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윤심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1920년대 초반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활동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해 오사카에서 녹음한 "사의 찬미"는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니힐리즘을 자극하기도 했다. 같은 해 김우진과 함께 관부연락선에서 자살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삶은 여러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으로 재해석되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소프라노 - 보이 소프라노
    보이 소프라노는 사춘기 이전 남자아이의 소프라노 음역 목소리를 지칭하며, 맑고 청량한 음색과 제한적인 기간 동안만 가능한 특징을 지니고, 종교 음악,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용되며, "보이 소프라노" 또는 "트레블"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 소프라노 -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넓은 음역과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 소프라노의 한 유형으로, 음색, 음역, 표현력에 따라 리릭, 드라마틱, 소프라노 아쿠토 스포가토 등으로 나뉘며, 오페라와 바로크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1926년 자살 - 나석주
    나석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식민지 수탈 기관 파괴를 위해 폭탄 투척 후 자결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1926년 자살 -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성장하며 조선 독립 운동에 공감하고 흑도회 등 아나키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박열과 함께 체포되어 옥사한 일본의 아나키스트이다.
  • 한국의 자살한 사람 - 김우진 (1897년)
    김우진은 1897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극예술협회 등을 통해 표현주의 문예이론을 소개했으며, 윤심덕과 불륜 관계를 맺고 1926년 자살했다.
  • 한국의 자살한 사람 - 호동
    호동은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로, 낙랑공주와의 혼인, 자명고 파괴, 왕위 계승 다툼을 겪고 자살했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윤심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윤심덕
윤심덕
이름윤심덕
본명윤심덕
한자尹心悳
로마자 표기Yun Sim-deok
일본어 표기ユン・シムドク
별칭수선 (水仙), Suseon
출생일1897년 7월 25일
출생지평양, 조선
사망일1926년 8월 4일
사망지대한해협
직업가수, 성악가, 배우
활동 시기1924년 ~ 1926년
장르서양 고전 음악, 대중가요
가족여동생: 윤성덕 (尹聖悳)
남동생: 윤기성 (尹基誠)
학력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도쿄 음악학교
음악
참고자료
백과사전윤심덕(尹心悳)
서적Historical Dictionary of Pyongyang
방송Yun Sim-deok, Korea's First Professional Soprano

2. 생애

윤심덕은 평양에서 태어나 진남포에서 자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형제들 모두 음악에 재능을 보였는데,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 되었다.[11]

활달한 성격의 윤심덕은 도쿄 유학 시절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으며, 1921년 유학생 순회공연에서 김우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김우진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11]

1924년 귀국 후, 윤심덕은 1923년 5월에 귀국하여, 같은 해 6월 26일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하며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과 스캔들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26년에는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 활동하기도 하고, 사의 찬미를 녹음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오사카에서 사의 찬미를 녹음한[13] 윤심덕은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발 부산행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했다가 쓰시마섬 근해에서 투신자살했다.[14]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사후 10만 장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곧 진남포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아버지 윤호병과 어머니 김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려운 형편에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했고, 언니와 여동생은 이화학당, 남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의 형제들은 모두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였고,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성악가였다. 윤심덕의 동생 윤성덕은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주최 음악회에서 피아노 듀엣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 후,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후 음악에 뜻을 두고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 학교를 졸업한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11]

2. 2. 일본 유학과 김우진과의 만남

윤심덕은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녔다. 그러나 음악에 뜻을 두고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갔다.[11]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 학교를 졸업했는데,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으로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11] 1921년에는 유학생들이 계획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학생인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11]

2. 3. 귀국 후 활동과 좌절

1921년 유학생들이 기획한 순회 공연에 참가하면서 김우진을 만났다. 이 공연은 김우진이 연출하고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죽음"과 음악 등을 결합한 형식으로, 부산에서 시작하여 25개 도시에서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다.[11] 그러나 공연 중 "10년 전에는 자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대사 때문에 탄압을 받아 공연은 중단되었다.[11] 김우진은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11]

1924년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12] 1923년 5월에 귀국하여, 같은 해 6월 26일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하며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교사로 임용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혼담마저 깨지는 등 개인적인 문제들이 겹쳤다.[12] 부모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여동생, 연희전문학교에서 성악을 배우는 남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유학의 꿈도 포기하고 대중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부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 때문에 만주 하얼빈으로 도피까지 해야 했다.[12] 이후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도 활동했다.[12]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해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를 방문했고,[13] 사의 찬미를 녹음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의 찬미」


일동축음기는 윤심덕의 사망 2주 후에 "사의 찬미"를 발매하여 "사의 찬미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바다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라고 홍보했다.[9] "사의 찬미"는 당시 기준으로는 전례 없는 10만 장이 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8]

