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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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염민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장군으로, 한족 출신이다. 석륵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석호의 양자가 되어 석민(石閔)으로 불렸다. 후조에서 활약하며 무흥공에 봉해졌으나, 석호 사후 정권을 장악하고 호족을 대량 학살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이후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염위(冉魏)를 건국했으나, 전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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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위 - 영흥 (염위)
영흥은 중국 염위에서 사용된 연호로, 후조에서도 기년으로 활용되었으며, 동진 시대에는 이운이 반란을 일으키며 사칭하기도 했고, 후한 헌제와 염우도 사용한 연호이다. - 352년 사망 - 교황 율리오 1세
교황 율리오 1세는 337년부터 352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며 동방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했고, 사르디카 공의회 개최에 영향을 주어 로마 주교의 권위를 강화했으며, 여러 바실리카와 교회 건설에 힘쓴 공로로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 352년 사망 - 요익중
요익중은 오호십육국시대 강족 수장으로, 유랑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고 전조와 후조에 복속하며 활약하다가 후조 말기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동진에 귀순했으나 곧 병사했으며, 그의 삶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강족을 이끌며 생존을 모색했던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후대 후진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 - 오호 십육국 시대의 황제 - 유현 (후조)
유현은 후조의 장수로, 석지에게 명을 받아 염민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항복한 후 염민에게 투항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이후 양에서 황제를 칭했으나 염민에게 패배하여 몰락했다. - 오호 십육국 시대의 황제 - 장조 (전량)
장조는 전량의 인물로, 동생 장중화 사후 권력을 장악하여 왕을 자칭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장관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염민 | |
---|---|
기본 정보 | |
휘 (이름) | 석민 (石閔) → 이민 (李閔) → 염민 (冉閔) |
자 | 영증 (永曾) |
아명 | 극노 (棘奴) |
신분 | |
칭호 | 황제 |
왕조 | |
국가 | 염위 |
생애 | |
즉위 | 350년 |
퇴위 | 352년 5월 17일 |
사망 | 352년 6월 1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염첨 |
어머니 | 왕태후 |
배우자 | 동황후 |
시호 및 묘호 | |
시호 (추증) | 평황제 (平皇帝, 염씨 추증) |
시호 (전연 추증) | 무도천왕 (武悼天王) |
묘호 | 없음 |
연호 | |
연호 | 영흥 (永興) |
연호 기간 | 350년 - 352년 |
2. 즉위 이전
wikitext
염민의 아버지 염양(冉良)은 위군(魏郡, 지금의 안양 북하남성) 출신으로,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다. 310년경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진오(陳午)가 이끄는 기화라는 난민 집단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11년 후조의 창시자 석륵이 진오를 격파했을 때, 11세의 염량(개명 후 염첨)은 포로로 잡혔다. 석륵의 조카 석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염첨을 양자로 삼고, 이름을 석첨(石瞻)으로 바꾸게 했다. 염민의 어머니는 왕(王)씨였다. 염민은 석민(石閔)으로 알려졌으나, 출생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328년 석호가 한조의 황제 유요에게 패했을 때 석첨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석첨이 염민의 아버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염민은 한족 출신으로 염양(冉良)의 아들이다. 311년에 석륵이 진우(陳牛)를 점령하였을 때 석륵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용맹함을 인정받아 석호의 양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진서에 따르면, 석민은 키가 1.9미터가 넘고 비범한 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석민이 성장하면서, 석호는 그의 용맹함과 전술에 감탄하여 석민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대했다.
후조가 성립된 후 무장으로 각지에서 활약하였으며, 338년 전연 정벌에서 후조군이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당시 석호는 전연의 수도 기성(棘城, 현재의 랴오닝성, 진저우시)을 약 20일 동안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하면서 군대가 붕괴되었다. 339년 진나라 장군 유량이 후조를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치려 하자, 석호는 괴안에게 석민을 포함한 다섯 명의 장군을 지휘하여 진나라 북부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다. 석민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다섯 명의 장군들은 연합하여 큰 피해를 입혀 유량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석민은 무흥공에 봉해졌다.
349년, 관중(關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석민을 비롯한 제장이 출진해 있는 동안 석호가 사망하였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 중이던 석민 등은 하내(河內) 지역에서 석준(石遵)과 조우하여 황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석준은 반정이 성공하면 석민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반정을 일으켜 석세(石世)를 폐위하였다. 석준이 황제에 즉위하여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태자로 삼았다. 석민은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였다. 그러나 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옹립하였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 인근만 유지하였다. 옛 수도 양국(襄國)에서는 석지(石祗)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때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胡族)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학살하였다.
