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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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준은 후조의 황족으로, 석호와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석호 사후 석세가 즉위하자 불만을 품고 요익중, 부홍, 석민 등과 연합하여 황위를 찬탈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나, 석민을 제거하려다 석민의 반정으로 폐위되어 살해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18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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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민은 오호십육국시대 염위의 초대 황제로, 후조의 석호에게 입양되어 석민으로 개명했으나 정권을 장악 후 석씨 일족을 몰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한족 중심주의 정책과 이민족 학살을 자행하다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하는 등 논쟁적인 행적을 남겼다. - 후조의 황제 - 석지
석지는 후조 석호의 아들로 석감이 폐위된 후 황제를 칭하며 후조를 이끌었으나 내부 반란으로 살해당해 후조는 멸망하고 염위의 염민과의 전투, 전연에 구원 요청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 후조의 황제 - 석홍
석홍은 후조의 2대 황제로, 석륵 사후 옹립되었지만 실권은 석호에게 있었고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그의 통치는 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석준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석준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 사망일 | 349년 |
| 재위 기간 | 349년 |
| 이전 군주 | 석세 |
| 다음 군주 | 석간 |
| 묘호 | 알 수 없음 |
| 시호 | 알 수 없음 |
| 성 | 석 |
| 씨 | 알 수 없음 |
| 휘 | 석준 (石遵) |
| 자 | 대지 (大祗) |
| 부친 | 석호 |
| 모친 | 정앵도 |
| 배우자 | 장황후 |
| 자녀 | 알 수 없음 |
| 왕조 | 후조 |
| 즉위 정보 | |
| 칭호 | 황제 |
| 연호 | 태녕 (太寧) |
| 연호 기간 | 349년 |
2. 생애
석준은 석호의 아들로, 석호 치세 때 팽성왕에 책봉되었다. 349년 석호에 의해 대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산시성 중부)을 지수하라는 명을 받았다.[1]
업으로 돌아온 석준은 황후 유씨, 장시 등의 방해로 석호를 만나지 못하고 임지로 떠났다. 곧 석호가 사망하고 석세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하내에서 들었고, 마침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포홍, 요익중, 석민 등과 이성에서 만났다. 장수들이 석준에게 황위를 빼앗을 것을 권하자, 석준은 찬탈을 결심하고 거병했다.[1]
당시 수도 업의 병력은 이농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석준은 쉽게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석준은 각지의 종실왕들을 위무하고 석민과 이농을 중용했다. 그러나 즉위에 반대한 패왕(沛王) 석충(石沖)이 계(薊)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동진(東晉)이 쳐들어와 서주(徐州 : 장쑤성 북부)를 위협하였다. 석준은 석민을 파견하여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농을 보내 동진군을 격파하였다.[2]
한편 낙평왕(樂平王) 석포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동진의 양주(梁州)에서 관중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거병하지 못하였다. 이를 틈타 석준은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2]
정세가 안정되자 석준은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석민은 석준의 쿠데타에서 큰 전공을 세운 후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등 전횡을 부렸다. 이로 인해 석준은 여러 종실왕들과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으나 태후 정씨가 반대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하였던 의양왕(義陽王) 석감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석민이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해 살해하였다.[2]
2. 1. 초기 생애와 석호 치세
석준은 석호와 그의 총애를 받던 정씨(정앵도) 사이에서 태어났다.[1] 석호의 치세 동안 석준은 팽성왕(彭城王)에 책봉되었다.[1] 349년 석호는 석준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고 관중(關中 : 산시성 중부)을 진수하도록 명했다.2. 2. 석세 폐위와 즉위
349년, 석호 사후 석세가 즉위했으나, 석준은 이에 불만을 품고 거병했다. 석준은 요익중, 포홍, 석민 등과 연합하여 수도 업을 장악하고 석세를 폐위, 살해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1] 석준은 석민과 이농을 중용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다.[1]석준은 석호의 아들로, 석호 치세 때는 팽성왕에 책봉되었다. 349년 석호에 의해 대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산시성 중부)을 진수하라는 명을 받았다.[1]
업으로 돌아온 석준은 황후 유씨, 장시 등의 방해로 석호를 만나지 못하고 임지로 떠났다. 곧 석호가 사망하고 석세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하내에서 들었고, 마침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포홍, 요익중, 석민 등과 이성에서 만났다. 장수들이 석준에게 황위를 빼앗을 것을 권하자, 석준은 찬탈을 결심하고 거병했다.[1]
당시 수도 업의 병력은 이농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석준은 쉽게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석준은 각지의 종실왕들을 위무하고 석민과 이농을 중용했다.[1]
2. 3. 통치 기간
349년 석세가 즉위한 뒤, 업의 병력이 이농의 반란 진압을 위해 떠나 있는 틈을 타 석준은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패왕(沛王) 석충(石沖)이 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동진(東晉)이 쳐들어와 장쑤성 북부인 서주(徐州)를 위협했다. 석준은 석민을 보내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농을 보내 동진군을 격파했다.[2]한편, 낙평왕(樂平王) 석포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동진이 양주(梁州)에서 관중을 위협했기 때문에 거병하지 못했다. 석준은 이 틈을 타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2]
정세가 안정되자 석준은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했다. 석민은 석준의 쿠데타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석준은 여러 종실왕들과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했으나, 태후 정씨(鄭氏)가 반대하여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했던 의양왕(義陽王) 석감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석민이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해 살해했다.[2]
2. 4. 최후
석민(石閔)은 석준의 쿠데타에 큰 공을 세워 권력을 잡고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석준은 종실왕들과 함께 석민을 제거하려 했으나, 황태후 정씨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2]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했던 의양왕 석감(石鑒)이 석민에게 밀고했고, 석민은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황제로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한 뒤 살해했다.[2] 석준의 재위 기간은 183일이었다.3. 가족 관계
- 아버지: 석호
- 어머니: 정씨
- 황후: 장 황후
4. 평가
석준은 석호 사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황위에 올랐으나, 결국 석민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349년 석호가 사망하고 석세가 즉위하였으나, 석준은 포홍, 요익중, 석민 등의 권유로 찬탈을 결심하고 거병하여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석준의 즉위에 반대하여 패왕 석충이 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동진(東晉)이 쳐들어오는 등 정세가 불안하였다. 석준은 석민을 파견하여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농을 보내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또한 낙평왕 석포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동진의 양주에서 관중을 위협하여 거병하지 못하자, 석준은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
정세가 안정되자 석준은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석민은 석준의 쿠데타에서 큰 전공을 세운 후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석준은 여러 종실왕들과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으나 태후 정씨가 반대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하였던 의양왕 석감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석민이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해 살해하였다.[1]
그의 통치 기간은 후조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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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일화
석준이 즉위한 지 며칠 후, 업(鄴)에서는 폭풍우로 나무가 뽑히고 천둥이 쳤으며, 멜론과 말 크기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1] 게다가 태무전(太武殿)과 휘화전(暉華殿)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문과 누각, 수레와 의복도 대다수가 불에 타 없어졌다.[1] 불길은 하늘을 비출 정도였고, 금석(金石)도 모두 타버렸다.[1] 화재는 한 달여 만에 겨우 진화되었지만, 이번에는 핏빛 비가 성 주변에 쏟아졌다고 한다.[1]참조
[1]
서적
The City of Ye in the Chinese Literary Landscape
Brill
2020-01-07
[2]
서적
Routledge Handbook of Imperial Chinese History
https://www.worldcat[...]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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