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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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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익중은 남안군 출신의 강족 추장으로, 후조를 섬기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영가의 난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전조와 후조에 번갈아 복속하며 관직을 얻었다. 석호 사후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으나 동진에 귀순하였다. 요익중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아들 요장이 후진을 건국한 후 경원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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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익중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야오이중
원어 이름姚弋仲
로마자 표기Yao Yizhong
출생280년
사망352년
아버지야오커후이
자녀야오이, 야오뤄, 야오샹, 야오창, 야오쉬, 야오인마이, 야오숴더, 야오샤오, 야오징, 야오황, 이름 없는 아들 32명
관직 정보 (후조)
관직서강대도독
임기 시작333년
임기 종료351년
군주석홍/석호/석세/석존/석건/석지
관직우승상
임기 시작351년
임기 종료351년
군주석지
관직 정보 (진나라)
관직대선우
임기 시작351년
임기 종료352년
군주목황제
사후 정보
시호경원황제 (景元皇帝)
묘호시조 (始祖)

2. 생애

요익중은 남안(南安, 현재 룽시현 동남쪽, 간쑤성) 출신의 강족 추장으로,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맹하며 강인한 성격으로 부족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2] 영가의 난 이후 혼란을 피해 312년 유메로 이주하여 동쪽에서 온 난민들을 보호하고 호서강교위, 옹주자사, 부풍공을 자칭했다.[3]

313년 기근으로 옹주(산시성 중부)로 이주, 전조 유총(劉叢)의 포섭을 거부했다. 318년 유요장안(長安)에 도읍하자 전조에 복속, 323년 평서장군, 평양공에 봉해졌다.[4] 329년 후조 석호가 전조를 멸망시키자 후조에 귀순, 석호에게 농서 호족 이주를 건의하여 행안서장군, 육이좌도독에 임명되었다.[5] 330년 조약을 참소하여 주살하게 했다. 333년 석호의 명으로 강족을 이끌고 청하로 이주, 분무장군, 서강대도독, 양평현공에 봉해졌다.

334년 석호 즉위 후 병을 칭하여 조하에 불참, 석호의 질책을 받았다. 338년 단료 정벌에 참전, 345년 십군육이대도독, 冠軍大將軍에 임명되었다. 349년 량독의 반란을 진압, 서평군공에 진봉되었다. 석호 사후 후계 분쟁에 개입, 섭두를 중심으로 독립 세력을 구축하고 염위와 후조의 전쟁에서 후조를 지원했다. 포홍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350년 염민 토벌군을 일으켰고, 351년 석지의 요청으로 요양을 파견하여 염민을 격파했다. 같은 해 동진에 귀순, 고릉군공에 봉해졌다. 352년 병사했으며, 357년 부생에 의해 왕에 준하는 예로 매장되었다. 386년 아들 요장후진을 건국, 경원황제로 추시되었다.

2. 1. 초기 활동

요익중은 남안군(南安郡, 현재 룽시현 동남쪽, 간쑤성) 출신의 강족 추장이었다. 그의 가문은 우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며, 한나라와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그의 조상인 톈위(填虞)는 한 광무제 재위 기간인 서기 57년에서 58년 사이에 서역을 괴롭혔지만, 결국 장군 마무에 의해 쫓겨났다. 요익중의 고조부인 첸나(遷那)는 한나라에 항복하여 요익중의 출생지가 된 곳으로 이주했다. 촉한 정복전 당시 요익중의 아버지 야오커후이(姚柯回)는 위나라 군대를 도와 강유의 군대를 가두는 데 기여했고, 그 공로로 정서장군, 진융교위, 서강호의에 임명되었다.[2]

요익중은 젊은 시절 효심이 깊고 주변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맹하며, 과감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남을 돕고 구제하는 것을 좋아하며, 마치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행동했기에 부족으로부터 경외를 받고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312년, 영가의 난 발생 1년 후, 요익중은 유메이(榆眉, 현재 산시성 첸양현 동쪽)로 이동하여 근거지를 마련하고 동쪽에서 온 난민들을 보호했다. 그는 혼란을 피하려는 수천 명의 부족 및 한족 난민들을 끌어들였다. 이때 요익중은 호서강교위, 옹주자사, 부풍공을 자칭했다.[3]

313년에 기근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하여 옹주(雍州 : 산시성 중부)에 거주하며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護西羌校尉、雍州刺史、扶風公)을 자칭하였다. 전조의 유총(劉叢)은 요익중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18년 이후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관중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강족을 이끌고 전조에 복속하였다.