염민은 한족 출신으로 염양(염첨)의 아들이다. 311년에 석륵이 진우(陳牛)를 점령하였을 때 염민을 얻었는데, 석호에게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338년, 전연 정벌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349년, 석호(Shi Hu)가 사망한 후, 그의 막내아들이자 황태자 석사(Shi Shi)가 황제가 되었지만, 정권은 석사의 어머니 유태후와 관료 장채(Zhang Chai)가 장악했다. 석사의 형 석준은 이 상황에 불만을 품었고, 유태후와 장채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장수들, 특히 석민은 그가 수도 업성(예청)으로 진군하여 그들을 전복할 것을 제안했다. 석준은 그렇게 했고, 승리할 경우 석민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약속했다. 349년 여름, 석준은 석사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폐위시킨 후 유태후와 장채와 함께 처형했다.
석준이 황제에 즉위하여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태자로 삼았다. 석민은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였다. 349년 겨울, 석준은 석민을 두려워하여 그의 어머니 정태후 앞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석민을 처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태후는 석민이 석사에 대한 쿠데타 동안 기여한 공로를 기억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옹립하였다. 그는 석건을 황제로 세웠지만, 그와 이농은 정부를 장악했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鄴) 인근만 유지하였다. 옛 수도 양국(襄國)에서는 석지 신흥왕이 석민과 이농에 대항하여 강족 추장 야오이종 및 저족 추장 푸훙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때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胡族)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학살하였다. 그는 모든 비한족에게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명령했고, 그 후 대부분의 비한족이 업성을 떠났다. 비한족 부족들이 업성에서 계속 도망치자 석민은 그가 호(胡)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그는 한족에게 명령을 내려 한 명의 호(胡)를 죽여 그의 머리를 가져오는 관리는 세 등급 승진하고, 군인은 그의 최고 사령부에서 복무하도록 전출될 것이라고 명했다. 석민은 한족을 이끌고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호(胡)족을 죽였고, 낮 동안 수만 개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총 20만 명 이상이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도시 밖으로 버려졌다.
석민은 349년 석호(Shi Hu) 사후, 황태자 석사(Shi Shi)가 즉위했지만, 실권은 유태후와 관료 장채(Zhang Chai)에게 있었다. 석사의 형 석준은 이에 불만을 품고, 석민을 포함한 여러 장수들의 지지를 받아 수도 업성(예청)을 공격하여 정권을 장악했다.[5] 석준은 석민을 황태자로 책봉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대신 석연(石衍)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이에 석민은 불만을 품었다.[5]
349년 겨울, 석준은 석민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태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석민은 궁궐을 포위하고 석준, 정태후, 장황후, 석연 등을 처형했다. 석민은 석건을 황제로 세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석민과 이농이 장악했다.[5]
석건은 석민의 권력 장악에 반발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석민은 석건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비한족(非漢族)에 대한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그는 모든 비한족에게 무기 휴대를 금지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비한족이 업성을 떠났다.[5]
비한족 부족들이 업성에서 계속 도망치자, 석민은 한족에게 명령을 내려 호(胡)족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한 명의 호(胡)를 죽여 그의 머리를 가져오는 관리에게는 승진을, 군인에게는 최고 사령부 복무를 약속했다. 석민은 한족을 이끌고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호(胡)족을 학살했고, 총 20만 명 이상이 죽었다.[5] 이 과정에서 코가 크고, 눈이 깊으며, 털이 많고 숱이 많은 수염을 가진, 즉 비한족의 외모적 특징을 가진 한족들도 많이 희생되었다.[5]
350년, 석건은 석민의 압력으로 국호를 조(趙)에서 위(衛)로, 황실 성씨를 석(石)에서 이(李)로 변경했다. 석민은 석건을 처형하고 석호의 손자 38명과 나머지 석씨 가문을 모두 죽였다. 이후 석민은 자신의 원래 성씨인 란(冉)씨를 회복하고, 새로운 국가인 위(魏)의 황제로 즉위했다.[5]
2. 1. 가계와 출신
염민의 아버지 염량(冉良)은 위군(魏郡, 지금의 안양 북하남성) 출신으로,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다. 310년경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진오(陳午)가 이끄는 기화라는 난민 집단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11년 후조의 창시자 석륵이 진오를 격파했을 때, 11세의 염량(개명 후 염첨)은 포로로 잡혔다. 석륵의 조카 석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염첨을 양자로 삼고, 이름을 석첨(石瞻)으로 바꾸게 했다. 염민의 어머니는 왕(王)씨였다. 염민은 석민(石閔)으로 알려졌으나, 출생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328년 석호가 한조의 황제 유요에게 패했을 때 석첨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석첨이 염민의 아버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 2. 후조에서의 활약
염민은 한족 출신으로 염양(冉良)의 아들이다. 311년에 석륵이 진우(陳牛)를 점령하였을 때 석륵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용맹함을 인정받아 석호의 양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진서에 따르면, 석민은 키가 1.9미터가 넘고 비범한 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석민이 성장하면서, 석호는 그의 용맹함과 전술에 감탄하여 석민을 자신의 친아들처럼 대했다.후조가 성립된 후 무장으로 각지에서 활약하였으며, 338년 전연 정벌에서 후조군이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당시 석호는 전연의 수도 기성(棘城, 현재의 랴오닝성, 진저우시)을 약 20일 동안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하면서 군대가 붕괴되었다. 339년 진나라 장군 유량이 후조를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치려 하자, 석호는 괴안에게 석민을 포함한 다섯 명의 장군을 지휘하여 진나라 북부 지역을 공격하도록 했다. 석민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다섯 명의 장군들은 연합하여 큰 피해를 입혀 유량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석민은 무흥공에 봉해졌다.
