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소예는 중국 남조 양나라의 황족으로, 무제의 손자이자 소명태자의 아들이다. 521년에 지강현개국공에 봉해졌으며, 하동군왕, 남서주자사, 상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후경의 난 당시 형주자사 소역의 군량 및 병력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려다 소역의 공격을 받아 550년 왕승변에게 참수당했다. 사후 동생 소찰이 후량 황제로 즉위하면서 무환왕으로 추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519년 출생 - 소찰
소찰은 후경의 난 이후 서위에 투항하여 양나라 황제로 옹립된 후량의 초대 황제(555년~562년)로, 강릉을 수도로 후량을 건국했으나 영토를 확장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사망했다. - 550년 사망 - 아리아바타
5세기 후반 굽타 왕조 시대의 인도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리아바타는 《아리아바티야》를 저술하여 수학과 천문학 지식을 집대성하고, 원주율 근사값 계산, 삼각함수표 작성, 지구 자전 주기와 달 공전 주기 비율 계산 등 업적을 남겨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 최초의 인공위성 이름으로도 기려진다. - 550년 사망 - 드레스트 5세
- 살해된 사람 - 정인보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학자, 시조 작가, 교육자로, 민족주의 역사관과 ‘얼’ 사상을 형성하고, 연세대학교 강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교 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살해된 사람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소예 | |
---|---|
기본 정보 | |
성 | 소(蕭) |
이름 | 예(誉) |
시호 | 원황(元皇) |
묘호 | 의종(毅宗) |
존호 | 고종(高宗) |
출생 | 508년 |
사망 | 555년 |
아버지 | 소연 |
어머니 | 정령광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왕황후(王皇后) |
아들 | 소암 |
2. 생애
521년 무제에게서 지강현개국공(枝江縣開國公)으로 봉해졌다. 531년 아버지 소명태자가 사망하고 소강이 황태자가 되자, 소예는 7월 14일 하동군왕(河東郡王)으로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영원장군(寧遠將軍), 석두수군사(石頭戍軍事), 낭야태수(琅邪太守), 팽성태수(彭城太守)를 역임했다. 537년 4월 27일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이후 시중(侍中), 경거장군(輕車將軍) 등을 역임했다.[2]
548년 5월 10일 남중랑장(南中郎將)과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임명되었다.[1]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549년 형주자사 소역은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소예에게 양식과 병력을 요구했으나, 소예는 "각기 한 나라의 군부인데 어찌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될 수 있겠소?"라며 거부했다. 이에 소역은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소방등에게 정예군 2만 명을 주어 소예를 공격하게 했다. 소예는 군사 7천 명으로 소방등을 기습하여 격파하고 소방등을 죽였다. 소역은 포천과 왕승변을 보내 소예를 다시 공격하게 했다.[2]
550년 6월 22일 왕승변이 장사(長沙)를 함락시키자 소예는 도주하다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소역은 소예의 수급을 돌려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555년 동생 소찰이 후량 황제로 즉위한 뒤 소예를 무환왕(武桓王)으로 추시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521년, 할아버지 무제로부터 지강현개국공(枝江縣開國公)으로 봉해졌다. 531년 아버지 소명태자가 사망하고 숙부 소강이 황태자가 되자, 7월 14일 소예는 하동군왕(河東郡王)으로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2] 영원장군(寧遠將軍), 석두수군사(石頭戍軍事), 낭야태수(琅邪太守), 팽성태수(彭城太守)를 역임했다. 537년 4월 27일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이후 시중(侍中), 경거장군(輕車將軍) 등을 역임했다.[2]2. 2. 후경의 난과 독자 세력 구축
548년 5월 10일에 남중랑장(南中郎將)과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임명되었다.[1]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형주자사인 상동왕 소역은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소예에게 사자를 보내 양식과 병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예는 "각기 한 나라의 군부인데 어찌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될 수 있겠소?"라며 세 번이나 거부했다.[2] 이는 소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소역과의 갈등을 초래했다.이에 소역은 넷째 아들인 남안후(南安侯)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소방등에게 정예군 2만 명을 거느리고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하여 소예를 격파하고 소방구가 상주자사를 대신하도록 했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을 때, 소예는 직접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소방등을 기습 공격하여 소방등의 군대를 격파하고 소방등을 익사시켰다. 소방구는 패잔병을 거두어 강릉으로 돌아갔고, 소역은 포천과 왕승변을 보내 소예를 다시 공격하게 했다.[2]
2. 3. 소역과의 대립 및 최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549년 형주자사인 상동왕 소역은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소예에게 사자를 보내 양식과 무리들을 감독하려 했다. 그러나 소예는 "각기 한 나라의 군부인데 어찌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될 수 있겠소?"라며 세 번이나 거부했다. 이에 상동세자 소방등이 소예를 먼저 토벌하기를 요청했다.[1] 소역은 넷째 아들인 남안후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소방등에게 정예군 2만 명을 주어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하고 소예를 격파하게 했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을 때, 소예는 직접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기습하여 소방등의 군대를 격파하고 소방등을 죽였다. 소방구가 패잔병을 거두어 강릉으로 돌아가자, 소역은 왕승변을 보내 소예를 공격하게 했다. 포천은 해임되었다.[2]550년 6월 22일, 왕승변은 소예가 있는 장사(長沙)를 포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성이 함락되자 소예는 도주하다 왕승변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왕승변은 소예의 수급을 소역에게 보냈고, 소역은 그 수급을 돌려보내 원래 몸과 같이 장례를 지내고 안장하게 했다.
2. 4. 사후
555년 동생인 소찰이 후량의 황제로 즉위한 뒤 소예는 무환왕(武桓王)으로 추시되었다.[2]3. 가족 관계
3. 1. 부모
아버지 소통[1]어머니 채씨[2]
3. 2. 형제
참조
[1]
호수
洞庭湖
[2]
서적
周書 巻四十八·列伝第四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