에는 네덜란드에서 공연했다.[47] 최승희의 유럽 공연은 모두 호평을 받았다.[48] 최승희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녀의 전통 모자 (초립동 모자)는 파리에서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49] 193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최승희는 루돌프 폰 라반, 메리 위그만, 세르주 리파르, 안톤 돌린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50] 이 콩쿠르 이후, 최승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음악 및 무용 축제에 초청받았다.[51] 그 후 그녀는 파리의 샤이오 국립 극장에서 공연했다.[52] 관객으로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장 콕토, 로맹 롤랑, 미셸 시몽 등이 있었다.[53] 피카소는 최승희의 모습을 스케치하여 공연 후에 그녀에게 주었다.[53]

프랑스 사람들은 신문과 라디오 뉴스를 통해 유럽의 긴장된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다.[54] 최승희가 프랑스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또 다른 세계 대전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54] 따라서 최승희와 그녀의 일행은 일본 대사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머물기로 결정했다.[55] 그녀는 이탈리아, 북부 독일, 스칸디나비아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54]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이틀 뒤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55] 폴란드에서의 전쟁이 격화되자 최승희와 그녀의 일행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이탈리아로 대피하는 것이었다.[56] 이는 이탈리아가 독일, 일본과 삼국 동맹을 맺기 전이었고,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하기 전이었다. 마르세유 영사관 직원은 최승희에게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할 수 있으며, 약 190명의 일본인 피난민을 태운 일본 배 하코네 마루가 다음 날 이탈리아에서 도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56] 최승희와 그녀의 일행은 하코네 마루에 탑승하여 미국으로 대피했다.[56] 그녀는 미국,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에서 공연 투어를 계속했다.

1943년, 최승희는 만주, 한국, 중국 북부 및 중부의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일명: tairiku imon) 130회 공연을 시작했다. 한국의 일부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은 최승희가 일본 식민 정권에 의해 군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주장한다.[1]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은 일본 제국 해군진주만 공격 이후 총력전 체제로 전환되었다. 모든 공연은 일본 제국 육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군대를 위한 공연이 필수 사항이 되었다.[57] 1942년 2월 16일부터 최승희는 한국, 만주, 화북에서 일본군을 위해 공연했다.[58] 그녀는 한국 민속 무용에서 영감을 받은 춤과 일본, 중국, 인도, 시암의 영향을 받은 춤을 공연했다.[59] 1943년에는 상하이에서 매란방과 함께 중국 오페라 동작을 훈련받았고, 1944년에는 베이핑 (현재 베이징)에서 동양 무용 연구소를 시작했다.[59]

일본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가부키좌 등에서 개선 공연을 했다. 1944년 제극 공연에서는 전쟁으로 궁핍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연일 만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출신 무용가로서 군부·경찰로부터 다양한 감시와 경계를 받게 되었다. 창씨개명이 법제화된 후에도 "Sai Shoki"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정착되어 있다면서 개명 요구를 계속 거부했다. 1944년 3월,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해 도쿄를 떠났다.

2. 3. 귀국 후 활동과 월북

광복 후, 최승희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여 평양시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취임했다.[111] 공훈배우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111] 1946년 7월 북한으로 간 최승희는 국제적인 무용가로서 후한 대우를 받으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다.[93]

1936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 우승 직후 한 음식점에서 최승희와 손기정


1947년 7월 25일, 최승희는 딸, 시누이, 제자들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로 보내 국제 청소년 무용 축제에 참가하게 했다.[67] 1949년 12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사회주의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베이징에서 문화 지도자들을 위해 공연했다.[68] 이때 AP통신 기자가 해외 공연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최승희는 "나는 새장에 갇힌 새와 같아요."라고 답했다.[68]

1950년 5월, 최승희와 약 100명의 예술가들은 공연을 위해 모스크바로 보내졌다.[69] 이들이 모스크바에 머물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70] 이는 김일성이 요시프 스탈린에게 침공 허가를 받고 전쟁 의도를 숨기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70] 이후 이들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노보시비르스크 등지에서 공연하다 한국 전쟁이 격화되자 귀국했다.[72] 1950년 10월에는 중국으로 피난하여 공연을 이어갔다.[73]

중국에서는 저우언라이의 지원을 받아 베이징의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의 이름을 딴 훈련반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고 경극 근대화에 기여했다.[93] 딸 안성희도 무용가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지도에 나섰다.[92] 1948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98]