349년, 관중(關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석민을 비롯한 제장이 출진해 있는 동안 석호가 사망하였다.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 중이던 석민 등은 하내(河內) 지역에서 석준(石遵)과 조우하여 황위를 찬탈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석준은 반정이 성공하면 석민을 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반정을 일으켜 석세(石世)를 폐위하였다. 석준이 황제에 즉위하여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태자로 삼았다. 석민은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였다. 그러나 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옹립하였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 인근만 유지하였다. 옛 수도 양국(襄國)에서는 석지(石祗)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때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胡族)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학살하였다.
2. 3. 후조의 혼란과 정권 장악
염민은 한족 출신으로 염양(염첨)의 아들이다. 311년에 석륵이 진우(陳牛)를 점령하였을 때 염민을 얻었는데, 석호에게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인해 염민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은 용맹하고 책략에 뛰어나 석호의 총애를 받았다. 338년, 전연 정벌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석민의 부대만 온전하게 퇴각하여 높이 평가받았다.349년, 석호(Shi Hu)가 사망한 후, 그의 막내아들이자 황태자 석사(Shi Shi)가 황제가 되었지만, 정권은 석사의 어머니 유태후와 관료 장채(Zhang Chai)가 장악했다. 석사의 형 석준은 이 상황에 불만을 품었고, 유태후와 장채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장수들, 특히 석민은 그가 수도 업성(예청)으로 진군하여 그들을 전복할 것을 제안했다. 석준은 그렇게 했고, 승리할 경우 석민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약속했다. 349년 여름, 석준은 석사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폐위시킨 후 유태후와 장채와 함께 처형했다.
석준이 황제에 즉위하여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를 태자로 삼았다. 석민은 석준의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석민이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석준은 이러한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하였다. 349년 겨울, 석준은 석민을 두려워하여 그의 어머니 정태후 앞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석민을 처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태후는 석민이 석사에 대한 쿠데타 동안 기여한 공로를 기억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석감(石鑒)이 모의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여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옹립하였다. 그는 석건을 황제로 세웠지만, 그와 이농은 정부를 장악했다.
석민은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은 수도 업(鄴) 인근만 유지하였다. 옛 수도 양국(襄國)에서는 석지 신흥왕이 석민과 이농에 대항하여 강족 추장 야오이종 및 저족 추장 푸훙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때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胡族)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학살하였다. 그는 모든 비한족에게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명령했고, 그 후 대부분의 비한족이 업성을 떠났다. 비한족 부족들이 업성에서 계속 도망치자 석민은 그가 호(胡)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그는 한족에게 명령을 내려 한 명의 호(胡)를 죽여 그의 머리를 가져오는 관리는 세 등급 승진하고, 군인은 그의 최고 사령부에서 복무하도록 전출될 것이라고 명했다. 석민은 한족을 이끌고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호(胡)족을 죽였고, 낮 동안 수만 개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총 20만 명 이상이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도시 밖으로 버려졌다.