2. 4. 〈사의 찬미〉 녹음과 죽음

1926년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에서 사의 찬미를 녹음한 윤심덕은[13] 그해 8월 3일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했으며, 8월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자살하였다.[14] 당시 동아일보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에서 이들의 자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일동축음기|니토 레코드일본어와 전속 계약을 맺고 녹음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윤심덕은[8] 사업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사이에서 갈등하다 1926년 6월 중순 도쿄로 도망친 김우진을 찾아갔다. 1926년 8월 1일, 루마니아 작곡가 요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 선율에 윤심덕이 시를 붙인 "사의 찬미"가 일동축음기에서 녹음되었다.[8] 1926년 8월 3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연락선 '덕수丸'에 김우진과 함께 승선한 윤심덕은 8월 4일 오전 4시, 쓰시마 해협에서 김우진과 함께 배에서 투신하여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동축음기는 윤심덕의 사망 2주 후에 "사의 찬미"를 발매하여 "사의 찬미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바다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라고 홍보했다.[9] "사의 찬미"는 레코드 한 장이 현재 가치로 수만 원에 달하는 고가였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전례 없는 10만 장이 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8] "사의 찬미"의 곡조와 가사는 삼일운동 이후 만연했던 조선 청년들의 니힐리즘을 자극했다.[9]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감독 김호선은 영화 《사의 찬미》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임성민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3. 윤심덕의 유산과 영향

윤심덕의 1926년 녹음인 〈사의 찬미〉는 한국 최초의 대중적인 유행가로 평가받는다. 이 곡은 이온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곡으로, 일본 니토 레코드사에서 녹음되었고 윤심덕의 동생이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4]

윤심덕의 삶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1969년에는 안현철 감독, 문희 주연의 영화 《윤심덕》이,[5] 1991년에는 김호선 감독, 장미희 주연의 영화 《사의 찬미》가 제작되었다.[6] 《사의 찬미》는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예술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18년에는 동명의 드라마 《사의 찬미》도 제작되었다.[7]

3. 1. 〈사의 찬미〉의 대중적 인기

윤심덕의 가장 유명한 녹음인 1926년의 〈사의 찬미〉는 최초의 "대중적인" 유행가로 여겨진다. 이 노래는 일본의 니토 레코드사에서 오사카에서 녹음되었으며, 윤심덕의 여동생이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이 노래는 이온 이바노비치(Ion Ivanovici)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Waves of the Danube)〉의 선율을 사용하였다.[4]

윤심덕에 대한 영화가 두 편 제작되었다. 첫 번째 영화는 안현철 감독의 1969년 작 《윤심덕》으로 문희가 주연을 맡았다.[5] 두 번째 영화는 김호선 감독의 1991년 작 《사의 찬미(Death Song)》로 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91년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예술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6] 2018년에는 《사의 찬미》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드라마도 제작되었다.[7]

3. 2. 문화 예술계에 미친 영향

윤심덕의 가장 유명한 녹음인 1926년의 「사랑의 노래」는 최초의 "대중적인" 유행가로 여겨진다. 이 노래는 일본의 니토 레코드사에서 오사카에서 녹음되었으며, 윤심덕의 여동생이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이 노래는 이온 이바노비치(Ion Ivanovici)의 「다뉴브 강의 파도(Waves of the Danube)」의 선율을 사용하였다.[4]

윤심덕에 대한 영화가 두 편 제작되었다. 첫 번째 영화는 안현철 감독의 1969년 작 「윤심덕」으로 문희가 주연을 맡았다.[5] 두 번째 영화는 김호선 감독의 1991년 작 「사랑의 노래(Death Song)」로 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91년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예술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6] 2018년에는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드라마도 제작되었다.[7]

3. 3. 윤심덕을 연기한 배우들


  • 1969년 영화 《윤심덕》에서 문희가 연기하였다.[5]
  • 1991년 영화 《사의 찬미》에서 장미희가 연기하였다.[6]
  • 2018년 SBS 드라마 《사의 찬미》에서 신혜선이 연기하였다.[7]
  • 2022년 애플 TV+ 드라마 《[https://tv.apple.com/us/show/pachinko/umc.cmc.17vf6g68dy89kk1l1nnb6min4 파친코]》에서 이지혜가 연기하였다.

4. 사진

참조

[1] 웹사이트 윤심덕(尹心悳) http://encykorea.aks[...] 2018-03-26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Pyongyang https://books.google[...] Anthem Press
[3] 웹사이트 Yun Sim-deok, Korea's First Professional Soprano http://world.kbs.co.[...] 2012-08-23
[4] 서적 The Beginnings of Korean Pop, in Korean Pop Music: Riding the Wave Global Oriental
[5] 웹사이트 윤심덕: Yun Sim-deok https://www.kmdb.or.[...]
[6] 웹사이트 사의 찬미: Death song(Sa-ui chanmi) https://www.kmdb.or.[...]
[7] 뉴스 Lee Jong-suk, Shin Hye-sun to appear in 'Hymn of Death' http://kpopherald.ko[...] 2018-11-02
[8] 웹사이트 尹心悳 http://world.kbs.co.[...] KBS WORLD JAPANESE 2023-03-03
[9] 웹사이트 大ヒットした「死の賛美」…それを真似した「哀傷賦」は大失敗 https://www.donga.co[...] 東亜日報 2023-03-03
[10] 웹사이트 대중가요계 요절한 가수들의 명곡과 유작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11] 뉴스 절세가인 신여성 윤심덕을 재조명한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04-01-29
[12] 뉴스 절세가인 신여성 윤심덕을 재조명한다③ http://www.hani.co.k[...] 한겨레 2004-03-02
[13] 웹사이트 엔싸이버 백과사전 설명 http://encyber.com/s[...]
[14] 뉴스 서울 타임즈 기사 http://www.stimes.c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