그러나 남편 안막이 실각하면서 최승희 역시 1967년 "부르주아 및 수정주의 분자"로 지목되어[99] 딸과 함께 연금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행적이 묘연해졌다.[92]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 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111] 사후 34년 뒤인 2003년 2월 한설야와 함께 복권되었고, 같은 해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111]

2. 4. 북한에서의 활동과 숙청

광복 후, 최승희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여 평양시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취임했다.[111] 공훈배우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111]

1946년 7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남편의 강력한 의지로 북한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국제적인 무용가로서 후한 대우를 받으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다.[93] 1948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98] 딸 안성희(안성희|한국어)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무용가가 되었고, 함께 지도에 나섰다.[92]

저우언라이의 지원으로 베이징의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의 이름을 딴 훈련반이 만들어져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경극의 근대화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93] 1949년 12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최승희와 딸을 포함한 무용수들은 사회주의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베이징에서 문화 지도자들을 위해 공연하기도 했다.[68]

1950년 5월, 최승희와 그녀의 딸, 그리고 약 100명의 예술가들은 공연을 위해 모스크바로 보내졌다.[69] 이들이 모스크바에 있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김일성이 요시프 스탈린에게 침공 허가를 받고 전쟁을 숨기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70] 이후, 이들은 레닌그라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공연하다가 한국 전쟁이 격화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72] 1950년 10월, 최승희와 그녀의 아들, 제자들은 중국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공연했고, 전쟁 중에 헤어졌던 딸과 재회했다.[73][74]

그러나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최승희도 연금되었다는 설이 돌았고, 이후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111] 1967년에는 "부르주아 및 수정주의 분자"로 지목되어 딸과 함께 연금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후 소식이 끊겼다.[92][99]

사후 34년 뒤인 2003년 2월, 한설야와 함께 복권되었고, 같은 해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111]

3. 예술 세계

최승희는 중국-조선족 무용과 중국 고전 무용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경극에서 무용 요소를 추출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베이징에서 매란방 등 중국 오페라 배우들과 함께 중국 오페라의 움직임을 분석하여 중국 고전 무용 발전을 위한 요소로 삼았다.[59] 중국 무용가 천진청은 최승희의 작업을 중국 무용 분야의 모델로 평가했다.[59]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의 요청으로 무용 연구소를 베이징으로 이전하고,[59] 베이징에 무용 학교를 개원하여 교육 과정에 중국 무용을 추가했다.[74] 최승희는 민속 무용과 고전 무용을 자료의 출처(농촌의 농민들이 공연했던 춤, 중국 오페라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발전한 춤)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무용을 분류하는 주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경극이 가르쳐지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75]

1951년 7월,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공연했고, 이후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지에서 공연을 이어갔다.[76] 같은 해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총리의 요청으로 베이징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최승희는 평양에 자신의 무용 학교를 설립했다.[77]

1955년, 남일 북한 외무상은 일본과의 경제 및 문화 교류를 제안했다.[78] 당시 일본에서는 최승희를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78] 센다 코레야 등 많은 일본인들이 평양에서 최승희를 만났으나,[79] 북한 정부는 최승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일본행을 허락하지 않았다.[80]

3. 1. 신무용의 개척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 한국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산춤〉, 〈에헤라 노아라〉, 〈달밤의 곡〉, 〈반야월성곡〉, 〈우조춤〉, 〈칼춤〉, 〈보살춤〉, 〈초립동〉, 〈고구려 무희〉, 〈광상곡〉, 〈가면의 춤〉, 〈승무〉, 〈인도인의 비애〉,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방랑인의 설움〉, 〈봉산탈춤〉, 〈유격대의 아들〉 등이 있으며, 북한에서 쓴 저서로는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이 있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들어가 무용을 시작하여 1년 반 만에 경성공회당에서 단독 공연을 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93] 1929년, 경성으로 돌아와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 고전 무용의 현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무용은 기생의 소양 정도로만 인식되어 연구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최승희는 다시 도쿄의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들어가 모던 댄스를 배우며 큰 명성을 얻었다.[93] --

3. 2. 대표 작품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한국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 및 저서는 다음과 같다.