2. 4. 호족 학살
석민은 349년 석호(Shi Hu) 사후, 황태자 석사(Shi Shi)가 즉위했지만, 실권은 유태후와 관료 장채(Zhang Chai)에게 있었다. 석사의 형 석준은 이에 불만을 품고, 석민을 포함한 여러 장수들의 지지를 받아 수도 업성(예청)을 공격하여 정권을 장악했다.[5] 석준은 석민을 황태자로 책봉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대신 석연(石衍)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이에 석민은 불만을 품었다.[5]349년 겨울, 석준은 석민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태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석민은 궁궐을 포위하고 석준, 정태후, 장황후, 석연 등을 처형했다. 석민은 석건을 황제로 세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석민과 이농이 장악했다.[5]
석건은 석민의 권력 장악에 반발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석민은 석건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비한족(非漢族)에 대한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그는 모든 비한족에게 무기 휴대를 금지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비한족이 업성을 떠났다.[5]
비한족 부족들이 업성에서 계속 도망치자, 석민은 한족에게 명령을 내려 호(胡)족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한 명의 호(胡)를 죽여 그의 머리를 가져오는 관리에게는 승진을, 군인에게는 최고 사령부 복무를 약속했다. 석민은 한족을 이끌고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호(胡)족을 학살했고, 총 20만 명 이상이 죽었다.[5] 이 과정에서 코가 크고, 눈이 깊으며, 털이 많고 숱이 많은 수염을 가진, 즉 비한족의 외모적 특징을 가진 한족들도 많이 희생되었다.[5]
350년, 석건은 석민의 압력으로 국호를 조(趙)에서 위(衛)로, 황실 성씨를 석(石)에서 이(李)로 변경했다. 석민은 석건을 처형하고 석호의 손자 38명과 나머지 석씨 가문을 모두 죽였다. 이후 석민은 자신의 원래 성씨인 란(冉)씨를 회복하고, 새로운 국가인 위(魏)의 황제로 즉위했다.[5]
3. 치세
350년 정월, 염민은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다. 윤정월에는 마침내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였으며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바꾸었다.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 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전연과 동진이 침입해 오고 부홍(苻洪)이 전진(前秦)을 건국하였다.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하였다. 351년에 전연과 요익중(姚弋仲)이 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하였다.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하였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을 함락할 수 있었다.
양국을 함락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염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고 보급이 부족하여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전하였다. 이를 틈타 전연은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민을 공격하였으며, 염민은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용성으로 호송된 염민은 곧 살해되었다. 전연의 모용준(慕容俊)은 염민에게 무도천왕이라 시호를 내렸다.
350년 1월, 염민은 스스로의 독단으로 국호를 "위"로 변경하고, 자신의 성을 "이"로 고쳤다. 2월, 스스로 업의 남쪽 교외에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고, 연호를 영흥으로 하고, 국호를 대위(염위)로 정했다. 3월, 이민(석민)은 성을 염씨로 되돌렸다. 한인 지상주의에 기반한 한인만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민족의 세력권에 있던 화북 지방에서는 그 세력 기반이 취약하여, 지배 영역은 업 주변의 좁은 지역에 한정되었다. 이농을 처형하고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동진에 공조를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또한 후조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도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영흥 2년 (351년) 4월에 유현의 배신으로 석지를 살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12월에는 동진의 환온의 북벌로 연주, 서주, 예주, 형주의 자사들이 동진에 귀순해 버렸다. 영흥 3년 (352년) 1월에 황제를 칭한 양국의 유현을 살해했다.
하지만 강족의 요양의 군대에 대패하여 사망자 10만 명을 냈다. 그리고 이 혼란을 틈타 4월에 전연의 모용각 등이 유주에서 남하하여 염위를 격파했고, 염민은 처형되었다.
후에 앙갚음을 두려워한 전연의 모용준이 무도천왕이라는 시호를 보냈다. 또한, 염민의 자손이라고 칭했던 북위의 염화의 묘지(:zh:染华墓志)에는 시호가 평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3. 1. 염위 건국
350년 정월, 염민은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다. 윤정월에는 마침내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였으며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바꾸었다.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 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전연과 동진이 침입해 오고 부홍(苻洪)이 전진(前秦)을 건국하였다.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하였다. 351년에 전연과 요익중(姚弋仲)이 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하였다.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하였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을 함락할 수 있었다.염민은 자신의 어머니 왕씨 부인을 황태후로 높였다. 그는 부인 동씨를 황후로 임명했고, 맏아들 염지를 황태자로 임명했다. 그의 다른 아들들과 동맹이었던 이농은 왕(王)으로 봉해졌고, 이농의 아들들은 공(公)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대사면령을 반포하여 독립한 장군들이 자신의 칙령을 따르도록 희망했지만, 이를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는 곧 이농을 살해했다. 그는 동진 무제의 조정에 편지를 보냈는데, 진나라가 북쪽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복종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도전적인 어조를 내포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후조의 남부 지역 장군들의 충성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염민은 350년 1월, 스스로의 독단으로 국호를 "위"로 변경하고, 자신의 성을 "이"로 고쳤다. 2월, 스스로 업의 남쪽 교외에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고, 연호를 영흥으로 하고, 국호를 대위(염위)로 정했다. 3월, 이민(석민)은 성을 염씨로 되돌렸다. 한인 지상주의에 기반한 한인만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민족의 세력권에 있던 화북 지방에서는 그 세력 기반이 취약하여, 지배 영역은 업 주변의 좁은 지역에 한정되었다. 이농을 처형하고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동진에 공조를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또한 후조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도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영흥 2년 (351년) 4월에 유현의 배신으로 석지를 살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12월에는 동진의 환온의 북벌로 연주, 서주, 예주, 형주의 자사들이 동진에 귀순해 버렸다. 영흥 3년 (352년) 1월에 황제를 칭한 양국의 유현을 살해했다.