323년 7월, 전조의 유요가 농서에 할거하던 진안을 토벌하자 주변의 저족과 강족은 모두 인질을 보내 전조에 귀순했다. 유요는 요익중을 정서대장군 겸 평향공으로 정식 임명했다.[4] 또한 농상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329년 9월, 후조석호상규를 함락시켜 전조를 멸망시켰다. 요익중은 후조에 귀순하여 석호에게 "명공(석호)께서는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공의 높이는 비할 데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계책을 세울 때입니다. 농상에는 호족이 많고, 진나라 사람들은 맹렬합니다. 도가 흥륭하면 복종하겠지만, 도가 쇠퇴하면 곧 배반할 것입니다. 농상의 호족을 이주시키고, 마음속을 비워주면 왕도에 이로울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석호는 이에 동의하여 석륵에게 상소를 올려 요익중을 행안서장군, 육이좌도독에 임명했다.

329년 1월, 동진예주 자사였지만 소준의 난에 가담하여 패배한 조약이 후조에 망명했다. 석륵은 조약을 예우했지만, 속으로는 그가 고국의 조정에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을 꺼려하여 오랫동안 면회를 하지 않았다. 330년 2월, 요익중은 상소하여 "조약은 진조에 있을 때 태후(유문군)를 협박하여 죽이고, 주군(성제)에게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폐하께서 그를 총애하시는 것을 보니, 저는 그가 또다시 반역의 마음을 품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석륵은 깊이 동의하여 후에 조약을 주살했다.

333년 7월, 석륵이 사망하고, 석호가 정권을 장악했다. 10월, 석호는 예전 요익중의 진언을 떠올려 진·옹의 호족과 저족, 강족 10만 명을 관동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따라 요익중도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청하로 이주했다. 또한 분무장군, 서강대도독에 임명되고 양평현공에 봉해졌다.

2. 2. 후조 섬김

313년 기근을 피해 옹주(雍州 : 산시성 중부)로 이주하여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護西羌校尉、雍州刺史、扶風公)을 자칭하였다. 전조의 유총(劉叢)이 요익중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5] 318년 이후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관중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강족을 이끌고 전조에 복속하였다. 323년 7월, 유요가 농서에 할거하던 진안을 토벌하자 주변의 저족과 강족은 모두 인질을 보내 전조에 귀순했다. 요익중은 평서장군에 임명되고 평양공에 봉해졌다. 또한 농상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5]

329년후조(後趙)가 전조를 멸망시키고 관중을 장악하자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다.[5] 요익중은 석호에게 "명공(석호)께서는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공의 높이는 비할 데가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계책을 세울 때입니다. 농상에는 호족이 많고, 진나라 사람들은 맹렬합니다. 도가 흥륭하면 복종하겠지만, 도가 쇠퇴하면 곧 배반할 것입니다. 농상의 호족을 이주시키고, 마음속을 비워주면 왕도에 이로울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석호는 이에 동의하여 석륵에게 상소를 올려 요익중을 행안서장군, 육이좌도독에 임명했다.[5]

333년에 후조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하였다가 석호(石虎)에게 패배하자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강족 수십만 명을 이끌고 관동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5]

349년 석호 사후, 후조가 후계 분쟁에 휩싸이자 염위(冉魏)와 후조의 전쟁에 개입하여 후조를 돕기도 하였다. 351년 요익중은 동진(東晉)에 복속하여 관작을 받고 동진의 영역으로 이동을 계획하였으나 352년에 사망하였다.[5]

2. 3. 후조 멸망 전후

313년 요익중은 기근을 피해 강족을 이끌고 동쪽 옹주(雍州, 산시성 중부)로 이주하여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護西羌校尉、雍州刺史、扶風公)을 자칭하였다. 전조의 유총(劉叢)이 요익중을 포섭하려 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318년 이후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관중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전조에 복속하였다. 329년 후조(後趙)가 전조를 멸망시키고 관중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다. 333년 후조에서 일어난 반란에 개입했다가 석호(石虎)에게 패배한 후 다시 후조에 복속하였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강족 수십만 명을 이끌고 관동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7]

요익중은 석호 휘하에서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349년 관중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병에 걸린 석호가 소극적으로 대처하자 요익중은 석호를 찾아가 그를 꾸짖고 총사령관이 되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 진압 후 귀환 도중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후계자 분쟁에 휩싸이자 요익중은 섭두(灄頭)를 중심으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염위(冉魏)와 후조의 전쟁에 개입하여 후조를 돕기도 하였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姚襄)을 보내 저족의 포홍(蒲洪)을 공격하게 했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염위, 후조, 포홍 등의 세력과 대립하였다.[9][10][11][12][13]

351년 요익중은 동진(東晉)에 복속하여 관작을 받고 동진 영역으로 이동을 계획했으나, 352년 사망하였다. 요익중의 유골은 후계자 요양이 보관하였는데, 357년 관중에 돌아간 이후 부생(苻生)에 의해 왕에 준하는 예로 매장되었다.