작품저서


3. 3. 중국 고전 무용에의 영향

최승희는 중국-조선족 무용과 중국 고전 무용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중국 경극에서 무용 요소를 추출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최승희는 중국 오페라 배우인 매란방, 한세창, 백운생과 함께 중국 오페라의 움직임을 분석하여 중국 고전 무용 발전을 위한 요소로 삼았다.[59] 중국 무용가이자 CAD 무용단 단장인 천진청은 최승희의 작업을 현지 민속 자료를 활용하고 현대적인 안무 기법을 사용하여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중국 무용 분야의 모델로 평가했다.[59]

1951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는 최승희에게 무용 연구소를 베이징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59] 같은 해 3월 15일, 최승희는 베이징에 무용 학교를 개원하고 교육 과정에 중국 무용을 추가했다.[74] 그녀의 프로그램은 민속 무용과 고전 무용을 분류하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는 자료의 시대가 아닌 자료의 출처에 초점을 맞춘 방식이었다. 민속 무용은 농촌의 농민들이 공연했던 춤이었고, 고전 무용은 중국 오페라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발전한 춤이었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무용을 분류하는 주요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승희는 당시 중국 무용가들에게 경극이 가르쳐지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75]

4. 평가 및 논란

2007년, 1930년대 초반에 가수로 음반을 낸 '최승이'가 음성 분석 결과 최승희와 동일 인물로 밝혀졌다는 주장이 나왔다.[112] 최승희는 일본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여러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고, 장 콕토, 파블로 피카소와 서신을 교환했다. 또한 태평 레코드와 기린 레코드(만주국)에서 녹음했으며, 1936년 콜롬비아 레코드 일본에서 앨범 ''이탈리아의 정원''을 발매하는 등 성악가로도 활동했다.

일본 평론가들은 최승희의 작품이 만주국의 국시인 오족협화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보아 그녀의 작품을 찬양했다. 일본 평론가 미쓰요시 나쓰야는 1943년 상하이에서 열린 최승희의 독주회를 일본 통치 아래 대동아 형성에 기여한 아시아인들의 훌륭한 대표라고 묘사했다. 최승희는 일본인 무용가로 공연했지만, 한국을 동정하고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제국 아래서 춤을 춘 것에 동화되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1]

최승희는 중국 오페라에서 무용 요소를 추출하는 프로젝트를 이끄는 등 중국 고전 무용과 중국-조선족 무용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에서 중국 오페라 배우 매란방 등과 함께 중국 오페라의 움직임을 분석하여 중국 고전 무용 발전을 위한 요소로 삼았다. 중국 무용가 천진청은 최승희의 작업이 현지 민속 자료를 활용하고 현대적인 안무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중국 무용 분야의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1951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는 최승희에게 무용 연구소를 베이징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고,[59] 같은 해 3월 베이징에 무용 학교를 개원했다.[74] 그녀의 프로그램은 자료의 출처에 초점을 맞춰 민속 무용과 고전 무용을 분류하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무용을 분류하는 주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승희는 베이징 오페라가 가르쳐지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75]

1951년 7월,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단을 모스크바로 데려가 공연했고,[76] 이후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지에서 공연했다. 같은 해 저우언라이의 요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공연했으며,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돌아갔다. 한국 휴전 협정 이후 평양에 자신의 무용 학교를 설립하고,[77] 딸을 볼쇼이 발레 아카데미에 유학 보냈다.[77]

1955년 2월, 북한 외무상 남일은 일본과의 경제 및 문화 교류를 제안했다.[78] 그해 5월, 일본 평화 사절단이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일본에서는 최승희를 일본에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78] 센다 코레야 등 많은 일본인들이 평양에서 최승희를 만났지만,[79] 북한 정부와 안막은 최승희가 일본에서 공연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일본행을 허락하지 않았다.[80]

김일성 아래에서 김창만과 한설야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한설야 측이 패배하면서 숙청이 뒤따랐다. 안막은 한설야의 오른팔이었고, 1959년 4월에 체포되었다.[81] 1967년, 최승희는 당에 의해 숙청되어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1999년 탈북자 김용은 최승희가 제18호 관리소에 수감되었다고 증언했다.[82] 2003년 2월 9일, 1969년에 사망했다는 공식 발표와 함께 "인민배우"로 칭송하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나,[104] 실각 이유나 사망 원인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고, 사망일조차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05] 1956년 8월 종파 사건 당시 반대파가 김일성에게 "친일파 중용"을 비판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일보는 북한 정권 지지자들이 "친일파를 철저히 배제했다"는 주장이 거짓이라고 지적한다.[107]

4. 1. 긍정적 평가


  •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육체는 그 균형 잡힌 점에서 확실히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훌륭하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보통 사람의 두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1]
  •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나는 주저 없이 최승희가 일본 최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들 만한 것을 최승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지고 있다. 다른 누구를 일본 최고라고 말하기보다 최승희를 일본 최고라고 말하기가 쉽다."라고 평가했다.[2]
  • 뉴욕 타임스는 "최승희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라고 평가했다.[3]