3. 2. 내우외환
350년 정월, 염민은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으며, 윤정월에는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고 성씨를 염씨(冉氏)로 바꾸었다.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 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전연과 동진이 침입해 오고 부홍이 전진을 건국하였다.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하였다.염민은 자신의 어머니 왕씨 부인을 황태후로 높였다. 그는 부인 동씨를 황후로 임명했고, 맏아들 염지를 황태자로 임명했다. 그는 대사면령을 반포하여 독립한 장군들이 자신의 칙령을 따르도록 희망했지만, 이를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염민의 짧은 통치는 성급한 결정과 대규모 처형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고문들에게 폭력적으로 반응하여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폭력적인 반응을 후회하곤 했다.
351년에 전연과 요익중이 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하였다.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하였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을 함락할 수 있었다.
351년 봄, 염민은 석지(石祗)의 수도인 상국(襄國)을 포위했다. 석지는 전연의 왕자 모용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염민에게 큰 패배를 안길 수 있었다. 이때, 업성(鄴城)의 흉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염인을 사로잡아 석지에게 항복했고, 석지는 염인을 처형했다.
양국을 함락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염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고 보급이 부족하여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전하였다. 이를 틈타 전연은 모용각을 파견하여 염민을 공격하였으며, 염민은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용성으로 호송된 염민은 곧 살해되었다. 전연의 모용준은 염민에게 무도천왕이라 시호를 내렸다.
염민은 352년 초에 상국을 점령하고 유선을 처형한 후, 전연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 북쪽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모용각은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하는 척하며 후퇴하여 염민과 그의 한족 보병을 유인한 후, 정예 선비 기병을 사용하여 염민의 보병을 포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염민은 양손에 무기를 하나씩 들고 격렬하게 싸워 선비 병사들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염민의 명마 적룡(赤龍)이 갑자기 죽어 그는 말에서 떨어져 포로로 잡혔다.
3. 3. 최후
350년 정월, 염민은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으며, 윤정월에는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고 성씨를 염(冉)씨로 바꾸었다.[7] 양국에서는 석지가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염민과 석지는 치열한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화북 각지는 군웅 할거 상태가 되었으며, 전연과 동진이 침입해 오고 부홍(苻洪)이 전진(前秦)을 건국하였다.[6] 350년 말에 염민은 후조의 수도 양국을 포위하였다. 351년에 전연과 요익중(姚弋仲)이 원군을 파견하여 염민은 크게 패배하였다.[6] 석지는 반격에 나서 업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으며, 염민은 석지의 부하 유현(劉顯)을 매수하여 석지를 암살하고 후조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였다.[6] 그러나 곧 유현이 양국을 점거하고 염민에 적대하였으며 352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을 함락할 수 있었다.양국을 함락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염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고 보급이 부족하여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전하였다. 이를 틈타 전연은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민을 공격하였으며, 염민은 크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6] 용성으로 호송된 염민은 곧 살해되었다. 전연의 모용준(慕容俊)은 염민에게 무도천왕이라 시호를 내렸다.[6] 염민의 아내 동씨 황후와 아들 염지는 몇 달 더 버텼지만, 결국 항복하여 염위는 멸망했다.
4. 가족 관계
염민의 아버지는 석호에게 입양되어 석첨(石瞻)으로 개명한 란잔(冉瞻)으로, 327년 전조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추존 황제 고황제가 되었다. 어머니는 왕태후이다. 배우자는 동 황후이다.
자녀로는 태자 염지, 태원왕 염윤(冉胤), 팽성왕 염명(冉明), 오흥왕 염유(冉裕), 염조(冉操)가 있다. 염윤은 351년 후조 황제 석지에게 살해되었다. 염지는 35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이후 전연에 의해 해빈후에 봉해졌다.
5.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4]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5]
서적
Jinshu, Ch. 107, Shijian (石鑒)
[6]
서적
Jinshu, vol.107
[7]
서적
『晋書』巻107 石季龍(石虎)載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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