2. 4. 동진 귀부와 죽음

요익중은 남안(南安) 출신의 강족 수장으로, 313년 기근을 피해 옹주(雍州 : 산시성 중부)로 이주하여 호서강교위·옹주자사·부풍공(護西羌校尉、雍州刺史、扶風公)을 자칭했다. 전조의 유총(劉叢)이 포섭하려 했으나 따르지 않았고, 318년 이후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에 도읍하자 전조에 복속했다. 329년 후조(後趙)가 전조를 멸망시키자 후조에 복속했다가, 333년 후조의 반란에 개입했다가 석호(石虎)에게 패배 후 다시 복속, 석호의 명령으로 강족 수십만 명을 이끌고 관동으로 이주했다.

349년 관중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석호를 꾸짖고 총사령관이 되어 반란을 진압했다. 석호 사후 후조의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자 염위(冉魏)와 후조의 전쟁에 개입하여 후조를 돕기도 했다. 351년 동진(東晉)에 복속하여 관작을 받았으나, 352년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아들 요양(姚襄)이 보관했다가 357년 관중으로 돌아간 후 부생(苻生)에 의해 왕에 준하는 예로 매장되었다.[19]

3. 평가

요익중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의례와 작법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을 반복했다. 그의 말에는 거리낌이나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석호는 요익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조정의 대의에 관해서는 반드시 요익중을 참여시켰다. 공경들조차 그를 두려워하여 동조했다고 한다.[1]

부족원이었던 마하라는 박학하고 문재가 있었는데, 후조장시석세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자 요익중을 배반하고 장시를 섬겨 상서랑에 임명되었다. 장시가 참수되자 다시 귀순해 왔지만, 모두 그를 죽이라고 권했다. 요익중은 "지금은 재능을 불러 그 기묘한 계략을 받아들일 때이다. 그 힘을 써야지, 해를 끼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마하라를 참군에 임명했다. 그의 관대함은 이와 같았다.[1]

3. 1. 긍정적 평가

요익중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의례와 작법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직언을 반복하며 거리낌이나 꺼리는 바가 없었다. 석호는 요익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조정의 중요한 일에 반드시 참여시켰고, 공경들조차 그를 두려워하여 따랐다고 한다.[1]

석호의 총희의 동생이 요익중의 진영에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요익중은 그를 붙잡아 "너는 금위인데 소민을 위협하고 있다. 나는 대신인데, 이를 간과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참수하려 했다. 동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빌고 측근들이 간언하자 참수를 중지시켰다. 이러한 일화는 그의 강직함을 보여준다.[1]

부족원이었던 마하라는 박학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나, 후조장시석세를 보좌하게 되자 요익중을 배반하고 장시를 섬겨 상서랑에 임명되었다. 장시가 참수된 후 다시 귀순해 왔을 때, 모두가 그를 죽이라고 권했다. 하지만 요익중은 "지금은 재능을 불러 그 기묘한 계략을 받아들일 때이다. 그 힘을 써야지, 해를 끼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마하라를 참군에 임명했다. 이러한 일화는 그의 관대함을 보여준다.[1]

3. 2. 부정적 평가

요익중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강직했지만, 의례와 작법을 익히지 않았다. 여러 차례 직언을 반복했으며, 그 말에 거리낌이나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석호는 요익중을 매우 중히 여겨, 조정의 대의에 관해서는 반드시 요익중을 참여시켰다. 공경들조차 그를 두려워하여 동조했다고 한다.[1]

석호의 총희의 동생인 무성좌위가 요익중의 진영에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요익중은 그를 붙잡아 "너는 금위인데 소민을 위협하고 있다. 나는 대신인데, 이를 간과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측근에게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좌위가 피가 흐를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측근들이 간언하자 참수를 중지시켰다. 그의 강직함은 이와 같았다.[1]

3.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요익중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의례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 말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호는 요익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조정의 중요한 일에 반드시 참여시켰다. 다른 공경들조차 그를 두려워하고 따랐다고 한다.

요익중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석호의 총애하는 후궁의 동생이 요익중의 진영에 침입하여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요익중은 그를 붙잡아 "너는 금위(禁尉)인데 백성을 위협하고 있다. 나는 대신(大臣)인데, 이를 간과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측근에게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고 측근들의 간언이 있은 후에야 참수를 중지시켰다.[1]

또한, 요익중은 관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부족의 일원이었던 마하라는 박학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후조(後趙)의 장시(張豺)가 석세(石世)를 보좌할 때 요익중을 배반하고 장시를 섬겼다. 장시가 참수된 후 마하라가 다시 돌아오자, 모두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익중은 "지금은 재능 있는 사람을 불러들여 그 기묘한 계략을 받아들일 때이다. 그의 능력을 활용해야지, 해를 끼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마하라를 참군(參軍)에 임명했다.[2]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요가회
미상
조카요란
아들요상, 요장, 요서, 요석덕, 요윤매, 요민, 요황, 요소, 요정 외 32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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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1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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