4. 2. 친일 행적 논란

일제강점기 말기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 공연에 참여하고 여러 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어 친일 논란이 계속되었다.[113] 1941년에는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영화 《그대와 나》에서 무용 공연을 펼쳤고, 1943년에는 75,000원이 넘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했다. 그 외에도 중국에서 열린 황군 위문 공연에 참여했으며, 국민총력문화표창을 받은 일본풍 창작 무용 《무혼》(武魂) 제작에도 참여했다.[113]

이러한 행적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최승희를 포함시켰다.[11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또한 최승희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최승희의 친일 행위와 관련된 논란이 많다는 점과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드물게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공로가 인정되어 기각되었다.[113]

최승희의 국방헌금 헌납이 강요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며, 설령 친일행위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로 인해 그의 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14][115]

홍천군에서 최승희의 춤 선양사업 등을 추진할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등 단체와 여론의 반대로 중단되었다.[116]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 및 그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제2차 목록에 최승희의 이름을 등재하여 친일파로 규정했다.[106] 한국 좌파는 최승희를 "명백한 친일 무용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최승희가 북한으로 건너가 20년 이상 활약한 사실을 들어 북한이 전후에 "친일"을 모두 처벌했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지적한다.

4. 3. 성격 및 사생활 논란

최승희는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일제강점기 조선과 북한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다.[101]

다음은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 "팬레터는 적당히 보고 버린다"라고 발언.[101]
  • 면담 요청에 "조선 땅에서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라며 거절.[101]
  • 공연 중 소란을 피운 관객에게 춤을 중단하고 호통.[101]
  • 신경질적인 성격.[101]
  • 제자들을 하인처럼 부리고 발을 씻게 함.[102]
  • 일본에 남겨둔 딸 안성희의 뒷바라지를 제자에게 떠넘기고, 불만을 품자 무용단에서 내쫓음.[102]


무용가로 성공한 후에도 금전 문제로 형제들과 불화가 잦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주변의 충고를 받았으나 고치지 않았다. 북한으로 건너간 후에도 호화로운 생활은 계속되었다.[103]

5. 가족 관계

최승희는 일제강점기 서울양반 가문 출신으로, 오빠 최승일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일원이었다. 1931년 5월 10일 와세다 대학 학생이었던 안막(본명 안필승)과 결혼했다.[18] 안막은 결혼 3개월 만에 공산주의 동조자와 연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0월 15일에 석방되었다.[19]

1932년 7월 20일, 딸 안승자(후에 안성희로 개명)가 태어났다.[17] 1944년에는 아들 안병건을 낳았다. 딸 안성희는 소련에서 발레 유학 후 북한에서 무용가 및 안무가로 활동했다.

6. 기타

일제강점기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일본어 발음인 '''사이 쇼키'''로도 알려졌다.[1] 창씨개명에도 불구하고 한국 성씨인 최씨를 유지했다.[1]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한 여러 일본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고, 장 콕토파블로 피카소와 서신을 교환했다.[1] 성악가로서 태평 레코드와 만주국의 기린 레코드에서 녹음을 했으며, 1936년 콜롬비아 레코드 일본에서 앨범 ''이탈리아의 정원''을 발매했다.[1]

1930년대 한국 최승희의 패션


최승희의 패션 스타일은 전통적인 한국 미학과 서구적 모더니티의 조화를 반영했다.[83] 공연에서 한복과 같은 전통적인 요소를 자주 활용했지만, 현대적인 컷과 원단을 사용하여 한국 정체성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보여주었다.[83] 그녀의 패션 선택은 예술적 표현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여성들이 민족 정체성과 모더니티의 복잡성을 탐구하면서 현대적인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 시대의 넓은 문화적 변화를 상징했다.[84][85] 최승희의 서양식 패션 스타일은 우아함과 모던함의 조화를 보여주며,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패션 트렌드를 반영했다.[86] 그녀의 의상은 종종 긴 스커트와 짝을 이루는 맞춤 블라우스를 특징으로 하며, 세련된 실루엣을 강조했다.[87][88] 또한, 고급스러운 모피 코트로 앙상블을 완성했다.[89] 최승희는 당시 유행했고 세련된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리시한 모자를 액세서리로 활용하기로 유명했다.[90] 그녀의 뾰족한 코 구두 선택은 패셔너블한 멋을 더해 의상의 길고 늘씬한 라인을 강조했다.[91] 이러한 서양적 요소와 그녀만의 독특한 예술적 감각의 결합은 그녀를 한국의 "모던 걸" 사이에서 패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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